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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볕이드는창가 Feb 13. 2021

난징에 남은 중화민국의 흔적들

난징(南京) 지역연구 마지막날 (1)

난징에 남은 중화민국의 흔적, 총통부


난징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 일정을 마치고 저녁 6시 기차로 상해로 돌아가야 하는 일정이라 숙소를 나서면서 짐을 다 싸서 체크아웃까지 하고 나왔다. 2박 3일 치 여행 짐을 다 들고 다녀야 해서 좀 번거로울 하루였지만, 그래도 첫 지역연구의 마지막 날이니 볼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보고 와야 한다는 생각에 일찌감치 체크아웃을 끝냈다.


마지막날 첫 일정은 총통부(总统府). 전날 난징1912 거리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총통부는 바로 그 거리와 붙어있다. 1912년 쑨원이 중화민국의 임시 대총통이 된 바로 그 장소이자, 그의 집무실, 숙소 등을 겸했던 곳이다. 총통, 대통령이라는 개념이 아예 없는 현대 중국에 민주주의, 중화민국의 흔적이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이곳은 태평천국의 난 때 태평천국의 수도 난징의 황궁이었기에, 총통부에는 총통의 흔적과 태평천국의 황제 홍수전(洪秀全)의 흔적이 혼재한다. 전근대와 근대의 흔적이 함께 남아있다니, 아이러니하다.


총통부 입장권. 뒷면에는 어떤 순서로 보면 되는지 지도와 함께 적혀 있다.


총통부를 가게 된 이 날 아침은 좀 흐렸다. 게다가 지하철역에서 총통부까지 걷는 길에 플라타너스(法国梧桐)의 꽃가루가 어찌나 날리던지, 눈썹과 이마에 온통 꽃가루가 묻어 굉장히 불편했다. (비슷한 상황을 몇 주 뒤 상해의 조계지에서도 똑같이 경험하게 되는데...) 강남의 4월은 플라타너스 꽃가루를 조심해야 한다는 교훈.


그래도 다행스러운 건, 짐 들고 어떻게 돌아다닐지 고민하던 우리 앞에 짐 보관 센터가 등장했다는 점이다. 총통부 입구를 들어가면 좌측에 짐 보관소가 있는데, 연락처와 이름을 적으면, 번호가 달린 고리 같은 것을 준다. 그리고 짐은 보관소에서 맡아주는데, 사람 한 명이 지키는 곳이고 그다지 전문적으로 운영되는 것 같지 않으니 귀중품은 당연히 맡기지 않아야 한다. 여하튼 감사하게도 짐 보관소가 나타나 준 덕에, 총통부 구경은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하고 할 수 있었다.


입구를 지나 어디부터 봐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일단 사람이 좀 적은 곳부터 보자고 하고 간 곳에는 기다렸던 손중산 선생이 아니라 태평천국의 자료들이 나타났다. 당시에는 공부가 덜 되어 왜 뜬금없이 태평천국이 나오나 싶었는데, 나중에 보니 난징이 태평천국의 수도였고 이곳이 그 황궁과 같은 곳이었다. 앞에서 하나는 전근대, 하나는 근대라고 이야기하긴 했지만, 사실 어찌 보면 쑨원이나 홍수전이나 근본적으로 원했던 결과는 하나였다. 소수민족의 지배를 끝내고 한족 위주의 나라로 만드는 것. 홍수전은 사상적으로 전근대적 봉건사상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고, 쑨원은 시대적 분위기에 맞는 근대적 사상을 내세웠을 뿐이다. 그러니 이 둘이 한 공간에 자리하고 있는 것도 크게 모순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태평천국 천왕부의 모형과 그 왕좌로 보이는 곳. 결국 전근대적 모습을 벗어나지 못했다.


조금 걸으니 희원(熙园)이 나왔다. 명나라 때부터 정원 역할을 했다는 이곳은 쑨원이 이곳에 머물기 시작한 이후에도 총통부의 정원으로 기능했다. 명, 청, 태평천국, 그리고 중화민국까지의 역사를 간직한 정원이라 그런지 건물들도 고풍스럽고 무엇보다, 규모가 상당히 컸다.



이전 매거진 글에서 상해의 예원(豫园)을 다루면서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강남(江南) 정원 문화의 특징은 곡선과 자유분방함이다. 난징은 사실 상해보다도 더 강남 문화의 대표 격인 도시고, 그중에서도 이곳은 지배자급이 살았던 곳이니 그 특징이 더 도드라질 수밖에 없다. 곳곳에 심긴 색색의 꽃나무들과 독특한 돌들까지 저마다 그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희원을 지나면 쑨원이 총통 사무실로 썼다는 곳이 나오는데, 그 건축 양식이 상당히 서구적이다. 이 건물은 본래 쑨원이 직접 만든 것은 아니고, 청나라 때 관료가 유럽에 다녀오고 나서 서양식 건축 양식에 마음을 뺏겨 프랑스 르네상스 양식으로 짓기 시작한 건물이라고 하는데, 아쉽게도 지어진지 얼마 되지 않아 청의 시대가 끝나고 쑨원의 사무실이 된다. 마침 봉건 시대를 끝내고 근대 중국으로 나아가는 시기에 서양식 건물이라니, 타이밍이 아주 그럴듯하다.



사무실 건물에 들어가면 위 사진처럼 당시 임시 대총통이었던 쑨원의 집무실을 볼 수 있다. 그의 손으로 쓴 '분투(奮鬪)'라는 글자가 벽에 장식되어있는 집무실을 참관하고 내려오면 손중산과 남경 임시정부의 사료실이 나온다. 쑨원이라는 사람의 일생과 그가 중국 사회를 위해 했던 일들을 개괄적으로 정리해둔 곳이다.



정확히 어느 건물에서였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그 건물 2층에서 쑨원의 초상화를 마주했다. 공교롭게도 때마침 대만돈 100위안 지폐가 들어있었다. 아마도 18년 대만 출장 이후 환전하지 않고 갖고 있던 지폐였으리라. 문득 100위안 지폐에 있는 쑨원 선생과 내 눈앞에 보이는 쑨원 선생을 한 프레임 안에 넣고 사진이 찍고 싶었다. 찍고 나니 드는 의문. 왜 대만 돈에 있는 쑨원 선생은 동양 느낌의 복장을 하고 있고, 이곳의 중산 선생은 오히려 서양 복장을 하고 있는가. 아직 그 답은 찾지 못했다.


총통부를 나오던 길에 마주친 한복(汉服)입은 소녀들


사실 총통부에는 쑨원의 집무실이나 숙소 외에도 장개석의 사무동도 분명 존재한다. 국민당 정권이 난징을 버리고 대만으로 가기 전, 장개석이 집무를 보던 곳 역시 이곳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어쩐지 이곳을 끝까지 참관하고 나면, 장개석이라는 인물보다는 손중산이라는 인물이 훨씬 머리에 오래 남는다. 지난 글에서 나는 중국인에게 과연 중산릉은 어떤 존재일까에 대해 적은 적이 있다. 혹시 없애고 싶은 곳은 아닐까 하고 적으면서도, 어쩌면 손중산이라는 인물은 대만과 싸워서라도 갖고 싶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적었다. 총통부를 보면서 그런 생각은 더 강해졌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어린 중국인들에게 총통부는 그저 위의 사진처럼 전통 복장을 입고 나들이하고 사진 찍기 딱 좋은 그 정도 의미일지 모른다. 하지만 대다수의 중국인들에게 이곳은 역사의 패러다임을 바꾼 혁명가가 살던 곳이자 중국의 새 시대가 시작된 곳이다. 아쉽게도 그가 세운 국가가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니라 중화민국이라서 차마 '국부'라고 대놓고 잘 말하진 않지만, 쑨원에 대한 중국인의 마음은 대만인의 마음 못지않은 듯하다. 총통부를 둘러보고 나면 그런 생각이 든다.



난징에서 대만 요리를, Bellagio


총통부를 정독하고, 우리는 점심을 먹으러 총통부 옆에 바로 붙어있는 1912 거리로 향했다. 어제저녁에 이미 와본 곳이긴 하지만, 역시 밤에 보는 것과 낮의 풍경은 다른 것 같다. 개인적으론 밤의 풍경이 더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날 날씨가 좀 흐려서 낮이 그다지 밝지 않았던 것도 한몫한 것 같긴 하지만.


점심을 먹으러 온 곳은 대만식 중국요리를 파는 음식점 <루강샤오쩐(鹿港小镇, Bellagio)>. 대만의 항구 루강(鹿港)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대만 요릿집인데, 중국 각지에 체인점이 있다. '총통부를 보고 왔으니 중화민국 요리를 먹어야지!'라는 멋진 각오로 갔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사실 여기를 온 건 옛 추억이 생각나서였다.


때는 바야흐로 2012년, 북경에서 교환학생을 할 때, 중관촌(中关村)에 이 식당 체인점이 있었고, 북경에서 유학하고 계시던 학과 선배님과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엄청난 크기의 빙수를 먹었던 기억이 있는데, 난징에서 마침 이 식당 체인점을 만나 들어와 본 것이다. 사실 12년에 선배께 얻어먹을 때만 해도 이 식당이 대만 요릿집인 건 몰랐는데, 그래도 그새 많이 컸다 싶다.



이 식당의 큰 장점은, 메뉴판에 컬러풀한 사진이 다 붙어있다는 점이다. 이틀간 일행들을 위한 메뉴 주문을 주로 맡았던 나는 이 기회를 빌어 일행들에게 주문권을 맡겼다. 그 결과 사진과 영어 이름이 나름대로 안전해 보이는(?) 메뉴 위주로 식탁에 올라왔다. 돌솥버섯소고기볶음(石锅蘑菇牛仔粒), 란차이고기볶음(榄菜肉碎), 녹색 전병과 함께 나온 징쟝러우쓰(京酱肉丝), 파인애플밥(菠萝炒饭). 딱 봐도 안전한 요리들이다. 지금 생각하니 조금 아쉬운 점은 막상 대만 요리 다운 대만 요리가 없었다는 점인데, 어쩔 수 없지. 이날은 먹지 않았지만 이 집에 오면 꼭 땅콩 빙수를 먹어야 한다. 피넛버터 맛을 싫어하는 분이면 좀 안 맞을 수 있는데, 그렇지 않다면 꼭 맛보도록 하자.



얼결에 향을 올려본 계명사


밥을 다 먹고 난 뒤, 지하철을 타고 두 정거장을 가서 계명사(鸡鸣寺) 역에 내렸다. 사실 마지막날 오후 일정을 짜면서 일전에 말했던 난징 출신 친구 조언을 제일 많이 받았는데, 왜냐하면 저녁 6시 기차로 상해로 돌아가는 일정에 맞춰야 했기 때문이다. 오후에 기차역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곳을 보러 가게 되면 돌아가는 일정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어 친구는 최대한 난징 기차역으로 자연스럽게 이동할 수 있는 루트를 추천해주었다. 그래서 선정된 루트가 계명사(鸡鸣寺) - 난징 성벽(南京城墙) - 현무호공원(玄武湖公园)을 보고 난징역으로 바로 들어가는 루트였다. 친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루트를 짜려고 했다면 시행착오를 많이 겪을 수도 있었는데, 이 친구 덕에 길에서 엉뚱하게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었다.


계명사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불교 사찰이다. 다른 이름으로 고계명사(古鸡鸣寺)라고도 한다. 그 기원을 파고 들어가면 300년 서진(西晋) 시대라고는 하는데, 사실 그 당시에는 불교 사찰이 아니라 도교 사원이었다. 불교 사찰로 개종(?)된 것은 200여 년이 지난 남조 시대. 남량(南梁)의 양무제가 다시금 불교 사찰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다만 사실 지금 남아있는 사찰 건물은 당연히 그때 지어진 건물은 아니고, 80년대 다시 지은 건물이다. 남방 지역의 오래된 사찰 중 하나이고, 남조 시대에는 남방 지역 불교의 중심으로 기능했다고 하여 여행책에서는 꼭 가봐야 할 곳처럼 쓰여있었지만, 사실 가보니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사찰이었다. 글을 쓰면서 다시 찾아보니 최근에는 대중에 개방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사찰에 들어가려면 표를 사야 하는 줄 알고, 매표소에 가서 표를 샀는데, 알고 보니 표를 사면 향을 3개 무료로 주었다. 들어가서 위로 올라가면 나오는 향 피우는 곳에서 향을 올리면 된다. 이후 다른 몇 군데의 사찰에서도 표를 사면 향을 주었는데, 종교 관련 건물이라 영리 활동을 할 수 없어서 향 값을 받는 겸 표를 파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얼결에 중국 절에서 처음으로 향을 피워보게 되었다.



들어가서 몇 개의 건물을 지나 올라가면 대웅보전(大雄宝殿)이 나오고, 큰 탑이 보이는 자리에 향을 피우는 장소가 있다. 나같이 중국 절에서 처음으로 향을 피워보는 사람을 위해서 매우 친절하게 어떻게 불을 붙이고 어떻게 소원을 빌어야 하는지까지 다 쓰여있다. 앞에 보이는 탑의 이름은 소재연수약사불탑(消灾延寿药师佛塔). 줄여서 그냥 약사불탑이라고도 한다. 앞에 붙은 소재(消灾)는 재앙을 없애준다는 뜻이고, 연수(延寿)는 수명을 늘려준다는 뜻이니, 그냥 좋은 일만 생기게 해주는 약사불탑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재밌는 건 이 탑도 당연히 역사와 전통이 있는 탑이 아니고, 91년에 만들어진 탑이고 국태민안을 바라는 동시에 여행객과 분향객들에게 축복을 주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그 목적이야 좋지만, 진지하게 향을 올린 사람으로서 막상 탑이 별로 역사가 깊지 않다니 좀 허무해진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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