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나쥬르 Feb 02. 2023

조카는 내게 모쏠이냐고 물었다

신인류의 사랑법


아침 해가 떴는데도, 이불에 파묻혀 곤히 자는 조카의 이마와 뺨에 굿모닝 키스를 한다. 현재 시각은 오전 7시 50분, 녀석이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는 시간을 감안해 인기척을 해야 한다.


아침 스케줄이 꽉 찬 날이었다. 조카를 학교에 등교시키고, 바로 준비해 외출해야 하니 시간이 별로 없었다. 땡땡이가 세수와 양치질을 하고 화장실에 앉아있는 동안, 나는 거울 앞에서 부지런히 단장한다.


“이몽~


“웅!”


“이모는 모쏠이에요?”


살짝 짓궂은 표정으로 코를 찡긋하며 땡땡이가 묻는다. 잠이 덜 깨, 젖은 솜방망이 같은 목소리다.


‘욘석, 모쏠이라는 말을 어떻게 알았지? 요즘 애들 참 빠르네……’ 


하긴 혼자 있는 시간을 너무도 즐기는 나다.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지만, 주로 일대일 만남을 선호하고, 둘만의 사적인 대화를 즐긴다. 그룹이 네 명 이상만 되면 어질어질하고 소위 말하듯 기가 빨린다. 모임에서 소모한 에너지를 회복하려면, 혼자 보내는 시간이 배가 되어야 한다. 큰 규모의 모임에 나간 다음 날이면, 깊은 동굴 속에 숨어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 정도면 모쏠 맞지. 그런데, 요 녀석이 어떻게 그걸 알았을까? 눈치 백단이군.’


조금 망설이다 땡땡이에게 묻는다.


“이모가 모쏠인 거 같아, 아닌 거 같아?” (땡땡이 너 대답 잘해야 한다!)


조카의 얼굴에는 장난스러운 표정이 가득하다.


“아닌 거 같아요~ 헤헤헤!”


“땡땡이, 이모가 진짜 모쏠이면 어쩌려고?”


“히히…… 만남을 준비해 줘야 해요~”


재작년만 해도 동화책에서 ‘바둑이’라는 단어를 발견하고는, "바둑 잘 두는 강아지가 바둑이예요?"라고 물어보더니, 일 년 사이에 왜 이렇게 많이 컸지? 오늘도 조카는 어린이와 어른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다중인가? 내 속에 나도 모르는 내가 많듯, 너 또한 그런 거겠지.




양치질과 세수를 마친 땡땡이 옷 입는 걸 도와주고, 아침 밥상에 앉힌다. 오늘은 엄마의 육아 휴일이다. 언니는 출근 전 내게 간단히 아침 식사 지시를 한다.


“오늘은 엄마 안 오시니까, 반찬 많이 차리지 말고, 그냥 달걀 프라이, 모닝 빵, 바나나 우유 준비해서 간단히 먹여 보내면 돼.”


언니가 미리 꺼내 놓은 달걀 두 개를 곱게 깨서 달걀 프라이를 하고, 모닝 빵에 에그 마요 소스를 발라 전자레인지에 30초 데운다. 달걀이 익어가는 모습을 보며 뒤집을 준비를 하는 내 뒷모습을 보며, 땡땡이가 물어본다.


“이모는 뭐 먹고 지내요? 미국에서 어떻게 먹는지 궁금해~”


뜻밖의 질문이다.


“응, 땡땡아~ 이모는 혼자 사니까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걸로 만들어 먹어.”


“어떤 요리하는데?”


“음…… 김치볶음밥, 김치찌개, 된장찌개. 가끔 스파게티, 유부초밥, 카레도 해 먹고…… 아 참, 땡땡이가 좋아하는 떡볶이도 가끔 해 먹어.”


“우왕, 그렇구냥~ 미국에도 떡볶이가 있어?”


조그만 입으로 오물오물 모닝 빵을 맛있게 먹는다. 미국에서 뭘 먹고 지내냐는 조카의 질문은 의외였다. 마치 동갑내기 친구에게 “니 밥은 잘 묵고 지내나?” 물어보는 것 같아서. 세상에 태어난 지 8년 된 녀석이 “밥은 잘 묵고 지내냐?”가 대화의 기본인 건 어떻게 알았을까. 땡땡이는 뭔가 또 궁금한 모양이다.


“이모는 미국에서 생일 축하도 해? 생일날은 뭐 해?”


나의 생일은 대체로 조용한 편이다. 생일이라고 주목받는 그날은 내게 조금 부담스럽다. 미국인들처럼 친구 여럿을 초대해 큰 규모의 파티를 벌이지 않는다. 생일과 관련된 이벤트는 생일 앞뒤 주말에 일어난다. “생일은 행복하면서도 불편한 날이며, 미역국과 축하 문자가 없는 아침이 왠지 홀가분했다'*는 유지혜 작가님의 글에 위로받은 적도 있다. 생일 아닌 날이 더 편한 건, 그리 보편적인 감성이 아닐 텐데, 어떻게 대답한담?


“이모는 주중에 좀 바빠서, 주말에 친구들하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


“앙, 그렇구나. 생일 케이크는 있어?”


“구럼, 생일 케이크도 있지!”


친구와 일대일로 만날 때는 주로 외식을 하지, 케이크 하나를 통째로 사지는 않는다. 게다가 미국 케이크는 칼로리도 너무 높아.ㅎㅎ 하지만 조카의 동심 파괴를 막기 위해 하얀 거짓말을 한다. 땡땡이는 생일 케이크가 매우 중요한 녀석이다. 우리 집의 크고 작은 행사에 모든 케이크를 직접 고르는 재미에 산다.


밥도 잘 챙겨 먹고, 친구랑 생일 파티도 하고, 케이크도 있다고 하니, 그제야 궁금증이 다 풀렸는지, 아침 밥상에 집중한다. ‘모쏠’이라는 단어는 의외였지만, 이모를 살뜰하게 챙기는 네 마음이 참 고맙구나.




아침나절 열심히 일정을 마치고 땡땡이를 픽업하러 학교로 향한다. 오늘은 조금 일찍 끝났는지 친구들과 눈밭에서 놀고 있다. 멀리서 “땡땡아~~!” 하고 부르니, 나를 향해 와다다 뛰어온다. 멀리서 세 명의 친구도 몰려온다.


“땡땡아, 엄마가 픽업 오신 거야?”


“아니, 엄마 아니야. 우디 이모야! 우디 이모, 방학 때 나 보러 미국에서 왔어.”


세 명의 친구는 동그란 눈으로 동시에 나를 쳐다보며 말한다.


“대~~박!”


나는 요즘 애들 말하는 방식이 너무 웃겨서 그냥 웃고 만다. X세대, MZ 세대 이후에 태어난 너희들이 크면 과연 무슨 세대라고 불릴까? 세상은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


눈밭에서 신나게 놀고 있는 땡땡이와 친구들




“띠디디디디..... 삐리릭"


현관문 열리는 소리. 일을 마치고 온 언니가 한 아름 장을 봐서 들어온다.


“아까 아침에 땡땡이가 너한테 모쏠이냐고 물어봐서 좀 그랬지? 내가 버릇없다고 혼내 주려다가, 출근 시간이 늦어서 말았어.”


“아, 아니야~ 난 그냥 웃겼는데!”


“요즘에 애들 <흔한 남매> 많이 보잖아. 거기서 배운 말 너한테 써먹고 싶어서 그래."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8살짜리 입에서 ‘모쏠’이라는 말이 나오는 게 그저 놀랍고 웃겼을 뿐이다. 




요즘 <흔한 남매>와 냥이 유튜브 연구에 빠져있는 조카는 8살 꼬마 2015년생이고, 나는 80년대생이다. 가끔 친구들과 미디어에서 배운 신조어와 줄임말을 쓰는 조카를 보며 세대 차이를 느끼기도 하지만, 우리에게는 ‘신인류 꼬맹이’와 ‘밀레니얼 아주미’의 격세지감을 메워주는 '사랑의 언어'가 있다.


“이모는 미국에서 뭐 먹고 지내요?”

(조카 식 “밥 잘 묵고 다니나?”)


혼자 사는 이모를 살뜰하게 챙기는 녀석이다. 호기심 가득한 너의 투명한 눈빛은 어른의 파삭한 심장을 마시멜로처럼 녹인다. 장난스러운 표정 뒤에 숨은 너의 말랑말랑하고 보드라운 마음을 이모는 잘 안단다. 그게 신인류의 사랑법이라는 걸. 내년엔 또 어떤 말로 이모를 놀라게 하려나?


조카가 미술 학원에서 만든 신년 카드. 밀레니얼 아주미가 이해 못 할까 봐 '따롱해요'를 ‘사랑해요’라고 해석까지 해주는 센스


※ 인용*: 유지혜 작가의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생일 아닌 날'

※ 이미지 출처: 조카의 미술 작품, 지나쥬르 사진첩

※ 이 글은 뉴스/창작 콘텐츠 플랫폼, '헤드라잇'에도 게재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이스크림에도 층이 있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