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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혜 Jan 01. 2019

바나나는 기다렸다 드세요

가오슝에서 여덟 번째 일기

어제는 2018년의 마지막 날, 이곳에서 친해진 언니와 바나나를 사러 갔다 왔다. 기숙사, 학교, 기숙사, 학교만 오고 가는 나와 달리 언니는 벌써 이곳을 주민처럼 빠삭하게 알았다. 기숙사에서 쪽문으로 나가 횡단보도를 하나 건너 골목으로 들어가면 매일 가는 일본 라면집이 하나 나온다. 평소에는 딱 거기까지만 가는데 그 너머에 맛있는 바나나 가게가 있다고 하여 처음으로 그 앞에 횡단보도도 건너 봤다.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였는데 이젠 익숙해져서 잘 건났다.


가오슝에는 아직 횡단보도가 제대로 안 갖춰진 곳이 많다. 물론 이보다 더 작은 도시들 보다야 안전하지만 타이베이나 한국이 비교하자면 무법지대나 다름없다. 가장 큰 문제는 보행자 신호가 없어서 차 신호를 보고 적당히 건나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대중교통이 불편해서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은데 오토바이는 차 신호에도 가고 사람 신호에도 가고 원하는 대로 골라 다니니 그야말로 도로의 야생마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원체 겁이 많아, 한국에서 도 못 꿀 상황이지만 인간이었지만 이런 곳에서 살다 보니 어느새 '그래 쳐볼 테면 쳐 봐라' 하는 마음가짐으로 살고 있다. 참 신기하게도 어떻게든 되겠지 하면 정말 어떻게든 된다. 그 예로 난 아직까지 두 다리 잘 달린 채 살아있지 않은가.


바나나 가게는 횡단보도를 건너고 바로 코앞이었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요 앞에 절도 보고 갈래?' 하는 말에 좀 더 걸어서 근처 절로 향했다. 대만은 불교가 국교에 가까운 곳이다 보니 절이 여기저기에 익숙하게 있다. 학교 쪽문으로 나가서 왼쪽으로 가도 벌써 하나 나오는데 석가탄신일쯤에는 거기서 큰 축제도 있었다.

그렇다 보니 우리나라의 흔한 산속 소박한 절의 느낌이 아니라, 정말 사람 사는 건물 같은 느낌이 난다. 특히 언니와 간 절에는 커다란 스크린이 두 개 붙어 있었고 창은 전부 유리창으로 대체되어 있었으며 근처에 물건을 파는 가격표 같은 것도 어딘가 조잡한 그림과 함께 붙어 있었다. 절에 대한 환상이 좀 깨지는 건 사실이지만,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일상적인 생활 공간화되었다는 뜻이니 생기가 느껴져 싫지는 않았다.

1월 31일이다 보니 거리에는 유난히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절을 구경하고 절 근처에 귀여운 해태 닮은 무엇과 사진도 찍고 오랜만에 외국 나온 기분을 만끽했다. 물론 우리가 외국에 사는 건 맞지만 사실 반년을 여기서 살았더니, 이젠 처음의 신 신 친숙함이 더 강하다. 좋으나 싫으나 신기하게도 사람은 결국 어디에나 적응하는 모양이다.


다시 돌아가는 길에는 원래 목표였던 좌판으로 향해 바나나를 샀다. 여기는 바나나가 사과처럼 당연한 과일이라 커다란 좌판에 바로 먹어야 하는 바나나, 얼마 기다렸다 하는 바나나 등 다양한 바나나를 늘어놓고 팔았다. 가격도 아주 싸다. 한 자루에 열대여섯게 달려선 천 얼마 정도 하고, 비싸 봤자 1500원을 안 하니 사는데도 부담이 없다. 게다가 한국서 보이는 길쭉한 바나나의 반 만한 크기밖에 안 되니 심심풀이로 하나씩 먹기에 안성맞춤이다. 한국에 우리 집은 원체 뭘 잘 못 먹는 편이었다. 바나나를 한 자루 사면 결국 다 못 먹고 절반은 버리기 일쑤였다. 따라서 평소대로 이번에도 하루 정도 기다렸다 먹을 것으로 한 자루밖에 사지 않았다.


잘 익고 있는 바나나 뭉텅이


그런데 막상 사서 먹어보니 너무 맛있는 게 아닌가! 오늘도 앉은자리에서 벌써 네 개나 먹었다. 한 자루 더 사 올걸. 벌써부터 후회가 막심하다. 처음에는 바나나를 하루에서 이틀 기다렸다 먹는다는 개념이 좀 신기했다. 무슨 컵라면도 아니고. 바나나 한 자루 사는데 사장님의 당부가 철저하다. 이건 하루에서 이틀, 이건 삼일 이상. 게다가 보관법도 특별하다. 큰 몸통을 아래로 두지 말고 위로 두고, 그냥 통째로 두는 것보다는 하나씩 잘라서 두거나 따뜻한 곳에 두는 게 더 빨리 익는다. 그냥 두면 날파리가 꼬이는 일도 많기 때문에 나는 보통 지퍼백에 두어 보관한다.


가끔 빨간 바나나도 보이는데 이건 '핑궈 바나나' (사과 바나나)라는 특별한 품종이다. 전에 가오슝의 중부, 시토우로 여행을 갔을 적 내가 바나나에 지나친 관심을 보이니 여행 가이드가 한 자루 사 준 적이 있었는데 그 맛이 또 기가 막히다. 바나나를 꿀에 푹 절인 듯, 아니 바나를 짜서 꿀을 만드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달아서 물이랑 같이 먹어야 할 정도였다. 오랫동안 잊지 못할 맛이었는데 어제 좌판에도 보여 살까 말까 고민하던 중, 언니가 한 자루 사서 나눠주는 덕분에 사지는 않았다. 그때만큼 맛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다른 나라에 산다는 건,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남의 삶을 대신 사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다. 산지에서 바로 올라와 수입한 여느 과일보다 맛있는 바나나를 마치 귤처럼 일상적으로 먹는 삶이라니. 추석 때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었다. 그때 대만 친구 씨씨는 유자를 잘라주고, 그걸 모자처럼 만들어 씌워 줬었다. 여기서 어린아이들은 자주 그러고 논다면서. 그래서 '어때? 잘 어울려?' 하니 다들 웃겨 죽겠다는 얼굴로 '아니 바보 같아.' 하고 대답했던 기억이 선하다.


용과를 먹을 때도 비슷한 기분이다. 나는 다른 과일보다 특히 용과에 빠졌는데, 유별나게 붉어서 옷에 묻으면 큰일 나지만 조심해서 먹으면 그만큼 맛있는 과일이 또 없다. 적당히 달고 물도 많고 하루 이틀 묵었다 먹으면 너무 달아서 얘도 물이 필요하다. 처음 먹는 사람들은 이게 뭐지? 싶을 정도로 맹숭맹숭 하지만, 먹다 보면 물컹한 식감 속에 자잘이 박힌 씨앗과 설탕 수수 같은 자잘한 단맛에 빠져들게 되어있다.


만일 당신이 대만에 온다면, 특히 하루 이틀이 아니라 좀 더 있을 거라면 나는 주저 없이 주변의 과일 가게를 가보기를 권한다. 대만 사람들의 어린 시절, 익숙한 식탁 위 풍경, 맛있어서 또 먹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경험을 간단히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기억하길. 바나나는 기다렸다 먹는 것이 제일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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