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도 국물도 위로해주지 못한 하루
19년 3월 21일, 상해에 온 지 5일이 되던 날. 아침에 일어나니 인후통이 좀 있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혹시 상해가 내게 늦은 신고식을 하려는 것은 아닐까 좀 걱정이 되긴 했지만, 다년간의 출장 경험으로 잘 때는 무조건 호텔 에어컨을 끄고 자야 한다는 노하우가 생겨 에어컨도 잊지 않고 껐으니 설마 감기는 아닐 거라고 좀 안일한 생각을 했다. 컨디션이 안 좋더라도 하루를 허투루 보낼 순 없다는 생각에 일단 옷을 챙겨 입고 난징시루 스타벅스 탐방을 나섰다.
상해 난징시루에 있는 스타벅스 리저브 로스터리 (星巴克臻选烘焙工坊)는 지하철 난징시루 13호선 11번 출구에서 가깝고 2호선 3번 출구로 나와도 오른쪽을 보면 바로 나오면 랜드마크적인 건물이다. 17년 12월에 상해에 들어올 때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큰 스타벅스 매장이었는데, 작년에 도쿄에 매장이 오픈하면서 세계에서 그 1등 자리를 도쿄에 내주게 되었다.
요즘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상해에 있을 때만 해도 그 인기가 엄청나서 상해에 여행을 온 사람들은 모두들 가보는 곳이었다. 나 역시 한국에서 스타벅스를 좋아하는 지인이 상해를 놀러 오면 꼭 이곳을 추천하곤 했다. 다만 정작 내가 자발적으로 이곳을 간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데, 이유인즉슨 사람이 너무 많아서였다. 특히 주말엔 사람이 미어터져서 마치 개업 초기의 Shake Shack 버거처럼 웨이팅 하는 사람들을 가게 밖에 줄 세우고 인원을 통제할 정도였다. 만약 상해 여행을 하는데 이곳을 가보려고 한다면, 가능하면 날씨가 별로 좋지 않은 날을 고르거나(ㅠㅠ) 평일 아침 이른 시간에 가기를 추천한다.
1층에는 각종 굿즈와 원두, 초콜릿과 빵 등을 판다. 사람이 너무 많을 땐 굿즈 파는 곳 사람들이 그다지 친절하게 대응해주지 않는데, 여유가 좀 있을 땐 말도 걸어주고 추천도 해준다. 자체 로스팅한 원두를 사본 적이 있는데, 원두 하나하나 특성도 설명해주고 꽤 전문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아, 이름이 '로스터리 공방'인 만큼 이곳에서 직접 원두 로스팅을 진행하는데, 그건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계단에서 잘 볼 수 있다.
중국에 있는 로스터리 공방답게 중국 옛 글자체인 전서(篆书)로 표기된 글자들이 새겨진 것이 인상적이다. 큰 통에서 직접 로스팅을 진행하고, 현장에서 로스팅한 원두를 판매하고 있다. 그리고 어떤 원두가 서빙되고 있는지를 큰 판에 글자로 보여주는데, 재미있는 건 로딩될 때 "8"이라는 숫자가 기본적으로 나오게 되어 있다. "8"을 사랑하는 중국인 입맛에 아주 딱이다.
2층에는 주로 음료를 안에서 마시는 사람들이 리저브 음료와 베이커리류를 주문하고 앉아서 먹을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니까 외국인(특히 서양인)이나 딱 봐도 관광객처럼 보이는 사람이 들어오면 직원이 직접 메뉴판을 들고 가서 무릎을 낮추고 메뉴를 설명해주고 주문을 받고 카드 결제까지 돕는 것 같았다. 로컬로 보이거나 다소 얕보이면 그냥 짤 없이 직접 주문해야 한다.
카페에 왔으니 뭔갈 마시긴 해야겠지? 한국에는 없는 상해에만 있는 메뉴가 마셔보고 싶어서 시킨 게 오른쪽에 보이는 '와이탄의 안개 낀 새벽(外滩雾晓, The Bund Mist)'이라는 음료. 그리고 레몬 타르트였다. 감기가 올 줄 알았으면 따뜻한 음료를 시키는 거였는데.
상해에서는 이곳이 이미 꽤 대표적인 관광지가 되었고, 한국에는 없는 로스터리 공방인 만큼 한 번쯤은 가볼만한 곳이지만, 개인적으론 한 번으로 족한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굿즈나 원두를 사기에는 적합하지만 음료를 차분하게 마시려면 적합한 공간이 전혀 아니다. 소비자에게 그다지 친절하지 않은 매장이라고 판단된다. 사실 상해의 어느 곳에 있는 스타벅스든 한국만큼 혼자 앉아서 독서를 하거나 공부를 하기에 적합한 매장이 많지 않다. 음료의 테이크아웃이 비교적 습관화되어있는 데다 커피를 마시는 사람의 비율이 높지 않은 이유도 있겠지만, 시내는 땅값이 비싸 넓은 공간에 매장을 내기가 쉽지 않은 이유도 있을 것이다.
시내 구경을 마치고 호텔에 들어오니 갑자기 몸이 으슬으슬 떨리기 시작한다. 한국에서 준비해 간 1인용 전기장판을 3월 중하순 상해의 호텔에서 개시할 줄이야. 주섬주섬 상비약 봉투를 뒤져 감기약을 꺼냈다. 약도 먹어야 하고 몸도 떨리니 국물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편의점에서 산 컵라면을 뜯었다. 캉스푸 새우탕면 하나와 가난했던 교환학생 때의 추억이 담긴 옥수수 소시지 하나. 소시지 껍질을 뜯는데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사실 전날 심적으로 좀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었는데, 어쩌면 이 일 때문에 갑자기 감기몸살이 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 컵라면은 호텔에서 먹기 딱 좋은 음식이다. 컵라면 속에 플라스틱 포크가 들어있어 특별한 식기가 필요하지 않고 뜨거운 물만 필요하므로 별도의 조리도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럴 땐 왠지 중국 맛 나는 마라 국물은 먹고 싶지 않아 고른 흰 국물의 새우탕면인데 거참, 새우탕면에서도 중국스러운 느끼함이 팍 밀려온다. 소시지 한 입을 베어 물고 혼자 호텔방에서 펑펑 울었다. 문득 '이곳에서 나는 진짜 혼자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누구도 나 대신 뭔가를 결정해주거나 해줄 수 없다는 것. 한국에서 이미 충분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왔는데도 불구하고.
한편으론 이 모든 것이 너무 빨리 한꺼번에 모든 것을 처리하려고 하지 말라는 상해의 경고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중국어로 '欲速则不达'라는 말이 있다. 너무 빨리 뭔가를 하려고 하면 오히려 성공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17일 상해 땅을 밟고 매일매일 주어진 퀘스트를 최대한 빨리 해치우려고 했던 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나 싶었다.
어디든 익숙하지 못한 타지에 가면 물갈이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갈이든 감기 몸살이든 타지에서 겪는 아픔은 어쩌면 익숙했던 곳에 대한 이별의식과 지금 이 곳에서 겪는 일들에 대해 늘 겸손하라는 경고를 겸한 것은 아닐지. 상해에 대한 내 마음은 아마도 일방통행이었는 듯, 함부로 친한 척하지 말라는 듯, 상해가 내게 준 이 감기몸살처럼 말이다. 역시 한 번은 아파야 했다. 비록 서럽더라도, 한 번은 이 낯선 땅에서 아파봐야 비로소 '적응'이라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약 먹고 자면 좀 낫겠지. 내일은 학교 등록을 하러 가야 한다.
[중문 일기 in 위챗 모멘트(朋友圈)]
昨天忽然浑身发抖、发烧,感冒了。在异国他乡生病躺在床上的感觉非常悲惨。上海考我考得够狠的。
(譯) 어제 갑자기 온몸이 떨리고 열이 나기 시작했고, 감기에 걸린 듯하다. 생면부지의 땅에서 몸이 아파 침대에 누워 있는 기분은 정말 비참하다. 아무래도 상해가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