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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혜 Dec 19. 2018

사랑하는 만큼, 미워하세요

가오슝에서 다섯 번째


많은 사람들이 대만 여행을 올 때, 대체 옷을 어떻게 가져가야 할지 몰라 혼란스럽다고 말한다. 누구는 반팔을 입고 누구는 긴팔을 입고 심지어는 패딩에 반바지를 입은 사람도 심심찮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의외로 이유는 간단하다. 낮이 되면 햇볕이 세서 더운데 바람이 불면 또 춥다. 그러니 밤이 되거나 구름이 낀 날은 만만찮게 서늘한 것이다. 


타이베이는 비가 자주 와서 금방 가을이 왔지만, 가오슝은 남쪽이라 비도 적고 햇볕만 쨍쨍하다. 내 친구는 그 후덥지근한 날씨에 도무지 정을 붙일 수 없다고 했지만, 솔직히 여름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대만을 좋아하는데 날씨 덕이 컸다. 


보얼 예술특구에서 본 문자 그대로 '아름드리' 뻗어나간 나무


나는 대만의 날씨를 사랑한다. 심하게 내리쬐는 햇볕에 나무는 한국보다 월등히 크고 두껍고, 처음 보는 종들도 많다. 아스팔트를 무시하고 울룩불룩 튀어나온 나무뿌리들이나, 천장처럼 수북하게 뻗은 잎들을 보면 햇볕이 생명이 사는데 얼마나 중요한가 새삼 실감하게 된다. 또한 맛있는 음식도 천지에 가득하다. 맑은 국물에 차돌박이를 넣고 끓인 우육면이나, 곱창이나 야채를 골라 원하는 육수에 끓여주는 루웨이 등등은 들이키면 속이 맑아지는 음식들이다. 사람들도 그렇다. 나가는 사람을 배려해 엘리베이터 버튼 옆에는 늘 누군가가 있고, 나가는 사람들도 그들에게 인사하는 게 당연하다. 늘 실례합니다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입에 붙이고 살도록 교육받고, 곤란을 겪는 사람이 있으면 최대한 도와주려는 사람들도 많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나는 대만을 마냥 좋게만 보았다. 급하게 고른 교환학생 치고는 꽤 괜찮은 곳이구나 싶었다. 그렇지만 살다 보면 느낀다. 불만을 마냥 덮어놓고 긍정적인 면을 본다고, 별로인 점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여전히 남아서 꿈틀꿈틀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으면 뻗었지. 어제도 비슷한 글을 썼지만 역시 답은 같았다.


대만은 참 좋은 나라지만, 동시에 참 별로인 곳이기도 하다. 교환학생을 받는 학교 치고 학교 행정실에는 영어가 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중국어로 차근차근 말해주는 것도 아니고, 알아들을 때까지 빠른 속도로 쏘아붙이고 못 알아들으면 얼굴을 찌푸리며 화를 낸다. 중국어 자격증을 아무것도 요구하지도 않았으면서 이 학교에서는 중국어를 못하면 할 수 있는 게 없다. 한국에서 살 때에는 똑소리 난다는 소리도 종종 들었던 나인데, 여기서는 늘 무력한 어린아이처럼 '아, 아.' 거릴 뿐이다. 


식당도 그렇고 택시도 그렇고 길거리에서도 그렇다. 대뜸 지나가면서 중국어로 시덥잖은 훈계를 하거나 (최근에는 캐리어 넣을 락커가 없어 전전긍긍하는데 29인치 캐리어를 가장 작은 사이즈의 락커가 비었으니 여기 빨리 넣으라는 호통을 들었다.) 트렁크를 썼으니 돈을 내라는 황당무계한 주장을 하기도 하고, 본인들이 실수해놓고 실수를 감추려고 중국어로 더듬거리면 거릴수록 더 빠른 중국어로 쏘아붙이는 사람도 많많찬다. 누가 대만이 친절한 나라라고 했을까? 대만이 친절한 나라면 한국은 천사들만 사는 나라다. 여행지에서 잠깐 겪는 인상과 살았을 때 느끼는 인상은 확실히 달랐다.


이처럼 모든 것들엔 사랑받아 마땅한 면과, 미움받아 마땅한 면들이 있다. 사랑만 하면 참 좋을 텐데. 세상일이 그렇게 녹록지 많은 않다. 그렇지만 미워하기만 해서는 대상의 진정한 면모를 보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면 결국 모든 건 사랑스럽고 밉살스러우며 두 가지를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본 건데 어느 드라마 작가는 한 수업 강의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어떤 극의 별로인 부분 대신에, 좋은 부분을 찾아보세요. 
별로인 부분을 찾고 비판하는 건 쉽지만,
 좋은 게 왜 좋은지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중학교 때 나는 애니메이션 동아리의 소설부를 맡은 적이 있는데, 아이들 글을 하나 잡고 별로인 점을 뽑는 게 좋은 점을 찾는 것보다 훨씬 쉬웠다. 글에는 실체가 없다. 그러니 한 문장 문장, 한 단어 단어 내가 별로라고 생각하면 정말 별로인 게 된다. 그러면 한 장 짜리 글에도 별로인 점을 세 장은 적을 수 있다. 


내가 자주 했던 짓이다 보니 커서 그런 식으로 글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을 보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버릇마저 생겼다. 좋은 이유가 되는 데에는 어떤 계기가 필요한데, 싫은 걸 만들어 내는 데에는 기준이 필요하다. 계기는 마음대로 생기지 않지만 기준은 내가 어디 잡느냐의 문제니 이렇게도 잡았다가 저렇게도 잡았다가 하면 그만이다. 그러니 미워하는 데에는 이유가 필요 없다는 말이 어느 정도는 정답이다.


그렇다면 미워할 걸 미워하고, 좋은 점에 초점을 맞추면 어떻게 될까?  미워할 건 미워하고 짚고 넘어갈 건 넘어가되 왜 그렇게 좋았는가를 차근차근 생각해 보는 것이다. 나는 이 방법이 사는데 아주 도움이 되는 방법이라고 확실한다. 


예를 들어 나는 영국의 락밴드 '퀸(Queen)'을 참 좋아한다. 매일매일 좋아하는 곡이 바뀌고 거의 대부분의 곡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어떤 곡이 제일 좋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사랑할수록 외로워지는 마음을 표현한 'love of my life'도 좋아하고, 사랑하여 살아있음을 실감하고 싶은 'somebody to love'도 좋아한다. 최근에 가장 꽂힌 곡은 'My melancholy blues'인데, 거리는 밝은데 내 마음은 한없이 추운 연말에 딱 알맞은 곡이다. 


퀸은 여러 가지 방식의 음악을 시도한 밴드로서, 곡 하나하나도 단순하지 않은 시각을 보여준다. 외로움도 한 없이 외롭기만 한 것이 아니고 사랑도 한 없이 아름답기만 한 것도 아니다. 퀸의 대표곡으로 뽑히는 'bohemian labsody'에도 이러한 성격이 잘 반영되어 있다. 이 노래는 원래 3곡이었는데, 프레디 머큐리는 도무지 노래가 각자 끝나지 않아 결국에는 이것들을 하나로 합했고 결과적으로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이 독특하고 사랑스러운 노래가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내가 최근에 퀸이 참 좋다 이야기했더니, 친구가 대뜸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너 프레디 머큐리가 얼마나 사생활 적으로 문란헀는지 알아?
 네가 좋아한다는 드러머 로저 테일러는 엄청 바람둥이였어.
기타 치는 브라이언 메이가 인스타그램에 여자 가슴 컵을 올린 건 아니?
투어 때 썼던 포스터들도 성 상품화가 엄청 심하고.
네가 좋아한다고 해도, 이런 걸 알았으면 좋겠어.

친구 말을 듣고 느낀 첫 번째 감정은 혼란스러움이었고, 다음은 부끄러움이었다. 내가 남들에게 비슷한 논조로 '너 대체 그런 거 어떻게 좋아해?' 하고 다닐 때 이런 심정이었겠구나. 어떻게 다들 나와 아직도 친구를 하고 있을까? 이렇게 말해버리면 나는 뭔가를 좋아한 기억밖에 없는데 갑자기 나쁜 사람이 되어버리는 게 아닌가.


물론 친구의 말은 모두 맞는 말이다. 퀸 멤버들의 사생활은 결코 깨끗하지 않고, 여전히 그걸로 문제가 되는 것도 맞다. 성상품화는 당연히 이해할 수 없고 비난받아야 마땅한 일이다. 그렇지만 나는, 한편으로는 역사적인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도 본다. 밉기는 하지만 이해는 한다는 말이다. 


 에이즈는 그 당시 어떻게 걸리고 어떤 병인지 아무런 연구가 이뤄지지 않았다. 내 어렸을 때만 해도 에이즈 환자들을 위한 의식 개선 운동이 아직 활발하던 때였다. 손을 씻지 않고 외과적인 치료를 하는 건 병균의 존재를 아는 현대로서는 당연히 금기시될 행동이었지만, 병균이 발견되지 않았던 때에 사람들을 마냥 무식하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결국 과거의 사람들이 쌓아 올린 사상적, 기술적, 문화적 배경을 누리며 살고 있다. 그러니 함부로 과거 인물들에게 왜 그렇게 바보 같은 행동을 했냐고 묻기도 애매하다. 상대가 살인을 하고, 반인륜적인 행위를 한 게 아니라면 어느 정도는 시대상과 비교해 넘 거야 하지 않을까 싶다. 


기타리스트인 브라이언 메이도 그렇다. 그는 이제 70살이 넘은 노인이고 성격이나 사상을 바꾸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다. 나는 나의 친할머니를 참 사랑하지만, 그분이 내가 어렸을 때 절에 찾아가 한 스님께 남자 앤지 여자 앤지, 이번에는 남자애야 한다고 물었던 사실을 기억한다. 스님은 '아드님 사주에 아들이 없어요. 그러니 딸이 나오면 아드님 때문입니다. 그래도 둘째는 아들 노릇을 할 딸일 거예요.'라고 대답했다. 선별 낙태가 암암리에 남아있던 시절이었다. 많은 의사와 스님과 점쟁이들은 그런 말들로 딸들을 살렸다.


그런데도 나는 할머니를 원망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분이 우리 엄마에게 시어머니 노릇을 하실 때면 같이 욕을 하다가도, 또 할머니 개인에 대해서는 원망이 들지 않았다. 거기에는 90세가 넘어서부터는 할머니 주위에 남은 사람이 없어 나를 아껴주신 탓도 있고, 그분이 나를 만났을 때는 이미 89세로 한 세기가 지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늙어서까지 모두에게 촉망받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지금껏 그런 사람을 문재인 대통령 빼고는 본 적이 없다. 살면서 자연스레 익히 이런저런 유연하지 못한 사고들이 시간이 갈수록 단단히 굳어, 남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않을 거라고 누구도 안심할 수 없다. 단지 그러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끝없는 자기 객관화로 문제점을 찾고, 또 고쳐나가는 게 최선일뿐이다. 


무엇을 사랑하는 일이 원래 그렇다. 살인과 같은, 피해자가 죽어 평생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을 제외하고서 사랑하고 미움은 함께하되 분리되어야 한다. 그게 오래 사랑하는 비법인 듯 하다. 그러니 누군가가 그걸로 나를 재단하거나 화를 낼 때는 '사랑하지만 눈이 멀지는 않았어.'라고 마음속으로든 밖으로든 대답하는 것으로 대화를 끝내는 것이 답인 것 같다. 


의외로 미워하기만 하는 사람들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 잘 미워할 수 있다. 대상의 본질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상의 본질이란 무엇일까. 인류사에 기여할 긍정적인 면과, 인류사를 후퇴시키는 부정적인 면 모두가 바로 본질이다. 모두는 세상을 구하려 왔으면서, 동시에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기도 한다. 그러니 사랑에 상처 받아 영원히 사랑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거나, 미움에 눈이 멀어 사랑에 빠진 사람들을 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이다. 또 사랑에 빠져 미운 면을 보지 않으려는 것도 아쉬운 일이다. 



사랑받아 마땅한 면과, 미움받아 마땅한 면은 양쪽으로 뚫린 문과 같다. 결국 깊이 들어가면 그 사람 자체, 즉 본질에 도달한다. 그러니 상대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양쪽의 문을 잘 들여다봐야 하고 한쪽만 봐서는 완전해지지 않는 것이다.  


사랑할 시간도 아까운데 미워하라니. 어찌 보면 웃긴 말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할 때마다 우리 엄마는 넌 평생 결혼은 못할 거라고 주장한다. 세상에 예쁘기만 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별로인 면도 때로는 품을 줄 알아야 한다나. 그러면 나는'알았어요 연애만 할게요.' 하고 도망치곤 한다. 


그러니 어딘가 미래의 연인이 있다면, 내가 미움을 품어줄 거라고 기대하지 마시길. 나는 당신의 예쁜 면만 보고 좋아하고 미운면을 보곤 그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할 테니까. 사랑할수록 더 미워할 테니까.  그러니 내 사랑이 미움에 지지 않게 노력해주길 바라고, 나 역시 당신의 미운 면 속에서 외로움을 발견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온전히 사랑하고 또 사무치게 미워할 수 있겠지. 그러다 진정한 서로를 발견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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