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1월 13일

꼭 29번의 잠 - 16 로마 수도교+집중호우+세번째도서관&재회+...

by 윤에이치제이

꼭 15번의 잠, 로마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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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좀 나으니 아주머니가 좀 아프시다

아저씨 바이러스가 퍼진 것 같다고 농담하신다

방에는 두 개의 싱글 침대가 있어서 한 곳에선 자고 한 곳에선 일기를 썼는데

아주머니께 침대를 붙이고 싶다고 부탁드렸다 문제없다고 하신다

왜 이 생각을 이제야 하게 됐을까


아침 식사는 혼자 천천히 하고 싶었으나

아주 드물게 머물곤 하는 옆 방 게스트가 어제 1인 입성했고 오늘 아침

식탁 앞에 아주 오래 머무는 바람에 결국 겸상을 하게 됐다

그는 무표정으로 질문이 많고 내 대답은 오지랖퍼 아저씨가 선수 치신다


예보된 비가 아침부터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우산을 챙기고 나갈 준비를 하면서 굳이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이젠 책을 읽고 있는 그에게 사과의 문장을 건넨다

식사 후에 독일어로 인사를 했는데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우린 독일어를 사용하지 않아 단호하게 대답했었다

오스트리아 여행 중에 독일어로 인사를 해서 그런 거였는데 내가 뭘

잘못 안 건가 싶었다 그 얘기를 함께 건네니

이제야 표정이 풀어지며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고 한다

오스트리아가 아니라 오스틴에서 왔단다 텍사스주에 있는

그랬던 거구나 오해가 풀리고 표정이 풀려 어쨌든 다행이다

함께 집을 나와 서로의 좋은 여행을 응원한다





보다시피 짙은 구름이 장악한 하늘에서 해가 영 힘을 못쓴다

어제부터 내린 비는 간간히 계속되고 바람은 몹시 분다 다행히 기온은 올랐다

지하철 끝자락에서 내린 후 (아주머니가 말해 주었던) 거대한 쇼핑센터에서

드디어 나머지 한 개의 햄버거 체인까지 세 개 모두를 목격했다 로마에서

쇼핑센터에 잠깐 들러 구경을 하다가 (가방 좋아하는 나는)

마음에 드는 가죽 노트북 가방을 발견하고 굳이 이 먼 곳의 쇼핑센터 품목까지

찜 목록에 저장해 둔다 로마의 시간이 다해갈 때 스스로에게 선물할

쇼핑 데이의 그날을 위해서 (그리고 오늘의 목적지는 쇼핑센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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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도착한 곳, 로마의 수도교

Parco degli Acquedotti

로마의 거대한 수로를 보기 위해 이곳에 왔다

오래전 여행에서는 가지 못해 꼭 와야겠다고 생각한 곳인데 세상에

이제 입구에 다다랐을 뿐인데 벌써 심장이 웃고 있다


다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짙은 회색의 구름 밑, 길게 이어진 낡고 오래된 거대한 돌덩어리들의

끝없는 일렬과 그 아래 어울리는 듯 아닌 듯 드넓은 푸른 잔디 위의 셀 수 없는 양 떼

내가 지금 무얼 보고 있는 거지


이 광활한 곳에 나와 양 떼들이 전부인 기막힌 상황을 즐기고 있는데

멀리서 터벅터벅 걸어오는 유일한 사람은

그 수많은 양 떼들을 아주 손쉽게 통솔하는 유일한 양치기

멀리서 나에게 손인사를 하고 양들을 향해 선 아저씨가

드넓은 잔디와 끝없는 수로와 셀 수 없는 양 떼와 거기에 그의 등 뒤 커다란 나무와

조화롭게 어우러져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것만 같다 고흐나 모네의 화폭 속


긴 긴 수로를 따라 전진하다가 무너진 수로의 일부를 마주하고

양치기의 농가일, 이곳처럼 외롭고 삭막해 보이는 돌집을 안쓰러워하는 사이에

빗방울은 빗줄기가 되고 빗줄기는 순식간에 기세가 대단해졌다

쏟아지는 비로 시야에도 카메라 렌즈에도 풍경은 뿌옇게 흐려졌고

순식간에 옷과 가방과 신발까지 몽땅 젖어버렸다


내일 꼭 다시 와야지 내 마음 상위에 랭크되어버렸기에

두 번째의 만남을 진지하게 결심하며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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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을 타고 와 내린 곳과는 달리 버스를 타러 온 곳은 번화한 주택가였는데

서울 외곽의 신도시 느낌을 로마 외곽의 이곳에서 느낀다

빗줄기가 점점 거세져 보관에 특화된 3단 우산은

비바람에 맥없이 꺾이는 거대한 나무의 잎사귀처럼 마구 나부낀다

무엇보다 푹 젖어버린 운동화 속 발이 점점 얼어가고 있다


집 근처로 가는 안면 있는 590번 버스는 배차 간격이 상당히 길고

젖은 몸이 느끼는 기다림도 어느 때보다 길다

버스 정류장이 있는 길은 좁고 오고 가는 사람들이 어깨를 자주 부딪힌다

가만히 서서 버스를 기다릴 뿐인데 길을 가로막는 꼴이 되는 것 같아

살짝 비를 피할 수 있을 것 같은 옷가게의 통창 아래로 들어가 우산을 접고 선다

윙- 서자마자 들려온 소리에 위를 울려다 보니 넓은 차양막이 쳐지고 있다

뒤를 돌아보니 가게 안에서 사장인지 점원인지 그가 빙긋 웃어준다

이탈리아 남자들의 친절을 조심해 며칠 전부터 아주머니가 계속 주의를 줬는데

별 마음 없는 지금의 친절은 그저 감사할 뿐이고 까닥 고개 인사로 그 마음을 전한다


기다림이 1시간이 되기 전에 도착한 버스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로마의 도심과 외곽을 연결하는 버스여서인지 기다린 시간보다

더 빨리 버스는 씽씽 달린다 시외버스나 고속버스를 탄 줄 알았다

지하철에서는 밖이 보이지 않아 몰랐던 풍경이었고

버스에 타 있는 동안 어마어마하게 쏟아붓던 비는 잦아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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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싸늘한 방도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아침에 아주머니께 부탁드린 대로 싱글 침대 두 개를 붙이고 새 이불로 교체된 침대가

포근한 자태로 나를 맞아 주었다

이제 차렷 자세 안 하고 실컷 뒹굴거릴 수 있게 됐다 신난다!


빗물에 푹 젖은 몸을 따뜻한 샤워로 달래주고 나니 살 것 같았고

감기가 재발되지는 않을 것 같았고 컨디션이 다시 쭉쭉 올라갔다

그리고 아직 비가 완전히 그치지는 않아서 쉴 법도 한데

아직 비가 완전히 그치지 않아서 도서관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비 오는 통창 앞에 앉아 있고 싶다는 소망을 현실화시키기 위해서


아주머니께 젖은 옷의 세탁을 부탁드리고 (세탁비는 10유로로 따로 지불)

다시 외출 준비를 하고 바삐 나섰다 pm4시가 되어가고 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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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비가 내리는 날 도서관에 왔다

나의 지정석은 비어 있었다 정말 다행이지 오늘은 모든 게 좋다

간단히 지갑과 노트와 필기구만 챙겨 자리에 앉아

빗방울이 창을 타고 흐르는 걸 자주 바라보면서

미리 오늘 일기의 일부를 써 내려가며 행복한 기분을 만끽한다

오래 머물기 위해 온 건 아니었고 pm7시가 되어가자

내가 있는 열람실은 마감시간이니 퇴실 준비를 하라는 방송이 들려와

이만하면 충분하다 싶었고 때에 따라 조금 위험할 수도 있을

로마에 와서 정점을 찍은 희귀한 감정의 상태로 귀가를 준비했다

방문 출입구를 지나고 사물함에서 물건을 챙기고 여권을 돌려받고

여기까지가 아주 바람직한 오늘 일정의, 오늘 에피소드의, 끝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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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행이 시작된 후

보름 정도 친구와 크리스마스를 한껏 즐기는 시간들이 좋았고

홀로 된 다음에도 얼마간은 혼자여서 좋았다

그러다가

진짜 크리스마스에 부쩍 가까워지고 한 해가 끝을 향해 달려갈 때

아름다운 자연 속 소도시에서는

친구와 연인과 가족들이 행복하게 그 시간들을 보내는 모습들을 보며

함께, 즐겁게, 이 두 가지 조건 모두에 부합되지 않음에 대해

외로움이 컸다 친구들과 가족들이 많이 보고 싶었다

그러다가

로마에 도착해 새해를 맞고 다시 또 한 해가 세팅되어가고 있을 때

도시에서 생활을 하는 또 다른 경험과 기분에

얼마간은 좋았다가 여기서는 지난 외로움과 다른 형태의 외로움을 느꼈다

가족적이었던 독일에서의 모습과 달리 이탈리아의 그들은

언제나 어디서나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에 대한 애정을 마음껏 드러냈고

사방천지에서 그 모습이 목격되지 않는 곳이 없다보니

얼마 지나지 않은 이별의 선 상에 놓인 이는

(원래 이별 후 얼마 안 되었을 때가 가장 괴롭고 힘든 법이지 않나)

그 모습이 지나치게 부럽고 그들 때문에 부쩍 외로웠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본관을 나와 더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걷고 있는데

hey hello 뒤에서 누가 자꾸만 누군가를 부른다 그게 나라는 생각은 못했다

그런데 이제는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치고 내 앞을 막는다

인사했는데 왜 그냥 가? 누구세요? 나야 엘, 나 잊어버린 거야?

다소 황당했던 첫 만남이었는데 역시 두 번째 보니 또 다른 사람 같아서

한참 긴가민가 했다 아, 안녕 미안

그때와 다른 복장 다른 머리 스타일이라 그는 나를 못 알아볼 거라

생각했는데 아시아인이 거의 없는 그곳에서 그건 나의 판단 착오였던 것 같다

사물함 앞에서부터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그랬구나

나오기 전에도 인사 건넸는데 쌩 지나가더라고 미안

결국 만났네 운명인가 (속마음 대답) 여긴 운명을 운운하기엔

장소는 너무 좁고 만남의 확률은 너무 높잖아


커피 마시러 가자고 했다 추워서 집에 가고 싶다고 했지만

확실히 거절하던지 어느 정도는 맞장구를 쳐주던지 사이에서

후자를 택하고 말았다 친구로는 좋다고 선을 정했지만 대답은 듣지 못했다

낯익은 길을 건널 때 내 손을 잡던 그의 손은 이제 어깨를 감싼다

에스프레소와 룽고 시시콜콜한 대화

오늘 나랑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면 어때 아니야 집에 갈 거야

알았어 그럼 내일 만나자 pm3시 아니면 pm6시 차 가지고 데리러 갈게

미안 내일도 계획해 놓은 일정이 있고 pm 6시면 늦은 시간이야


외곽에 사는 엘은 떼르미니 역으로 가서 전철을 탄다고 했다

다른 방향인데 내가 가는 걸 보고 가겠다고 했고 같이 내가 탈 지하철을 기다렸다

역에 오는 동안도 엘은 계속 내일의 약속을 부탁했다

당장은 대답할 수 없어서 결국 메신저로 답하기로 합의를 봤는데 그게

실수였는지도 모르겠다 전화번호를 받았었지만 내 번호를 알려 주는 건 아니었는데


전철을 기다리며 나란히 벽에 기대어 있다가

엘이 내 앞으로 돌아서서 나를 아주 가까이에서 내려다본다

나는 사람 눈을 잘 피하지 않는다

수업 시간의 선생님의 눈이든 대화하는 친구의 눈이든

아무 말 없이 바라보는 연인의 눈이든

나는 사람과 사람 간의 눈맞춤을 좋아한다 너의 눈도 그래서 피하지 않는다


로마에서 머무는 날짜는 늘어나고 그래서 로마를 떠나야 하는 날짜는

점점 가까워 오는데 그게 서로 다른 이유로 조급한 것 같다

내일은 꼭 만나줘 연락해야 해

조금만 생각을 더 하고 금방 연락할게 솔직히 나는 제법 정직한 사람이라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그래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 그렇지만 친구라면 좋아

그래 그럼 친구로 만나 그러니까 꼭 전화해 내일 꼭 만나

전화하라는 말과 내일 만나자는 말을 내가 알아들었는지 몇 번을 확인한다

내게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솔직히 저돌적인 고백은 늘 나를 한 발 물러나게 했다

딱 한 번 나와 어울리지 않는 연애에 덤벼들었다가

태어나서 겪어보지 못한 감정의 소용돌이와 목청만 높아지는 의미 없는 싸움에

자주 휘말리는 경험을 했었다 짧았지만 잔잔한 인생에 새겨진 폭풍 같은 기억이었다

물론 시간이 흐르고 나니 그 연애의 추억은 나쁜 것보다 좋은 게 남긴 했다

새로운 경험이 준 추억이 짙게 새겨졌었나 지우기 힘들 정도로


네가 타야 하는 지하철이 곧 올 거야 헤어지기 전에 인사할 수 있게 해 줘

코가 닿을 듯 간격 없이 훅 들어온 파란 눈동자가

나의 시선의 사정거리 안에서 꽉 찬다 순간 아찔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내가 아는 우주에는 없던 새로운 행성이 눈앞에 나타난 것 같은

어릴 적 남동생이 가지고 놀던 유리구슬 중에 유난히 영롱하고 아름다운 유리구슬을

지금까지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데 그 유리구슬을 보는 특별한 시선과 감정이

이 파란 유리구슬을 보는 지금 그대로 느껴지는 것 같은

정신이 혼미해졌고 작별의 인사가 길어지고 있었다

나는 내가 정한 선을 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는데

그 문제의 파란 눈동자에 정신이 홀려 잠시 이성을 잃고 있었다

길어지던 작별의 인사가 깊어지려고 할 때 정신이 확 들었다

엘의 어깨를 가볍게 밀었다 우리 인사하는 거였잖아

너는 너무 겁이 많아 네 마음의 뭐가 문제야

우린 너무 다른 사람들이야 네게 아무 문제 아닌 게 내겐 문제일 수 있어

사람은 다르지 않아 마음이 아니라 머리를 따르려는 게 너의 문제야

나는 그런 사람이야 그러니까 너의 감정의 속도를 내게 강요하지 마

미안해 네게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걸 알겠어 그러니 만나 우리 만나서 얘기해 꼭


지하철 유리창 밖의 그에게 손을 흔드는 나의 표정은 아마도

무표정에 가깝다 그에게 내 기분이 좋을 리 없다고 확인시켜 줄 필요는 없었는데

나도 모르게 딱딱해졌다 제 감정에 충실한 그와 매 순간 이성이 앞서는 나는 다른 부류일 뿐

내가 엘의 생각과 마음을 오해하고 있을 수도 있어 조금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확실히 내 단단한 벽은 지난번보다 조금 더 무너졌고

투명한 파란 빛깔의 눈동자가 내 벽에 작은 구멍 하나를 냈다

하루 만에 정리되었던 마음이 재회로 인해 무용지물이 되려고 하나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에 서서 어느 쪽으로 갈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살면서 감정의 동요가 전혀 없을 수는 없지 낯선 곳에서도 일상은 계속되고 있고

이렇게 큰 폭으로 날뛰는 감정들이 이상할 것 없을지도 모르지 그래도

여행인지 삶인지 헷갈리면 안 된다


집으로 돌아와 잘 준비를 하고 와이파이를 켜니

메신저로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엄청나게 들어와 있다

생각 좀 하게 날 좀 놔두면 좋겠는데

철학적 의문과 보채는 아이 같은 문장들이 쏟아져 있는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는데

전화벨이 울려댄다 여긴 나 혼자만 있는 곳이 아닌데 말이다

골 난 어린아이에게 사탕 물려주듯 일단 내일 보기로 하고 전화를 끊은 후

장문의 거절 메시지를 적어 보내고 와이파이를 꺼 버렸다

(일방적이어서 미안하지만 나는 막 좀 질려버렸다)


아직 잠들지 않은 새벽

와이파이를 켰다 내 의중을 알았겠지 또 앞다퉈 튀어나오는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들

나와 참 다른 사람의 의중과 지금의 심정을 추측하기가 힘들다

상처받았나 결론적으로는 미안하다는 말과 떠나기 전에 한 번은 연락을

달라는 풀 죽어 보이는 마지막 글에 내가 너무했나 싶었다가

더 이상 남은 시간들을 날뛰는 감정의 주파수에 망치기 싫어서

잘 했다는 결론으로 더 이상의 생각을 접었다

이제 내일을 위해 잠들어야만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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