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미국 유학을 결심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복합적인 사건이 켜켜이 쌓여 임계점을 넘어가면서, 몇 년 동안 뜸만 들이던 유학 준비를 행동에 옮기게 되었다. 회사 선배들은 20대 중·후반의 나를 보면서, 그저 젊음이 싱그럽고 부러워서 "와~ 꽃같이 좋을 때다!"라며 감탄하곤 했다. 선배의 부러움이 담긴 말에도 불구하고, 나의 20대는 그리 꽃 같지 않았다. 마음 깊숙한 곳에는 항상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찰랑거렸고, 'next step'에 대해 끝없이 고민하던 시기였다.
1. 멘토 대신 북극성을 찾다
© thoughtcatalog, 출처 Unsplash 직장 7년 차였다. 어느 주말, 야근으로 푸석해진 머리를 달래주러 미용실에 갔다. 미용실은 월화수목금금금 도비 생활에 지친 직딩이 주말을 만끽할 수 있는 최고의 마실이 아니던가. 친절한 미용실 언니들이 커피와 쿠키를 무한 리필해주고, 온갖 잡지를 몰아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잡지를 뒤적이다 '당당한 커리어 우먼' 들의 인터뷰에 눈이 갔다. 굵직굵직한 대기업, 외국계 기업의 여성 임원을 피처링한 잡지의 한 꼭지였다.
나는 이미 두 번의 이직 후 홍보 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계속되는 야근과 진상 고객사로 심신이 지쳐있었다. 뭔가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직하든가 유학을 떠나든가.
이 '커리어 우먼' 꼭지에서 한 대기업 여성 임원의 인터뷰를 우연히 접하게 되었다. 당시 눈 씻고 찾아보기 힘든 여성 임원 중 한 분이었다. 이 분의 유학 경험담을 눈으로 훑으며, 내가 평소에 관심 두고 있던 미국 대학원을 졸업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혼 후 남편분과 함께 미국에 건너가 유학을 하게 되었다는 내용이 언뜻 기억난다. 나와는 매우 다른 상황이었지만,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북극성'을 제시해 준 분이었다. 이때부터 미국 대학원에 대한 자료를 주섬주섬 모으기 시작했다.
이렇게 '긍정적인' 사건이 있었던 반면, '부정적인?!' 자극을 준 사건도 있었다. 그 사건의 발단은 바로 두 사람이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미국물을 먹은 유학파였다.
2. 영어 때문에 매일 땜빵이라니...
첫 번째 주인공은 바로 나의 동료였다. 업무 강도가 높을뿐더러 수시로 폭언과 호출을 일삼는 한 고객사로 인해 우리 팀은 '쑥대밭'이 된 상태였다. 나 또한 2년 동안 무리한 야근으로 인해, 체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진 상황이었다. 팀장님과 동료분은 원래 몸이 약하신 편이었는데, 문제의 고객사와 일하고 난 후, 거의 사흘이 멀다고 지각이나 결석을 하셨다. 나도 겨우 일어나 눈곱 떼고 출근한 거니까, 그래 처음에는 인지상정 이해하기로 했다. 하지만 상황이 6개월 이상 지속되면서 점점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졌다. 혼자 전쟁터에 선 느낌이랄까.
© siora18, 출처 Unsplash 정신력이 강한 건지 체력이 강한 건지 끝까지 잘도 버텼다. 내가 맡은 고객사 일도 많은데, 두 분의 빈자리를 땜질해야 하는 횟수가 점점 늘어났다. 이렇게 1년이 지났다. 나의 인내심도 한계에 달했다.
'어서 이곳을 탈출하는 수밖에 없겠구나.'
동료분은 해외 유학파 출신으로 원어민처럼 영어를 구사하는 분이었다. 그래서인지, 지각과 결석을 해도 신기할 정도로 보직을 철저히 보존해 주었다. 영어를 잘하는 인재가 필요한 회사였으니 그 상황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했다. 그간 잘 지내왔던 동료분이었지만, 반복되는 지각과 결석으로 인해 계속 직격탄을 맞다 보니, 점점 실망감이 커졌다. 하지만 언젠가부터는 미움의 화살이 나에게로 돌아왔다.
'왜 나는 영어를 저 사람만큼 못해서 이렇게 땜빵을 하고 있을까?
왜 이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을까?'
돌이켜보면 그 상황은 나의 잘못이 아니었다. 타고난 체력이 약하고, 회사 일로 너무 무리해 건강이 악화되었으니, 그 동료분의 잘못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회사에서 적정한 조치를 취해주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사실 경영진도 상황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씁쓸하지만 그것은 여느 K-직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모두 암묵적으로 알고 있지만 외면해버리는 그런 문제였다. 탈출구가 보이질 않았다.
영어와 미국 유학의 파워를 느끼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 시기를 거치며, 떠나야겠다는 결심은 점점 확고해졌다. 야근하던 직원들은 함께 야식을 먹으며 농담 반 진담 반처럼 말했다. "국내파는 우리처럼 힘든 고객사 만나 뼈 빠지게 일하고, 유학파는 편하고 돈 많이 주는 어카운트 만나 항상 칼퇴하는 거잖아요." 물론 야근으로 지친 직원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 피해 의식에서 비롯된 측면도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뼈가 있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잠시 생각했다.
'미국 유학이 대체 뭐길래... 나도 한번 해볼까?'
3. 유학 욕구에 불을 지핀 그림
당시 나는 소위 결혼 적령기이기도 했다. 부모님께서는 딸이 결혼 적령기를 넘기기 전,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하기를 원하셨다. 여느 부모님들처럼. 마음이 급해진 어머니는 심지어 결혼정보업체 D사에 거금을 질러버리셨다. 그걸 차라리 유학비에 보태주셨더라면.
직장 생활은 우울했고 결혼 적령기 압박은 목을 죄어왔지만, 당시 사수하던 주말 루틴이 있었다. 매주 일요일, 패션디자인 학원에서 '패션 일러스트레이션'을 배우고 있었다. 소중한 주말을 털어 그렸던 그림들은 대강 이런 것들이었다.
당시 그렸던 패션 일러스트레이션 습작, 왼쪽 그림의 뿔 난 모습이 꼭 당시의 나 같다 © 지나쥬르
언뜻 보기에도 기럭지가 후덜덜한 팔등신 모델들.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이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리며 직장 생활로는 채울 수 없는 허기를 채웠다. 그림을 그릴 때만큼은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어느 가을날 주말이었다. 그날도 여느 일요일처럼 학원으로 향했다. 오후에는 어머니께 등 떠밀려 나가게 된 소개팅이 기다리고 있었다. 학원을 마치고 커피숍으로 향했다. 그 남자는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첫인상부터 거만한 인상을 스멀스멀 풍기는 이 사람,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만나자마자 자신의 미국 유학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앞에 앉은 사람은 안중에도 없었다. 얼마 전 미국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교수직을 알아보고 있다며, 이 시간 후에도 중요한 채용 미팅이 있다고, 계속 시계를 쳐다보았다. 30분이 지나고 그가 물어왔다.
팔짱남: "그 스케치북은 뭐예요?"
나: "요즘 그림 배우는 게 있어서요."
팔짱님: "그딴 건 왜 배워요?"
나: "......"
이미지 출처: 보배드림 '드라마에서처럼 이 인간에게 찬물을 끼얹고 나와야 할까'하는 생각이 광속으로 스쳤다. 미국 교포의 어색한 억양도 없으니 한국어를 잘 몰라서 나온 말은 분명 아니었다. 그런데 이 소개팅 자리는 어머니 동료분이 주선해 준 자리다.
'아 참, 어머니 체면도 생각해야지.'
"그딴 그림?" 외의 대화는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자리를 뜨고 싶다는 생각만 줄곧 맴돌았다. 최소한의 예의, 1시간을 채운 후 자리를 떴다.
왜 하필 그때, 내 주변의 유학파 남성들은, 내게 잊지 못할 상처와 모욕감을 주었을까. 그냥 포기해버리고 싶은 마음도 들다가, 멈출 수 없을 정도로 증오가 차오르기도 했다. 마음속에서는 수많은 범죄를 저지르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나중에 미국 유학을 마치고 나서도 겸손과 초심을 잃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4. 뼛속까지 영어 사대주의
하지만 오해의 여지가 있을까 말씀드린다. 이 사건으로 인해, 모든 미국 유학파 남성을 일반화해 증오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 일하며 매너 좋고 인격이 훌륭한 분들도 많이 만났다. 당시 내가 정말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한국인의 뼛속까지 깊게 새겨진 이놈의 '영어 사대주의'였다.
한국 사회는 마치 해외 유학파들에게 모든 죄를 사해주는 것 같았다. 일을 설렁설렁해도, 지각과 결석을 밥 먹듯이 해도, '영어'라는 무기만 있으면 모든 것이 허용되는 'Hi-Pass'를 거머쥔 듯했다. 10가지 강점이 있지만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A 직원과, 별다른 강점은 없지만 영어를 잘하는 B 직원이 있다면, 후자인 B를 우대하는 식이었다. 인턴과 후배 직원들을 뽑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굳이 유학하지 않고 국내 대학을 나와도 꼼꼼하고 성실하게 일을 잘 해내는 후배들을 많이 보았다.
해외 고객사가 많았던 회사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지만, 윗분들은 항상 유학파 출신 직원들을 선호하셨다. 이런 분위기는 당시 나와 같은 국내파 직원들에게 좌절과 박탈감을 안겨주었다. 단지 우리 회사뿐 아니라 다른 조직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한국 사회에 팽배했던 분위기였다.
5. 맞지 않는 옷을 벗어던지다
수년이 흘렀다. 얼마 전 우연히 정회도 작가님의 <운의 알고리즘>이라는 책을 읽었다. 흔히 '운'이라고 하면 미신, 무속신앙 등을 떠올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 책은 누구나 공감할 만한 운, 카르마, 전반적인 삶의 이치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기억에 가장 선명하게 남는 구절이 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 일하는 사무실, 국가가 나의 상극인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나에게 맞는 터를 찾아 생활의 배경을 옮기면 운명이 하루아침에 바뀌게 된다.
늪에 빠져 있는 스포츠카가 고속도로 위를 달리게 되는 격이다.
<운의 알고리즘>, p.105, 정회도 지음
이 구절을 읽고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내가 살고 있는 집, 심지어 국가와도 상극일 수 있다니... 누가 유학 동기를 물어보면 "더 성장하고 싶어서요. 해외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어서요"라고 모범 답안만을 제출해 왔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읽고, 비로소 내가 왜 미국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는지 이해되는 것 같았다. 분명 미국 유학에 불을 지핀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나의 내면은 이미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곳은 나와 맞지 않아. 계속 여기 있다가는 숨 막혀 죽을 것 같아...
나답게 살 수 있는 곳으로 탈출해야지."
미용실에서 보게 된 잡지도, 유학파 동료도, 주말에 그림을 배우기로 한 것도, 이 모든 게 우연만은 아니었다. 지난한 삶에서, 영어 사대주의가 팽배하는 곳에서 탈출하고 싶은 나에게 숨 쉴 구석을 마련해 주고 싶은 신의 한 수가 아니었을까. 때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을 하다 해결의 실마리를 찾곤 한다. 나에게는 그것이 ‘그림’이었다. 이 그림 한 장으로, 그리고 어이없었던 그 한마디로, 뜸만 들이던 유학 욕구에 불이 지펴졌다.
아무리 노력해도 중간도 못 가는 상황에서 나를 건져내야 했다. 공부는 제대로 하지도 않으면서 스터디 그룹만 쫓아다니던 ‘유학 준비 코스프레’에도 방점을 찍었다. 지지부진했던 인간관계도 정리했다. 더 이상 맞지 않는 옷을 벗어던지고, 나의 길을 찾아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1년간 나와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 이미지 출처: Unsplash, 보배드림, 일러스트레이션 습작 (엘르, 보그 등 패션 매거진 참고)
※ 도비: 도비는 《해리포터》에 나오는 집요정으로, 집이나 조직에서 잡무를 하는 사람이나 과로를 하는 사람을 일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