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동방명주가 내게 말했다
19년 3월 23일, 임시숙소였던 호텔에서 아침부터 부산스럽게 짐을 정리하고 고정 숙소인 난징시루 모처로 이사를 했다. 이사 전에 인터넷으로 베개, 이불, 매트리스, 제습기 등 필요한 생활용품을 최대한 미리 사놨는데도 불구하고 막상 짐을 다 싸들고 집으로 오자 또 필요한 것들이 하나둘 발견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제 상해에 집이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곳이 생겼다는 점이 실감 나 뿌듯한 마음이 더 컸다.
큰 일 치렀다는 안도감을 안고 다음날 한 숨 돌려볼 겸 주말 나들이 장소로 고른 곳은 바이두 지도(百度地图)가 이 시기에 벚꽃 구경하기 좋다고 추천해준 강 너머 푸동(浦东)의 세기공원(世纪公园). 그러고 보니 푸동공항으로 입국한 뒤 강을 넘어와 복닥거린 이 일주일 동안 한 번도 강을 다시 넘어가 본 적이 없었다. 상해의 봄기운도 좀 느껴볼 겸, 바람도 쐴 겸, 지하철 2호선을 타고 강을 넘어 세기공원으로 향했다.
상해 세기공원(世纪公园, Century Park)은 황푸강의 동쪽 푸동(浦东)에 있는 비교적 큰 공원 중 한 곳이며, 4A급 관광지로 지정되어 있다. 공원이라면 다 그렇겠지만 규모도 있고 녹화도 잘 되어있는 곳이라 봄을 즐기기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동방명주, IFC 등이 있는 루쟈주이(陆家嘴)와도 가깝기 때문에 여행지 동선 짜기도 나쁘지 않다. (사실 상해에서 벚꽃 구경을 하기 가장 좋은 공원은 구춘공원(顾村公园)인데, 시내와의 접근성을 생각하면 세기공원이 훨씬 우월하다.) 지하철 2호선 상해과기관(上海科技馆) 역 혹은 세기공원(世纪公园) 역에서 내리면 바로 갈 수 있다. 난징시루(南京西路)에서는 2호선을 타고 여섯 정거장을 가면 도착한다.
상해에 있는 공원 중에 대놓고 입장료를 받는 공원이 많지 않은데, 세기공원은 10위안(한화 2천 원 정도)이라는, 공원 치고는 거액의(!) 입장료가 있다. 사전에 딱히 조사를 하지 않고 왔다가는 입구부터 티켓을 구매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벙찔 수 있다. 많은 배달 라이더들이 공원 입구에서 서성대고 있었는데, 안에서 음식을 주문한 손님에게 음식을 전달하기 위해 기다리는 것이었다. 배달원도 티켓 없이는 입장이 불가능했다.
표를 사고 입장을 위한 줄까지 서가며 들어간 우리를 반기는 것은 상해의 수많은 상춘객들과 오색찬란한 텐트들. 공원 풀밭(草坪)에 텐트를 치는 것에 대한 규정은 딱히 없는지 가족 단위로 많은 사람들이 이미 텐트를 펴고 일요일 낮의 햇빛을 즐기고 있었다. 텐트 앞에는 봄을 수놓는 튤립과 팬지들.
길을 따라 조금 걷자 슬슬 봄에 이 공원에서 꼭 봐야 한다는 벚꽃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째 좀 덜 풍성하다. 이곳이 진정 벚꽃 구경하기 좋다는 상해의 세기공원이 맞는 것인가? 슬슬 헷갈리기 시작한다. 표에는 분명 세기공원이라고 쓰여 있는데...
벚꽃 나무들이 많다는 구역을 반 정도 걸었을 때 나는 깨달았다. 서늘한 공기가 채 가시지 않은 3월 중하순의 상해는 아직 우리에게 벚꽃을 보여줄 준비가 덜 되어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고 보니 시기상조이긴 했다. 정작 나만 해도 숙소에서 히터를 틀지 않으면 아직도 손발이 시릴 정도인데 벚나무들이야 오죽할까. 또 마음만 앞선 것이다. 하지만 기왕 왔으면 마음을 편하게 먹으라(既来之,则安之)고 했던가? 이렇게 된 거 피어날 준비를 하는 꽃들을 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사고방식을 조금 바꾸니 아까보다 공원이 훨씬 아름답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미세먼지로 인해 하늘이 완전히 맑고 푸르지는 않았지만, 이 날따라 유독 흰 벚꽃이 참 청초하게 보였다. 해가 잘 드는 곳은 따뜻한 공기로 인해 그래도 꼬마 벚꽃들이 약간씩 피어있었다.
조금 더 걷다 보니 왕벚꽃 구역이 나왔다. 왕벚꽃은 덜 피어 있던 벚꽃들로 상심한 우리를 위로라도 하려는 듯 만발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새삼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어떤 뜻인지 느껴졌다. 때 이른 나들이를 온 다른 중국인들도 우리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지 다들 여기서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었다.
팝콘 같은 벚꽃을 따라 조금 걷다 보니 이상하게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 나타났다. 다들 뭘 저렇게 둘러싸고 보고 있나 했더니 무언가 푸드드드 날아간다. 비둘기였다. 알고 보니 세기공원에는 비둘기 먹이주기(喂鸽子) 체험을 하는 공간이 있었다. 관람객들이 비둘기에게 마음대로 먹이 주는 것을 막을 수 있으면서도 어린이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도록 고안된 공간 같았다. 한국에서 비둘기의 몸에는 40만 마리의 박테리아가 살고 있고 그의 날갯짓 한 번에 박테리아들이 우수수 떨어진다는 말을 워낙 많이 들었던 나는 왠지 좀 무서워졌다. 역시 어린아이들은 두려움이 없다. 잘만 다가가서 먹이를 준다.
다소 녹차라떼스러운 호수를 지나 조금 더 걸으니 이번엔 자목련 구역이 나타났다. 벚꽃은 좀 덜 피었지만 자목련이 워낙 예쁘게 피어있어 역시 오길 잘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자목련 구역을 지나니 이번엔 유채꽃밭이다. 한국에 있을 때도 도심에서 이렇게 큰 꽃밭을 본 적은 없었는데, 대륙은 시내에 있는 공원도 이렇게 크다니. 새삼 대륙 스케일에 또 한 번 놀란다. 꽃을 찾아 떠도는 상춘객들은 여기서도 사진 찍기 열심이다.
유채꽃밭까지 보고 나니 슬슬 공원의 반대쪽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때 이른 꽃놀이에 벚꽃은 많이 보지 못했지만 자목련과 유채화로 충분히 즐거웠다. 공원 출입문 근처에 다다르니 큰 붓과 물만 가지고 길에 붓글씨를 쓰고 있는 주민을 발견했다. 쓰고 있던 시는 송나라 위야(魏野)의 작품 <서일인유태중옥벽(书逸人俞太中屋壁)>의 한 구절이었는데, 시의 의미처럼 한가롭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주말을 즐기는 그 덕에 나도 덩달아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洗砚鱼吞墨 (세연어탄묵)
벼루를 씻으면 물고기가 몰려와 먹물을 먹고
烹茶鹤避烟 (팽다학피연)
차를 끓이니 학들이 연기를 피해 날아가네
기왕 강을 건너온 김에 동방명주도 볼 겸 루쟈주이(陆家嘴)에나 가볼까 하고 공원을 나섰다.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세 정거장을 가 도착한 곳은 루쟈주이(陆家嘴) 역. 상해의 CBD이자 상해를 상징하는 3형제 빌딩이 모두 모여 있는 곳. 낮에 봐도 멋있지만 밤에 보면 더 멋있는 곳.
멋있게 써놨지만 돌이켜보면 막상 이때는 루쟈주이 역에서 어디를 어떻게 찍어야 멋있게 나오는지, 뭐가 루쟈주이의 3형제 건물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단순히 강 건너왔으니 오랜만에 동방명주나 한 번 보겠다고 갔던 것 같다. 그러니까 밤이 아니라 낮에 갔겠지.
위 지도의 1번으로 표시된 곳이 바로 동방명주(东方明珠)다. 상해 관련 사진에 늘 등장하는 UFO 같은 건물 맞다. 지도 중간에 원형으로 보이는 곳은 바로 루쟈주이 역을 나오면 바로 보이는 루쟈주이 공중회랑(陆家嘴 世纪连廊)이다. 이 공중회랑을 따라 걸으면 루쟈주이의 풍경을 모두 담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주변 건물과도 이어져 있어 이동도 편리하다. 밤만 되면 이곳은 루쟈주이의 야경을 담아보려는 인파들로 붐빈다.
공중회랑에서 내려다본 광경이다. 원형 차로 중간에 조경을 참 예쁘게 해 두었다. 이 사진은 19년 3월의 풍경인데, 19년 9월에 국경절을 맞아 정비를 한다고 조경을 다 새로 했던 기억이 난다. 내용은 당연히 국경절에 걸맞은 내용으로, 중국인이 좋아하는 빨간색으로 중무장한 디자인으로 바뀌었다.
기왕 상해의 CBD에 왔으니 마천루를 찍지 않을 수 없다는 마음으로 찍은 사진. 딱 봐도 상해를, 루쟈주이 3형제 건물을 모르는 사람이 찍은 사진인 게 너무 티가 난다. 왼쪽 사진에 병따개 건물(上海环球金融中心, Shanghai World Financial Center), 주사기 건물(上海金茂大厦, Shanghai Jinmao Tower), 오른쪽 사진의 꽈배기 건물(上海中心大厦, Shanghai Tower)을 모아 놓아야 진정한 루쟈주이의 마천루를 찍었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瞎猫碰死耗子)으로 지금 보니 3형제를 찍긴 했네.
꼭 이 원형 공중회랑에 올라와야지만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다는 동방명주. 그 풀네임은 동방명주 방송 TV탑(东方明珠 广播电视塔). 이름 그대로 본 역할은 방송 송출탑이지만, 그 함의는 매우 심오하다. 동방명주는 사실상 상해 푸동 개발계획의 상징과도 같은 건축물이다. 이름부터 '동방(Oriental)의 빛나는 구슬', 상해도 중국도 아닌 '동방'을 대표하는 건축물이 되고 싶은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돈을 내는 만큼 더 높은 곳에서 야경을 보게 해 준다는 '중국 특색 사회주의' 전망대가 있는 것으로도 유명한 곳인데, 사실 그만큼 올라가 볼 가치가 있는 곳인지는 잘 모르겠다. 한 가지 알아두면 좋은 것은 동방명주 옆에 디즈니 소품샵이 있다(오른쪽 사진 왼편에 보이는 시계탑 건물). 파는 물건이 꽤 많고 다양한 데다 디즈니랜드에 가서 사는 것보다 저렴하다고 한다. 상해 교외에 있는 디즈니랜드까지 갈 시간적 여유가 없는 여행객에겐 가볼만한 가치가 있다.
동방명주에 들어가려면 돈을 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슬슬 돌아가 볼까 하던 차에 내 눈에 띈 다섯 글자.
상해는 당신을 환영합니다(上海欢迎您)
별 것도 아닌 그 다섯 글자가 그날따라 왜 그리도 고맙던지. 이상하게 가까이 가서 사진 한 방 남기고 싶었다. 공중회랑에서 내려와 가까이 다가가자 같은 목적으로 그 앞까지 온 많은 중국인과 마주쳤다. 건물 바깥에 세워져 있어 입장료가 필요 없어서 그런지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었고.
그날 그 자리에 우연히 모인 우리는 모두 이방인이었다. 설령 국적이 중국인 사람일지라도 그날 그곳에 있었다면 분명 이방인이다. 해당 집단에 속한 사람에게 '당신을 환영합니다'라는 말을 하지는 않는다. 상해가 상해 사람에게 '상해는 당신을 환영합니다'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상해가 아직 이 이방인들에게는 낯설지만 '받아들여지고 싶은' 도시이기 때문에 그날 그 많은 사람들은 그 다섯 글자를 보러 그곳에 모인 것일 테다.
떠나오기 전 누군가 내게 중국이 나에게 익숙한지 낯선지 물었다면, 분명 익숙하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익숙함이 '생활'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일주일 정도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뼈저리게 깨달았다. 아니, 오히려 익숙하니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모두들 믿고 있을 것이기에, 도리어 잘 해내지 못하는 스스로를 더 자책하게 되고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는 것도 말이다.
3월 24일, 상해라는 도시에 정착하기 위한 제반 준비가 어느 정도 끝난 것이나 진배없었다. 중국 휴대전화 번호도 생기고, 은행 계좌도 생기고, 집이라고 부를만한 곳도 생기고, 심지어 한 번 아파도 보고.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하듯, 당시에는 마음이 조급하고 자책도 많이 했지만 지금 그때를 복기해보면 많은 일들을 스스로 해냈음을 알게 된다. 사기를 당하지도 않았고, 휴대전화나 여권을 잃어버리지도 않았으며, 어디서든 현지인처럼 생활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날, 동방명주가, 상해가 내게 말했다. "상해는 당신을 환영합니다(上海欢迎您)"라고. 아무래도 3월 24일의 나에게 필요했던 건, 그 한 마디였던 듯하다. 비록 그것이 허울뿐인 다섯 글자였을지라도. 중국이 진심으로 나를 환영해주는 날이 올 때까지, 조금 더 돌아다니고, 더 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화이팅(加油)!
[중문 일기 in 위챗 모멘트(朋友圈)]
(譯) 세기공원의 벚꽃. (사실 70~80% 정도는 아직 덜 피었다ㅠㅠ) 그래도 유채화도 실컷 보고, 봄바람 잘 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