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삼천 원짜리 밴드와 상처에 대하여
밤바람이 선선한 것이 모기가 나타날 계절도 아닌데 마치 모기에 물린 것처럼, 누군가 귓가에서 바람이라도 불어대는 것처럼, 상처가 아물어가는 그 자리가 그렇게 간지러울 수가 없다. 이미 새 살이 나고 있는 자리라서 살짝 긁는다고 해서 피가 나거나 하지는 않지만, 참지 못하고 긁게 되면 마치 허물 벗은 것처럼 겨우 자리 잡은 새 살이 한 꺼풀 벗겨져 나오곤 한다. 그 자리엔 어린아이의 엉덩이 같은, 내 몸에 이런 색이 존재했었나 싶을 정도로 예쁜 분홍빛의 살갗이 얼굴을 드러낸다.
새 살이 나는 자리의 간지러움을 너무도 오랜만에 느껴본다.
얼마 전, 도보로 출근하던 길에 화단 울타리에 걸려 넘어졌다. 서두르고 있지도 뛰고 있지도 않았고, 하늘을 본다거나 어딘가에 정신이 팔린 것도 아니었고, 누군가 쫓아오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평소처럼 "출근을 하고 있는데 이미 퇴근하고 싶은" 그런 마음으로 걷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무언가에 발이 걸렸고, 나는 "나 넘어진다~"하고 광고하는 사람처럼 우스꽝스럽게 기울어지는 내 몸을 느꼈고, 오른손에 휴대전화를 들고 있음을 눈치채고 급하게 오른손을 몸 뒤로 뺐고, 이대로라면 초등학교 몇 학년 때처럼 턱이 깨질 것 같아 무의식 중에 왼팔로 얼굴 앞을 막았고, 그 자세 그대로 고꾸라졌다.
사람이 아주 많이 다니고 있었다면 민망함에 급하게 몸을 추스르고 가던 길을 갔겠지만, 다행히 나처럼 걸어서 출근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주변에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서야 겨우 나 스스로의 모습을 점검해볼 수 있었다. 아래부터 훑어보던 시선은 바지에 머물렀다. 다행이다. 검은색 바지라 뭐가 묻었어도 눈에 띄지 않는다. 셔츠, 마지막에 팔로 지탱해서 그런지 땅에서 묻은 것은 없어 보인다. 가디건, 어머 여기 뭐가 많이 묻었네. 얼굴 깨지는 것을 막아준 왼팔 팔꿈치는 땅먼지가 묻었고 보도와의 마찰로 인해 구멍이 났다. 좋아하는 가디건이었는데, 구멍이 나서 입을 수가 없게 되었다. 한 번 쓱 피해 규모를 살펴보고 나서야 나는 내가 출근길이었음을 다시 떠올렸고, 급하게 집으로 돌아가 가디건을 갈아입고 상처부위만 감싸고 회사로 향했다.
늘 그렇듯 외상은 없지만 내상은 가득한 하루를 견디고 퇴근길에야 들른 약국에서 상처에 흉이 지지 않게 해 준다는 밴드를 샀다. 팔꿈치 상처 부위가 꽤 넓고 커서 큰 밴드를 사서 그런 건지, 아니면 효능이 뛰어난 밴드여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밴드가 만 삼천 원이나 했다. 빨간 약을 바르고, 후시딘을 바르고, 밴드까지 붙이니 좀 마음이 놓였다. 다음 날부터 출장도 가야 하는데. 밴드라도 붙이고 가면 거래선에서 좀 봐주려나, 외상을 좀 강조해볼까, 혼자 되도 않는 작전을 짜보며 피식 웃었다. 생각해보면 크게 넘어진 일은 초등학교 때 턱이 찢어져서 여덟 바른이라 꿰맸던 그때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상처를 돌보는 일은 생각보다 공이 많이 들어갔다. 비싼 밴드를 썼으니 하루하루 낫는 모습이 보여야 하는데, 서른 해가 넘은 피부는 좀처럼 낫는 속도가 나질 않았다. 새 살이 돋는 마데카솔이 아니라 후시딘을 써서 그런가. 매일 아침 소독을 하고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이고, 저녁에 다시 털이 빠지는 고통을 참으며 밴드를 떼고 다시 소독과 연고, 진물이 있으면 거즈로 닦아내야 하고 수돗물은 정제되어 있지 않으니 믿어서는 안 된다는 충고. 뛰다가 넘어졌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일주일이 넘어도 진물이 줄어들 기미를 안 보이는 이 상처가 매일 밤 너무 귀찮았다.
그러던 어느 날, 늘 하던 대로 상처님을 위한 의식을 하려고 밴드를 뗐는데, 눈에 띄게 늘어난 분홍색 영역이 보였다. 그리고 그 며칠 뒤, 드디어 밴드를 붙이지 않아도 될 만큼 상처가 아문 모습이 느껴졌다. 밴드는 할 일을 다 했다. 약사가 해준 말처럼 딱지는 앉지 않았고, 새 살이 바로 올라왔다. 그런데 그것이 시작이었다. 간지러움. 새 살은 마치 자신이 거기에 있음을 내게 각인시키기라도 하듯 지속적으로 간지러웠고, 나는 아주 충실하게 그 자리를 매만지고, 가끔은 소심하게 손톱으로 긁어보고, 그래도 안 되면 때려보았다. 그럴 때마다 새 살은 낫지 않겠다고 선언이라도 하듯 슬쩍 한 꺼풀을 벗겨내 보였고 나는 또 충실하게 그것을 뜯어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상처를 받으면 늘 그 자리를 건드려서 덧내곤 했다. 그것이 외상이든, 내상이든. 힘든 일이 있으면 계속 곱씹어보면서 그 일이 나를 잡아먹게 내버려 두었고, 지쳐 나가떨어지며 다음엔 절대로 이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다음번엔 또 건드리며 알 수 없는 즐거움을 느끼곤 했다. 이번에야 만 삼천 원짜리 밴드가 제 역할을 해줘서 그나마 이 정도였지, 이마저 없었다면 딱지가 앉았을 것이고, 딱지만큼 뜯는 맛이 있는 것도 없어 나는 참지 못하고 뜯고, 피난 자리를 지혈하고, 딱지가 앉고, 또 뜯는, 악순환을 반복했겠지.
오늘 저녁에도 간지러워오는 새 살을 마주하며,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또 긁고야 말았다. 만 삼천 원짜리 밴드를 써도, 긁을 사람은 긁는다. 그리고 그게 바로 나다. 지금 이 분홍빛의 뽀얀 새 살은 아마 몇 주가 지나면 더 이상 간지럽지 않게 되겠지만, 긁어내고 건드린 주인 덕에 시간이 지나도 주변 피부와는 섞이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또 어떠리, 언젠가 팔꿈치 언저리의 상처를 발견하면 모월 모일의 장렬한 넘어짐을 생각하게 될 것인데. 긁어내고 덧낸 상처가 오히려 아파트 울타리 앞에서 발놀림을 조심하는 나를 만들 것인데. 만 삼천 원짜리 밴드도 좋지만, 조금은 긁어도 괜찮지 않을까. 어쩌면 요즘은 사람들이 너무 자신의 부끄러운 기억을 흔적도 없이 지우는 것에 익숙한 것 아닐까.
그건 그렇고, 오른쪽 무릎의 이 멍은 어디서 든 것인지. 출처를 알 수 없는 상처로부터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