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불야불 5) 야구가 기록경기라고? 누가 그래?

기록되지 않는 것들을 기록하라!

by 잼벅

야구는 기록으로 시작해 기록으로 끝난다고 한다. 맞다. 느 종목보다도 기록되는 게 많다. 시즌별은 물론 구단별, 게임별, 선수별 기록들로 가득하다. 투수의 방어율, 타자의 타율은 기본이고 더 구체적으로 투수의 구종별 가치, 타자의 이닝별(요일별) 타율이나 OPS까치 수치화되어 WAR같은 종합적인 평가 기준에 이를 수 있게 해준다.


정말 모든 게 기록되는 게 맞을까?


감독이나 코치진의 사인은 기록되지 않는다. 선수의 멋진 수비도 기록되지 않는다. 그것만이 아니다. 심판의 오심도 기록되지 않으며 선수의 재미있는 루틴도 귀여운 몸매도 기록되지 않고 팬들의 응원도 함성도 탄식도 물론 기록되지 않는다.

반대투구/헛스윙/오심의 동시발생




사인, 슈퍼 플레이, 오심, 루틴, 몸매, 응원 등은 얼마나 중요한 구성 요소란 말인가!


이런 것들이 없다면 야구 게임은 그저 밋밋한 공치기 놀이에 불과할지 모른다. 사인만 해도 그렇다. 사인은 몸과 센스로 하는 야구의 언어다. 내편과는 소통의 수단이지만 상대편에게는 풀지 못하는 암호이고 속임수이다.


그런데 그렇게 생생하고 재미있는 일들이 기록되지 않는다고? 갑자기 허전함이 밀려온다. 기록의 풍요 속에 진한(?) 빈곤이 느껴지는 것이다.


이건 아니다 싶다.(나만 그런가 ㅎ) 기존의 기록들이 죽어있는 숫자에 불과한 것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든다.


투볼 투스라이크에서 던진 투수의 투구가 스트라이크존으로 들어갔는데도 볼 판정을 받자 투수는 짜증이 나고 짜증이 난 투수는 결국 어이없는 공을 던져 타자에게 사구를 내준다. 그 때까지 7회까지 한 점도 뽑아내지 못한 팀은 처음으로 진루하자 다음 타자에게 번트를 지시하고 1사에 2루 상황을 만든다. 이전 두 타석에서 연속 삼진을 당했던 3번 타자가 친 타구가 상대팀의 실책으로 주자 3루, 1루가 되고 이어 4번타자가 펜스를 맞히는 장타를 치면서 순식간에 2점을 얻어 게임을 뒤집는다. 기록에는 사구로 단순하게 처리되지만 실제로는 심판의 오심에 이어진 투수의 난조가 결정적인 요소임이다.(물론 오심에도 흔들리지 않는 투수도 있다) 그러나 그 결정적인 것들은 기록되지 않는다.


기록의 역설이라고 해야 하나....


타자가 발이 빠르다는 사실을 잊은 채 타구를 여유있게 처리한 좌익수의 게으른 수비 탓에 1루만 내줄 것을 2루까지 내주고 만 경우에도 그냥 2루타로 기록되겠지만 사실상 좌익수의 기록되지 않은 본헤드플레이가 숨어있는 것이다. 거꾸로 발빠른 중견수가 환상적인 다이빙 캐치로 안타성 타구를 잡아내어도 그냥 외야 플라이 아웃으로 기록될 뿐이다.


스트라이크 존 아래로 떨어지는 슬라이더만 던지던 투수가 스트라이크 존 위에 걸치는 높은 슬라이더를 던지는 바람에 타자가 볼인 줄 알고 보고만 있는데 주심조차 같이 속아 볼 판정을 한다. 포수가 한참 동안을 공을 잡은 채로 있자 뒤늦게 속을 걸 알아챈 심판은 그것을 인정할 수도 없어서 마스크 안에 표정을 숨길 뿐이다. 그런데 투수의 다음 공이 오른쪽 타자 몸쪽 아래로 파고 들면서 스트라이크 존을 살짝 벗어났는데 심판은 미안한 마음에서인지 공을 거듭 잘못 본 때문인지 스트라이크를 선언한다. 기록으로는 스트라이크는 볼이 되고 볼은 스트라이크가 된다.


뭐 이런 황당한 경우가 있나 싶겠지만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야구광팬인 엄마를 따라와 치어리더의 동작을 완벽하게 섭렵한 꼬마의 응원은 심판의 오심도 선수의 본헤드플레이도 모두 날려줄 만큼 앙징맞고 재미있다. 수업 제치고 직관하러 온 여중생의 ‘ㅇㅇㅇ 어머님! 며느리 여기 왔어요’라는 스케치 북 응원은 어이 없는 웃음과 함께 삶의 여유를 준다.


오늘도 행운의 여신이 같이 하기를 기원하며 하늘을 향해 검지 손가락을 쳐드는 야수의 동작은 잘 눈에 띠지 않지만 꽤나 재미있고 독특한 장면이다. 그리스 로마 시대 신전에서 신탁을 받는 사제의 모습이 살짝 오버랩된다.


투수에게 루킹 삼진을 당하고 덕아웃으로 들어가면서 투수를 째려보며 ‘네가 감히 나를 발린다고? 그래 좋다! 다음에는 뽄대를 보여주마. 각오해라!’라고 말하는 것 같은 타자의 서늘한 모습도 볼만하다.


헐~ 이런 것들도 기록되지 않는다니....


야구가 선수들의 플레이가 세세하게 기록되고 분석하는 유별난 기록 경기이지만 꽤나 중요해보이는데도 기록되지 않는 일들이 적지 않다. 오히려 정말 기록되어야 할 것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빠진다.


기록되지 않는 일들을 기록하라!


그러면 야구가 더 재미있어 질 것이다. 그런 일들을 기록하는 건 쉽지 않다고? 팬들에게 맡겨라. 잘 하는 팬들이 넘친다. 야사를 다룬 삼국유사가 공식적인 기록인 삼국사기를 보충하고 역사를 보다 풍부하게 해주는 것처럼 공식적인 기록에만 머룰러 있지 말고 야구판 삼국유사를 만들 것을 제안한다. 그러면 야구는 또 하나의 재미있는 서사의 구조를 갖게 될 것이다. 외 바퀴로 뒤뚱뒤뚱 가던 수레가 두 바퀴로 생생 달리는 것처럼 전혀 다른 세상이 펴쳐질 것이다.


책임 질 수 있냐고? 아니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또는 아니면 말고.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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