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여행 노트] 40. 시베리아 횡단 열차 이야기

시간의 경계에 대하여

by 진보

스크바까지 가는 횡단 열차를 타기 위해 알혼 섬에서 버스를 타고 이르쿠츠크로 다시 돌아왔다. 마트에서 식빵 두 줄, 딸기잼 한 통, 소시지, 보드카 한 병, 커피 두 팩을 샀다. 새벽 4시, 열차 시간에 맞춰 역으로 갔다. 승무원에게 표를 보여주고 열차에 올라타 자리를 찾았다. 사람들이 안 깨게 최대한 조용히 짐을 정리하고 시트를 깔았는데 몇몇이 깼다. 웃으며 미안하다고 하니 조용히 미소를 짓는다.

식량 구매 (feat. 보드카)

편하게 자고 일어나니 어제 잠깐 봤던 사람들이 안 보인다. 무수히 많은 역에서 다양한 사람이 타고 내린다. 커피와 소시지를 잘라 빵과 함께 먹으니 훌륭한 아침식사다. 오전 내내 자유론을 읽었다. 진정한 자유에 대한 시대를 초월하는 밀의 사상에 한 문단 한 문단 감탄하며 읽었다. 오후엔 팟캐스트를 틀어 두고 바깥 풍경을 구경했다. 눈, 나무, 그리고 가끔 보이는 집이 끝이다. 단조로운 시베리아 동부를 지나는 길이다.

IMG_6128.JPG?type=w773 휴대용 나이프로 소시지와 빵을 썰어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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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엔 유소년 발레단으로 보이는 단체팀이 열차 칸을 점령했다. 한창 시끄러웠지만 10시가 되니 나름 조용해졌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를 읽기 시작했다. 밤이 되어 잘 준비를 하고 있는데 내 자리 밑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건장한 아저씨였다. 짐 옮기는 걸 도와주고 2층 내 침대 칸으로 올라갔다. 잠들기 전 배가 고파 빵 몇 조각을 잘라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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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칸을 쓰는 친구의 이름은 안드레! 복싱선수였다. 본인이 가져온 고기를 꺼내 같이 아침을 먹었다. 내가 조금씩 먹으니까 더 먹으라고 아예 빵 위에 고기를 큼직하게 얹어준다. 쿨한 브로스키다. 구글 번역기를 돌려가며 이야기를 하다 체스를 두며 시간을 보냈다. 바빈스키 역에서 약 1시간 정도 멈췄다. 나와 안드레는 열차 주변에 모인 상인에게서 소시지 빵, 고기, 감자를 샀다. 아침에 산 컵라면과 함께 푸짐한 식사를 했다.

IMG_6144.JPG?type=w773 안드레!
IMG_6150.JPG?type=w773 정차시간이 긴 역에는 항상 맛있는 먹거리를 파는 상인들이 바글바글하다
IMG_6153.JPG?type=w773 도시락 컵라면은 시베리아 횡단열차 최애 아이템!

어제와 오늘의 경계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 안에선 의미가 없다. 열차 속 어느 한 순간, 안드레와 체스를 두고 있었는데 한 러시아 아저씨가 와서 흥미롭게 지켜보신다. 안드레와 대결을 마치고 이 아저씨와 두었다. 내가 생각하고 있을 때 이미 다음 수를 다 생각해 두신 듯하다. 신속하게,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두 판 다 패배했다. 이 아저씨의 정체는 사냥꾼이었다. 야생에서 호랑이와 조우했던 이야기를 해 주셨다. 눈 빛이 인상적이었다고. 한참 서로 눈빛을 교환한 뒤 별일 없이 헤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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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카테린부르크 역에서 안드레와 사냥꾼 아저씨가 내렸다. 열차는 다시 조용하다. 마지막 남은 소시지를 잘라 식빵과 함께 먹고 커피를 마시며 카라마조프 형제를 계속 읽었다. 대심문관(The Grand Inquisitor) 부분이었다. 밑줄 그어가며, 책 빈 공간에 필사해 가며 읽었다. 인간의 정신 가장 깊은 곳까지 거침없이 파고들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한 편의 숭고하고 웅장한 오페라를 본 느낌이다. 심장을 두드린 그 소리가 한참 온몸에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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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지났을까, 열차 안이 다시 시끌시끌하다. 초등학교 수학여행인지 담임 선생님 2명과 어린아이들이 열차를 점령했다.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책을 읽고 있었는데 꼬마 아이들이 한 명씩 와서 호구조사를 하고 책 사진을 찍어가기도 하고 뭐 볼게 있다고 나랑 같이 셀카를 찍어가기도 했다. 한국인 처음 봤나 보다. 한 아이가 나한테 사과와 초콜릿을 줬다. 고맙다. 각 열차 칸은 두 명의 승무원이 2교대로 담당한다. 승객이 탑승하면 담요와 침대 시트를 나눠주고 내리면 자리를 정돈한다. 화장실과 복도도 매시간 깨끗하게 청소한다. 그렇기에 상상과 달리 열차 안은 매우 청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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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횡단 열차 속에는 작은 세계가 있다. 쉴 새 없이 달리는 모습이 우리 삶과 닮아있다. 대체 지루한 횡단열차 안에서 뭘 해야 되는지 고민하는 것처럼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 치열하게 고민하는 사람도 있다. 항상 흥미롭고 새로운 일이 벌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많은 순간이 정적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지만 어느 순간 헤어진다. 3등석 열차 칸은 항상 주변 사람과 시공간을 공유하는 곳이다. 마음 맞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다른 어느 곳과 마찬가지로 여기 또한 사람 사는 곳이다. 기왕 가는 거 안 맞더라도 조금씩 맞춰 가는게, 웃으며 가는 게 더 낫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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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앉으신 할머니 두 분이 조용히 창밖을 내다보신다. 한 할머니께서는 조용히 노래를 흥얼거리신다. 열차는 계속 달린다. 황혼의 노을이 지고 깊은 밤이 지나 다시 해가 뜬다. 열차가 서서히 속도를 낮추자 할머니는 예쁜 털 모자를 쓰신다. 목적지가 있는 삶은 언제나 살만한 가치가 있다. 열차는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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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SIBERIAN TRAIN JOURNEY
Beijing → Manzhouli → Ulan-Ude → Irkutsk[Olkhon Island] Mosc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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