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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Sep 23. 2019

라디오를 듣다가.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면




아이는 이번 달부터 어린이집엘 다니기 시작했다. 아직은 적응기간이라 3주째 오전 10시 데려다주고 12시에 데려 오고 있는 중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두 시간 동안 브런치를 먹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고 산책을 하기도 한다. 월요일은 주로 주말 동안 어질러진 집을 정리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오는데, 이땐 주로 라디오를 듣는다.


여느 날처럼 라디오를 틀어둔 채 집안 정리를 하고 있는데 사연 하나가 귀에 쏙 들어온다.



아이 둘을 키우고 있는 아빠의 사연이었다.


연애 때부터 지금까지 쭉  생 머리를 고수하던 아내가 갑자기 단발로 싹둑 자르고 나타나 마음이 철렁했다는 남편 이야기였다.


연애 때의 아내가 아닌, 두 아이의 엄마로서 새로운 아내를 받아들여야 하는 신호인 것만 같아 어쩐지 마음이 이상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과거로 한 번만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미래는 어차피 겪게 될 일이니 궁금하지 않다고, 과거로 다시 돌아가 우리 둘 만 있던 그 시절로 가서 그 시절의 와이프에게 당신이 어떤 모습이어도 당신을 사랑하겠노라 말하겠다는 달콤한 사연이었다.


내 남편의 사연도 아닌데 마음이 따뜻해져 왔다. 아이를 키우고 하루들을 살아내느라 사라졌던 연애의 감정이 오래간만에 고개를 삐죽 내미는 기분이다.


남편의 사연을 건네들은 아내는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남의 이야기에 감정이입을 하는 지금의 내가 어쩐지 우습다. 드라마를 보고 그토록 열광하던 엄마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했던 예전의 모습이 떠올라 조금 민망하지만 말이다.






남편이 나에게 프러포즈를 할 때, 그 라디오에 사연을 보냈었다. 카페에서 본방사수를 목표로 이벤트를 준비했었지만 그 날따라 컨디션이 안 좋았던 내가 약속을 펑크 내는 바람에 그다음 날 차에서 녹음된 파일을 듣게 됐었었다. 처음엔 신경도 안 쓰다가 갑자기 사연 초반에 남편의 이름이 나오면서 '어엇~?' 했던 기억이 난다.


한번 듣고 말았던 터라 내용은 가물가물 하지만 부끄러워하던 그 시절의 남편의 얼굴과 발갛게 달아올랐던 내 볼의 온도는 아직도 생생하다. 다시 들어보고 싶지만 남편은 그 파일을 영영 어디론가 치워버린 듯하다. 남편의 성격상 분명 어딘가에 저장을 해 두었을 테지만 도통 내어놓질 않는다. 애정표현에 박하기만 한 남편의 처음이자 마지막 이벤트는 그렇게 추억으로만 남겨졌다.





며칠 전 사촌 오빠네 부부가 동네에 놀러 왔었다. 우리 아파트 내 놀이터를 자주 이용했던 터라 그날도 반갑게 놀이터에서 조우해 아이들끼리 놀리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오늘이 결혼 10주년이라 말하는 게 아닌가!


"아니 결혼 10주년을 이렇게 보내면 어떡해요!!"


화들짝 놀란 나에게 언니도 오빠도 피곤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어휴 10주년이고 뭐고 애들이나 빨리 재우고 쉬고 싶."


두 아들의 등쌀에 분위기 좋은 저녁 식사는커녕 놀이터에서 시간이 때워야 하는 10년 차 부부의 모습이 너무 평범해서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유난스러울 건 없지만 10주년 정도는 유난 좀 떨어야 할 것 같은데 맞벌이 육아 부부에게 지금 필요한 건 그저 휴식 일 뿐이라니. 이대로 그 날을 보낼 순 없어 온 가족을 불러다가 지로 사진을 찍게 했다.



"남는 건 사진뿐이에요!! "



그렇게 피곤해 보이는 2019년의 사촌 오빠네 부부가 사진으로 남겨졌다. 결혼 10주년,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날 중에선 가장 젊을 날의 기념사진이다.



아이들은  엄마 아빠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신나기만 하다. 하원 후 놀이터의 씨끌벅적함이, 아이를 뒤쫓아 이리저리 영혼 없이 돌아다니는 엄마 아빠들의 모습이 어쩐지 서글프다. 그네들에게도 분명 반짝반짝 빛나서로에게 설레던 꿈결 같은 시간들이 있었을 텐데.

 

함께임을 축복하는 일 따위는 과거의 나에게 버리고 온 듯한 시니컬한 언니와 오빠의 모습에서도 그런 모습을 찾긴 어려웠다. 아이에게 모두 양보한 엄마 아빠의 빛이 아이를 더 빛나게 하는 거겠지만, 아이가 웃을 때나 따라 웃음 짓는 놀이터의 엄마 아빠들이 유독 피곤해 보인다.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놀이터에서 놀다가 다 같이 아파트 상가 내 치킨집에서 간단히 저녁을 먹었다. 축하를 위 맥주 한잔을 곁들였지만 가만히 있는 법을 아직 배우지 못한 아이들 덕에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날 밤, 사진이라도 남겨 줘고맙다메시지를 받았다.


온통 아이 사진으로 가득 한 내 갤러리에도 남편과 함께 찍은 우리의 사진은 거의 없었다. 서로를 찍어주기에 아이와 함께 찍은 각자의 사진이 있을 뿐, 볼을 맞대고 수없이 셀카를 찍어대던 어린 시절의 우리는 오래된 핸드폰 앨범 속에나 들어있을 뿐이다.


가끔은 아이가 아닌 우리의 사진도 남겨줘야겠다.






눈물 콧물 짜게 했던 현실공감 드라마 고백부부




우리에게도 분명 서로에게 설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삶이라는 고난의 배를 함께 탄 전우처럼 필요한 소통만 해 가며 하루를 살아내고 있지만 말이다.


행복하고 아름다울 것만 같았던 결혼 생활은 아주 잠깐이었던 것 같다. "공주와 왕자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마무리도, 티브이에 나오는 잉꼬부부들의 달달한 일상도 모두 거짓이라 믿는 지경에 이르다니. 결혼은 나의 환상과 동심을 모두 파괴해버린 것 같다.


육아에 치이고 살림에 치이는 나.

일에 치이고 육아에 치이는 남편.

 

지금의 우리에겐 삶을 즐길만한 여유가 그리 없는 듯하다. 아이가 더 큰다면 여유가 생긴다고 하니 기다려보는 수밖에.


언제가 될 진 모르지만 우리가 함께 겪게 될 그 미래가 다가왔을 때 우리도 서로의 나이 듦을 아쉬워할 수 있을까?

서로의 젊은 시절을 기억하며 그때 당신 참 괜찮았는데..라는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모를 일이다. 지금의 전쟁 같은 삶에선 그런 멘트를 입 밖에 꺼내는 것조차 낯설고 오글거리기만 한다.


라디오에 사연을 보낸 그 남편도 어쩌면 그런 말을 아내에게 직접 해 주지 못해 라디오를 통해, 과거의 아내에게까지 돌아가서 전하려 했던 건 아닐까? 오글거림이 허락되는 유일한 시기인 연애시절로 돌아가서 말이다.


나에게도 만약 과거로 잠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나는 남편이 라디오에 보낸 사연의 원본을 꼭 구해오고 싶다.  그래서 남편이 힘들게 하고 외롭게 할 때마다 곱씹어 보며 마음을 다잡아야지. 가끔은 남편에게도 '당신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는데 이 남자 어디 갔어?'라고 놀려야지.



그리고 이젠 애를 데리러 가야겠다.


오늘 청소는 내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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