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공원에는 角이 있다
2019년 3월 19일, 상해에 발을 디딘 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 이제 계좌도 있고 위챗페이도 있으니 어디 가서 밥은 굶지 않을 수 있고, 교통카드가 있으니 대중교통도 이용할 수 있고, 집이 있으니 밤이 되면 돌아갈 곳도 생겼지만 왠지 2% 부족했다. 문득 대학 때 배웠던 매슬로의 욕구 피라미드가 생각났다. 생리적 욕구와 안전의 욕구가 채워지면 인간은 '애정과 소속의 욕구'를 가진다고 하는데, 지금 내가 느끼는 결핍감도 그런 욕구에서 발현된 것이 아닐까? 아무래도 이제 상해에 대한 애정을 키워 정신적인 안정감을 높이려는 노력을 시작해야 할 것 같았다. 특히 상해라는 공간에서 1년이나 생활을 해야 하는 만큼, 상해가 어떤 곳인지, 어떤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가는 과정도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상해 3일 차에 '상해와 친해지길 바라'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가보기로 한 곳은 임시숙소인 호텔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인민공원(런민꽁위안, 人民公园)과 상해도시계획전시관(上海城市规划展示馆)이었다. 한 곳은 상해의 봄기운을 느끼며 마음의 눈으로 상해를 느낄 수 있는 곳이었고, 다른 한 곳은 머리로 상해를 배울 수 있는 곳이었다. 마침 또 두 곳이 굉장히 가까이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에 두 곳을 다 다녀올 수 있었다. 이 글에서는 우선 인민공원의 이야기를 써보려고 한다.
상해의 아침은 참 빨리 시작한다. 이후 사귄 중국인 친구 曰 아침 7시 정도에 공원에 가야 진짜 중국의 아침을 볼 수 있다고 하던데, 말마따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중국 아주머니 아저씨들의 광장무(广场舞, 공원에서 추는 일종의 사교댄스)도 아침 8시가 피크고, 아무리 주말이어도 9시 30분이 넘어가면 어르신들의 춤사위가 조금 덜 열정적으로 변한다. (하긴 아침 7시부터 만나서 춤을 추는데 아무리 에너제틱한 어르신들이어도 그 정도면 지칠 만도 하다) 공원 자체적으로 소음과 관련된 규정이 있어 아침 10시 이후에는 춤에 곁들일 음악을 재생할 수 없는 것도 한몫한다.
벚꽃이 한창인 3월 중하순의 상해, 이제 막 상해에 온 지 3일 된 New-be로서는 그런 정황은 아직 알 길이 없었고, 덕분에 인민공원에 도착했지만 기대했던 시끌벅적한 광장무는 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평일 오전 시간이었던 만큼 손자 손녀를 데리고 산책 나오신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많이 볼 수 있었고, 귀여운 아이들의 애교를 보며 어쩔 줄을 몰라하는 그들을 보며 잠깐 한국의 가족이 보고 싶기도 했다. 한편 도처에 꽃이 피기 시작한 시기였던지라 꽃나무만 보면 옆에 포즈를 잡고 서 있는 중국 아주머니(혹시 중국에서 산 경험이 있다면 100% 동감하리라 생각한다)들 덕분에 사진을 좀 찍어 보려고 카메라를 들었다가 아주머니 옷자락만 찍히는 웃픈 상황도 여러 번 연출됐다.
지금 돌이켜보면 3월의 상해는 날이 덜 추우면 미세먼지로 공기가 좀 탁했고, 날이 좀 추우면 오히려 하늘이 맑았던 것 같다. 추우면 바람이 세게 불어서 미세먼지를 다 날려버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인민공원에 갔던 이 날도 하늘이 맑은 것을 보니 꽤나 추웠던 듯하다.
벚꽃이 소담하게 피어 있었다. 하지만 그 벚꽃을 카메라로 포착하기는 여간 어렵지 않았는데, 이유는 방금 말했던 것처럼 여기저기 꽃나무를 잡고 서있는 아주머니들 덕분. 두 번째 사진에 나무 아래쪽을 프레임에 담지 못한 이유는, 그 밑엔 온통 포즈를 잡고 있는 아주머니들이 서 계셨기 때문이다. 땅덩이가 크고 도시 녹화에 대한 나름의 사명감이 있는 나라인지라 중국은 도심에도 공원이 참 많다. 그래서 집 밖을 몇 발자국만 나서면 아래와 같이 초록 초록한 장면을 눈에 담을 수 있다.
중국의 공원에는 조금 특별한 것이 있다. 그건 바로 각종 角이다. 이 角은 영어로 하면 Circle이다. 어른들이 학창 시절에 참여했던 동아리를 표현할 때 "서클"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그 서클이 바로 이 서클이다. 중국인들은 공원이든 공터든 여러 명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 주어지면 항상 이런 서클을 만들곤 한다. 정치적인 성향이 있는 시위나 집회는 불가능하지만 개인의 취미나 기호를 반영한 서클은 금지되어 있지 않다.
북경 인민대학(人民大学)에서 교환학생을 하던 시절에는 인민대학 동문 앞에 英语角(English Circle?)가 있었다. 뭐 특별히 공간이 마련된 건 아니고, 스탠딩 파티처럼 공터에 모여서 같이 수다를 떠는 그런 모임이었다. "중국까지 교환학생 와서 웬 영어?" 싶은 생각에 나는 참여를 해본 적이 없는데, 당시 룸메이트였던 미국인 친구는 중국인 동학들이 자꾸 참가해달라고 졸라서 한 번 갔다가 모든 중국인이 다 자기만 붙잡고 말을 걸어서 곤혹스러웠던 경험을 말해준 적이 있었다. 영어를 배우고 싶은 인민대 학생들과 영어가 너무 그리운 외국 유학생들, 그리고 흥성 흥성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동네 주민들이 콜라보를 이루는 시간인 듯했다.
상해의 공원에도 나름대로 그 공원의 명함이 되는 각종 角이 존재한다. 앞서 말한 어르신들의 사교댄스, 광장무(广场舞)를 추는 모임도 하나의 角이고, 일본어 회화를 하는 角도 있고, 합창을 하는 角, 검무(剑舞)를 추는 角 등 그 모임의 성질과 구성원도 다양하다. 도대체 어떻게 이 모든 정보들을 알고 참여하는 걸까 무척 궁금했는데, 그건 내가 상해의 어르신들을 얕본 거였다. 정보화시대에 백 퍼센트 적응하신 어르신들은 관심이 있는 角의 위챗 단체 대화방에 참여하고 계신다. 정기적으로 이 위챗 단체 대화방을 통해서 정보를 공유하고, 아침부터 꽃단장을 하시고 이 모임에 참여하신다.
나중에 소개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상해에 살면서 루쉰공원(鲁迅公园)에 자주 갔었는데, 이 루쉰공원에는 광장무를 추는 유명한 角이 있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친분은 별로 없어 보이는 어르신들이 정해진 시간에 딱딱 모여서 랜덤으로 재생되는 각종 노래에 맞춰서 칼군무를 추고 계셨다. 대체 저분들은 저 동작들을 어떻게 저렇게 틀리지도 않고 잘하시는 것인지 너무너무 궁금했는데, 나중에서야 그 비결을 알았다. 이 角의 리더는 젊은 시절 일본에서 활동하던 유명한 안무가였는데, 은퇴 후 고향인 상해로 돌아와 춤추는 角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이 분이 만들어둔 위챗 단체방에는 매일매일 각기 다른 노래의 안무 영상이 올라오는데, 이 모임에 참여하는 어르신들은 그 영상을 보고 각자 집에서 미리 연습을 하고, 아침마다 모여서 같이 춘다는 것이다. 그만큼 중국인들의, 특히 중국 어르신들의 이 角에 대한 열정은 매우 대단하다.
한편 이날 갔던 인민공원(人民公园)에도 유명한 하나의 角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맞선 Circle(相亲角)"이다.
바이두 지도(百度地图)에서 인민공원을 검색하면 무려 공원 지도에 당당하게 표시되어 있는 이 相亲角! 맞선이라는 뜻의 중국어 샹친(相亲)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맞선"을 주제로 한 서클인데, 이제는 이미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매주 토요일 오전에 진행되는 프로그램이다. 맞선 서클이라고 하니 아직 적당한 결혼 대상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직접 와서 맞선을 볼 것 같지만, 정확히 말하면 이곳은 '부모들의' 맞선 서클로, 미혼의 자식을 둔 부모들이 직접 와서 적합한 사돈·사위·며느리감을 찾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내가 인민공원을 갔던 날은 평일이라 상친각을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사실 인민공원의 이 相亲角는 이미 한국에도 여러 번 소개된 바가 있다. 유튜브에 검색하니 14년에 찍은 영상이 하나 나오는데, 내용이 100%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간접적으로나마 相亲角를 조금 느껴보시라고 공유해본다.
https://www.youtube.com/watch?v=jw4ldtplJAM
이 영상에 나오는 장면은 이미 6년이나 지나서 지금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요즘 相亲角에는 사람이 직접 서 있지도 않고, 아들딸에 대한 정보가 적힌 우산을 놓아두고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는 식으로 많이 진행된다고 한다. 여전히 젊은이들은 대체 부모들이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있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지만, 한편으론 결혼이라는 일을 상해의 부모세대들이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개인적으로는 중국 부모들이 조금 더 쿨해져서, 자식들이 알아서 결정하기를 좀 내버려 뒀으면 하는 마음이 있지만.
마침 인민공원 입구 앞에 대만 출신 나이차 브랜드 1点点이 자리 잡고 있어, 인민공원 산책의 마무리는 나의 소울푸드, 버블티(珍珠奶茶, 쩐쭈나이차)로 정했다. 중국에서 돈 없는 교환학생 할 시절, 버블티만큼 적은 돈에 많은 행복을 주는 음료가 없었다. 한국에선 한 잔에 오천 원 정도 하는데, 중국에선 한국 돈 삼천 원 이하에 살 수 있다. 물론 중국의 저 삼천 원도 예전에 비하면 엄청 오른 가격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사실 한국에서 버블티를 마시려고 하면 좀 배가 아프다.
이렇게 내가 너무 좋아하는 나이차지만 하나 단점이 있는데, 그건 주문할 때 너무 많은 말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요즘은 우리나라도 많이 복잡해졌는데, 중국에서 버블티 주문을 잘할 수 있으면 생존 중국어는 마스터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음료 하나 주문하는 데 대화나 어휘를 많이 써야 한다. 대충 그 흐름은 아래와 같다.
1. 中杯? 大杯? → 컵 사이즈 선택
- 내 위(胃)의 사이즈나 먹을 수 있는 양을 생각하면 中杯를 마셔야 하고, 大杯를 선택하는 순간 하루 종일 그것만 마실 각오를 해야 한다. 하지만 中杯에 비해 大杯가 명백히 가성비가 우월하다. 현명한 소비자가 되려면 大杯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늘 하게 되는 내적 갈등!
2. 热的,冰的? → 온도 선택
- 사실은 히든 선택지가 있다. 그건 바로 상온(常温)! 겨울이지만 바로 마실 음료를 주문하고 싶으면 이 히든 선택지를 꺼내면 된다.
3. 糖度呢?→ 당도 선택
- 대충 이런 단계로 정리해볼 수 있다. 0%(无糖) - 25%(微糖,三分糖) - 50%(半糖,五分糖) - 100%(正常糖). 100%는 혈당 올라가는 느낌이 쫙-드는 당도고, 중국인들은 50% 정도로 마시는 사람이 꽤 있는데, 개인적인 픽은 三分糖 정도다. 음료가 전반적으로 달기 때문에 우선 50%를 주문해 보고 이것도 달다 싶으면 25%를 시도할 것을 추천한다.
4. 冰块正常吗? → 얼음 양 선택
- 얼음 빼주세요(去冰),얼음 적게 주세요(少冰),네(正常) 이렇게 구분할 수 있다. 아이스를 시켰는데 去冰으로 했다고 덜 시원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도 된다. 덜 시원한 선택지는 앞에 말한 히든 선택지, 상온(常温)이다.
5. 打包,现在喝? → 바로 마실지, 가져갈지?
- 여기가 대부분 직원이 가장 빠르게 말하는 부분이다. 나는 중간에 쉼표를 적었지만 사실 실제 발화 시에는 쉼표가 없어 그냥 연음으로 발음되고, 직원이 내키는 대로 저 두 단어의 위치를 바꿔서 말하기도 하기 때문에 여기서 절망을 느끼는 외국인이 꽤 있다. 사실 내용은 별 거 아니다. 바로 마신다고 하면 그 자리에서 빨대를 꽂아주고, 가져간다고 하면 비닐봉지에 빨대와 함께 담아준다. 참고로 패스트푸드점에서 음식을 시키면 “在这吃, 打包?(For here, or to go?)"라는 문장으로 묻는다. 역시 쉼표는 없다.
중국에서 그 도시의 분위기를 느끼려면 일단 공원을 가보기를 추천한다. 공원에서는 마음을 안정시키는 녹색도 볼 수 있고, 로컬 사람들을 접하면서 마음으로 그 도시를 느낄 수 있다. 또 아무래도 공원 같은 환경에서는 사람들이 경계심을 많이 내려놓게 되기 때문에 새로운 사람을 사귀기도 좋다. 마음의 지식을 채웠으니 이제 머리에 지식을 넣어볼 시간, 발걸음은 상해도시계획전시관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