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lling lies' 보다 'making stories up'
얼마 전 아이를 데리러 학교로 갔다. 담임선생님께서 나에게 슬며시 다가오시더나 나에게 물으셨다. "혹시 임신 중이세요?"라고 말이다. 나는 깜짝 놀라서 선생님께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우리 아이가 학교에서 엄마 배 속에 아기가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아이에 대한 정보도 제법 디테일했다. 여자아이이고, 1월에 태어날 예정이고 등등(참고로 자기 생일이 1월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얼굴이 빨개져서 죄송하다고 말한 후 아이가 거짓말을 한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아이가 동생이 갖고 싶어서 이야기를 만든 것 같다고 말씀하시며 미소 지으셨다.
하지만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정말 수많은 생각을 했다. 무엇이 잘 못 된 걸까? 내가 무슨 교육을 제대로 못 시켰을까? 한 참을 이 생각 저 생각에 얼굴이 벌게졌다 가라앉았다 하기를 반복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아이에게 물었다.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말이다. 처음에는 내가 그렇게 물어도 웃고 까불면서 얼마나 이 사안이 심각한지에 대한 이해도 없는 것 같은 행동을 했다. 화내지 않고 타일러보려고 시작한 대화에서 나는 결국 화를 내고 말았다.
왜 그런 말을 했냐 이 말이야!
그러자 아이가 울먹 거리며 답했다.
그냥 동생이 갖고 싶어서 그런 건데..
아마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자꾸 디테일한 것들을 여러 사람들이 물어보니 그것에 대답을 하면서 점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야기가 흘러간 것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아이를 안아 무릎에 앉혀놓고 이야기를 했다. 아무리 원하는 것이 있어도 이야기를 만들면 안 된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제발 아이가 한 번에 잘못을 깨닫고 이 버릇(?)을 고쳤으면 했다.
그 주가 그렇게 흘러간 후 주말에 아이를 데리고 바닷가에 나갔다. 집 근처 바닷가에서 우리는 늘 주말을 보낸다. 아이는 바다에서 첨벙첨벙 파도를 타고, 나는 자리를 깔고 누어 다리 마사지를 하며 천국에 있는 것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나에게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학교에 선생님과 아이들에서 끝난 게 아니었다. 아이들이 아마 집에 가서 부모님들께 다 이야기를 한 것 같았다. 아이 반 친구 엄마가 나에게 임신을 한 게 맞냐고 물어온 것이었다. 심지어 그다음 날에도 다른 엄마가 학교에서 애를 등교시키는 데 또 물었다. 임신했냐고 말이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 이 사실은 어느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다. 그냥 제발 이 사건이 빨리 지나가기만 바랐다. 아이는 어느새 이 사건을 잊어가는 것 같았고, 친청 엄마에게 말하자니 엄마는 그러면 동생을 하나 낳아주라는 논점에 벗어난 이야기를 하실 게 뻔했으며, 친구들에게 말하자니 왜인지 우리 아이가 거짓말쟁라고 소문이라도 내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고 나서 며칠 후, 아이 친구 엄마 하나가 나에게 와서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
"너 요즘 걱정하고 있다며? 그런데 이야기 만들어 내는 것들은 크면서 한 번씩 있는 일이야. 아이들이 고맘 때 꼭 원하는 거 있으면 그렇게 이야기를 만들어 내더라고. 내가 아이들 여럿 키워 보니까 그래. 너무 걱정하지 말어. 그냥 지나갈 거야."
그 말이 얼마나 위안을 주던지 며칠 꽉 눌렸던 무언가가 스르륵 녹아드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아이가 거짓말을 한 행동은 물론 잘못이지만, 아이는 아마도 동생이 갖고 싶었던 마음이 너무 컸기 때문에 이야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제 고작 만 다섯 살, 충분히 그렇게 표현할 수 있었다. 물론 당분간은 아이를 좀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이것 또한 커가는 한 과정임은 틀림없었다.
엄마가 되면서 아이들 통해 참 많이 배우고 성장한다. 예전에 아이가 호주 아이들이랑 왜 나는 다르냐고 물었을 때에도 나는 사람은 다 똑같다고 이야기해 줬었는데, 호주 엄마들은 내 이야기를 듣고는 다 다른 게 맞다고 하며 우리 아이를 이해시킨 적이 있었고, 이번 사건에서도 나는 아이가 '거짓말'을 한 것에 화가 났지만, 호주 엄마들은 아이들의 '원하는 것 때문에 이야기를 만든 것'이라고 표현하며 아이들을 이해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국 문화에서 삼십 년을 살다가 호주 문화 속에 아이를 키우는 덕에 아이도 나도 늘 정서적으로 성장하는 느낌이 든다. 오늘 하루도 다시 한번 내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혹시 너무 편협한 건 아닌지, 내 기준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게 있는 건 아닌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