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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불야불 9) 절묘하거나 절망하거나

불펜데이 즐기는 법

by 잼벅

프로야구의 투수운영은 5선발이 기본이다. 시즌 중 경기가 일주일에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6일 열리니까 화요일 선발은 일요일에도 선발로 나선다.


그런데 이런 로테이션은 선발 투수진이 잘 돌아갈 때에나 가능한 이야기다. 갑자기 부상선수가 발생하거나 부진한 선수가 나오면 쉽게 흔들릴 만큼 취약하다. 소위 ‘빵구’가 나면 대체 선발을 올린다. 하지만 그마저 마땅치 않으면 선발 없이 불펜 투수들로만 마운드를 꾸려간다. 이게 좁은 의미의 ‘불펜데이’다. 가까운 예로는 2023 한국시리즈에서 LG 트윈스는 외국인 투수(플럿코)가 빠지자 선발 없이 불펜들로 두번째 게임을 운영했다.


불펜이 강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경기를 져도 어쩔 수 없다는 식의 경기 운영이 되기 쉽다. 불펜이 강해도 불펜데이를 자주 가동시키다가는 불펜이 오버런으로 흔들릴 수 있어 예외적으로만 운영되곤 한다.


A팀은 최근 1선발이 타구에 팔을 맞아 2군으로 내려가 있는데 4선발마저 지난 경기에 이어 또 무너지는 바람에 선발 투수 운용이 큰 위기를 맞는다. ㄱ감독은 시즌은 막바지로 치닫는 가운데 5위 싸움을 벌이고 있는 B팀과 3연전을 앞두고 애간장이 탄다. 대체 선발감을 찾지만 마땅한 선수가 보이지 않자 불펜데이를 운영하기로 한다. 다행히도 A팀에는 비교적 잘 던지는 불펜 투수들이 다른 팀보다 많은 편이다. 그래도 ㄱ감독은 불안하기 짝이 없다. B팀은 불펜은 다소 약하지만 선발 투수진은 의외로 강한 편이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막상 게임에 들어가니 불펜들이 기대 이상으로 잘 던져준다. ㄱ감독은 불펜데이의 묘미를 실감하면서 남은 시즌에 불펜을 적극 활용하기로 한다.


한편 최근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는 트렌드의 영향으로 상대팀 타자들에 강한 복수의 투수진을 구성한다든가 선발 투수의 부상을 막기 위한 투수 운용 차원에서 불펜데이가 등장하기도 한다. 사실 아무리 강철 같은 어깨를 자랑하는 선발 투수라 하더라도 한 시즌 중 한번도 거르지 않고 28~29게임을 소화하기는 쉽지 않다. 선발요원은 부족한데 불펜 투수를 다수 보유하고 있는 팀이라면 이를 적극 활용할 만하다. 종전보다 적극적으로 운영된다.(광의의 불펜데이)


예전에는 선발투수의 비중이 절대적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분업화가 진전돼 선발, 계투, 마무리의 체제가 자리잡은 지 오래다. 계투 안에서도 투수 1명이 1이닝씩 끊어가는 경우가 많다. 즉 선발이 5이닝까지 던지면 3명의 계투 자원이, 6이닝까지 던지면 최소 2명의 계투 자원이 필요하다. 어떤 때에는 타자 1명만 전담하는 계투 자원도 있다.


그런데 앞으로는 분업화가 더욱 진전돼 불펜데이 방식으로 운영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2023년 한국시리즈에서 선발이 다치거나 난조에 빠지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불펜데이는 그런 리스크를 크게 줄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압도적인 구위를 갖고 있는 선발 자원이 부족하더라도 복수의 중상급 자원이 있다면 마운드 운영은 가능한 것이다. 데이터 야구가 더 발달하고 투수들의 투구역량보다 타자들의 타격 역량이 더 빠른 속도로 발전한다면 불펜데이는 예외적 운영이 아니라 일반적 현상이 될 수도 있다.


선발진에 사고가 나면 예외적으로 운영되곤 하는 불펜데이는 관중 입장에서는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강속구나 커맨드 뛰어난 선발 투수를 보고 싶다면 실망하겠지만 다양한 투구스타일의 선수들을 볼 수 있고 투수와 타자 간의 개별적인 승부가 보다 박진감 있게 진행되는 것을 즐길 수 있다. 감독도 보다 세밀한 투수 운영을 할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뜻밖의 수확을 얻기도 한다. 별 기대 없이 마운드에 올린 불펜투수가 큰 포스를 발휘하거나 특정 팀에 강한 면모를 보여주면 감독은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절망하거나 암담한 상태에서 의외의 수확으로 웃을 수도 있는 게 야구다. 야구에는 이런 의외성이 도처에 숨겨져 있다. 다른 종목도 그런 측면이 있지만 야구만큼은 아니다. 0대 3으로 뒤지고 있는데 딱 한방으로 승부를 뒤집을 수 있는 종목이 있는가. 직구 구속이 겨우 시속 130km에 불과한 투수가 160km에 가까운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를 이기는 게 가능한 종목이 야구다. 잠복되어 있는 의외의 일은 사고(부상, 부진, 대패, 기후변동, 트레이드 등)로 그 얼굴을 드러낸다.



야구는 마치 두 얼굴을 한 운명의 여신 같다. 우리가 흔히 보는 얼굴 뒤에는 또 다른 얼굴이 숨겨져 있어서 언제 운명이 뒤바뀔지 모른다.


그래서 같은 불펜데이라도 절묘한 작전이 될 수도 절망의 게임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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