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볕이드는창가 Mar 06. 2021

첫 수향 마을, 상해 주가각

지하철로 갈 수 있지만 다리는 튼튼해야 해

지하철과 두 다리만 믿고 간다, 주가각(周家角)!


19년 4월 26일 금요일. 주 4파로 학교 수업이 없던 나는 한 번 좀 멀리 나가보기로 했다. 멀리래 봤자 다른 도시로 나갈 수는 없는 형편이라 상해 안에서 갈 곳을 찾던 중 발견한 곳이 바로 주가각(周家角). 상해에 있는 수향(水乡) 마을 중 가장 오래된 곳이라고 한다. 상해 시중심에서는 48km나 떨어진 곳이고, 이쯤 되면 상해라기보단 쿤산이나 강소성 어느 도시라고 해도 믿을 법한 외곽에 위치해 있지만 꾸역꾸역 상해 권내에 들어와 있고, 무려 지하철로도 갈 수 있다. 주가각을 내 금요일 여행지로 정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지하철로 갈 수 있다'는 점이었다.


표시된 곳이 주가각. 상해 시중심에서는 꽤 떨어져 있다.


하지만, 지하철로 갈 수 있다고 써둔 저 말은 사실 부동산 홍보 문구 중 '역에서 (엄청 빠른 걸음으로) 5분'과 같이 많은 과정이 생략된 표현이다. 상해 시중심에서 정말 지하철과 두 다리만 믿고 주가각까지 가려면 편도 2시간, 왕복 4시간을 길에서 보낼 각오를 해야 한다. 내가 살고 있던 난징시루에서 지하철 17호선 주가각 역까지 가려면 지하철에서 한 시간 이상을 보내야 하고 그 와중에 2번을 갈아타야 한다. 물론 지하철에서 앉아서 갈 수 있다는 보장은 당연히 없다.


이뿐만이 아니다. 역에서 내린 후 실제 주가각 마을까지는 또 약 2km 정도 떨어져 있기 때문에, 두 다리로 열심히 걸어가야 한다. (아, 물론 자전거를 타실 줄 안다면 그나마 좀 낫다.) 이렇게까지 빡센 여정이 될 줄은 모르고 출발했는데, 혹시 시중심에서 가시려는 분이 계시다면 현실을 아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먼저 일러둔다.



수향 마을이 뭐지?


수향 마을. 향(鄕, 간체자로는 乡)이 마을이라는 뜻이니 '수향'이라고 해야 맞는 말일 테지만, 중국 여행서적에는 대부분 '마을'까지 붙여서 표기하는 이것. 서두를 읽은 분들 중 중국에 대한 배경지식이 많지 않은 분들은 아마 이 단어가 생소하실지도 모르겠다. 이전에 중국에서 체류했던 도시가 북경이었던 내게도 사실 이 말은 낯설었다.


'수향'은 말 그대로 '물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조금 의역을 넣으면 '물을 따라 형성된 마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육로가 잘 발달되지 않았던 과거에 곡물 등의 자원을 물길을 따라 운반하기 시작했고, 많은 곡창들이 그 물가에 건설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뚫린 물길을 따라 형성된 주거지가 바로 수향 마을이다. 


수향 마을이 형성되기 위한 가장 필수적이면서 당연한 조건은 '물'이다. 그것도 길을 따라 트여 있는 물. 워낙 건조해 물이 기본적으로 많지 않은 북방 지역에서는 당연히 수향 마을이 형성될 수 없다. 그래서 북경에 주로 체류했던 내게는 수향 마을이 낯선 개념이었던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물이 흔하고 습한 기후를 가진 남방 지역에는 수향 마을이 형성되기 쉽다. 그래서 보통 '수향 마을'이라는 단어 앞에는 으레 남방을 뜻하는 '강남(江南)'이라는 말이 붙는다.


사실 절강, 강소, 안휘, 강서성 일대에는 수향 마을의 이름이 붙여질 만한 곳들이 참 많다. 상해를 조금만 벗어나도 저우좡(周庄), 통리(同理), 우쩐(乌镇), 시탕(西塘) 등 내로라하는 수향 마을이 즐비하고, 마을이라고 부르기는 좀 작지만 쑤저우의 산탕지에(山塘街)나 핑쟝루(平江路)는 작은 수향 마을이나 다를 바 없는 풍경을 보여준다. 하지만 다 상해에서 가려면 도시를 벗어나야 하는 일이라 다소 부담스럽다. 그것이 내가 왕복 4시간이어도 주가각을 가기로 선택한 이유였다.



지하철역엔 도착했는데


우여곡절 끝에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지하철 안에 있던 대부분의 승객들의 목적지가 나와 같아 안타깝게도 앉아서 오지 못했다. 다리가 영 뻐근하지만 역에서 내려서 또 30분 정도를 걸어야 한다. 일단 열심히 발을 움직여본다. 일기예보를 보고 각오는 했지만 날씨가 영 좋지 않다.


역에서 내려 걷는 길에 보인 풍경. 벌써부터 수향마을 느낌.


지도에서 안내해주는 대로 걷다 보니 멀리 환영한다는 문구가 보인다. 일단 두 시간을 지하철에서 서서 오느라 좀 배가 고프니 적당히 요깃거리를 좀 사 먹어야겠다. 그때 눈에 띄는 익숙한 글자, 샤오빙(烧饼)! 시내에서 먹던 것과 같은 체인점이라 왠지 믿음직스럽다. 샤오빙 하나 들고 또 발길을 재촉해본다.



주가각이라는 지명의 한자는 朱家角. 송나라 때 마을로 승격되어 '주가촌(周家村)'이라고 불렸다는데, 이름으로 봤을 때 아마 같은 성씨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후 곡물 운반 통로 등으로 계속 활약하다가 현대에 와서는 상해에서 가장 보존이 잘 되어 있는 명청대 수향 마을이 되었고, 상하이의 베니스라고 불린다고 한다.



아리아를 기대했는데, 날씨가 영


연애할 때, 당시 남자 친구(現 남편)가 좋아하는 만화책이라며 추천해준 책이 있었다. <아리아(ARIA)>라는 일본 만화였는데, 가상의 행성 아쿠아의 한 도시 '네오 베네치아'에서 프로 수상 안내원이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주인공의 이야기였다. 내용도 인상적이었지만 운하를 배경으로 한 만화가 주는 청량함이 아직도 기억난다.


사실 내게는 주가각이 중국에서 처음으로 가보는 수향 마을이었던 터라, 내심 <아리아>에서 본 것 같은 아름다운 운하의 모습을 기대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날씨가 좋았다면 어쩌면 그런 모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가 갔던 그 날 상해의 날씨는 그다지 좋지 못했고, 아쉽게도 찍힌 사진마다 우중충했다. 역시 날씨는 중요하다.



위 사진 중 오른쪽 사진에 보이는 다리는 이곳의 명물이라는 방생교(放生桥). 이름에 붙은 방생은 우리가 아는 그 방생이 맞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예로부터 이 강에서 잡히는 생선이나 자라, 새우 등을 먹고살았는데, 언젠가 한 스님이 이 다리를 만들면서 이 다리 밑에서 잡히는 생물들은 먹지 말고 방생하라고 했다고 하여 방생교라는 이름이 붙었다. 지금은 이 다리에서 낚시하는 사람이 없으니 스님의 당부는 어떤 형태로든 지켜지고 있는 셈이다.




다리를 건너 마을에 들어서면 왼쪽 끝부터 오른쪽 끝까지 일직선의 긴 길이 펼쳐진다. 그 길을 따라 상점도 들어서 있고,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주거지도 있다. 내가 갔을 때쯤엔 곧 다가올 단오절(보통 6월에 있다)을 맞이하는 쫑즈(粽子, 댓잎이나 연잎에 찹쌀 등을 넣어 쪄낸 음식으로, 속에 고기나 계란 노른자 등을 넣곤 하는 단오절 전통 간식)를 만들어 파는 상점들이 꽤 있었다.



'물'로 먹고사는 이런 수향 마을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배와 뱃사공들이다. 어찌 보면 앞서 말한 만화에 나오는 '수상 안내원'이라는 직업이 결국 이 뱃사공인데, 다만 다른 점은 <아리아>의 뱃사공들은 예쁜 아가씨들이고, 이곳의 뱃사공들은 나이 지긋하신 아저씨들이라는 점일 뿐.



배라면 난징 친화이허에서 이미 타보기도 했고, 날도 우중충해 의자가 젖어있을까 싶어 배를 타진 않았는데 생각보다 이곳에 온 많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유유히 강을 넘실거리며 이곳을 즐기고 있었다.



수향 마을의 특징이라고 하면 강을 사이에 두고 양쪽 길을 잇는 그 수많은 다리일 것이다. 보통은 돌로 되어 있는 그 다리들은 제각기 그 모양과 디자인이 아주 조금씩 달라 보는 이에게 새로움을 찾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물론 그 다리들 대부분이 정말 옛날부터 보존된 다리는 아니겠지만 말이다. 또 하나는 강물로 슬슬 이어지는 '내려가는' 돌계단. 가끔 이 돌계단으로 내려와 빨래를 하는 주민들을 만날 수 있다. 이 역시 삶의 냄새 가득한 풍경들이다.



과식원에서 비를 피하고


열심히 돌아다니다 보니 입구가 제대로 갖춰진 구역이 하나 나타난다. 이곳에서 몇 안 되는 입장권을 구매해야 하는 지역 중 하나인 과식원(课植园)이다. 마 씨 집안의 정원이었다는 이곳은 공부를 하면서도 농사일을 잊지 말라(课读之余,不忘耕植)는 뜻을 담아 명명했다고 한다. 주인의 의도에 걸맞게 이곳에는 각종 작물을 심을 수 있는 정원과 장서를 보관하는 장서루가 함께 지어져 있다.


민국 원년에 짓기 시작했다는 이곳은 완공하는 데 15년이나 걸렸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재미있다. 주인이었던 마 씨가 상해의 예원(豫园), 소주의 사자림(狮子林) 등 강남 지방의 유명한 정원들을 모두 찾아다니며 멋지다고 생각한 풍경들을 하나하나 다 적어와 이곳에 그 모방품을 만들었는데, 그렇게 여기저기서 짜깁기를 하느라 15년이나 걸렸다는 것이다. 어째 그 이름에 담긴 소박하고 성실한 느낌이 이 에피소드를 듣고 나니 사라지는 것 같다.



넓은 땅을 가지고 후손에게 물려줄 이런 건물을 지었을 정도면 분명 부유한 집안이었겠지? 그래서 그런지 그들이 잠을 자던 곳, 취미 생활을 즐겼던 곳, 심지어는 음악을 듣고 바둑을 두었던 장소들 모두 실내 장식과 소품 배치에 크게 공들인 듯한 느낌이 든다. 한편 이런 부가 민국 원년의 부였으니, 이들은 어쩌면 이후 지주계급으로 배척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건물을 나서면 드넓은 정원 구역이 펼쳐진다. 아마 이곳이 각종 작물을 심고 기르는 후원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이곳을 둘러보는 동안 공교롭게도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흐린 날씨를 보여주긴 했어도 큰 비는 보여주지 않은 하늘이었는데, 쏟아지는 비의 기세를 보니 꽤 오래 참았다 싶다. 그래도 처마가 있는 곳에 들어와 있을 때 내려주어 어찌나 감사한지 모른다.



조금 더 뒤로 돌아가니 이번에는 서재 건물인 장서루가 나온다. 아쉽게도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재밌게도 이곳에서는 아마 정기적으로 국학(国学, 서예, 전통악기 등 중국의 전통문화를 배우는 학문)을 가르치는 수업을 하는 것 같았다. 6살 이상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라 내가 들을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 고풍스러운 건물에서 국학을 배우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있는 경험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고맙게도 여기저기 구경하는 동안 비는 그치고, 이제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장서루 뒤쪽으로 나오니 강남 문화를 잘 구현한 정원 구역이 나온다. 여기가 주인이 그렇게 공을 들였다는 곳일까? 구불구불, 삐쭉빼쭉 자유분방한 강남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중간에 청량한 소리를 내는 풍경이 잔뜩 있는 구역도 있어 흥미롭다.



그런데, 돌아다니다 보니 어디서 많이 본 풍경이다. 정말 주인이 예원에서 본 예쁜 풍경을 다 담으려고 했던 것인지. 참 그 시절에 살았던 사람들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보다 생각해야 할 것이 훨씬 많았겠다 싶다. 아치형 다리 하나가 독특한 모양이라 사진을 찍었다. 그 시절 사람들도 언밸런스가 매력적으로 느껴졌다보다.




뒤쪽으로 나오니 이것이 진짜 수향(水乡)


과식원을 나와 뒤쪽 길로 어슬렁거리니 이쪽은 사람이 많지 않다. 고즈넉한 분위기와 하얀 벽, 개성 있게 치솟은 처마, 처마를 하나하나 수놓은 각종 상징들. 그리고 조금 더 걸어가니 아주 전형적인 수향 마을의 풍경이 나온다. 실제 주민들이 살고 있는 곳들인지 훨씬 조용하고 관광객이 적다. 역시 수향 마을은 번잡하면 구경하기가 좋지 않다. 조용하니 그 매력이 좀 더 잘 보인다.




첫 수향 마을, 제 점수는요...


상해에서 가장 오래된 수향 마을, 주가각. 지하철로 갈 수 있다는 말에 혹해 무작정 집을 나섰지만 돌아온 건 왕복 4시간의 거리. 물론 남는 게 시간이었던 내게는 다리만 튼튼하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곳이었지만. 게다가 가는 날이 장날이라 흐리고 비가 와서 얼굴을 보이지 않는 태양이 내심 야속했던 날.


날씨라는 통제 불가능한 변인을 고려하지 않고 봤을 때, 결론적으로 수향 마을이 어떤 느낌인지를 대략적으로나마 느끼는 데는 괜찮은 장소라고 생각된다. 상해에서 도시를 넘어가지 않고도 가볼 수 있다는 점도 좋고, 좀 험난하긴 하지만 지하철로 갈 수 있다는 점도 큰 매력이고.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1년 동안 다양한 도시로 지역 연구를 다니면서 수많은 수향 마을들을 접한 결과, 수향 마을의 기본적인 컨셉은 대부분 비슷하다. 지역에 따라 약간씩 포인트가 다른 것뿐. 그렇다면 상해가 수향 마을의 원형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오히려 그 원형 격에 속하는 절강성이나 강소성, 안휘성 쪽에 있는 마을들을 가는 것이 훨씬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가각을 꼭 가야 한다?! 그렇다면 택시를 타자. 물론 체력이 충분하고 시간이 많다면 지하철을 타도 된다. 단, 미리 지하철 안에서 볼 중국 드라마를 준비할 것!



 [중문 일기 in 위챗 모멘트(朋友圈)]

(譯) 상해에서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는 강남수향 마을 주가각. 비록 하늘이 그다지 도와주진 않았지만, 그래도 지하철을 타고 이곳까지 와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꽤 괜찮은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북경에서의 짧은 추억팔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