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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쥬르 Jan 26. 2023

아이스크림에도 층이 있나요?

조카바보 이모의 성장일지


"이모는 몇 층이야?"


앞에 앉아 있던 조카가 눈을 호동그랗게 뜨고 물어온다. ‘아, 땡땡이는 이걸 층이라고 하는구나’ 잠시 생각하고 말했다.


"이모는 2층!"


“이모는 왜 이렇게 빨리 먹어? 나는 아직 3층이나 남았는데...”


언니가 다이소에 잠깐 들르는 동안, 우리는 오손도손 테이블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추억의 소프트아이스크림. 소라처럼 둥글둥글 곡선을 그리며 올라가다 날카로운 봉우리가 부드럽게 꺾인 소프트아이스크림, 미국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레어템이다. 조카는 아이스크림을 살살 핥아먹다가 또 물어봤다.


“이몽, 이제 몇 층 됐어?”


“응~ 이모는 이제 1층이야. 이얏, 마당이 보인다! 꽃도 있고, 새도 있고.”


“헤헤. 나는 2층인데. 근데 이모, 내가 신기한 거 말해줄까? 아래도 아이스크림 들어있다. 콘 하고 같이 먹으면 옴총 맛있어.”


혼자 먹었으면 별 감흥 없이 몇 입이면 먹어 치웠을 소프트아이스크림을, 조카와 함께 층수를 세며, 핥아먹고 베어 먹다 보니, 새삼 바닐라 맛이 이런 거였구나 싶었다.


“이몽, 그다음으로 맛있는 게 뭔 줄 알아?”


“뭔데에?”


“바닐라 초코 혼합, 담에는 그거 먹어 봐~ 땡땡이가 추천하는 거야.”


나에게는 다음에 먹을 아이스크림 맛까지 야무지게 추천해 주는 8살 조카가 있다. 그런 조카를 하염없이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나는 '조카바보' 이모다.




이번 한국 방문은 좀 특별했다. 언니와 공동육아를 한 것이다. 언제까지나 아가일 줄 알았던 조카는 이제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방과 후 수업도 하고, 피아노, 미술 학원에도 다닌다. 몇 년 전만 해도 깐따라삐야어로 소통하던 녀석인데, 이제 혼자서 동화책도 곧잘 읽는다.


언니는 풀타임으로 일하고 있어, 20~30분 떨어진 곳에 사시는 엄마(조카에게는 할머니)께서 조카를 봐주고 계셨다. 남들은 도우미 아주머니를 고용하거나, 일과 육아를 병행하느라 버둥거렸을 텐데, 할머니 전담에, 할아버지까지 가끔 백업으로 조카를 봐주고 있으니, 조카는 참 행운아다. 거기에 올겨울에는 든든한 지원군이 하나 더 생겼다. 그녀는 바로 미국에서 건너온 조카바보 이모.


겨울엔 빙판길이 미끄러워 엄마께서 새벽같이 달려오기 힘드시니, 언니는 방학할 때까지 2주 동안 자기 집에 머물며, 조카 등교 및 픽업을 좀 맡아줄 수 있냐고 물었다. 조카 보러 한국에 온 것이니 당근 예스. 이렇게 휴가 2주 동안 나는 조카를 전담하게 되었다.




매일 아침 조카 케어 루틴은 대략 이러하다.


- 아침에 조카보다 10분 일찍 일어나

- 캐럴을 틀어 조카를 깨우고 (가끔 이불도 뺏고)

- 세수, 양치를 시키고, 아침상 앞에 앉힌다

- 밥 먹는 동안 머리를 양 갈래로 예쁘게 묶어준다

- 양치를 시키고, 따뜻하게 입혀 등교를 시키면


Mission Complete!


오전 9시 전에 교실 자리에 앉히려면, 이 모든 과정이 40분 내에 끝나야 한다. 안 그래도 요즘 장꾸력이 폭발하고 있어, 매일 아침이 작은 전쟁이었다. 엄마는 어떻게 매일 이걸 하셨을까? 녀석은 밤에 집중력이 폭발하는 언니와 나를 닮아 얼리버드가 아니다. 이모는 이불을 빼앗고, 녀석은 아침잠을 깨우지 말라며 이불을 돌돌 말고 팽팽한 줄다리기를 한다. 우짜든 둥 조카를 준비시켜 학교에 들여보내고 나면, 엄마와 언니 핸드폰에서는 등교 알람이 울린다.


“땡땡땡땡땡!!!” (김땡땡 학생이 등교했습니다)


조카를 학교에 등교시키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 엄마가 말씀하신다.


“축지법 썼냐?”


나는 어깨 뽕이 들어가 씩 웃는다.


“ㅎㅎㅎ”


엄마와 늦은 아침을 먹고 나면, 그제야 ‘내 시간’이 주어진다. 서울에 약속 있는 날은 후다닥 나갈 채비를 하고 10시에 떠나는 광역버스를 타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날은 느긋하게 아침 요가 수업을 하나 듣고, 허리 치료 차 한의원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는 커피 한 잔의 여유도 즐긴다. 한국에서만 즐길 수 있는 연유라떼. '이 시간에 커피라니...' 달콤한 시간도 잠시, 금방 픽업 시간이 온다. 헐레벌떡 피아노 학원 가방을 들고 하교하는 땡땡이를 픽업하러 간다.


땡땡이는 바로 피아노 학원에 가는 법이 없다. 아침엔 이모 손에 끌려 후다닥 등교해야 했지만, 하굣길은 아주 여유만만이다. 조카의 장난기에 5분짜리 짧은 하굣길은 30분의 여정이 된다. 차에 쌓인 눈도 쓸어내려 보고, 키 작은 나무에 쌓인 눈을 손으로 휘휘 저으며 꼬마 눈보라를 일으킨다. 그러다 뭔가를 보고는 와다다 뛰어간다.


“와, 샤베트다!!”


조카에게 녹아가는 눈은 ‘샤베트’고, 갓 온 눈은 ‘솜’이다.


“땡땡이, 이모가 드러운 샤베트 밟지 말라고 했지?”


“히히히. 드러운 샤베트! 아니야, 밟을꼬야. 밟지 말라고 하니까 더 밟고 싶어.”


“지지~ 거기 새 똥도 있고, 멍멍이 똥이 있고, 냥이 똥도 있어...”


“헤헤헤... 똥! 똥이래!!”


아직도 녀석은 똥, 드럽다, 방귀 뿡 등의 말을 들으면 깔깔깔 웃는다. 조카의 깔깔거림은 이모의 유머 욕심을 더 자극한다. 깔깔깔, 히히히, 피아노 학원 가는 길은 녀석과 함께 유쾌한 여행이 된다.


눈밭에서 신나게 놀고 있는 김땡땡  


눈이 펑펑 쏟아지는 아침, 뽀득거리는 눈을 밟으며, 빵처럼 말랑말랑한 작은 손을 꼭 잡고 등교를 한다. 1분도 안 되어 조카의 손은 물고기처럼 스르륵 빠져나간다. 어느새 발을 동동거리며 하얀 눈을 밟고 있다.


“히히히, 이거 솜이야?”


호동그랗게 나를 쳐다보는 땡땡이의 눈은 너무 맑아서 하얗다 못해 파랗다. 한국의 청명한 하늘빛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아직도 그리운 쪽빛(azure)의 지중해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녀석은 신나서 한참 눈 위를 퐁퐁 뛰어다닌다. 자그마한 불의 요정처럼. 온 마을 눈을 다 녹일 태세다.




‘현재에 집중하자', '지금을 즐기자',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외치기만 했던 이모는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고, 막상 걱정만 한 포대기였다. 2천 원짜리 소프트아이스크림을 한층 한층 오롯이 즐길 줄 아는 아이. 당연하다 여겼던 자연의 경이에 놀라고 감탄할 줄 아는 아이. 스쳐 가는 일상에서 숨겨진 재미를 보석 반지처럼 찾을 줄 아는 아이. 너에게서 잠시 잊어버렸던 여덟 살의 동심을 다시 보았고, 세상에 감탄하는 법을 배워 간다.


야호, 소프트아이스크림이닷! :)


※ 이미지 출처: Unsplah, 지나쥬르 사진첩


※ 이 글은 뉴스/글 컨텐츠 플랫폼, '헤드라잇'에 게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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