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회사의 조직원이라는 정체성을 빼고 나면 저 인간에게 과연 무엇이 남을까 싶은 사람이 있다. 언론사인 우리 회사를 예로 들면, 국가와 민족을 걱정하면서 어려워지는 업계 환경까지 우려하며 지내는 사람들. 대표적으로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떠올릴 때마다 내 가슴을 아프게 하는 선배가 있다. 정치부에서 능력 있는 기자였던 이 선배는 암으로 투병 중이던 시절 내가 병문안을 갔을 때조차 국가와 민족을 걱정 중이셨다. 당시 박근혜가 새누리당 대표였나, 여하튼 그 당에 출입하던 나에게 정치인 얘는 어떻게 지내냐 쟤는 계획이 어떻게 되냐 등등을 물으셨다. 나는 파리한 얼굴이 돼버린 선배를 향해 왜 그런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곳에 신경을 쓰느냐!!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었다. 나름대로 그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선배의 자존심이고 업무 외 다른 세상에 대한 관심이 이미 메말라버린 선배의 상태가 아닐까 싶어 고분고분 아는 대로 대답을 했던 기억이 난다. 병문안을 마치고 집에 오는 길은 유독 캄캄하게 느껴졌다. 그 선배도 결국 암을 이기지 못했다.
이후로 나는 결코 100%의 회사원으로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면서도 그대로 실천은 못했다. 되레 월급만 제 때 받으면 된다며 업무시간이 끝나면 회사 동료들과 어울리는 것조차 쓸데없는 일이라 여기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을 이해 못 하는 나를 보면서, 나도 결국 그 선배 같은 사람이 됐나 자책을 했다.
요즘 들어 내가 십수 년 동안 회사를 다닌 건 국가와 민족에 대한 걱정 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기업이고 언론사고 할 것 없이 회사라는 곳이 분명 조직의 성공을 위해 개인을 부품화하는 경향이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나의 행복을 위해 이곳을 내 삶과 철저하게 분리하고 월급만 받자고 지내는 건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일뿐더러 나의 행복을 위해서도 그럴듯하지 않는 일이다.
어딘가 전설처럼 느껴지는 표현이긴 하지만 '자아실현'이라든지 '성취감' 같은 것은 회사라는 공적 공간에서나 객관적으로 작동하는 개념들이다. 집이라는 사적 공간에서는 노력의 결과를 인정해 줄 사람이나 최소한 지켜봐 줄 사람 모두 소수이고 그나마도 매우 주관적이다. 회사가 제공하는 수많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매일 여기서 돈을 벌기 위한 시도! 라도 할 수 있는 이유는, 주위의 좋은 동료들 덕분일 때도 많다. 어떤 이들은 나에게 인간종에 대한 경멸을 불러일으키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더 뛰어난 사람이 되라는 자극을 주거나 위로가 돼준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가끔 나에게 뭐지 이 병신은! 하는 일종의 우월감까지 안겨준다!!
회사에 다녀야 하는 이유와 이제는 그만 둘 이유를 계속 생각해 보다가, 되레 회사에 고마운 사람이 많다는 것, 이들이 나를 그동안 회사에 다니게 해 준 사람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내가 무엇을 원하고 어떤 걸 잘할 수 있는지와 상관없이, 그래도 오랜 시간 천둥벌거숭이였던 윤지나를 참아내고 이만큼이라도 인간 비슷하게 만들어준 건 회사의 여러 사람들, 그게 좋든 나쁘든 여기서 제공한 조건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내가 정말 갈 때가 됐나 아니면 말로만 듣던 40춘기인가 싶다. 이상하게 숨이 막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