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3.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나는 너에게서 순순히 물러선 대가로 너의 곁에 계속 남아 있을 수 있었다. 너에 대한 내 마음을 모두 접은 것처럼. 그게 잘 감춰졌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야 내 이름을 불러줄 테니까. 이런 나를 보던 너의 마음은 어땠는지 나는 모르겠다. 나에게 말해주지 않아서. 아니면 내가 너무 멍청해서 너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는지도.
‘나’라는 그 봄날의 수선화
너는 그날 이후 일정한 반경 이상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완전히 닫아버리지도 않았다. 왜? 혼란스러웠다. 무심한 듯 다정했고, 다정한 듯 무심하게 나를 대했다. 그러면서도 내 이름을 부르는 네 목소리는 나무 사이로 비치는 봄날의 햇살처럼 따뜻했다. 여전히 나의 말에 입술 끝만 살짝 올려 웃는 너는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변덕스러운 봄날의 햇살이었다.
수선화는 해바라기처럼 태양을 바라보는 듯 보이지만, 실은 햇빛을 향해 스스로 몸을 틀어 자란다고 한다. 봄날의 햇빛은 그저 있는 것이고, 수선화는 그 아래에서 제 나름대로 햇빛을 향해 몸을 비틀어 자라는 것처럼,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너를 양분 삼아 곧게 자란 수선화는 그런 의미에서 나였다. 봄날의 햇빛은 자신을 바라보며 핀 수선화가 필요하지 않았다. 알면서도 자꾸만 미련하게도 너에게 향하는 내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다.
너에게 필요한 사람이고 싶었다. 나는 네 마음에 내가 들어갈 작은 틈이 있길 바랐다. 그 틈에 비집고 들어가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꽃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너는 나라는 꽃이 필요치 않은 줄 알면서도 자꾸만 욕심이 났다. 내 마음 가는 대로 너를 담았다. 그러면서도, 마치 담지 않은 것처럼.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아무렇지 않은 듯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았다.
이 순간들마저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서 조금이라도 더 오래 네 곁에 머물고 싶어서. 그래서일까. 나는 너와 언제나 일정한 거리에서 스스로 선을 그었다. 가까이 다가갈 수도, 완전히 등을 돌릴 수도 없는. 애매한 관계 속에서,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봄날의 변덕스러운 날씨 같은 너를 바라보며 나는 홀로 자랐다. 이제야 기억났다. 지워진 사진에서 너의 뒷모습이 유독 많았던 이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