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1월 3일

꼭 29번의 잠 - 6 로마 트램3번종점+보르게세미술관+후회+떼베레강

by 윤에이치제이

꼭 5번의 잠, 로마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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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깨어 어젯밤에 도착한 생일 축하 메시지를 확인한다

너무 늦지는 않은 답을 하나하나 정성껏 보낸다

아직 나의 존재함을 축하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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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에 앉아 함께 식사 중인 아저씨의 아침은 커피와 비스킷이 다다

아침밥을 가장 든든하게 챙겨 먹는 스타일인 나의 앞에는

시리얼과 요거트와 스크램블 에그와 tea가 있다

아저씨 그게 아침식사인가요? 이탈리아 사람은 아침을 간단하게 먹어

한국 사람은 아침을 든든하게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아침 먹으면 뇌에도 좋아요 대신 배가 무겁잖아


이상, 오늘 아침의 대화





아무래도 꼭 늦가을 속에 있는 느낌이다

겨울 추위 속이라면 잡다한 생각과 감정의 노예가 될 여유가 없을 텐데

이 정취와 온도 속에서 쓸쓸한 기분이 된다

차라리 비가 쏟아진다면 좋아하는 빗속에 그냥 푹 잠길 텐데

흐린 하늘은 우울한 기분까지 더해 오늘 나의 시선은 모두 흑백사진이나 흑백 티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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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 트램 정거장에 서는 3번 트램을 타고 끝까지 가보기로 한다


서울에서도 부산에서도

속이 시끄러운 날엔 아무 버스에 올라 종점까지 가곤 했었는데

머리를 비우고 마음을 가라앉히는데 좋았다

지하철은 안된다 나는 정말 시급한 상황이 아니면 넉넉히 여유를 두고 나와

시간이 더 걸릴지언정 창 밖을 볼 수 있는 버스를 타는 것을 선호한다

로마에서도 빠르지만 답답한 지하철보다 버스가 좋고 버스보다는 트램이 좋은데

창밖을 볼 수 있는 건 당연하고 느린 완행열차를 타고 여행하는 기분이 들어서다

하나 더

서울이라면 익숙하니까 어디의 종점에 도착하든 돌아갈 방법을 찾을 수 있으니

겁이 날 이유가 그다지 없다 하지만 이곳은 로마 아닌가

그래서 트램이 또 좋다 트램의 끝과 끝은 그리 멀지 않다 길치인 나조차 안심될 만큼

더군다나 집 앞에서 탈 때의 트램은 북적거리지 않는다

그리하여 로마에서 트램을 탄다면 가장 추운 겨울 날씨에 의자에 앉아

천천히 스쳐 지나는 로마의 거리 풍경을, 걷는 것보다 편하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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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점에 내려 한적한 거리를 걷다 보니 큰 숲 공원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

공원은 언제나 좋지 도시 산책자에겐

도시의 풍경을 지우는 인위적이지 않은 숲과 잔디가 펼쳐진 길과 길과 길

그곳을 모르는 버스 정류장들을 지나치듯 방향도 모르고 하염없이 걷는다


걷다가 알게 됐다

내가 들어왔던 문은 어제 갔던 그 거대한 숲의 공원 빌라 보르게세의 다른 쪽 출구이고

(어제 지도 사진을 첨부했다시피 이 공원은 엄청 넓고 크다)

이 출구로 들어와 걷다 보면 공원 어느 안쪽에 보르게세 미술관이 있다

하지만 오늘은 미술관에 정식으로 입장하지 않고

(계획에도 없었고 예약도 하지 않았으며 그럴 기분도 아니었으니까)

미술관 외부 출입문으로 들어가 미술관 본관 주변의 외부를 산책하면서 다음을 기약한다


도시에서 자연으로 넘어온 건 좋아하는 우연이지만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는다

그냥 터벅터벅 걷다가 어제의 포폴로 광장과 이어진 입구 쪽으로 다시 나온다

어제는 스쳐 지나간 (식수로도 음용이 가능한) 분수는 의무적으로 찍고

상점과 사람들이 드문 스페인 광장의 다른 골목길로 들어서 또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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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후회하고 있는 것은 두 가지다

그중 하나는 여행에 있어 지대한 비중을 차지하는 숙박의 문제

나처럼 겁이 많은 사람이라면 불편을 감수하고 나와 같은 선택을 해도 되지만

한 달이라는 기간 동안 현지에서 일상처럼 살아보길 원한다면 제발

모든 공간을 내 것처럼 사용할 수 있는 독채를 빌려 지낼 것을 당부한다

원화로 120만 원가량의 28박 숙박 비용은

로마라는 최대 관광도시의 특성상 비싼 값을 치렀다고 할 수는 없지만

공유 숙박 사이트를 잘 이용한다면 더 경제적이고 유용하고 무엇보다

낯선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 픽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후회를 잘하는 편이라서 연연하지 말자는 주문을 자주 외우는 사람이지만

4번의 잠을 자는 동안 아직은 후회를 시원하게 밀어내지 못하고 있다


또 하나는 아주 작은 후회라서 곧 잊을 수 있다

흔하디 흔하지만 로마여서 흔하지 않은 맥도널드에서 오늘 점심을 먹은 것

굳이 이곳에 들어온 것은

이탈리아는 스타벅스가 들어오기 가장 어려운 관문이었듯

맥도널드 역시 마찬가지였을 텐데 이제 로마도 그 단단하고 굳건한 문이 열린 것이 아닌가

그런 의미를 떠올렸기 때문이고 먹는 호기심보다 보는 호기심에 끌려 발을 들인 것이다

하지만 로마의, 라는 기대와 달리 서울의 매장보다 (당시에는) 첨단을 달리는 내부는

편리하긴 하지만 보는 아쉬움이 컸고 더하여

사진과 전혀 다른 햄버거의 실물에 또 한 번 (나쁜 의미로) 놀라고 말았다

괜찮다 아마 다시 오지는 않을 것이어서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테니


어쨌든 부피가 크고 깊은 후회와 별 것 아닌 후회에 대한

쓸데없이 긴 생각의 타래를 맥도널드에 들어앉아 미리 일기의 어느 페이지로 적어 내려가며

우울한 기분을 흑심에 실어 날려보려고 노력했지만 이 또한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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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집에 들어가기는 싫어서 또 다른 골목길로 정처 없이 걷는데

떼베레 강 어느 한 편이 나온다

지도 따위 없이 방향 따위 고려하지 않고 그냥 걷다가

그래서 다시 찾아가겠다고 마음먹어도 이곳에 또 닿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그건 아무 문제도 아니다 문제는 지금의 마음 상태

떼베레 강마저 왜 이렇게 회색빛일까 오래된 도시의 낡은 돌다리 아래서


마음도 시야도 온통 흑백이 회복되지 않는다 돌아가야겠다

버스 정류장을 찾는다 찾은 정류장은 포폴로 광장의 다른 쪽 바깥이다

여기서는 어떻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을 종잡을 수 없을 때는 떼르미니로 가면 된다 언제나

그렇게 590번 버스를 타고 떼르미니 역으로 가서 집으로 데려다 줄 14번 트램에 올라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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