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며칠 전 오래된 외장하드를 정리하다 툭 하고 튀어나온 사진 한 장이 이 사단의 시작이었다. 마침 봄이네, 환장할 노릇. 차가운 바람이 잦아들고, 봄꽃들이 피기 시작하면 나는 널 떠올렸다. 아니, 사실 꽤 많은 봄이 지나가는 동안 너를 잊고 살았다. 너를 다 비워 내었노라 생각했는데, 사진 한 장에 이토록 흔들릴 줄은. 세차게 두드리는 빗속에 고스란히 노출된 느낌이었다. 태풍 한가운데 정신을 못 차리는 나무처럼 휘청일 줄 알았다면, 나를 조금 더 봐 달라 너에게 매달렸어야 했을까. 어차피 너를 잃은 건 매한가지인데, 후회나 남지 않도록 소리 내어 말해 볼 걸 싶었다.
왜 나는 아니었냐고.
그러면서, 왜 나를 곁에 계속 두었냐고.
사랑이란 건, 도대체 무엇인지. 너는 내가 누군가에게 속절없이 속수무책으로 빠져들면 어떤 모습이 되는지 알려줬다. 사랑이라는 말도 버거워서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어 숨이 찼다. 사랑이란 게 나에게는 이렇게 생각하게 하고, 행동하게 하고, 마음을 나누고,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이었구나. 그렇다면 네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어떤 모습일까. 나는 너에게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어, 너의 사랑 방식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길이 없었다.
나는 네 곁에 머물기 위해 점점 작아졌고, 나 혼자 애가 닳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네가 나를 바라봐 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헛된 꿈을 꾸었다. 그럼에도 너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 헛된 꿈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산산조각 났다. 여자라는 이유로 나는 내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들지 못했고, 세상 사람들이 남은 우리로부터 적처럼 느껴졌다. 아버지를 잃은 나는 아버지가 있던 세상에서 살던 방식으로는 살 수 없었다. 더 이상 너라는 이상을 좇아서 살 수 없었고, 나는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야 했다.
내 삶에서 너를 조금씩 지워나가는 일이 고통스러웠지만, 어차피 우리는 일방적인 관계였다. 내가 애를 써야지만 유지되는 관계, 너를 떠난다는 말조차 성립되지 않는 관계.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너를 생각하지 않는 시간에 익숙해졌다.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마음에 품는 것은 때로 사람을 병들게 하고, 지치게 만든다. 하지만 그 마음조차 결국 내 삶의 일부였음을. 곡예 하듯 위태롭게 마음을 내어주었던 시간이 있었기에, 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알아차리게 된다. 누군가가 내게 보여주는 안정적이고 따뜻한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래서 이제는 위태롭게 바람에 흔들리다 금세 흩어져 버리는 벚꽃 잎이 아니라, 커다란 나무에 둥지를 틀고 살아가는 새가 되기로 했다. 바람 부는 대로 떠도는 것이 아니라, 한 자리에서 누군가의 곁을 지켜주는 삶. 나무의 잎 사이를 스치는 벌레를 잡아주고, 밤이 되면 나무가 외롭지 않도록 조용히 곁을 내어주는 존재가 되기로 했다. 네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았고, 당장은 죽을 것 같았지만, 결국 희미해졌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 너 없이도 시간은 흘렀고, 계절은 쉼 없이 반복되었다. 너라는 계절이 지나간 자리에서, 나는 나만의 계절을 살아가고 있다.
너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나는 너를 체념한 것이다.
절망 없는 사랑이 어디에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