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사랑이었을까, 동경이었을까

Episode 1. 고백

by Jin

디지털 타입 캡슐이 있다면, 그건 오래된 외장하드가 아닐까. 나의 과거와 기록들이 있는 네모난 상자에서 010101로 저장되어 있던 너를 발견했다. 너의 앞모습보다 뒷모습이 더 많이 찍혀 있었던 사진들을 바라보며, 나는 무슨 생각으로 셔터를 눌렀을까. 까마득한 기억이라 선명하게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너를 내 안에 담고 싶었던 마음은 아니었을까. 뒷모습이 찍힌 사진을 한참 말없이 바라보다 Del 키를 눌렀다. 이것은 사진을 지우는 행위였을까. 너에 대한 내 마음을 비우는 행위였을까. 아직도 너에 대한 내 마음을 비울 것이 있는 생각이 드는 게 놀라웠다.


절망 없는 첫사랑이 어디 있나.

어차피 내 차례는 오지 않았을 텐데.


무단 도용 금지


너와 처음 만났던 차가운 회색빛이 도는 공간의 모습, 조금은 쌀쌀했던 날씨, 간편한 차림새, 친구가 부르는 소리에 의자에서 쓱 하고 일어나던 너의 모습이 생생히 기억난다. 몸은 분명히 거기에 있었지만, 의식은 다른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 100m 달리기를 하면서 봐도 너는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처음엔 그것에 대한 호기심이라 생각했다. 호기심이라 하기엔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만 너에게 마음이 갔다. 싫은 것과 좋은 것, 나쁜 것과 올바른 것, 하면 되는 것과 하면 안 되는 것을 이분법적으로 정확히 나누며 살던 내 세상에서, 너는 그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나와 달리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너의 눈빛, 내가 가지지 못할 것 같은 담담함. 세상의 이치를 모두 알고 있을 것만 같은 언어와 말투.


지금 말로- 다시 태어나도 가질 수 없는 내 이상이 주는 완벽함이란, 이런 건가. 시간이 지날수록 너에 대한 내 마음을 단순히 좋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사랑이라 하기엔 어렸고, 동경이라 하기엔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사람들이 종교에 빠져드는 것에 이유가 없다는 걸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이 신을 만난 것처럼, 나는 너를 만났고, 너의 존재는 내 마음 깊숙이 날아와 박혔다. 그날 이후 나의 종교는 너였다.

너의 존재 자체가 나를 무너뜨렸다가, 다시 일으켜 세우기를 반복했다. 신이 그러하듯 너는 의도하지 않은 일이었음을. 네가 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지 않았다.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었다.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교리에 의문을 가지지 않듯, 네가 하는 모든 행동은 나에게 너라는 교리였다. 신에게 다가가고 싶어 하는 신자처럼, 나는 너의 곁을 맴돌았다. 나는 너에게 무작정 닿고 싶었다. 온 마음이 너에게 향했다. 으레 그렇듯 나는 너를 소유하고 싶었다.

“나. 너, 좋아”

인생 한번 살지, 두 번 사나?


너에게 내 마음을 꺼내 들었다. 어차피 나는 모 아니면 도인 인생이었다. 그 말에 늘 그렇듯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너의 표정에 큰 변화가 없는 걸 보니 내 마음을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 오죽 티가 났을까. 적어도 그날만큼은 나를 봐줬던 것 같았다. 너는 담담한 목소리로 ‘이서씨, 나 잊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 하고 평소처럼 나에게 친절히도 말해주었다. 그래도 괜찮냐고 나에게 물어봤던 것도 같다. 당연히 그 물음에 나는 괜찮다고 했겠지. 그랬겠지.


나를 받아주었다는 사실에 가장 중요한 것을 잊었다. 잊지 못한다는 건, 누군가와는 다시 시작할 수 없다는 뜻이다. 다시 시작할 수 없다는 건, 아직도 너의 안에서 끝나지 않았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는데, 그땐 몰랐다. 너의 곁에 있을 수 있다는 그 사실에 나는 봄날의 어린 강아지처럼 세상모르고 기뻐했다. 시간이 지나 너를 잊지 못하는 내가 그렇게 될 줄도 모르고,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 너 보고 싶어- 보러 가도 돼?’

‘응, 시간 괜찮아. 나도 이서씨 보고 싶어.’


‘오늘은 뭐 먹고 싶어? 우리 뭐 먹을까?’

‘아무거나. 이서씨가 좋아하는 걸로’


‘오늘 어디로 가볼까? 여긴 어때?’

‘이서씨가 가고 싶은 곳으로, 난 괜찮아.’


내가 보고 싶다고 하면 너도 보고 싶다고 말해주었다. 무엇이 먹고 싶냐고 하면 내가 좋아하는 것을 먹자고 해주었고, 어딘가로 가고 싶다고 하면 같이 가주었다. 너는 나에게 바라는 것이 없었다. 나에게 바라는 것이 없다는 건 슬픈 일이다. 그날 나는 너에게 잊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데 나를 만나도 괜찮겠냐고 왜 물어보지 않았을까. 나만 생각한 이기적이고 나쁜 년이 그게 나일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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