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겨울이었다. 광화문 근처에서 오랜 지인과 맥주 한 잔을 기울이며 미국에서 집 산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언니는 타지에서 혼자 그걸 해내다니 너무 대단하다고 우쭈쭈해 주셨는데 과분한 칭찬에 조금 민망했다. 한국이야 실제 집값의 80~90% 종잣돈이 있어야 집을 사지만, 미국은 10~20% 다운페이만 해도 집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미국 부동산과 모기지 시스템, 한국과의 차이점에 관해 설명하며 “그러니까 저는 타운하우스 현관문 한 짝만 산 거나 다름없어요~ 나머지는 평생 부지런히 갚아 나가야 해요. 들어보니 별거 없죠?” 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언니는 '그럼 미국에서 집 산 얘기를 한번 써보면 어떻겠냐?'라고 의견을 주셨다. 좋은 아이디어에 감사했지만, 집값 비싼 실리콘밸리에 대한 고정관념도 있을 테고, 빈부격차가 심한 이곳에서 내 집 마련한 얘기를 했다가 괜히 금수저 오해라도 받을 것 같아 조심스러웠다. 부족한 글솜씨로 민감한 주제를 다룰 수 있을까...? 약간 망설임의 시간이 있었지만 결국 나는 쓰기로 결심했다. 독자층을 아예 좁히고 써보기로. 분명 나와 같이 해외에서 살지만, 남들에겐 말하지 못할 고민과 동질감을 느끼는 싱글들이 있을 것 아닌가.
이 글은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며 첫 집을 마련한 이민자의 이야기를 담은 ‘1인 가구 힐링 에세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월세 아파트를 전전하며 살던 이민자의 올챙이 적을 떠올리며 써 내려갔다. 결국 내 집 마련 얘기지만, 경제적인 측면보다는 집을 사면서 겪게 되는 심리적 변화와 경험, 마주친 소중한 인연들, 미국의 다양한 주거 형태에 대한 정보를 담아내고 싶었다.
- 싱글로 미국에서 ‘내 집 마련’을 꿈꾸는 분
- 해외 싱글 라이프가 궁금한 분
- 해외에서 씩씩하게 잘 살고 싶은 비혼 등
나와 같은 해외 비혼을 독자층으로 생각하며 썼는데, 의외의 독자분들이 공감해 주셔서 신기했고 글을 계속 이어 나갈 힘이 되었기에, 이 기회를 빌려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구글에서 ‘미국 부동산’ 검색을 하면 리얼터 등 부동산 전문가들이 이미 웹상에 공유한 수많은 정보를 찾을 수 있다. 요즘엔 리얼터 분들도 유튜브 채널을 많이 운영한다. 그럼에도 이 글을 쓰기로 한 이유는 ‘리얼터(부동산 중개업자)나 셀러(공급자)’보다 ‘바이어(매입자)’ 입장에서 경험한 집 사는 과정과 관련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서였다.
무엇보다 외노자 초반 시절에, 나처럼 헤매지 말고 어서 자기만의 공간을 마련했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또한 겉으로 화려해 보이는 싱글의 삶에도 양면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슬쩍 알려드리고 싶었다. 일과 요가 수련을 마친 후 커피 한 잔 테이크아웃하는 여유로운 싱글 라이프의 모습 뒤에는, 가라지 페인팅으로 머리카락 여기저기 페인트가 덕지덕지 묻어있고, 크롤 스페이스 청소로 지하실 먼지를 뒤집어쓴 무수리의 삶이 있다는 것을. 화려한 싱글, 승모근이 발달한 무수리 모두 내 모습이니까. :)
여유로운 싱글 vs. 승모근이 발달한 무수리 ^^
격한 노동 후에는 산책을 :)
지금의 집을 사기 전까지 나에게 ‘홈 스위트 홈(Home Sweet Home)’은 단연코 한국 가족들이 있는 한국 집이었다. 아무리 타지 생활이 내가 자초한 모험이고 당분간은 떠돌이 인생을 각오했다 하더라도, 월세 아파트는 도무지 내 집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주변엔 싱글 하우스보다 아파트를 선호하시는 분도 있으니, 이건 순전히 아파트 소음과 불친절하고 느린 행정으로 시달렸던, 개인적인 경험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파트 화재 경보가 울릴 때마다 오밤중에 룸메이트와 짐을 챙겨 밖에서 오들오들 떨며, 다시 들어가도 좋다는 공지를 기다린 적도 있었고, 1년 남짓 인도인 6명이 사는 윗집 소음으로 시달린 적도 있었다. (링크) 연말 한국 방문 후 곤히 잠들었는데 강도 4.4 버클리 지진으로 새벽녘 침대가 2분 동안 위아래로 흔들려 엄청난 공포심을 유발했다. 그런 크고 작은 사건이 있을 때마다 마음이 흔들렸고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비집고 들어왔다.
그런데 지금 이 집으로 이사 온 후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아무리 밖에서 스트레스받고 힘든 일이 있어도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홈 스위트 홈’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하고 마음이 벅차올랐다. 영주권을 받고 나서도 좀처럼 미국은 내가 평생 살 곳은 절대 아니라고 부인했던 마음도 사라졌다. 아파트에서 7년간 쓰던 어린이용 침대를 드디어 갖다 버리고 트윈 침대에 누웠을 때의 구름에 동동 뜬 것 같은 세상 편함이란!
단지 부동산을 소유한 기쁨에 관해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첫 집 마련은 삶의 중요한 마일스톤이므로 성취의 기쁨도 부인할 수 없다. 집 떠나봐야 소중함을 안다고, 미국에 와서야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던 집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집 얘기를 하다 보니 이 동화책 얘기를 빼고 넘어갈 수 없을 것 같다. 아래 사진 속 <Wherever You Go>는 이 집을 산 후, 첫 생일날 지인에게 받은 영어 동화책이다. 글과 삽화, 모두 아름답고 뭉클한, 취향저격 100점 만점 선물이었다.
<Wherever You Go> 동화책 사진
Roads… return.
During your journey, you’ll ramble and roam.
But sooner or later, you’ll think of your home.
After you’ve seen all you needed to see,
A road takes you back wherever you’re longing to be.
Roads take you over the planet, but then,
you always can follow them home once again.
길은 돌아오기도 해요.
여정에 오른 당신은 오랜 시간 거닐고 배회하겠지만,
머지않아 집이 생각날 거예요.
보고 겪어야 할 일들을 모두 경험하고 나면,
길은 당신이 오래 갈망하던 곳으로 데려다줄 거예요.
길은 당신을 세상 곳곳에 데려다주겠지만,
그 길을 따라 언제라도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답니다.
<Wherever You Go> by Pat Zietlow Miller, illustrated by Eliza Wheeler 중에서
<Wherever You Go> 동화책 사진
<Wherever You Go>에서는 여행길에 오른 토끼가 만나게 되는 다양한 길의 모습을 보여주며, 우리가 살아가며 마주치는 경험과 감정 - 꿈, 모험, 성공, 실패, 좌절, 기쁨, 설렘 - 을 쉽고 포근한 문장으로 풀어나간다. 이야기는 집에서 시작해, 집으로 끝난다.
동화책 사진, 모든 여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토끼
이 동화책은 내게 지난 10년간의 이민 여정을 상기시켜 주었다. 30대의 나는 새로운 삶과 모험을 원했다. 유학 준비하며 느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 새로운 터전에서 삶에 대한 낯선 설렘, 예상치 못하게 나를 당황시켰던 사건들, 늦은 나이에 유학길에 올라 헤매던 나 자신이 지질하게 느껴졌던 시간, 별것 아닌 성취에 오만방자했던 순간들, 그럴 때면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초심으로 시작하기. 하지만 숨 가쁜 여정의 끝에는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홈 스위트 홈’이 있다는 것.
집을 떠나 타지에서 바지런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에게 홈 스위트 홈이 생겼으면 좋겠다. 이미 집을 마련하셨다면 본인이 꿈꾸는 아늑하고 화사한 공간에서 하루하루 깨알 같은 행복을 채워 나가길 바란다.
이로써 회사 다니면서 사부작사부작 써내려 나간 미국이민 4부작 중 유학/취업기 <직딩의 미국유학 일지>와 내 집 마련기 <비혼이고 미국에 집을 샀습니다>를 마쳤다. 이번 글은 오픈하우스를 둘러보듯 가볍고 설레는 마음으로 써보았다. 그동안 연재한 매거진 <실리콘밸리에 혼자 삽니다>를 찾아주시며 공감과 댓글로 응원해 주신 글벗님들과 독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