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름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걸까?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말이 이상한 이유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나는 사람들이 저런 식의 발언을 너무도 쉽게 한다는 것에 놀랐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의 추구로 재미가 사라졌다'는 말은 너무도 위험한 말이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 올바르다 평가 받는 가치는 아무리 철저하게 추구되어도 '과도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캡콤 기밀 문서에 술렁인 게임 커뮤니티 반응: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이 게임의 재미를 해친다고?⟩, 신필규, 오마이뉴스, 2020.11.24.
며칠 전 오마이뉴스에서는 '해시태그 #청년'이라는 컨셉으로 기사가 하나 올라왔다. 이는 일본 게임회사인 캡콤의 내부 문건이 유출되었고, 그에 대한 한국 네티즌들의 반응을 살피는 내용이었다. 유출된 문건에는 게임으로 인해 성별이나 인종에 관한 고정관념이 생기지 않도록 다양성을 추구하도록 하는 가이드라인이 담겨있었고, 몇몇 네티즌들은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이 게임성을 망친다며 반발했다고 한다.
사실 게이머들의 PC에 대한 반발은 그 배경을 살펴야 한다. 단순히 게임회사가 PC를 추구했다고 반발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을 전시하느라 메인 스토리 진행이 미흡하거나(오버워치), 기존에 유대감을 쌓은 캐릭터를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정치적 올바름을 과시하는(라스트 오브 어스2) 행태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당 기사에서 이러한 맥락을 살피는 노력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앞의 이야기는 논외로 하더라도 기사의 논리 전개 방식은 상당히 괴상하다. 기사에 따르면 "정치적으로 올바르다 평가받는 가치는 아무리 철저하게 추구되어도 '과도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그러므로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 형용모순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기호학자 소쉬르는 언어를 '기표'와 '기의'로 구분했다. '태양'이라는 단어의 생김새와 발음은 기표에 해당하고, 이 단어가 의미하는 붉은 항성은 기의에 해당한다. 일상에서는 별문제 없이 의사소통이 가능하지만 정신분석가 라캉은 기표와 기의의 관계에 의문을 품었다. 사실 '나무'라는 언어는 실제 나무와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추상적인 언어로 가면 이러한 의문은 더 심해진다. 정의, 공정, 진보 등. 사람들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더라도 진정한 정의/공정/진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기표는 기의에 가닿을 수 없이 영원히 '미끄러진다.'
'올바름'이라는 단어 역시 마찬가지다. 똑같이 '올바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더라도 그 올바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천차만별이다. 정치적 올바름을 옹호하는 세력들은 젠더 구분을 철폐하는 것이 올바름일지 모르지만, 보수 기독교인들에게는 이성애 중심의 가족주의가 올바름이다. PC를 부르짖는 사람들은 사실 그것이 (자신들만의) 올바름임을 괄호 속에 애써 숨기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비단 PC주의자 사이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무릇 나름의 정치권력을 가진 세력이라면 모두 자신들의 특수한 신념을 보편적인 신념으로 격상시키는 행각을 벌이곤 한다. 기표와 기의 사이의 모호한 관계를 이용하여 대중을 기만하는 것이다.
MB정권 때 경찰의 진압 방패에는 '법질서'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진압 방패 너머에 있는 사람들은 마치 법질서와 대치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새누리당은 2016년 '테러방지법'을 통과시키려다 필리버스터에 부딪혔다. 마치 이 법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테러 방지에 반대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더불어민주당 소속의 유창오 소장은 조국 장관 임명에 반대하는 20대 남성 비율을 근거로 '20대 남성의 보수화'에 관해 논하는 칼럼을 기고했다. 여기엔 조국과 민주당에 반대하면 보수적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과거의 온건한 페미니스트들은 "성평등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모두 페미니스트다."라는 구호를 외쳤다. 하지만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면 성평등에 반대하는 사람이다'라는 불합리한 대우 명제가 도출된다.
한나 아렌트는 자신을 '정치철학자'가 아닌 '정치이론가'로 불러주길 원했다. 왜냐하면 정치라는 영역은 필히 특정한 입장을 취하기 마련인데, 철학이라는 영역은 보편적인 진리를 탐구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정치적 올바름을 주장하는 진보주의자들이 모두 아렌트의 미덕을 배웠으면 한다. 정치는 입장의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고, 설득을 통해 그 차이를 좁혀나가는 것이 정치적 능력이다. 설득이 아닌 강요를 선택한다면 그러한 정치세력은 도태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