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여행 노트] 3. 여행의 기술: 거부와 기각

6개월 배낭여행의 기록 첫번째: 태국 - 방콕

by 진보

소 덥고 습해서 중간중간에 깼다. 도미토리에 머무는 6명의 게스트들 중에 아무도 중간에 일어나 에어컨을 켜지 않았다. 역시 불편해도 감기는 눈꺼풀을 이길순 없나 보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을 잠깐 본 뒤 다시 잠에 들었다. 이번엔 푹 잤다. 약 11시경 일어나 호스텔 옆에 있는 카페에 갔다.


여행 떠나기 전 동대문 중고서점에서 2,000원에 구입!

이탈리아 부부가 운영하는 카페로 이탈리아에서 직접 커피를 공수한다고 한다. 커피 맛이란 진한 맛 연한 맛 두 가지 밖에 모르는 나로서는 그런가보다 하고 진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의 전개가 살짝 루즈한 감이 있지만 종교와 신념에 대한 도스토옙스키의 깊은 통찰력과 표현력을 엿볼 수 있는 장인 것 같다. 책은 이만 접고 갑자기 배가 고파서 데이비드랑 어제 갔던 음식점에 갔다. 볶음국수를 시켜 얼른 한 접시를 비우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데이비드가 슬럼가에 가보자고 제안을 했다.



2.jfif 점심


여행을 떠나기 전 몇 가지 규칙을 정했다. 그중 하나가 거부권과 기각권 제도이다. 매주 월요일마다 초기화되며 각자 서로의 제안이나 생각을 거부(Veto) 하거나 기각(Override) 할 수 있다. 각자 거부권 2번 기각권 1번을 쓸 수 있다. 거부권 선고시 기각을 하지 않는 이상 더 이상 따지지도, 질질 끌지도 않고 바로 수긍해야 한다.


슬럼가에 가자는 데이비드의 의견을 거부했다. 불평등과 빈곤을 두 눈으로 보고 싶은 취지였지만 거긴 삶의 터전이지 박물관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거절했다. 사실 콜롬비아 보고타, 인도 뉴델리, 케냐 나이로비,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까지 이 지역에 머물렀을 때 억지로 발길을 슬럼가로 뗐었었다. 도시의 불빛이 비치지 않는 곳에서의 삶은 어떨지, 현실을 보고 싶어 그랬었다. 꽤 나중에야 깨달았지만 나에게는 그들의 삶을 관조할 권리가 없다. 아무리 존중하고 같은 시선을 유지하려는 마음으로 본 다고 해도 그들의 눈에는 내가 이방인이니까.

농구가 하고 싶어져서 코트가 있을 만한 곳을 지하철 노선도에서 찾아보았다. 차뚜짝 공원(Chatuchak Park)이 눈에 띄어서 일단 가보자 하고 지하철에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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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여의도 공원과 비슷했지만 이 공원은 자연이 주인공이고 주변 건물들이 보조 역할인 느낌이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멋진 생태공원이다. 약 1시간 정도 걷고 헤매다 간신히 농구 코트를 찾았다.


관리가 잘 되어 있는 우레탄 코트였지만 아무도 없었다. 코트에 대나무 공이 떨어져 있길래 좀 갖고 놀다가 더워서 잔디에 누웠다. 신발을 베개 삼아 낮잠을 잤다. 데이비드랑 화폐에 대해 잡담을 주고받다 대화가 점점 산으로 가려는 찰나에 태국 학생 2명이 코트로 걸어왔다. 간단하게 인사를 한 뒤 2 대 2 게임을 했다. 오래간만에 몸을 움직이니 상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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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엔 호스텔에서 만난 친구인 잔 피에트로와 술 마시러 가기로 했기에 나와 데이비드는 바로 지하철을 타고 호스텔에 돌아왔다.


유쾌한 웃음이 트레이트 마크인 잔 피에트로가 호스텔 테라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수영복은 어딨어? 수영 안 할 거야?" 대충 세수만 하고 나갈 준비를 마쳤는데 잔피가 물어본다.
"거기 수영장도 있었어? 근데 나 수영복이 없어"
"내꺼 빌려줄게. 안 빨았는데 괜찮지?" "물론이지. 물에 들어가면 알아서 깨끗해짐"

이렇게 우리 3명은 수영복 반바지를 입고 루프탑 바로 향했다.


걸어가는 도중 횡단보도에서 뉴질랜드에서 온 친구들을 만났다. 딱히 할 일도 없었던지 우리와 같이 바에 가기로 했다. 호텔에 도착해서 자연스럽게 손님인 척을 하고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나 데이비드 잔피에트로는 진토닉을 시켰고 뉴질랜드 친구들은 처음 보는 칵테일을 주문했다. 언니인 베카는 동남아 여행을 하는중이었고 동생인 비키는 대학교 시작 전 언니를 따라 처음으로 해외에 나왔다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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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고향 음식 중 뭐가 제일 먹고 싶어?“ 비니가 물었다.

"나 떠난 지 얼마 안돼서 별로 땡기는건 없는데? 넌??" 정말 며칠전까지 한국에 있었어서 별 생각이 없었다.

"난 신선한 야채랑 치즈. 여기 음식이 생각보다 별로여서" 비니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뭐지... 태국 음식이 별로라고?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그렇지 좀 느끼하긴 하지. 아 꼬리곰탕이 생각난다. 시원하게 한사바리 하고 싶은데" 장단에 놀아나는 중이었던 내가 추임새를 넣었다.

"꼬리? 꼬리를 무슨 맛으로 먹어?“

"사골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맛이 있다고.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뭔가 인고의 시간을 견뎌낸 엑기스의 맛?"

"뭐라는거야. 아 초콜릿 먹고싶다. 크리스마스 에그 초콜릿 먹어야 되는데. 우리 엄마가 나 대신 내 에그 초코를 먹고있대" 비니가 핸드폰 메시지를 확인하면서 말했다.

"그게 뭔데? 에그 초콜릿?" 나는 그게 뭔가 싶었다.

"구석기시대 사람이야?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했나? 어떻게 에그 초콜릿을 몰라? 크리스마스 10일 전 카운트다운을 하면서 하루에 하나씩 달걀 모양으로 된 초콜릿을 먹어" 진심으로 놀란듯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며 얘기 했다.

"처음 들어 봐. 그런 거 못 들어봤어"

"난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는줄 알았는데..."


누군가 개개인의 관점은 그 당사자에겐 너무나도 현실이랬다.


살랑거리는 바람을 맞으며 시원한 맥주 한모금을 들이키니 나와 다른 이 이질감도 마냥 즐겁다.

6.jfif 왼쪽부터 시계방향: 데이비드, 잔피에트로, 나, 베카, 비니, 운(정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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