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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나 Nov 05. 2020

정의롭게 말하는 게 제일 쉬웠어요

업계에 "너무 많이 알면 기사를 못 쓴다"는 말이 있다. 반은 틀리고 반은 맞는 말이다. 틀린 부분이야 업계를 초월해 알 수 있는 얘긴데, 맞는 부분이 무엇인지는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A의 반사회적인 행동을 조지기¹로 했는데, 데스크는 '야마²  에 맞춰' 내용을 다시 정리하라며 기사를 써온 수습기자를 혼냈다고 하자. 이 후배가 잘못한 건 뭘까? A가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 구조적 이유, 개인적 이유, 알고 보니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이야기까지 구구절절 써왔을 것이다. 기사는 전달하고자 하는 정보가 제한적인 매우 딱딱한 글이다. 그러니까 'A는 나쁜 놈'이라는 테마를 완성하기 위해 A의 치 떨리는 나쁜 행위로만 팩트를 '추려서' 기사를 써야 한다. 뉴스 소비자로 하여금 A가 씹어 죽여 없앨 놈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켰다면 그 기사는 '기사로써' 잘 쓴 글일 것이다.

 

¹ 조지다: 비판하다는 뉘앙스의 업계 용어

² 야마: 기사가 소비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핵심 내용

(정색하고 업계 비속어를 설명함)


오죽하면 수습기자를 교육때 나는 "A가 나쁜 놈이야? 그럼 A는 털 한올, 내장 끝까지 더러운 놈이야. 그렇게 기사를 써야 해. A의 깨끗한 부분은 기사에 담으면 안 돼. 학교에서 언론 수업 들을 때 '게이트키핑' 들었지? 그게 여기서는 그렇게 통해."라고 말하곤 했다. 폭력적 기질인 까닭에 어느 정도 내 스타일이 반영된 설명이긴 하지만, 이 설명이 틀렸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업계 사람은 드물 것이다. 아쉽지만, 기사란 그렇다. 장르 자체가 개인의, 조직의, 세상의 모호한 결들을 담아내는데 한계가 있는 글이다. 더 중요한 건 뉴스 소비자다. 소비자들은 바쁘거나, 이미 편향적이거나, 지쳤거나 등등의 다양한 이유로 깨끗한 기사, 그러니까 잘 드는 칼로 현실의 일부를 깔끔하게 도려낸 듯한 결과물을 원한다. 뭐랄까, 기사는 무협지적 세계관을 갖고 써야 읽힌다.


그러나 어디 세상이 그런가. 귀 기울여야 하는 약자의 호소에서도, 역사를 바꿔왔다는 인민의 주장에서도 틀린 부분은 반드시 있다. 심지어 매우 개인적 욕구에 해당하는 조각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파편들까지 온전히 이해한 상황에서는, 이 주장들을 건너편에 전할 때-기사로 쓸 때 고민이 생길 수밖에 없다. 나이가 들면 혹은 연차가 좀 쌓이면, 인간과 그들의 사회가 당초 조잡하고 치졸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상황을 봐야 한다. 이제 다시 수습기자가 처음 써 온 듯한 기사를 만들자는 말이 아니다. 모두가 야누스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인식 위에서 사안을 보고 현실 인식을 하자는 얘기다. 인간은 언제든지 비열해질 수 있는 존재라, 지금까지 대단히 정의로웠던 사람도 절박한 조건에서는 언제든지 쓰레기가 될 수 있다. 확신은 언제나 위험하다.


비단 기사뿐만이 아니다. 인간과 조직, 사회를 대하는 모든 말, 태도, 인식 전반에 해당되는 얘기일 것이다.  잘못했다고 지적하고 정의롭게 말하는 것만큼 쉬운 것은 없다고요. 동시에 그만큼 무책임한 것도 없다고요! 나와 반대 편에 선 사람들 역시 나름의 이유와 맥락이 있다고 전제하고, 그 부분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면 대거리 말고는 딱히 할 것도 없다고요!!! 당장 내 손에 쥔 떡이 그대로일 때만 가능한 정의, 내가 피 흘리지 않는 것이 확실할 때 발산되는 투쟁 의지 같은 건 정말 지겹다고요오오오오!!! 한 줌을 반드시 쟁취해야 한다는 선명성은 때때로 "정의까지는 잘 모르겠고요, 저는 반 줌만 있으면 되거든요. 절실히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비수가 된다. 물론 문제를 해결할 생각은 없고, 그냥 접시나 실컷 던지며 화풀이를 하고 싶다면 그냥 영원히 정의롭기만 해도 된다. 여기까지 써놓고 보니 진정 내가 하고픈 말은... 시발, 나도 그냥 옳은 말만 하고 살고 싶다!!!!!!!!!!!!!!!!!!!!   


+ 미 대선 결과에 관해 광광대고(남의 나라 얘기니까 정의롭기 쉽다) 최근 힘들었던 일들에 대한 소회. 그나저나 5일 오후 내내 미 대선 상황이 실시간으로 전해진다. 이럴 거면 우리에게도 투표권을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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