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열살차이 04화

4. 썸

by 이진다

이진다의 두 번째 소설『열살차이』는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창작 소설입니다.

현실의 인물, 사건과 유사하더라도 이는 우연의 일치이며,

일부 인물 및 장소는 서사의 흐름상 가명 또는 허구적 설정을 사용하였습니다.




" 역시 저는 내릴래요. 민폐 끼치는 거 같아요. "


지안의 말에 재헌의 표정이 상당히 난처해졌다.

아직 대리기사는 오기 전이고, 친한 형은 이 광경이 몹시 흥미롭다는 듯이 앞 좌석에서 듣고 있었다.

과연 재헌은 어떻게 설득시킬지 사뭇 궁금해졌다.


" 아.. 부담 갖지 말아요. 저랑 집이 가까워서 태워주는 거예요.

지하철, 버스도 막차 시간 때라 가기 힘들 거예요.

불편하면 가는 동안 저는 바깥만 보고 있을게요. "


거짓말이다.

그의 집은 지안의 집에서 반대 방향으로 족히 40분은 걸린다.

앞 좌석에 앉은 형은 이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


거기다 친한 형까지 데려다 주기로 했으니 도로 위에서 꽤나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안은 한 번도 막차가 끊길 때까지 밖에서 시간을 보낸 건 이번이 처음이었고,

어떻게든 막차를 타고 집에 가면 분명히 잔소리를 심하게 들을 것이기 때문에

그의 말대로 따르는 것이 맞았다.


" 제 말대로 해요. 부담 안 줄게요. "


그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지안이 거절하는 것 또한 상당히 곤란할 거 같았다.

마침 대리기사가 왔고 목적지를 묻고 있었다.

지안의 핸드폰은 계속 울리고 있었고, 일단은 빨리 출발하는 게 맞았다.

시간이 없었다.


그래 일단... 출발하자.


그리고 그는 정말 가는 내내 지안의 목적지로 향하는 내내 옆자리에서 창문 바깥 풍경만 봤다.

차는 빠르게 한강대로를 지나가고 있었다.

어느 서울의 밤하늘 아래 이렇게 야경이 멋지게 펼쳐지고 있었다.

이 시간대에 밖에 있는 것이 처음인 지안은 지긋이 넋이 나간 채, 야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대만, 병원에 있었는데 이렇게 남의 차에 타서 이 야경을 보고 있다니.

자신이 처한 환경이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 와.. 진짜 이쁘지 않아요? "


재헌은 이미 낮이고 밤이고 운전을 해볼 만큼 하고,

야간 근무로 밤새 질리도록 본 야경이라 별다른 느낌이 없었지만,

그녀의 진심 어린 감탄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그 말을 시작으로 그녀는 쉴 새 없이 주절주절 자신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아... 지안의 주사는 " 속앓이 주절주절 넋두리 "였다.




요즘 재헌은 일주일에 1번 있는 스윙댄스 동호회에 자발적, 강제적으로 열심히 참석 중이다.

처음 그녀를 만나 집까지 데려다주었던 그날부터 지금까지 카톡도 열심히다.

업무나 정말 필요한 용건이 아니면 절대 카톡을 하지 않는 그의 입장에선 놀라운 변화다.


연락처를 교환하게 된 까닭은 핑계는 집에 잘 도착했는지였다.

사실 그녀에게서 답장이 올 거라곤 기대도 안 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봐도 그녀 역시 어쩔 수 없이 상황상 호의를 거절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자신이 뭐라고 그녀가 굳이 답장을 해줘야 할 용무도 없었다.


하지만 다음 날, 그녀에게서 "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카톡이 왔다.


재헌은 기뻤다. 그리고 조금 더 용기를 내서 고민하며 카톡을 작성했다.

심지어 중국 출장이 잡혔을 때조차 중국에서 혹시나 인터넷 환경이 좋지 않아

카톡이 끊어질까 봐 전전긍긍하며 카톡을 주고받았다.


친한 형은 재헌의 이러한 변화에 놀라면서도 놀리기 바빴다.

그날 데려다주면서 재헌이 얼마나 고생해서 집으로 돌아갔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녀 앞에서는 일절 내색을 안 하고, 오히려 운전기사 노릇을 자처하고 있었다.


이 스윙댄스 동호회에서 세 사람은 친해졌다.


동호회 수업이 끝나면 이 세 사람은 같이 주변 맛집을 돌아다녔다.

한 마디 추가하자면, 그녀는 국밥을 너무 사랑했고, "아재 입맛" 그 자체였다.

그들이 생각하는 어린 20대 여자들을 생각했을 때 절대 가지 않을 노포집조차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얼른 가자고 재촉할 정도로 입맛이 서로 잘 맞았다.


그녀는 "낡은", "노포집", "할머니 사진" 이 걸려 있는 이 3박자의 가게를 너무나 사랑했다.

재헌은 그녀의 취항을 완벽히 반영하여 늘 만날 때마다 노포 맛집을 데려갔다.

그들이 함께 혹은 둘이 간 노포 맛집만 해도 이미 수십 군데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결과는 늘 그녀의 입맛을 제대로 저격하여 성공적이었다.




지안은 사회인이 되었다는 사실에 안도했지만, 스펙에 비해 아쉽다는 평가도 있었다.
그러나 크게 개의치 않았다.
지금은 성인이 되어 스스로 밥벌이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직업은 앞으로도 바뀔 수 있다.
그래서 그녀는 이 직장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가 더 중요했다.
스펙이 아니라 인간관계, 태도, 가치관 같은 것들 말이다.


물론 아이를 낳으면 일을 쉬어야 할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했지만..

지금의 그녀에겐 다소 앞서간 걱정이었다.

어차피 미래를 철저히 계산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어머니조차 병으로 쓰러지는 걸 보며,

세상에 영원한 안정은 없다는 걸 절실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귀국 후 간병과 캐나다 준비가 모두 무산되면서 그녀는 오히려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 다니는 직장이 있고 일주일에 한 번 즐거운 동호회 모임이 있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맛집을 다니는 일상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는 것을.
지안에게는 이 소소한 하루하루가 무엇보다 소중했다.




어느 날, 재헌은 문득 깨달았다.


계속 이렇게 가다가는 국밥 사주는 아저씨 혹은 오빠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그녀가 오랜 시간 대만에 머문 까닭에 먹는 것에 서러움과 한이 설려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미 순댓국 집에서 수줍게 피순대를 추가해도 되냐는 물음에 흔쾌히 재헌은 허락했고,

그녀는 뛸 듯이 기뻐하며 이렇게 피순대를 추가해 주는 사람이 있다며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피순대 사주는 아저씨 혹은 오빠라는 타이틀이 또 추가가 된 셈이었다.


하지만 재헌도 이 "열살차이"라는 나이차이를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녀 입장에서 재헌은 동호회에서 만나 카톡을 매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친하게 지내고 있고,

그녀의 아재 입맛 취향을 저격해 늘 맛집을 데려다주고,

심지어 집까지 데려다주는 친절한 운전기사인 이 남자가 사실은 그녀에게 이성적 관심이 있고

그렇지만 자신의 나이 때문에 결혼 전제로 만나는 거라고 혹시나 부담을 느낄까 봐

그것이 문제였고 자신에 대해 사실은 아무런 이성적 관심도 없을 수도 있다.


혼자 이렇게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그녀는 아는지 모르는지 동호회에 오면 열심히 춤을 추기 바빴다.

이러한 모습에 다른 회원들이 더러 호감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는 것도 솔직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한술 더 떠서 그녀가 남자친구가 없는 것을 알고 오지랖을 부리며 소개팅을 주선해 주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지만 고백을 했다가 차이면 다시는 얼굴을 못 볼 것이다.


아...

재헌은 자신의 속마음을 말하기로 결심했다.





늘 그렇듯이 스윙댄스 동호회가 끝난 어느 날,

재헌은 그녀를 데리고 어느 한 유명한 분위기 좋은 인도 카레 레스토랑으로 데려갔다.

마치 성전에 들어와 있는 듯한 묘한 분위기를 주는 그 레스토랑은 정말 인도인들이 직접 요리를 하고,

가운데 분수와 정원이 있어 분위기가 늘 가던 노포 맛집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녀는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카레는 지금까지 오뚝이 3분 카레만 먹어 봤는데 하며 놀라워했다.

재헌은 그녀의 반응이 귀여웠지만 곧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해야 했기 때문에 메뉴판에 눈을 고정시켰다.

그는 익숙하게 인도식 카레 몇 가지를 시키고, 탄두리 치킨, 버터 난도 추가했다.

이윽고 맛있는 음식들이 차려졌다.

그녀는 오늘 나는 인도인이라며 헤헤 웃으며 큼지막하게 치킨을 카레에 묻혀 뜯어먹고 있었다.


" 저기.. 제가 오늘 할 말이 있어요. 지안씨"


" 치킨 기가 막히네. 너무 맛있어요. 말씀하세요."


" 나는.. 지안씨를 좋아하거든요."


" 네. 저도 오빠 좋아해요."


" 그러니까 나는.. 이성적으로 좋아하거든요."


지안은 오른손에는 탄두리치킨 왼손에는 버터 난을 쥐고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그것들을 내려놓았다.

목소리는 살짝 떨리지만 그래도 지안의 눈을 피하지 않고 고정하며 진지하게 말하고 있었다.


지안은 잠시 고민을 했다.

그리고 재헌을 향해 눈을 고정시키며 이윽고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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