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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완완 Jan 20. 2023

그중 제일은 사랑이라

사람들 사람들 4

  그녀는 노년에 접어든 교회학교 교사였다. 연필을 쥐고 그걸 꾹꾹 눌러 받아쓰는 어린이 앞에서 흰 분필을 잡고 성경을 교훈하고, 사역했다. 그녀가 다가오면, 노랑과 분홍을 입은 자그마한 어린이들이 그녀를 둥글게 에워싸서 멀리서 보면 마치 형형색색의 꽃 같았다. 자그마한 키, 둥그런 얼굴에 소처럼 큼지막한 눈을 가졌다. 2년 전 힘에 부쳐 교사를 그만두었지만, 우리는 늘 그녀를 선생님, 선생님하며 따랐다.

 

 나도 한때는 그녀의 제자였다. 지금은 그녀보다 한 뼘 더 큰 내가 그녀의 허리도 채 되지 않았을 때 그녀는 나를 폭 안고, “예쁜 딸.”하고 속삭였다. 가만가만한 깨끗한 목소리로. 어린 마음에 나는 성경 말씀보다 그녀의 귀엣말을 더 좋아했다. 가슴에 손을 폭 얹고 기도문을 읊는 소리도 좋지만, 빙긋이 웃으며 입 안에 넣어주는 알사탕이 맛있어서 엄마 대신 그녀 옆에 가서 예배드렸다.

 

 그녀를 따라 교회학교 교사가 되었을 때,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요, 묻자 그녀는 지식보다 정서라고 빙그레 웃었다. 지식을 달달 외우게 하는 건 한계가 있다고. 그런 건 더 커서 해도 늦지 않다고, 지금은 선생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커가면서 맘 둘 곳 하나 없어질 때, 지체 말고 선생님과 교회를 떠올렸으면 좋겠다고. 나는 그녀의 손주뻘 되는 아이들이 그녀를 선생님 대신 엄마, 엄마하고 부르는 걸 떠올렸다. 교회에서 싸늘함과 배신감을 느끼고 떠날 뻔했을 때, 그녀 덕분에 돌아왔던 나를 기억했다. 그녀는 본인의 가르침을 삶으로 완성한 몇 안 되는 선생이었다.


 교사이지만, 믿음도 신앙생활도 흠모할만한 게 하나 없는 나를 언제나 자랑스럽게 보셨다. 늘 뿌듯해하셨다. 그녀의 반의반도 못 따라가는 걸 내가 제일 잘 알아서, 그 눈을 쑥스러워하며 피할 때도 있었다. 내가 그녀보다 더 커졌을 땐 그녀는 나를 어릴 때처럼 안아준 적이 없었는데 그게 못내 섭섭했다. 한참 후에, 그녀가 교사를 그만두고 나서 한참 후에 알았다. 그녀의 눈에 담기지 않은 적이 없고, 여태껏 나를 눈으로 안아온 것을.

 교회학교 예배당에 그녀의 자리가 비어있는 것을 보자, 마음에 뭔가 쑥 빠져나갔다. 경쾌한 어린이 찬양을 반주하는데 슬픔이 점점 깊어져 자꾸 건반을 헛짚었다. 나만 그랬던 게 아닌지, 나보다 두 살 어린 동료 선생님이 울먹이며 노래했다. 물기 어린 찬양과 기도가 내내 이뤄졌다.

 

 엄마 없는 느낌이었다. 우리 교회학교 아이들, 그리고 한때 교회학교 아이들이었던 우리 청년부는 그녀의 딸, 아들이나 다름없었다. 그녀의 기도 속엔 그녀와 그녀 가족의 안녕보다 우리가 더 많았으니까.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예수와 어린이를 사랑했던 사람. 그녀가 가진 것 중 제일이 사랑이라, 세상 중한 것 중 제일도 사랑임을 알았다.



 *종교성을 최대한 배제하려고 했는데, 읽으시는 분들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제 맘에 담기는 사람 중 한 명에 대해 적어보고 싶었습니다. 함께 소속된 곳이 교회라서, 쓰다 보니 종교성이 깔릴 수밖에 없네요. 불편을 느끼셨다면 사과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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