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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불야불 10) 직구는 보톡스, 아니 샤갈이다.

중력과의 밀당

by 잼벅

이 녀석은 참 끈질기다. 지치는 법도 없다. 우리는 살아가는 내내 이 녀석에 시달린다. 그래서 오히려 잊고 산다. 그러다가 가끔 이 녀석의 존재를 실감할 때가 있다. 거울에 비친 얼굴에 주름이 유난히 깊게 보일 때 그렇다. 자신이 구기고 다닌 탓도 있는데 전적으로 이 녀석 탓으로 돌린다.(다 그런 거지 뭐 ㅎ) 일부는 보톡스로 녀석의 흔적을 지우려고 하는데 잘못하다가는 인간 마네킹이 되기도 한다.(텔레비젼엔 인간 마네킹이 드글드글 ㅎ)


또 있다. 투수가 던진 공을 볼 때이다. 투수는 온 힘을 다해 직구를 던진다. 더 빨리 포수의 미트에 꽂히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투수의 바람과는 달리 공은 포수 쪽으로 가면서 아래로 처진다. 바로 이 녀석, 중력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직구라고 부르는 공은 직구가 아니다. 끝이 처지는 곡선의 볼일 뿐이다.

이를 잘 알고 있는 투수는 중력에 덤벼들기도 하지만 중력과 타협하기도 한다. 직구를 던질 때에는 중력을 최소화하려고 힘차게 던지는 반면 변화구를 던질 때에는 중력을 이용해 아래로 휘어지도록 던진다.



특히 언더핸드 투수는 중력에 정면으로 덤벼든다. 땅에 닿을 듯한 낮은 자세에서 공을 윗쪽을 향해 던진다. 투수의 손을 떠난 공은 중력을 거스르며 위로 치솟는다. 중력과 싸우느라 위에서 아래로 던져지는 공에 비해 상대적으로 느리다. 하지만 관중에게 묘한 느낌을 선사한다. 거대한 질서에 역행하는 데에서 오는 통쾌하거나 아슬아슬한 느낌이랄까.


마르크 샤갈은 하늘을 나는 그림을 그렸다. 아내 벨라와 같이 나는 그림 <도시 위에서>는 모든 편견과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 그 자체의 모습이다. 마치 그림으로는 중력의 법칙조차도 이길 수 있다고 선포하는 것 같다. 나무도 꽃도 중력과 싸운다. 힘겹지만 중력을 뚫고 커지고 꽃을 피운다. 민들레는 열매가 바로 떨어지는 것을 이겨내고자 낙하산 같은 신기한 비행체를 만든다. 지구 위 모든 생명은 중력에서 벗어나려는 저항의 존재이자 동시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수용의 존재이기도 하다.


투수만 그런 것은 아니다. 타자도 자신이 친 타구가 중력을 이겨내 멀리 날아가기를 바란다. 홈런은 타자가 중력에게 한판승을 거두는 경우이다. 홈런이 못 되더라도 타구가 외야수 사이를 가르며 뻗어나가기를 바란다. 이에 반해 번트는 중력을 이용한다. 타구가 빨리 땅에 떨어도록 힘을 뺀다.


야수는 타구의 힘과 바람의 방향을 가늠해 포구한다. 타구가 중력을 얼마나 이겨내는지에 따라 비거리가 정해지기에 타구가 날아기는 속도나 휘어지는 정도를 관찰한다. 땅볼 타구는 중력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튕겨 올라가도 이내 떨어지고 마는데 몇번 그러고나면 힘이 빠져 데굴데굴 구르며 중력에 함락된다.


선수는 자신이 의도한 대로 중력을 이겨내거나 타협하면 좋은 결과를 거두고 그렇지 못하면 힘든 순간을 맞는다. 중력을 벗어날 수는 없기에 싸우다가도 타협해야 하는데 싸우기만 하겠다고 하면 힘은 힘대로 들고 상대방의 적응으로 성적은 기대만큼 나오기 어렵다. 때로는 밀어부치고 때로는 받아들이면서 중력과 적절한 밀당을 벌어야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다.


'우리'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는 야구 선수가 중력과 밀당을 벌이듯 '우리'와 때로는 밀착하고 때로는 떨어져 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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