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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혜 Dec 28. 2018

쥐새끼처럼, 사람처럼

가오슝, 여섯 번째 이야기


저번 일기부터 딱 10일 만에 쓰는 글이다. 미룰 때는 딱 하루, 하루 정도만 하고 미루게 되는데 그러다 벌써 열흘째 미루게 되었다. 무엇이든지 시작하는 것도 어렵지만 가끔은 한 번 그만두고 다시 시작하는 게 배로 어렵다는 걸 정말 실감한 한 주였다.


이렇게 많은 시간을 지체한 대에는 여러 이유가 있는데 먼저 처음 삼, 사일 정도는 감기에 걸려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당시에 어떻게든 썼던 일기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하루 종일 비척비척 살다가 배고프면 쥐새끼처럼 굴에서 기어 나와 아무거나 갉아먹고 다시 침대로 돌아가는 생활을 반복 중이다. 아플 때면 사람이 아니라 구질구질한 들짐승이 된 거 같다.'


눈도 뜨기 힘들 정도로  아플 때, 또 그래서 피곤할 때면 늘 그런 생각이 든다. 언젠가 학교 행사에 한 번 참여해 보려고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읽었던 적이 있었다. 다 읽지는 못했지만 초반부에 흥미로웠던 내용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영혼과 신체는 분리되는가. 그렇다면 신체는 영혼을 담는 그릇일 뿐인가? 하는 논의였는데 요약하자면 둘을 분리하면 그건 결코'한 개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거라는 말이었다.


아플 때면 그걸 온전히 실감하게 된다. 몸이 아프면 필연적으로 나쁜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하루 종일 같은 곳에 앉아 있다 보면 나쁜 생각을 하게 되는 건 당연한데, 움직일 수조차 없고 몸은 내 맘 같지도 않다. 그러니 침대 구석에서 쓸데없는 자책이나 후회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이번 질병은 감기였다. 주말에 타이베이에서 하도 싸돌아 다닌 탓에 심한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일몰을 보러 간 위런 마토우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 게 화근이었을까. 내 고향은 바닷가도 가깝지 않은 인천인데 바다를 보면 고향에 돌아간 것처럼 기분이 좋다. 바닷바람은 차고 짭짤해서, 보통 바람처럼 마냥 시원하지많은 않다. 그게 익숙하고 좋아서, 구름이 잔뜩 껴 결국 일몰은 보지도 못했는데 바다에서 머뭇거렸다. 웃기게도 그러다 결국 심한 감기 몸살에 걸려 버렸지만.


월요일 기차를 타고 오는데, 거의 송장에 가까운 상태였다. 화요일, 수요일을 끙끙 앓으면서 슬슬 걱정이 됐다. 토요일에는 한국에 가야 하는데, 감기가 나을 기미가 안 보이는 것이다. 이미 한 달 전부터 뭘 하고 놀지 다 계획을 잡아 뒀는데 몸은 따라주지 않고, 짐을 싸는데도 그만 쓰러져 자고 싶은 생각만 굴뚝같았다.


그럼에도 모든 일은 해왔던 대로 척척 진행됐다. 토요일은 보통의 토요일과 달리 복잡했다. 다음 주 월요일에 쉬는 대신 수업을 토요일로 미뤄, 학교는 평소보다 북적였다. 여전히 콜록거리는 입에 마스크를 채우고, 친구를 불러 캐리어 좀 같이 옮겨달라고 부탁해 편의점에서 부른 택시를 타고 밖으로 나섰다. 가오슝의 공항은 인천과 달리 한적해서 한 바퀴 돌고 점심을 먹은 후 금세 비행기를 타니 또 한국이었다.


수많은 여행에서 얻은 교훈이 있다면, 다른 무엇보다 몸을 움직이는 법이다. 내 체력은 남들보다 결코 좋은 편이 아니고 남들 하는 대로 다 하자면 남아나는 게 없다. 그러니 해야 할 것에 집중하고 다른 생각은 일절 하지 않음으로써, 쓸데없는 걱정과 고민에 쓰는 에너지만 낭비해도 어떻게든 될 일은 되는 법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사람처럼 사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쥐새끼처럼 쓰레기를 뒤적거리고 좀 냄새가 나면 어떤가, 목표한 바대로 더 나은 행복을 추구하며 인간과 조화롭다면 그게 인간이 아닌가. 아프다고 짜증을 내지 않기. 하지만 짜증을 내는 내 상태는 이해하기. 회복하는데만 주력하되 내가 벌려놓은 일들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기. 그 몇 개만 명심한다면 아픈 것도 버틸만하다.


아플 때 생각을 제어하지 않는다면 내 숱한 경험으로 보건대 내가 아프게 된 이유를 온갖데서 찾게 된다. 그러게 왜 여행을 가서. 그러게 왜 구름 낀 날에 일몰도 못 보고 미적거려서. 그러게 왜 한 달 있음 돌아갈 걸 못 참아서 한국행 비행기를 끊어서는. 그러게 왜 그러게 왜.


인생이 결국 장기 여행에 불과하다면 우리 마음가짐도 여행과 같아야 할 것이다. 마음의 짐은 적게, 발걸음은 늘 가볍게. 가오슝의 태양은 아직도 뜨겁고, 저녁은 이제 한국의 여느 가을날처럼 서늘하다. 이렇게 또 아프고, 멀쩡해지고, 행복하고 불행하고, 성장했다가 나아갔다 머무른다. 태양에게선 도망칠 수 없고, 여름만 오 개월을 살아서 그런 걸까. 이번 해는 유독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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