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률- 끌림- #낙엽
....
뉴욕의 지난 가을은 어땠나요?
7억8천8백01만9백서른아홉개의
양말 같은 낙엽들이 모두 자기 짝을 찾을 것처럼
뒹굴고 뒹굴었어요.
뭔가 둔탁한 것에 맞은 듯 심상치 않은 기분.
머리가 아닌 가슴이랄까.
그 짙은 감동은 한대 얻어 맞고 난 후
물로 옅어질대로 옅어 진 먹물 한 방울을
하얀 화선지 위에 떨어뜨린 것만 같았다.
전해진 감동은 부드럽고 입체적이게 스며 들었으나
스스로 위기감을 느낄 정도의
놀랍고도 빠른 속도감이 느껴졌다.
나에게는 아직도 어려운 감정이다.
짧은 글을 읽고 진한 감동이 전달되는 기분.
나에게는 아직도 낯설기만한 감정이다.
글 귀 하나 하나에서 나의 온 몸 구석 구석으로
찌릿한 전율을 전달해 주는 느낌.
살아 움직이는 글자들을 본 기억이 너무 오랜만이다.
일상 속 모든 것들이 이렇게 살아 숨쉬고 있는데
오직 내 삶 속에서만 이 모든 것들이 죽어있었나보다.
먹먹함이 전해지자 마음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머리 속은 마치 눈물이 앞을 가려 보이지 않는 것 처럼
하얀 안개로 드리워졌고,
울컥하는 마음과 동시에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었다.
'그곳의 이번 여름은 어땠는지 궁금하군요'
꼭 그렇게만 묻고 싶었다.
숨이 턱턱 막히던
100도의 온도를 온 몸으로 견뎌내던
아스팔트와 모래밭의 열기가 그리워졌고,
시원한 소낙비를 기다리던 그 뜨거움이 떠올랐다.
학교 안 황토 빛깔 흩날리는 먼지같은
흙바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큰 가로수 나무 아래 그늘 속에서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던 아이 셋이상의 금발 문화권의 엄마들.
타오르는 열기와 그늘 하나 마련되어 있지 않은
넓디 넓은 마켓 주차장은
늘 텅텅 비어 여유로움을 보여주었다.
초. 록. 색만 칠해 놓은 것 같이 보이던 동네 공원.
커다란 골든 리트리버와 방금 잡지에서 튀어나온 차림의 금발의 여자는 내 코 앞을 지나가도
나와는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파아란 눈을 까만 안경 안에 숨기고
끈 하나 달린 상의 안 훤히 보이는
거무튀튀한 주근깨 가득한 피부는
그곳의 여름 열기 위력을 과시하는 듯 보였다.
# THE LAYER
그 안에 굳은 마음을 살살 녹여주던
가을 바람같은 THE LAYER이 있다.
가을 바람은 먼지 하나 품지 않고
오롯이 쾌적함만을 담은 선선함과 곧 달아오를
나의 열정만을 닮은 그런 따뜻함을 품고 있었다.
진하고 구수한 커피향이 있었고
쇼윈도 너머 당찬 모습으로
나를 맞이 하던 벨벳이 있어 좋았다.
매일 아침 당차고 성숙미를 뽐내며 빨간 드레스 차림,
되직함이 깊이를 알수 없는 하얀 밀크 맛 모자를 쓰고.
옅은 갈색 곱슬 머리와
양 볼 가득 메운 주근깨가 귀염지던 젊은 여자.
눈 색깔이 달랐던 그녀를 기억한다.
오른쪽은 블루톤 왼쪽은 그린톤
한적한 오전 까페 안을 정리하며
반가운 얼굴과 목소리로 늘 나를 맞이한다.
나는 그 곳에서 나의 아픔을 달랬더랬다.
지긋 지긋한 나의 일상을
다리미로 다리듯 반듯하게 정리하곤 했었다.
그 안에 나의 일상과 아픔이 있었고
레몬향 새로움과 찬란한 빛의 배움이 있었다.
수국 한아름의 큰 위로가 되어주던 네가 있었다.
그렇게 매일 널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없는 이번 여름은 어땠냐고 묻는 대신
네가 없는 이번 여름을 홀로 답한다.
뽕뽕 뚫린 삼각 치즈처럼
네가 없는
허전함에 여기저기 구멍이 나 버려
구멍 투성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