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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지 Oct 13. 2022

하이 앤드 바이

퇴사를 했고, 퇴직을 했다

아디오나에서 처음 호주 유아교사 자격증을 땄고, 이곳에서 풀타임으로 일을 하며 호주에 와서 처음으로 호주 직장생활도 해왔다. 그리고 7개월이 지난 지금, 나는 이곳을 떠나 조금 더 한 걸음 나아가는 인생을 선택하기로 했다. 정말 중대한 결심이었고 오랫동안 심사숙고했다. 좋은 사람들과 매일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점이 나의 발목을 꽤나 오래 붙잡았지만, 우리의 인연은 이곳을 떠나서도 닿을 것이라 믿으며 그 간의 유아교사로서의 하루들을 기록해보려고 한다.


매주 목요일일 쯤에는 다음 주 스케줄이 메일로 전송되었다. 매니저가 휴가를 가는 주의 경우에는 2주 전에 나오기도 했고, 직원들의 갑작스러운 결근에 의해 하루 전까지 스케줄이 조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매니저부터 모든 교사들까지 불만을 따로 갖지는 않았다. 결근을 하는 사람이야 그 사람만의 사정이 생겼으니 어쩔 수 없지 않겠나. 다른 사람을 탓하지 않고 다음 스텝을 논의해 나가는 이곳이 그래서 내가 떠나기 힘들 정도로 사랑했던 점 중 하나였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판단할 권리는 없어

이게 내가 호주인들과 일 하면서 배운 것이다. 지금은 내 인생의 모토가 되었다. 




하이 앤드 바이 달팽이



어느 한 날은 점심을 먹고 유치원 정원에 누워 있었다. 혼자서 노래도 듣다 오디오북도 듣다 이런저런 생각까지 해가며 알차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뒤에 뭐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돌아보니 달팽이 한 마리가 지나가고 있었다. 나만큼 이 아이도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는 모습에 괜스레 동병상련이 느껴져 달팽이에게 사진을 찍어주었던 기억이 난다. 어느 하루도 아무 일 없이 지나가는 일은 없었다. 늘 누군가는 어디에서 무언가를 하지.






호주에 살며 이스터를 그냥 지나친 날도 없었다. 일을 하기 전에는 옆집 아주머니께서 토끼 수건과 초콜릿을 주셨고, 아이의 어린이집에서는 달걀 그림 그린 후 색칠하기, 토끼 만들기 등등 다양한 것들로 4월을 맞이했다. 아디오나에서의 이스터 또한 특별했다. 아이들과의 활동만 있을 줄 알았는데, 매니저의 소소한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끔 우리 매니저는 작은 편지와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에너지를 전해줄 때가 있었는데, 이 약발이 꽤나 오래갔다. 이때만 해도 나는 이곳을 평생 다니니라 생각했었지.




주로 집에서 도시락을 싸왔다. 딸아이 도시락 싸면서 내 것도 함께 준비했다. 어느 날은 아이 도시락 싸면서 남은 샌드위치나 과일 조각들이 주 메뉴였고, 어느 날은 아이의 남은 과자를 싸오기도 했다. 솔직히 제대로 싸도 되는데 이상하게 나는 궁상을 떨고 싶었다. 특히 먹는 것에 있어서는 더 그랬다. 일한 후 얻은 소중한 점심시간을 먹는 것으로 다 채우는 게 싫었고 그저 빨리 대충 해치우고 나서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을 하고 싶었다. 책을 읽는다던지, 독서노트를 작성한다던지, 혹은 어느 날은 유치원 근처에 있는 카페로 나가 완벽하게 만들어진 플렛 화이트를 먹고 들어오곤 했다. 이 정도의 여유만이 주어졌던 유아교사의 일상, 온전히 내 자유시간은 하루에 20분뿐이었다.





오뉴월의 호주는 해가 참 짧고 서늘했다. 아침 8시 30분에 출근했다가 저녁 5시에 끝나는 날은 밖이 어둑어둑했다. 아이는 내가 다른 아이들을 보는 이 일 때문에 방과 후 교실에서 해가 다 저물어갈 때까지 나의 퇴근을 기다려야 했다. 석양이 너무 예뻤던 어느 날, 아이는 엄마가 좀 빨리 데디로 올 수는 없었냐고 말하며 눈물을 글썽거리며 나를 맞이했다. 예뻤던 지는 하늘이 슬픈 하늘로 바뀌는 순간을 경험하는 건 다반사였다. 처음에는 그저 풀타임 직원이 된 게 좋았는데 돌아보면 그것만큼 나의 모든 것을 할애해야 하는 게 없었다. 아이도 나도 점점 시간에 끌려 다니는 것 같았고, 시간의 노예가 되는 것만 같았다. 학교 마치고 다니던 발레도 아빠랑 가게 되며 아이 진도 체크도 제대로 못하게 되었고 (아빠는 그저 데려다주고 데려오는 것만 충실했다), 친구들과 플레이 데이트는 상상도 못 했다. 주말에 혹여나 친구들이 생일파티라도 하면 거긴 되도록 참석하려고 했지만, 그것으로는 많이 부족했다. 아쉬움이 커져갔다.

이날 노을이 너무 예뻐 사진을 남겼는데, 우리 동네 커뮤니티에 나와 같은 사진들을 서로 공유하고 있었다. 정말 너무 예뻤던 인생 노을을 본 날, 딸아이가 슬퍼했던 날.


하지만 호주 유치원 교사 일은 정말 재미있었다. 제일 좋았던 점은 바로 아이들이 너무너무너무 예뻤다는 것. 그리고 아이들이 성장해 가는 모습을 통해 나도 많이 배울 수 있다는 점이다. 아마 내 아이만 키워봤으면 절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의 성장이라는 게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말이다. 예전 우리 엄마는 늘 이런 말을 하셨었다. 


"만 세 살이 되기 전에 다 가르쳐야 돼." 


어릴 때 너무 엄하게만 느껴졌던 우리 엄마의 이 말을 나는 알 것 같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이해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내가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다가 보니 정말 아이라고, 아기라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라는 것이었다. 그게 바로 인간의 본능이자 잠재된 사회성이 아닐까 싶었다. 눈이 부시게 성장하고, 모를 것 같은데도 다양한 상황에서 재빠르고 제법 지혜롭게 행동을 할 때는 정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단지 유치원 교사의 일이 아쉬웠던 것은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꽤 많은 강도의 노동을 함에도 불구하고 너무 저 임금이라는 것. 그것이 오늘의 나를 유아교사로서의 마지막 글을 남기게 만든 것이라 생각한다. 




아이들과의 시간은 늘 행복했다. 어느 날은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열정적으로 야외를 뛰어다니기도 했다. 요가의 날이라고 아이들과 선생님들 모두 다 같이 요가를 한 날도 기억에 남는다. 나느 그 많은 활동들 중 동화책 읽어주는 게 참 좋았다. 덕분에 나도 꽤 많은 동화책을 읽은 것 같다. 어느 날은 동화책 내용에 감명을 받아 집에 오는 길에 서점에 들러 그 책을 산 후 내 딸아이에게 읽어주기도 했다. 참 많은 활동들을 했고 모든 게 나 스스로도 배움과 성장의 과정이었던 것 같다. 



특히 나의 아디오나에서는 매니저가 작은 날도 그냥 넘기는 법이 없었다. 간식도 자주 주고 선물도 무척 자주 받았다. 다른 곳에서도 일해봤지만 이건 호주 유치원이라서 그런 건 아니고 매니저의 역량이었다. 아디오나도 호주 프랜차이즈 유치원이긴 하지만 그렇게 큰 곳은 아니었고, 오너들이 이따금 한 번씩 오기도 했지만 거의 매니저가 원장처럼 운영되는 곳이었다. 그렇다 보니 매니저는 우리를 대변해 많은 것들을 본사로부터 지원받는 편인 것 같았다. 참 감사했다.


유아교사의 날에는 특히 각각의 선생님에게 선물을 나누어주기도 하였는데 그 속에 들어있던 게 아주 예술이었다. 부모님들께 선생님들 모르게 편지를 받아서 각각 넣어 주었던 것이었다. 어떤 선물보다도 감동적이었다. 유아교사의 날에 선물을 주는 유치원은 많이 봤지만, 이런 정성은 정말 처음이었다. 그래서 내가 이곳을 떠나기 참 힘들었다. 



부모님 뿐만 아니라 동료들도 너무 좋았다. 나를 항상 따뜻하게 맞이해주었고 동료로서 인정해 주었다. 어느 다른 유치원보다 좋았던 점은 나를 외국인으로 대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호주인들과 일하다 보면 많은 배려를 받는다. 고맙지만 돌아보면 아직도 이방인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종종 있었다. 나는 언제 이 커뮤니티 안에 자연스레 들어갈 수 있을지 생각했던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늘 나를 진짜 동료로 인정해주었다.  내가 늘 블랙티 마시는 걸 알고 있던 한 동료는 나에게 맛있는 블랙티 하나를 추천해 주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요크셔 블랙티에 입문할 수 있었고, 블랙티를 마실 때면 늘 이 요크셔와 밀크를 함께 하는 습관도 생기게 되었다. 여러 부분에서 한걸음 더 성장했고 평안했으며 감사했다. 





그러던 내가, 이렇게 사랑받고 존중받으며 행복한 날들을 보냈던 내가, 이곳과의 이별을 고했다. 나 스스로의 도전을 늦출 수가 없었다. 한국 나이로 40이 그냥 지나가고 있었다. 더는 시간을 허투루 보낼 수가 없었다. 아직 나에게 남은 열정을 미친 듯이 쏟아내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이렇게 예뻤던 아이들과, 감사했던 동료들과 부모들의 응원에 힘 입어 퇴사를 결정했다. 그간 약 7개월이란 따뜻한 시간이 흘렀고 그래서 헤어짐은 슬펐다. 울지 않으려고 아침부터 여느 때처럼 일에 집중했다. 아이들을 한 번 더 안아 주고 웃어 주었다. 동료들과도 마지막 인사를 미뤘다. 그렇게 3시가 되었다. 마지막 그날 나는 3시 15분에 끝나는 스케줄이었다. 동료들이 하나둘 씩 나의 미래를 응원해주었고 격려해주었다. 기꺼이 포옹으로 나의 마지막을 함께 했고, 따뜻한 미소를 남겨주었다. 결국 나는 울음을 참지 못했다. 나는 더 이상의 눈물을 보이기 전에 그곳을 빠져나와야겠다고 느꼈다. 평소와 같은 인사를 하며 아디오나와 이별했다. 서로의 미래를 기약했다.


Thank you so much, and see you SOON!
BYE BYE Adeo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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