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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재 Oct 21. 2020

따릉이와 여유의 다섯

이번 가을은 따릉이 덕에 빛났다

1. 한 동안 정말 바빴다. 일도 많고, 재미도 있는데, 물리적으로 할 시간과 체력이 부족했다. 능력이 부족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누군가 쫓아오는 꿈을 꾸며 몇 주를 보냈다. 아무도 없을 때 출근하고, 아무도 없을 때 퇴근했다. 업무 밀도가 유난히 높은 회사라 퇴근하고 집에 오면 침대에 눕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업무 외의 다른 생각을 할 틈도, 글 쓸 틈도 없었다. 오늘은 모처럼 마음의 여유가 있다. 이런 날은 아무 말이라도 상관없다. 일단 써야 한다. 


2.  사람은 여유가 없을 때 본성이 드러나는 법이다. 다른 사람의 그런 모습을 본 후에는 슬그머니 피하게 된다. 나에게서 그런 모습이 보일 때도 마찬가지. 예민하고, 부정적이고, 초조하고, 눈치 보는 모습은 나만 봐도 되는데. 여유롭게 일하고, 여유롭게 살고 싶다. 늘 여유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3. 스톡홀름에서 서울로 돌아온지도 어느새 1년이 지났다. 그곳에서 보낸 여유로운 시간들이 무색하게 다시 바쁘고 정신없게 살고 있다. 퇴근하고 집에 가는 길이면 스톡홀름 생각이 종종 난다. 너무 여유로워서 이 시간을 어디에 쓸지 주체하지 못하고 사진도 찍고, 글도 쓰고, 미술관도 다니고, 여행도 다니던 때가 있었는데.  코로나 19가 아니었다면 이번 여름에 가고 싶었는데 아쉽다. 내년에는 꼭 갈 수 있기를. 


4. 이번 가을은 따릉이 덕에 빛났다. 매일 밤 따릉이로 여의도를 누비면서 마음을 달랬고, 주말에는 한강을 따라서 마포, 합정, 신사, 압구정까지 달렸다. 따릉이를 타고 어디든 갈 수 있는 계절도 저물고 있다. 이 핑계 저 핑계대면서 미루지 말고 자전거가 보이면 바로 빌려야지. 


5. 요즘 새로운 제품을 만들고 있다. 조금 제대로 해보자는 생각으로 초반에 사용자 문제나 리서치 결과를 기반으로 컨셉도 잡고, 아이디어도 내고, 디자인 원칙도 잡았다. 지금은 그걸 기반으로 보다 팀원들과 구체적인 화면을 잡고 있는데, 처음 세운 디자인 원칙과 반하는 상황과 계속 맞닥뜨리고 있다. 


처음에는 그 예외 상황도 포괄할 수 있도록 디자인 원칙을 수정했다. 그런 예외를 만들지 않는 게 나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러고 나면 나의 기대와는 다르게 그 원칙에 반하는 상황이 더 많아지는 게 아닌가. 늪에서 빠져나오려고 힘을 줬는데, 더 빠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어느 영상에서 아래 문장을 읽었고,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Good design principles force clarity and reduce ambiguity. 


원칙은 방향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려줄 뿐이고, 어떻게 갈지는 그 상황에 달려있다. 디자인 원칙을 아무리 엄격하고, 강력하게 세워도 모든 경우를 만족시킬 수 없다. 제품의 원칙을 세우는 디자이너로서 나의 일은 다른 사람이 어떤 목표로 디자인해야 하는지, 그래서 어떤 경험을 줘야 하는지 예시와 가이드라인을 통해서 명쾌하게 알려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이 프로젝트가 끝날 때쯤이면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더 분명하게 알게 되겠지.


나는 따릉이 타고 다리 건널 때가 가장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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