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완완 Feb 23. 2023

나는 나무로, 너희는 산으로

사람들 사람들 7

 브런치에서 첫째 조카를 산이, 둘째 조카를 산산이라고 부른다. 예상하셨겠지만, 아이들의 실제 이름은 따로 있다.


  산이라고 지은 데에는 뜻이 있다. 나무를 아우르는 게 산이니까. 나무보다 큰 게 산이니까. 첫째 조카가 태어나고 포대기에 둘둘 말린 그 아이를 조심조심 바치며 안는데 마음속에 그 아이가 쑥 들어왔다. 젖 먹은 그 아이를 트림시키기 위해 등을 토닥여주는데 울컥했다. 마음 저 아래에 부모님, 언니에 대한 사랑이 분명 있겠지만, 그게 수면 위에 드러난 적은 없다. 그와 달리 조카를 볼 땐 온 마음이 사랑으로 둘러싸였다.

 

 나 한 명 건사하기도 힘든데 누굴 지키냐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지키고 싶은 사람이 내 조카였다. 둘째 조카도 마찬가지였다. 걔는 더 작게 태어나고 마음이 더 갔다.

 

 우리 집안에 본래 존재하지 않았던 아이들인데 사랑을 듬뿍 받는 걸 보면 '너희는 도대체 어디에 있다 이곳에 온 거니' 생각이 들고 신비롭다. 산이가 태어났을 무렵 그때는 이모가 된 게 처음이라, 얼른 컸으면 했다. 손을 앙앙 물며 옹알거리는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언제 걷니! 같이 놀자!” 돼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갓난쟁이 시절이 이렇게 빨리 갈 줄 몰랐지. 지금도 너무나 사랑스럽지만,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가시지 않아 둘째인 산산이는 몸짓, 옹알이 모두 눈에 하나하나 담으려 한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얘네가 사라진다면. 주위가 적막해도 비명으로 가득 찰 거다. 그리움과 비관이 뒤섞인 비명이 귓가에 웅웅대겠지. 생각만 해도 진저리 처진다. 나는 우리 조카들 없이 살 수 없다. 반면에 우리 조카들은 내가 없어도 이미 그들을 지켜주는 부모라는 단단한 울타리가 있다. 나는 잘 놀아주는 이모, (엄마 아빠는 훈육을 위해 안 봐주지만) 실수를 은근슬쩍 눈감아주는 이모, 사달라고 하는 것 다 사주지 못하지만 5개 중 3개는 사줄 이모, 그 정도에 그칠 것이다.

 

 내가 산이고 아이들이 나무인 줄 알았는데. 내 숲 속에서 안전하게 무럭무럭 자라길 원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조카들이 부재한 삶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을 테고, 걷다가도 눈물이 터져 나올 거고, 낙이었던 게 낙이 아닐 것이다. 내 세상이 어둠 속으로 송두리째 가라앉을 것이다. 산을 잃은 나무의 삶이 안전할 리 없다.

 

 심지어 얘네가 나를 지탱하기도 한다. 내 핸드폰 배경 화면은 조카들인데 가끔 나쁜 마음을 먹거나 무기력해질 때 그들의 사진을 보면 아주 부끄러워진다. 조카들의 자랑이 되고 싶다. 성장할수록 방황하는 게 당연한데 그 끄트머리엔 ‘우리 이모 같은 사람도 괜찮은 삶을 사는데 나도 할 수 있겠지’ 생각하고 돌아왔으면 좋겠다. 내가 그 아이들의 돌파구와 전환점이 되고 싶다. 멋지게 살고 싶다. 이처럼 뿌리내릴 토양이 되어준 건 내가 아닌, 조카들이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아이들에게 영향주고 싶지 않다. 오히려 받고 싶다. 내가 함부로 던지는 위로나 충고를 듣고 상처받거나 본인들의 삶을 사는데 흔들리지 않길 바란다. 그러니까 난 산속에 그 아이들이 기른 수많은 나무 중 하나가 되면 그만이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나는 나무로 조카들은 산이 되어 같이 살아가길. 부디 그 숲에 안전과 내가 나로 살게 하는 사랑 외에 다른 더러운 것, 속된 것 하나 침범하지 않길 간절히 기도한다.

작가의 이전글 이젠 좀 알겠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