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1월 10일

꼭 29번의 잠 - 13 로마 사피엔자+젤라또+도서관+위험한놈+트래비분수

by 윤에이치제이

꼭 12번의 잠, 로마 13일




+++


이탈리아 남자를 조심하라

10여 년 전 여행 때 이미 새겨듣고 이미 경험한 바

그럼에도 나는 왜 더 단호하게 처신하지 못했을까 심심함과 외로움 사이

그 어디에서 잠시 정신을 놓았나





시작은 아저씨였다

선을 넘은 농담을 하기 시작하더니 언제는 직업을 물었고

그거야 말 못 할 바 아니니 대답을 했었는데 오늘은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질문을 연거푸 해댄다 남자 친구와의 관계라던지

일찍 나가야 한다고 했다 대화를 마무리한 내 표정을 눈치껏 읽었기를


+


오늘은 로마의 대학교 사피엔자(로마 라 사피엔자)에 가보려는 계획을 잡았다

우리네 대학 캠퍼스와 같을까 어떨까 TV에서 봤던 그런 모습일까 어떨까

호기심이 생겼으니 해결하기 위해서

캠퍼스란 말은 졸업한 지 오래여도 늘 설레지 않는가


트램을 타고 가는데 목적지를 두 정거장 남겨두고 내렸다

날씨가 좋았고 창 밖의 풍경이 끌어당기면 잠시 내려버리는 건 나에게

특권과도 같은 자유로움 그 어떤 것이니까

또 두 정거장 정도는 슬슬 걸어가도 괜찮은 거리라는 걸 이제는 안다


내린 곳에는 추모공원이 있었다

소담하지만 누군가의 소중한 사람이 고요히 잠들어 있는 곳

그들의 평안을 위해 아주 짤막한 기도를 올린다

다시 천천히 걸었다 사피엔자와 추모공원 사이에는 자판이 벌려져 있다

상상하던 대학가 주변 풍경은 아니다


Sapienza - Università di Roma

대학의 입구인 것 같은 곳에서 경비 아저씨께 확인을 하니

의대와 병원과 대학 본관까지 연결되어 있으니 여기로(병원 입구) 들어가면

된다고 말해 주신다 어쩌다 병원을 가로질러 본관까지 걷는다

상상하던 대학 캠퍼스 풍경도 아니다


찍은 사진이 별로 없다 설렘이 증폭되다가 순식간에 펑 터져 사라졌다

벤치에 잠시 앉아 있다 나왔다


IMG_2728.JPG
IMG_2731.JPG
IMG_2748.JPG
IMG_2749.JPG
IMG_2752.JPG
IMG_2757.JPG
IMG_2758.JPG
IMG_2760.JPG
IMG_2762.JPG
IMG_2763.JPG
IMG_2765.JPG
IMG_2768.JPG
IMG_2769.JPG
IMG_2773.JPG




첫날 발견했던 젤라또 가게 파씨에 이제야 왔다

쌀 젤라또를 먹었다 겨울에도 맛있는 젤라또

사실 로마는 상점이나 마트나 레스토랑 같은 곳이 제일 따뜻하다


로마에 있는 동안 장난감 같은 앙증맞은 차를 자주 보게 되고

마트에서는 갈 때마다 그날 먹을 만큼의 과일을 사게 된다


IMG_2777.JPG
IMG_2732.JPG
IMG_2759.JPG
IMG_2779.JPG
IMG_2780.JPG





이제 다음의 목적지는

좀 더 빨리 올 계획이었다가 미뤄진 국립중앙도서관이다

Biblioteca Nazionale Centrale di Roma

외국인 방문자도 방문증을 끊고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고 해서

미리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벌써 로마에 온 지 1/3이 지난 지금에야 왔다


외부 출입문은 누구나 들어갈 수 있고 본관 안에 들어선 후에는

방문증이 있어야 도서관의 모든 시설의 이용이 가능하다


방문증을 만드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고 까다롭지 않다

우선은 담당 사무를 보고 계신 분을 따라가 신분증(여권)을 주면

그가 컴퓨터에 기록을 하고 나는 방문증 발급에 필요한 서류를 수기 작성한다

그다음엔 즉석으로 사진을 촬영한다 (여권 못지않은 못난이 증명사진 주의보)

그러면 사진을 입힌 플라스틱 카드 방문증이 그 자리에서 바로 나온다

(우리나라 운전면허증이나 주민증과 거의 흡사하게 생겼고

프랑스의 나비고라는 정기 지하철 이용 카드 만드는 방법과도 유사한 듯하다)


이제 다시 출입구 쪽으로 가서

신분증(여권)을 맡기고 사물함 열쇠를 받는다

노트나 필기구 정도의 (노트북 가능) 필요한 것만 챙기고 배당받은 사물함에

다른 모든 소지품을 넣어둔다 (가방 반입 금지 책 반입 금지)

이제 방문증을 찍고 통과해야 하는 회전문 앞으로 가서 잘 찍고 들어가면 된다

나는 하드커버의 노트와 필기구를 들고 입장하려 했는데

회전문 입구에 있던 직원이 내 노트가 책인 줄 알고 일단 저지한다

책을 갖고 들어가면 도서관 책과 헷갈려서 반입이 안 되는 것 같다

백지의 빈 노트를 펼쳐 보여주니 바로 들어가도 된단다 처음이라

방문증을 찍고 회전문을 돌리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좀 헤맸고 좀 도움을 받았다

(이 방법이 상상과는 다른 방식이다 이후로는 혼자서 곧잘 해냈다)


다음에는 노트북을 꼭 가져와서 이것저것 하고 싶은 걸 해야지

미래의 계획을 머릿속으로 세우며 준비 안된 오늘은 도통 내용은 알 수 없는

이탈리아어로 쓰인 로마라는 도시에 관한 사진과 글이 채워진 책을 책꽂이에서 빼와

근사한 통창이 있는 곳 앞에 놓인 개인 책상과 의자가 마련된 좌석에 앉아서 열심히 본다

기분이 특별하게 좋았다 이건 왠지 정말 일상인 것 같으니까

우리와 다르게 도서관마저 전혀 따뜻하지 않은 로마의 일관성에

잠깐 헛웃음이 났지만 말이다


오늘은 일종의 사전답사니까

오래는 있지 않고 1시간이 조금 넘게 사진 위주의 책을 보다 나왔다

든든한 방문증 덕에 당당하게 출입할 수 있는

그들과 동질화된 착각의 기분을 그냥 내 마음대로 만끽하면서

이제 사물함에서 짐을 꺼내 열쇠를 반납하고

여권을 받는다 그렇게 나름의 어려운 일 하나를 마무리하고 나니

어디선가 커피 향이 풍겨온다 홀린 것처럼 그곳을 찾아간다

카페가 있을 줄 알았는데 그 자리에는 커피 자판기가 있다

어디선가 봤다 이탈리아는 자판기 커피도 맛있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자판기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벽에 기대어

앞사람이 커피 뽑는 걸 유심히 지켜봤다 믿기 어려우면 직접 경험해보려고


자판기 커피 맛은 어땠을까 나도 모른다

그 맛 한 번 볼까 벼르고 있었는데 정작 자판기 앞에는 서지도 않고

예상치 못한 시간과 사람과 사건(?)에 휘말려버리게 되었으니까


IMG_2785.JPG
IMG_2787.JPG


+


이곳, 도서관, 자판기 앞에서 두 번째 상황이 시작되었다


언제부터였는지 옆에 서서 중얼거리는 음성은 나를 향한 목소리인가?

나가서 10분 정도만 걸으면 더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 있는데 진짜 커피

나도 알아 그런데 이 자판기 커피를 한 번 마셔보고 싶은 거야

나의 짧은 영어 너의 생소한 발음 그런데도 어찌어찌 대화는 이어진다 늘 그렇듯

얼결에 따라나서고 있다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닌데

생각과 다르게 상황이 서둘러 전개되고 있다 계속되는 독촉과 앞선 걸음에

단호한 거절의 타이밍을 놓친 것이다 놓친 것일까 핑계를 대자면

도서관이었고 거기서 나쁜 사람을 만날 수는 없을 것 같았으니까


Bar에 가는 중이란다 모르면 오해하기 딱 좋은

우리가 쉽게 연결 짓게 되는 술을 파는 Bar가 아니라

물론 술도 있겠지만 커피와 잡다한 간식거리들을 모두 파는 곳이다

건전한 곳 그러니까 이렇게 낮에 가도 아무 상관없는 곳

가는 동안은 통성명을 했고 (앞으로 편의상 그의 이름은 '엘'이라 하고)

그에게는 어려운 이름 대신 나를 '윤'이라고 부르라 했다


도착한 곳에서 그는 묻지도 않고 커피를 주문했고 곧

라바짜 원두를 써서 내린 카페 룽고가 담긴 작은 커피 잔이 내 앞에 왔다

룽고, 따라 해 봐 까페 룽고 라바짜, 아니 라바찌아

내가 아는 걸 알은척 해도 소용없이 내 영어식이거나 콩굴리쉬식 발음을

이탈리아어 발음으로 교정하며 학생 가르치는 선생처럼

자꾸 자신을 따라 단어들을 발음하게 한다

너는 왜 안 마시니? 나는 티를 마셨어 상관 말고 마셔

자신은 Rock을 한단다 뮤직 록을 말하는 건가 아니 아니 Law

한참만에 알아들었다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네가 법대를 졸업하고 공부 중이라면 내가 누나거든

그걸 들먹였다는 건 아니고 처음부터 쭉 엘은 나이니 직업이니 그런 건

묻지도 않았다 나도 물론이었지만

이만 갈까? 난 오늘 계획이 있어서 그러자 근데 로마엔 얼마나 있을 거야?

한 달 정도.. 여기 공부하러 온 거야? 아니 여행 중

여행이 끝나면 한국으로 돌아가? 아니 프랑스로 가게 될 거야 멋지네 그런가?

멋진가.. 저마다의 이유가 있긴 하지 이 여행의 시작이 그저 멋지지만은 않았지만

그렇다고 행복하지 않은 건 아니니까 오히려 그 반대니까 그의 입장에서의 표현을 인정한다

어쨌거나 커피 양이 많지 않아서 다행이다 이 시간이 더 길어지지 않아서 천만다행

왜냐면 나는 조금 불안해지기 시작했었다 그게 무슨 이유든

엘이 먼저 일어나 계산을 하려 하길래 얼른 쫓아 가 사양했다

내가 마신 커피는 내가 계산할 거야 (선 긋는 거다)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가려는 길에서 횡단보도 없는 넓은 도로 양쪽을 살피다가

지나가는 차가 없을 때 엘은 별안간 내 손을 잡고 길을 건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후로도 엘은 잡은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너는 나의 보이프렌드가 아니잖아

이탈리아에선 친구끼리도 흔한 일이야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아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깍지를 끼려고 해서 이번엔 단호하게 손을 뿌리친다

기분이 좀 상한 것도 같다 나의 추측이다

네가 좋아 우리 만난 지 30분도 안됐어 상관없어 그게 뭐 중요한가?

이건 좀 다른 차원이다 밑도 끝도 없이 좋아한다니

난 남자 친구가 있어 이탈리아에 있어? 아니 한국에 그럼 난 이탈리아 보이프렌드

뭐지? 이 당당함과 이 뻔뻔함은

오늘 아침 아저씨에게도 그렇고 지금 엘에게도 그렇고

여행 전에 헤어진 남자 친구를 안전한 울타리로 이용했다 이 구역으로

넘어오지 마, 라는 경고가 담긴

그런데 그게 그다지 잘 먹혀드는 것 같지는 않다

이제 뭐 할 거야? 나는 이제 스페인 광장으로 갈 거야

너는 도서관으로 돌아가고 나는 지하철을 타러 가고

엘이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적어 준다

(이탈리아에서 사용하는 무료 메신저 앱도 굳이 알려준다)

전화해 꼭 전화해줘 X 5 생각은 꼭 해 볼게 x 5

제법 끈질기다 이제 마지막으로 작별 키스를 해 달라고 한다

이건 순전히 얘네들만의 인사가 확실한 건가 지난 여행에서도 괜한 말을 섞은

이탈리아 남자가 기차 타는 플랫폼까지 따라와 끈질기게 작별 키스를 요구해서

결국 이마에 키스하는 것으로 겨우 짐을 돌려받았었는데

그런 건 아니겠지 뭐 작별을 위한 볼 키스 정도야 인사일 뿐이고 그거라면 이미

독일에서 두어 번 로마에서 벌써 서너 번 한 이력이 있는데

인사를 하려고 다가갔는데 가볍게 입술이 두 번 닿았다

진짜다 이것도 진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도서관을 또 가긴 가야 하는데 다음엔 다른 옷을 입고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빠른 걸음으로 일단 도서관으로부터 멀리멀리 걸었다

조금만 변화를 줘도 어쩌면 아마도 그 때문에

행여 나와 마주쳐도 나를 못 알아볼 수도 있어 나도 그렇고

기분이 나쁨과 좋음 중 나쁨에 좀 더 비중이 실린 그 어딘가에서

당황스러웠고 정신이 영 혼란스러웠다






스페인 광장에 가지 않고 트래비 분수 Fontana di Trevi 로 왔다

애초부터 스페인 광장은 일정에도 없었고 단지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생각난 대로 뱉은 장소일 뿐이다

지난밤에는 찾지 못한 트래비 분수를 오늘은 그 혼란스러운 중에도

잘 찾아왔다 길을 찾을 때는 그나마 정신을 집중해야 했으니까

집으로 가지 않고 이곳으로 정처 없이 도착한 건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로마로 돌아오기 위해 던진 동전 하나의 약속이 오늘 지켜지고 있다

바쁘게 발도장을 찍었던 때와는 다르게 여유로움 가득히

분수를 바라보는 이 시간이 고맙다 사람이 무척 많은데도 그런 건

그다지 신경 쓰이지도 않는다 아름다움 앞에선 인파와 소음이 일시정지되니까


그런데 이 귀한 고요 속에서 세 번째 상황이 생겼다


분수대를 바라보고 있는데 모르는 남자가 옆에서 자꾸만 말을 건다

혼자 여행 왔다면 동행하고 싶다고

상황이든 기분이든 더 꼬이기 전에 서둘러 자리를 뜬다

이럴 땐 다음이 있는 게 참 다행이고 다행이다


IMG_2791.JPG
IMG_2796.JPG
IMG_2801.JPG
IMG_2811.JPG
IMG_2814.JPG
IMG_2815.JPG


+


긴 쉼표 없이 훅 들어온 네 번째 상황


정거장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 노선을 찾고 있는데

어디로 가냐고 묻는 청년 혹은 그 이상의 남자

대충 집 아닌 근처 아무 목적지를 말하니 아는 곳이라고 같이 가준다고 한다

71번 버스를 타면 된다며 그렇게 옆에 바짝 붙어 있다가

버스가 오자 타자고 하는데 조심해서 나쁠 것이 있나 그게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당시의 나는 위험을 감지했고 버스를 따라 타지 않았다

먼저 탄 버스 안에서 버스 밖의 나를 보고 난감해하는 눈동자

미안 너의 의중을 모르겠거든 그리고 그 의중이 궁금하지가 않거든

나는 오늘 이 상황들이 피곤하다



+


+

긴 일기 쓰기를 끝내고 잠을 청했는데 도통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가

다시 추가 일기를 쓰려고 조명을 켰다 그 시작 am 3:43

그렇다면 이제 10일이 아니라 11일이지만 10일의 잠과 이어진 어둠 속이고

또 10일과 이어진 일기이고 또 10일의 일들 때문에 이 지경 이 상태인 거니까

그냥 일기와 다름없이 오늘의 자리에 글을 추가하려 한다


잠 때를 놓치면 다시 잠들기가 힘든 스타일이긴 하지만

유난히 오늘은 정적의 밤을 지배하는 모든 소음이 귀에서 최대 볼륨으로 웽웽거린다

물론 잡생각이 많아서기도 하다 나는 꺼림직하다 싶으면서도 지금

그 전화번호에 대해 그 후속조치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결국 결론도 없이 날을 밝아왔고 진짜 다음 날의 해를 맞이하고 말았다

내일은 예보된 앞으로의 날씨 중 가장 맑고 따뜻한 날이라서

좀 먼 일정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이런 제기... 찰...


그래도 이불속에서 내내 뒤척거리다 새벽 어느 결에 잠이 들긴 했다

내일의 나의 하루는 아주 늦게 시작되겠구나 걱정하다가

이전 12화그, 1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