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미뤄진 첫 프렙 일상이 시작되다
갑작스러운 오미크론의 급증으로 호주 퀸즐랜드주의 모든 일상은 미루어졌다. 우리 딸 첫 초등학교만은 다른 조정 없이 무사 입학을 기원했지만 이 또한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부모가 맞벌이를 하는 경우에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입학 때까지 돌봐 준다고 한다. 그 말인즉슨, 수업을 시작하는 건 아니지만 학교로 아이들을 데려다 놓으면 선생님들이 봐주시겠다는 이야기이다.
이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아이의 방과 후 수업은 최대한 피하고 학교 정규 수업만 보내고 싶은 마음에 나는 출근시간도 모두 바꾸었다. 아이의 학교가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일을 마칠 수 있게 말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새벽 5시에 일어났다. 일찍 끝나려면 일찍 시작해야 하니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대충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먼저 도시락을 쌌다. 호주는 통상 정규 수업만 듣는 경우 2개의 도시락을, 방과 전후까지 학교에 있는 경우엔 최대 3개까지 싸야 한다. 다행히 난 2개만 싸면 됐다.
친정엄마는 도시락을 어떻게 2개씩이나 싸냐며 힘들겠다 말씀하셨지만 사실 호주식 도시락 싸는 건 쉽다. 한국처럼 요리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가 얼마나 먹고 올 지는 모르겠다 생각했다. 보통 밖에 나가면 더 안 먹는 아이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적게 싸줘서 배고픈 거 보다는 남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하며 내 마음을 안심시켰다.
아이가 언제 이렇게 커서 학교를 가게 되었을까 싶다가도 사실 한국 나이로 6살밖에 안 되었고, 입학이 빠른 호주에 살기 때문에 더 빨리 경험하게 된 감정이구나 싶기도 했다. 다 큰 거 같다가도 어느 때는 아직도 아기 같은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하긴, 우리 엄만 아직도 두루두루 시집간 딸 걱정을 하시지만 말이다.
일하는 내내 학교에 가 있는 아이 생각이 들어 시계를 여러 번 쳐다보았다. 잘 따라 하고 있을까. 화장실은 제때 잘 갔을까. 먹는 건 잘 먹었겠지. 혹시 짓궂은 친구들이 있지는 않을까. 혼자 동양 아이라고 선생님들이나 다른 친구들이 소외시키지 않을까 등등. 걱정을 하다 보니 퇴근시간이 다가왔다. 나는 어느 때보다도 더 정확하게 칼퇴를 하고 아이를 데리러 학교로 갔다.
선생님은 내 얼굴을 멀리서 확인하시고는 딸아이를 부르시는 것 같았다.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가는 시간이라서 그런지 선생님들은 모두 마스크를 끼고 계셨다. 정말 마스크는 도무지 잘 안 쓰는 호주였는데 지금의 상황은 제법 심각하긴 하구나 싶었다.
유치원에서 일하고 있는 나는 아이들의 반응을 보면 오늘 아이의 하루가 어땠을지 대충 안다. 보통 울면서 부모를 맞이하는 아이들은 하루 종일 엄마 아빠를 무척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이다. 아무리 하루 종일 친구들과 잘 놀고 울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울면서 맞이하는 만큼 부모님 생각을 많이 하고 마음도 편치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드디어 나와 딸아이의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성큼 뛰어나오다가 멈칫하더니 같이 놀았던 친구들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다. 자기는 이제 집에 가게 되었다면서 내일 다시 만나자고 말하는 것이었다. 기분이 묘했다. 적응을 잘하고 있었던 것 같다. 유치원 다닐 때도 가끔 헤어질 때 울었는데 오늘은 아침에도 울지 않더니 아마 스스로도 무척 기대를 많이 했던 입학이라서 더 즐겁게 잘 보냈구나 싶었다. 새로운 곳에서의 첫걸음이 잘 내디뎌지고 첫 단추가 잘 끼워진 것 같다. 기특했다. 아이와 나의 이 만족감이 부디 오래가길 바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너무 가슴 벅찬 마음이 드는 동시에 30여 년 전 내가 국민학교 입학하던 날 우리 엄마의 얼굴과 모습들이 떠오르며 묘하게 슬픈 감정이 든다. 세월이 아쉽고도 아쉽다.
오늘따라 엄마 생각이 많이 나는 것 같다. 사랑하는 내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