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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재 Mar 01. 2021

퇴사, 봄방학과 새로운 시작의 다섯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그 어느 때보다 두려움이 앞선다

1. 지난 2월 말을 마지막으로 자동차 회사 생활을 마무리했다. 파트장님이 퇴사 선물로 팰리세이드 미니어처를 주셨다. 책상 위에 올려두고 가끔 보면서 자동차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을 디자인하던 때를 떠올리며 추억하라는데, 보자마자 이슈 몇 가지가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걸 보니 아직 추억할 단계는 아니구나 했다. 그러면서 본인이 파트장으로서 더 재밌게 일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 같아서 반성하게 된다, UX에 대한 감각도 있고, 커뮤니케이션도 잘하니 가서도 잘 적응할 거라고 해주시는데, 평소 말씀도 많이 없으시고, 개인적인 대화나, 감정 표현도 잘 안 하시던 분께 이런 선물과 덕담을 받으니 괜히 마음이 찡했다. 


아련하게 배경을 날려봤다


2. 퇴사 이유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아서 간단하게 남겨보면, 우선 나이를 더 먹기 전에, 체력이 부족해지기 전에, 은행 빚이 생기기 전에, 대기업의 안락함에 익숙해지기 전에 스타트업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광고 회사, 해외 디자인 에이전시, 자동차 회사에서 일하면서 요즘 사람들은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어떻게 대처하면서 일하는지 궁금했고, 일한 만큼 보상받을 수 있는 환경에서 일하고 싶었다. 


자동차 회사는 제품 특성상 개발 프로세스가 복잡하고, 수많은 사람과 조직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그러다 보니 실무자로서 디자인보다 우리 조직의 의견을 타 조직에 전달하고, 양쪽의 의견을 조율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할애하는 경우가 많았다. 회사가 잘 돌아가기 위해서 커뮤니케이션만큼 중요한 일은 없긴 하지만, 여기에 내 에너지의 80%를 쓰는 게 과연 맞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고, 디자이너로서 디자인에 집중할 수 있는 효율적인 개발 환경에서 일하고 싶었다. 


답답함과 불합리함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은 내가 속한 조직의 문제라기보다 자동차 산업이 가진 특수성에 가까웠다. 운전자의 안전이 최상위 가치로서 존재하다 보니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하기 어려운 점도 한 몫했다. 나는 여전히 자동차만큼 재미있는 제품은 없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다시 자동차 회사로 돌아가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지금보다 더 재미있게 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3.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그 어느 때보다 두려움이 앞선다. 모험이 처음도 아니고, 대단히 새로운 모험도 아닌데 뭐가 그렇게 두려운 건지.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일까? 아니면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커서일까? 경험하지 않고서는 모르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조금이라도 미리 알고, 뭐라도 준비하고 싶은 마음 탓일까? 이번 여정에서 나는 얼마나 배울 수 있을까? 나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4. 클럽하우스에 들어온 지 2주일. 클럽하우스에는 사적인 자아와 공적인 자아가 공존한다. 참여자가 20명 미만으로 내려오면 사적인 자아로 이런저런 말을 떠들다가 50명을 넘어가면 조심하고 또 조심하다가 말 대신 침묵을 택하고, 화자에서 청자로 돌아선다. 공과 사를 넘나드는 참으로 신기하고도 불편한 경험. 사람을 모으는 것에 스토리텔링만큼 강력한 건 없다는 걸 다시 한번 느낀다.


처음에는 내가 무언가를 놓치는 거 아닌가 하는 불안함 때문에 아는 사람들이 많은 혹은 인기 있는 방에 들어가서 뭐라도 듣고, 얻어가려고 애썼다. 그런데 오디오 중심의 UX가 상당한 에너지를 소모하게 만들고, 방을 시작할 때부터 듣는 게 아니라면 맥락을 파악하기 어려우며, 모더레이터와 스피커의 역량에 따라서 콘텐츠의 수준이 크게 차이 나고, 결과적으로 얻을 수 있는 무언가를 담보하기 어렵다 보니 시간을 낭비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개인적으로 공적인 자아보다는 사적인 자아로 지인들 혹은 지인의 지인들과 모여 소소하게 수다 떠는 게 더 재미있다. 인터넷 어딘가에서 조금만 찾으면 볼 수 있는 그런 공식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적이고, 때론 오프 더 레코드 같은 날 것의 이야기가 지금 나에게는 더 흥미롭다. 누구나 아는 장점을 열거한 글보다 단점이나 아쉬운 점이 적힌 리뷰가 더 재미있는 것처럼. 클럽하우스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5.  짧은 봄방학을 틈타 춘천에 다녀왔다. 서울에서 찾기 힘든 한산함과 여유로움이라는 호사를 누리고 왔다. 코로나가 끝나면 꼭 스톡홀름에 가야지. 가서 매일 걷던 길을 걷고, 햇볕 아래에 앉아있다가 매일 가던 카페에 가고, 예전 회사에 찾아가서 친구들과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마트에 들러서 장도 보고 그래야지.


오월학교에서 햇볕을 누리던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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