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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혜 Dec 31. 2018

나에게는 먹여 살릴 내가 있어서

가오슝에서 일곱 번째

+ 제목은 인터넷 어딘가에서 보고 인상 깊게 생각했던 문구다. 어디서 봤는지는 잊었는데 구글에 검색해도 나오지 않아 아직 출처를 표기하지 못했다.




올해도 이제 막바지를 넘어 끄트머리다. 오늘은 12월 30일, 그리고 글을 쓰는 동안 31일이 되었다. 오늘은 연말을 기념하여 이곳에서 친해진 언니와 세계 3대 온천이라는 진흙 온천, '관쯔링 온천'에 갔다 왔다. 온몸에 진흙을 바르고 빨리 마르려고 퍼덕퍼덕 뛰어 나니는 건 꽤 재밌었다. 보통은 가족들이랑 가요대축제 보고, 시상식 보고, 당일에 일출을 보러 가던 연말만 보내다 보니 이런 연말도 꽤 나쁘지 않았다.


뜨거운 온천물에 몸을 담그니 자꾸 상념이 들었다. 내년에 난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어렸을 때 나는 나이를 먹는 게 너무 싫었다. 지금 반에도 적응하기 힘든데 또 새로운 반에서 새로운 친구를 만들어야 하다니. 스무 살이 되기까지 나이를 먹어서 좋은 점은 딱 하나였다. 바로 고등학생 졸업까지 얼마 안 남았다는 점. 그때는 학교를 나가기가 너무 싫어서 매년 고등학교 졸업까지의 날을 헤아렸다. 12살 때 '앞으로 이 짓을 7년이나 더해야 한다니!' 하고 괴로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반대로 19살 때는 수능이고 뭐고 앞으로 일 년 있으면 학생이 아니란 사실에 너무나 신이 났다. 친구들에게는 비밀이었지만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가 너무나 좋았다. 확실한 목표가 있고, 거기에 걸맞은 시간과 실력이 있었다. 뭣보다 몇 개월 후면 지긋지긋한 학생도 끝이니까.


물론 문득 창 밖을 보았을 때, 마법 같은  내 어린 시절이 어느새 스르륵 지나가는걸 발견할 때면 못내 아쉬웠던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단 한 순간도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지금도 그렇다. 나는 그 어떤 때로도 돌아가고 싶지 않다. 하루 정도는 괜찮을 거 같은데 틀 이상 있는 건 사양이다. 과거에 나는 언제나 도처에 불행이 있었다.


그런데 숱한 상담사를 지나던 시절, 내가 이 이야기만 하면 많은 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을 했다.

'너희 부모님은 비싼 돈 들여 너를 여기 보낼 정도로 널 사랑하는데? 부모님은 널 때리지도 않았고 네가 특별히 가난하게 자란 것도 아니잖니? 그런데 왜?'


그러면 나는 '그러게요. 왜 그렇까요. 나도 몰라요.'라고 대답했지만 사실 오랫동안 답을 찾고 있었다.

일곱 살에서 여덟 살이 되던 겨울, 사촌이랑 비누를 가지고 세면대를 닦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게 초등학교 통지표를 보여줬었다. 그걸 보면서 '학교를 가면 집도 유치원도 떠나니 행복해야 할 것 같은데, 별로 그렇진 않네. 그렇지만 학교도 가고 싶지 않아. 엄마도 없고 처음 보는 사람도 싫은데.' 하고 고민했던 기억이 있다. 아주 오랫동안 난 그게 너무 궁금했었다. 왜 나는 행복해야 하는데 행복하지 않을까. 분명 배 부른 투정인 거 아는데 왜 그만둘 수가 없을까?


나는 열심히 내 인생을 살아간다고 생각했었다. 어린 시절에 겪었던 별로 좋지 못한 추억과, 부모노릇에 서툰 부모님들, 그리고 선천적으로 타고난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해야 할 일을 미루지 않았다. 성적은 늘 잘함과 중간 사이에서 맴돌았고, 기본적으로 모든 일에 열심히 하려고 했다. 정직하고 열정적인 사람처럼 굴었다.


그런데도 나는 정작 진심으로 나를 책임져야 할 때는, 도무지 용기가 남지 않았다. 내게 운전대를 쥐어주면 나는 발발 떨다가 '누가 이것 좀 가져가! 난 이걸 운전할 능력이 없다고!' 하면서 울부짖으며 아무 데나 들이박고, 그대로 누군가 차 문을 열어줄 때까지 앉은 자리서 펑펑 울었다.


내가 이 모양 이 꼴로 살고 있다고 느낀 건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자기소개서를 가지고 갔는데, 담임 선생님이 몇 차례 열심히 앉아서 읽고 의견을 주셨다. 하지만 사실 진작 알고 있었다. 서사도 빈약해 삼류소설도 되지 못한 내 자기소개서에 붙을 리가 없다는 사실을.


'이제 더 이상 못하겠어요. 전 모르겠어요.'


세 번째 피드백 때, 나는 마침내 그런 이야기를 하며 펑펑 울었다. 아마도 선생님이 위로해주길 바래서였겠지. 고등학교 3학년 담임만 10년째인 우리 담임 선생님은 그런 내 속을 꿰뚫어 보셨다. 그리곤 내가 다 울 때까지 장장 10분을 기다린 후에 내 눈을 쳐다보며 말씀하셨다.


'네가 선택한 길이잖아. 힘든 걸 알고도 한 거 아니었어? 그럼 네가 책임을 져.'


당시엔 꽤 찔린 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눈물도 후딱 멎었다. 나는 몇 번 훌쩍, 훌쩍한 후 '그럼 나머지를 볼꼐요.' 하고 자기소개서를 마무리 지었다.


교환학생을 준비하면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간단한 여행자 보험을 들면 되는 거였는데, 괜히 아는 사람 실적을 하나 채워주고 싶었다. 사실 푼돈이라 별 상관없을 텐데도 그때는 그랬다.그래서 보험을 하는 이모에게 전화를 했었고, 그 이모는 또 자기 친구를 내게 소개해줬다. 그런데 이분이 메일조차 보낼 줄 모르시는 것이다. 나는 당장 학교에 보낼 영문 양식이 필요한데 서류가 있긴 있는데 파일로 보내는 법은 모르겠다고 계속 쩔쩔매셨다.


우리 학교는 우편으로 된 서류밖에 받지 않기에 빨리 준비를 끝내야 했다. 이런저런 일로 자꾸 초조해지니 나는 너무 짜증이 나, 당시에 지나가던 친구에게 이런 속내를 하소연한 적 있었다. 그러자 친구는 잘 맞장구치며 들어주다가 문득 치고 들어왔다.


'그런데 네 잘못도 있어. 네 일이잖아. 네가 다 감시하고 하나하나 확인했어야지.'


교환학생을 오고, 또 말 한마지 제대로 통하지 않는 이곳에서 식사를 하고 생필품을 구입하며 그 두 말은 자꾸 내게 밀려들었다. 이런데 외따로 떨어져 보니 더욱더 실감 나는 말이었다.

그렇다. 나는 내 일을 책임지고 싶어 하지 않고 누군가가 내 일을 대신해주기를 계속해서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내 이런 성미는 얼마나 유명한지. 교환학생을 갔다 온 친구에게 같은 문제에 대해 여러 번 물어보다가 나름대로 해결을 보고, '그건 그렇고 너는 저번에 결국 어떻게 해결했다고 했지?' 하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그랬더니 그 친구는 이제 뒷 말은 안 들어도 뻔하다는 듯이


'그러게 너한테 그렇게 중요한 문제면 진작 자세히 알아보고 갔었어야지 대체 왜 거기서 그러고 있는 거야?'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했지만, 내 전적이 있으니 같이 화를 내는 대신에 '저번에 말한 문제는 다 해결했고 네 경험이 제대로 기억나지 않아서 그래.'라고 이야기하고 넘어갔다. 이해가 안 가는 행동은 아니었다.


나는 늘 그렇게 내 주위 사람들에게 내 문제를 떠넘겼다. 대신 해결해줘. 대신 봐줘. 대신 고민해줘. 대신 화내 줘. 왜 직접 하지는 않고서? 나는 그 만한 능력이 없으니까.


대만에서 한참 외로웠을 때도 같은 생각을 했다. 룸메는 영어를 잘 못하고 나는 중국어를 잘 못하니, 말이 안통 통해 알아듣는 척 굴다가 전혀 말도 안 되는 말로 대화를 끊어버렸다. 빌어먹을 중국어는 아무리 해도 성조를 모르겠고 나는 분명 맞게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는 인상을 팍 찌푸리며 '띵부통!' (못 알아듣겠다!) 하고는 자기만 알아듣는 말로 구시렁구시렁, 또는 꺼지라고 짜증을 냈다.


택시에서도 버스에서도 그랬다. 음식점에 가서도 그랬다. 중국어 실력은 늘지 않고, 같이 다니던 한국인 친구는 중국어를 잘하고 싶은 마음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학점 인정도 제대로 안 돼, 사실 한 번도 배운 적 없는 중국어라 당장 자격증도 못 딴다. 중국어 하나 제대로 못 한다면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무력함은 나를 덮쳤고, 계속해서 외로웠다. 이런 데서 사는 건 내 능력 밖의 일이었다. 기숙사에 불이 났는데 나만 말을 못 알아들어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약을 먹거나 잠을 자거나, 오토바이에 치이거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정말 정신상태가 안 좋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만뒀지만, 적어도 11월까지는 계속 그런 상태를 오갔다.


그러다 11월에는 민이가 왔다 갔다. 그리고 그때 깨달았다. 나는 여전히 나를 책임 못 지고 참 못되게 굴고, 친구의 단점에 답답해하는 인내심 없는 인간이지만 그래도 내겐 친구가 있었다. 내가 그렇게 나쁜 놈이란 걸 인정하는. 그런데도 친구인 민이가.


그 사실에 마음이 편해졌다. 그 후로는 어떤 돌발 상황에도 그러려니 하고, 낮고 차분 한 목소리로 1분 이내의 짜증 한 번 내고 잊어버리는 것으로 내 화를 다스렸다. 우울함도 외로움도 당연했다. 그런데도 나는 여기서 살아야 하고, 새로운 곳을 가봐야 했다. 어찌 되었든 여름을 이대로 보낼 순 없었다.


못 알아 들어도 내 말을 했고 짜증스럽게 굴면 나도 한국어를 썼다. '어쩌라는 거야 지 말만 쳐하네.' 짜증 나면 너도 한국어 배우던가. 하는 식으로. 꾸역꾸역 알아들을 때까지 묻고, 막히면 방법을 찾았다. 우버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막히자 편의점에서 택시를 부르는 법을 배웠다. 수업은 그냥 제때 잘 나가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다 결석해서 꼴찌해도 상관없는데 친히 나가 주는 걸 감사히 여기란 마음으로 나갔다.


분명 좀 막살고 있는데, 웃기게도 그러니까 드디어 내 인생을 좀 끌고 나갈 수 있었다. 책임질 수 있었다.


싸움을 피하고 싶을 땐 피한다. 내가 감당하지 못할 것이니까. 모든 창피한 사건들에서 배울 점을 찾았다. 어쨌든 이미 지난 일이고 이런 점이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쓸데없는 일에 시간 낭비한 게 되니까. 부족하고 놀고 싶고 불안한 나를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새삼 놀라울게 뭐가 있나. 원래 이모양이었는데. 대신 짧은 계획을 세우고, 덜 책망하고 간단한 성취를 만들도록 노력했다. 쓰레기를 버리고, 매일 일기를 쓰고, 놀러 갔다 온 후 할 일을 하지 않은 오늘의 나에게 분노하는 대신 그의 변호사가 되어주었다. 애초에 휴일에 무슨 공부야. 그럼 평일에 좀 덜 피곤하게 살던가.


책임을 피하는 건 사실 가장 귀찮은 일이다. 내게는 먹여 살릴 내가 있는데, 가장이 되어서 책임이 싫다고 맨날 술이나 먹고 어린 자식에게 화풀이나 해서야 되겠는가. 그래서야 나아지는 게 없다. 미뤄둔 일은 언젠간 터진다. 한계를 알고 해야 할 일을 하고 노력하고 지금 상태에서 가질 수 있는 의욕과, 목표에 만족하고 싶다.


어제 엄마에게' 내 방 가구는 다 내 키에 맞지 않아. 인테리어는 아빠 담당이었고 그때 난 이미 170이었는데 아빠가 나에게 너무 관심이 없었던 거 같아.' 하니 엄마가 '아니야 아빠가 내 가구, 내 방 이런 건 전혀 모르는 채로 자라서 잘 몰라서 그래.' 하고 대답했다.


그래서 '나도 아빠가 나를 사랑한다는 건 알아. 그렇지만 아빠는 어떻게 상대를 사랑하고, 어떻게 책임져야 할지 모르고 있어. 사랑을 표현하는 법을 모른다는 거야. 사랑은 관심의 표현이고. 그러니까 관심이 없다는 거지.'


내가 벌인 일을 책임지고 훌륭히 끝마치는 건, 즉 내 인생에 책임감을 갖고 운전하기란 여간 어렵지가 않다.

그렇지만 나는 먹여 살릴 내가 있다. 사랑하는 나를 위해, 책임감을 갖고 임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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