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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나 Sep 04. 2019

'드봉'을 아십니까

드봉으로 소환한 01학번의 2001년 계급체험기랄까. 


  돌이켜 보면 별 것도 아닌 일에 바짝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서울로 대학을 와서 계급 차이를 강제 학습해야 했던 순간순간마다 나는 괜히 부모를 원망하고 하늘을 저주하고 지구를 탓했던 것 같다. 정신승리를 끝낸 지금에서야 안주거리 삼아 풀 수 있는 에피소드들이 당시에는 왜 그렇게 숨기고픈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18년 전(18년 전이라니!) 기억을 소환시킨 물건은 바로 '드봉'비누. 


  내 사무실이 있는 울 회사 7층 화장실에는 압력에 반응해 세제를 토해내는 물비누 통 외에도 굳이, 무슨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고체 비누통이 하나 더 있다. 아마도 수많은 세균이 행복하게 지내고 있을 비누 거치대에는 방금 포장지에서 풀려 나와 '드봉'이라는 음각을 선명히 자랑하는 비누가 놓여 있었다.

 

  드봉, 드봉... 드봉이 아직도 나옵니까! 우리 집에서 쓰던 오이 비누와 함께 오랜 세월 중산층 이하 계급의 위생을 담당하던 바로 그 비누. 물이 닿아도 쉬이 몸체가 닳지 않도록, 그래서 오래오래 쓸 수 있도록 만들어진 그 비누. 아마도 갓 세상에 나온 이 드봉비누의 음각도 한참을 갈 것이다.

 

  18년 전 내가 다니던 대학 화장실에도 드봉 비누가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손을 씻던 나는, 옆에서 다른 학생들이 '자기 집의 비누를 가져다 학교 화장실에 놓는' 해괴한 광경을 목격했다. 둘의 대화는 이랬다. 

  "학교 비누가 너무 안 좋아서, 집에 선물로 들어온 비누를 가져왔어. 이 것도 좋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여기서 쓰는 비누보단 나을 거야"

  "맞아. 이 비누를 쓰면 손이 건조해지는 느낌이야. 학교가 돈을 아끼겠다고 이렇게 싸구려를 쓰다니, 등록금은 다 어디에 쓰는 거야" 

  드봉이 뭐 어때서. 뽀드득 잘만 닦이는 구만. '이 대책 없는 박애주의자들은 뭐 하자는 건가' 싶은 것도 잠시, 그들이 떠나고 남긴 비누를 보고 나는 진정 움츠러들었다. 이 고귀한 비둘기 음각은... 도...'도브' 비누다! 


  도브 비누라 함은, 당시 내 기준에선 추가 비용을 지급해서 살 만한 상품이 아니었다. 나는 50원을 절약하기 위해 생협이 있는 다른 건물까지 가서 우유를 사 먹었으니까. 그런 대학 1학년생 윤지나가 느끼기에 도브 비누는 사용하고 나면 손이 부드러워지는 것 같고 향도 좋았으며 기품 있는 하얀 외관까지 모두 그럴듯했음에도, 너무 비쌌다!


  그래서 나는 마트에 갈 때마다 도브를 집었다가 다시 놓는 걸 반복하면서, 결국 오이비누 한 묶음을 카트에 담곤 했었다. 그런 비누를 놓고 가면서 '이 것도 좋은 건 아니라'라고 설명하다니. 저 학생들 집에서 평소에 쓰는 비누는 대체 뭘까. 당시 나는 화장실에서 머무는 몇 분 안 되는 시간 동안 오만 생각을 다 했다.



  지금은 위생 업계의 분화와 고급화 영향으로 도브도 (비록 나 정도 위치의 사람들한테 더 그랬겠지만) 당시의 객관적? 위상을 잃었다. 아직까지 드봉을 고집하는 우리 회사가 대단하다는 생각과 함께, 18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도 새삼 깨닫는다. 그때도 그렇게 위축될 필요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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