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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혜 Jan 03. 2019

대만의 가을, 뭐부터 먹을까?

가오슝에서 아홉 번째 일기


가오슝에도 드디어 겨울이 찾아왔다. 물론 내 방은 열선이라도 흐르는지 여전히 덥지만 (어제는 룸메가 '이게 겨울이냐? 이게 겨울이야?! 하고 소리를 질렀다.) 창밖에도, 거리에도 드디어 선선하고 건조한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학교 앞에서 찍은, 놀랍도록 아름다운 가을하늘


한국 사람들 중에 가을을 싫어하는 사람은 얼마 없다. 그건 가을 옷이 예쁘고, 공기도 바람도 부담스럽지 않게 시원한 까닭도 있지만 아마 어느 정도는 이제 가을을 보기가 정말 힘들어서가 아닐까. 요즘에는 9월 초순까지 계속 덥다가 어느 순간 확 추워져서, '이제 코트를 입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 바로 입지 않으면 일주일도 채 입지 못하고 겨울을 맞이하곤 했던 것 같다.


어학원 수업을 할 때도 한국은 여름이 더워? 겨울이 추워? 하고 물어보면 나로서는 할 말이 없어, 오늘은 '어른은 대만만큼 덥고 겨울은 러시아만큼 춥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모두 저 애국자 또 거짓말을 한다는 반응이었지만) 최근에 부쩍 마음의 여유가 없어지는 까닭도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어쩌면 가을이 줄어서일지도 모른다. 가을이 추는 어딘가 씁쓸하고, 외롭고 그리운 기분으로 스스로를 돌아보는 건 한국인들의 취미다.('10월의 마지막 날' 이라던가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또는 '가을 아침' 같은 노래를 떠올려보자. 우리는 추워서 머리는 맑고 마음은 가벼워지는데, 끝에 가까워지는 그 감성을 늘 좋아해 왔고 아직도 그리워하는 게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대만의 가을은 한국보다 늦되, 한국보다 길다.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얇은 옷을 가볍게 걸치고 터벅터벅 걷기 아주 좋은 날씨다. 아쉽게도 황금빛으로 변하는 낙엽은 없지만 그렇기에 늦여름과 가을의 중순 어딘가에 걸쳐진 특별한 기분이 든다. 대만은 참 신기하다. 이렇게 작은 나라인데도 여름부터 겨울까지, 알차게도 들어있다. 의외로 지역 간의 차이도 크다. 이곳 가오슝은 크리스마스까지는 여전히 더웠는데 며칠을 기준으로 확 추워졌다. 반면 타이베이는 11월부터 부쩍 추워져서, 12월 초순에 가오슝 생각만 하고 아무렇게나 입고 갔다가 독한 감기에 걸려 한동안 심히 고생했다. 그렇지만 나는 역시 가을이 좋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학교 앞 훠궈집. 이렇게 해서 만 이천원 정도 한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역시 가을 하면 역시 천고마비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딱히 뭘 먹고 싶은 기분도 없이, 평소보다 배로 맛있는 걸 먹고 있다. 도둑질도 배운 놈이 잘한다고. 나는 이제 대만 음식에 어느 정도 도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처음 몇 달간은 체중계에도 올라가 보고 꾸준히 운동도 해보곤 있는데 이제는 즐거운 마음으로 어느 정도 내려놓았다. 한국 가서 하지 뭐. 친구들도 뭔 걱정을 하냐고 타박들이다. '와서 과제 좀 하고 굶고 못 자고 해 봐, 금세 빠진다 야. 더 찌워 와!'


생각해보면 한국에서는 먹는 일에 지나친 행복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스트레스를 풀거나, 뭔가를 기념할 때 늘 뭔가를 먹는 일로 대체했다. 당연했다. 우리 과는 많이 바빠서 심할 때는 잘 시간도 먹을 시간도 화장실을 갈 시간조차도 아까워, 꾀죄죄해질 때까지 컴퓨터 앞에서 과제 또 과제를 해야 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나만 그런 건 아니다. 내 친구들 중에는 물에다 섞어먹는 간편식을 박스로 사서 잠깐씩 시간 날 때 하나씩 먹다가 새벽에 잠깐 짬을 내서 학교 앞 부리또로 연명하는 얘들도 허다하다. (놀랍지도 않게 역시 건강검진을 하니 다들 위에 이상 하나쯤 있다. 의사 말로는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는 당연하다고.)


아번 연도도 한결같았다. 지난 학기에는 시험과 과제가 겹쳐서, 금요일에서 토요일이 되는 12시까지 과제를 내야 하는데 도저히 시간이 안나 마지막 시험이 끝나고 목요일 밤에 시작했던 적이 있다. 과제는 성공한 드라마를 분석하는 일이었고 개요만 70장이 나왔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먹을걸 잔뜩 사다 놓고 중간에 2시간 자다 온 것을 제외하면 계속해서 앉아서 새 슬라이드, 글상자 채워 넣고, 새슬 라이드, 사진 대충 붙여놓고 다시 글상다 채워놓고 하기를 반복 또 반복. 과제가 끝나니 너무 오래 앉아있어 도저히 힘이 안 나, 의자에서 한 시간쯤 쉬다 간신히 집으로 기어갔다.


내 기억으로는 1학년 1학기 때부터 벚꽃구경 한 번 못했는데, 2학기에는 슬슬 심해지더니 2학년 때는 사람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고 3학년 2학기 때부터는 슬슬 어차피 죽을 거 적당히 놀고 죽어나가기를 반복했던 것 같다. 처음에는 내가 시간 조절을 못해서,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괴로워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모두가 다 힘들었다.


언젠가는 과제 피드백을 받으러 갔더니 '이번에도 이상해. 처음부터 다시 해보자.' 하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우리는 울며 겨자 먹기로 '하마 선생님 저희 벌써 이틀이나 밤샜어요!' 하고 비니, 우리 교수님은 활짝 웃으며 '얘들아, 이틀 새면 삼 일도 밤을 새울 수 있어!' 하고 우릴 돌려보냈던 추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침대에 눕는 게 너무나 기다려졌던 그때. 차라리 쓰러지면 여섯 시간은 합법적으로 잘 텐데. 하고 바랐던 시간들이 빼곡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먹는 일은 사치스럽게 생각되곤 했었다.


시간이 나면 앞에서 아무거나 바로. 많이 갔던 건 샌드위치 집, 브리또 집, 알밥 집 또는 백반집. 그러다 몸에 알레르기가 돋아서 한 동안은 샐러드 집에서 볶음밥을 추가해 먹었다. 늘 굶주려 있었기에 항상 맛있었던 기억만 있다. 그때 음식은 정말 사는데 필요한 무언가를 공급하는 과정이었다.


배가 고프면 일을 못하고, 우울해지고 능률이 떨어진다. 또 졸리면 일을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니 낮에는 기름진 배를 씻어내고자 쓴 커피를, 밤에는 지치니 달달한 커피를 마셨다. 밤을 새울 때는 평소보다 배의 에너지가 필요하니 젤리, 콜라 같은 불량 식품들을 잔뜩 사서 손이 멈출 때마다 집어 먹었고 지독한 과제가 끝나면 스트레스를 풀려고 불닭볶음면을 하나 사서 해치웠다.


그러니 내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에 대한 기호도 별로 없었다. 음식은 최대한 빨리 먹고 없앨 수 있는 걸로 샀다. 왜냐면 자취를 시작하면서 잘 챙겨 먹어 보겠다고 냉장고도 잔뜩 채워봤지만 잘 시간도 없는데, 요리할 시간이 있을 리가. 버섯에도 곰팡이를 피워보기를 몇 번, 그 뒤로는 간단한 음식만 넣어두고 빼먹었다.


그런데 대만에 오니, 먹을 것에 자유가 갑작스레 넘쳐났다. 대만은 일단 중국의 식문화와 이곳에 살던 원주민들의 식문화, 그리고 일본의 식문화가 더해져 다양한 음식이 넘쳐나는 곳이다. 가오슝은 특히 남쪽이라 많이 달고 많이 짜지만, 다른 곳도 사실 그렇게 담백하진 않다. 나물 요리에도 기름이 많고 나름 간소하게 만든다고 하는 음식들도 절간 음식에 가까운 음식을 먹고 살아온 나로서는 자극적이기 짝이 없다. 자극적이라는 건 무슨 맛일까? 맛있다는 말이다.


좋아하는 사람들은 너무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들은 손도 못 대는 게 대만 음식이라지만 난 정말 대만 음식들을 사랑한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목이버섯을 넣은 볶음밥과 훠궈인데, 그 외에도 직접 식재료를 골라 넣는 '루웨이'도 좋아하고 땅콩가루를 넣어 달달하게 먹는 대만식 부리또, '춘권'도 별미다.

내가 사진을 좀 못찍어서 그렇지, 춘권은 보기보다 맛있다.

 

가끔 야시장에서 괜찮은 큐브 스테이크를 구하면 그 날은 성공이다. 전에는 양파와 함께 미디엄으로 구워주는 큐브 스테이크를 하나 먹었는데 그 날의 행복이 아직도 입에 있다. (사실 큐브 스테이크는 많은 만큼 맛있는 집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또한 야시장에 가면 파파야를 간 우유, '모과뇨우나이'를 파는데 한 번쯤은 꼭 먹어보길 권한다. 끝으로 당신이 우육면을 좋아한다면 고기를 통째로 넣고 끓인 우육면 대신 차돌박이를 넣은 우육면도 꼭 한 번 먹어보길 바란다. 한 번 이 깔끔한 맛에 길들여진 나는, 이제 다시 예전의 통고기 우육면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차돌박이 우육면과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큐브 스테이크. 기억하시길, 맛있는 야시장은 리우허다 루이펑이 아니라.


나는 원래 소화력이 좋지 않아서, 처음 이곳에 왔을 땐 일주일 동안 복통을 달고 살았다. 맛있긴 한데 너무 맛이 강해서 밍숭 하게 먹고 한 동안 단것도 끊고 살던 나에게는 너무 강한 자극이었다. 그런데 한번 입에 익히니 너무 좋아서 자꾸 이것저것 참지 못하고 주워 먹었다. 그러다가 체하기를 또 여러 번. 한 번은 너무 심하게 체해서 삼일을 못 일어났다. 그만큼 한 동안은 식탐을 자제를 못했다.


음식에 한 번 눈뜨니 아침, 점심, 저녁이 너무 곤란했다. 세상에 이렇게나 먹을게 많을 줄이야. 이제 여행 계획을 짤 때도 자연스럽게 간식을 껴 넣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어딘가 멋쩍다. 덕분에 벌써 5킬로나 쪘지만 살면서 이렇게 행복했던 적이 또 드물다. (어쩌면 더 쪘을지도 모르지만 확인하기 싫어서 확인 안 했다. 옷은 배에서 잡지 않는 통짜 원피스나 고무줄 바지만 입고 있다.)   


그렇다면 대만에 오면 뭘 먹는 게 좋을까? 순순히 내 경험으로만 적어본다. 대만에 여러 번 가서 맛있다는 걸 좀 먹어봤다면, 또는 새로운 맛있는 걸 먹어보고 싶다면 다음 다섯 가지는 꼭 기억해 보자.

밀크샵의 로고 / 신줴장의 하이라이트 흑설탕 밀크티! / 시즈완의 깔끔했던 밀크티

1. 밀크티는 꼭 우스란이나 코코에서만 파는 게 아니다. 깔끔한 프랜차이즈라면 한 번 도전해 보자.

흔히들 대만 밀크티 하면 우스란을 많이 떠올린다. 물론 나도 우스란을 무척 좋아한다. 말차 라테에 아이스크림을 추가해 먹어도 맛있고 '전쭈(펄)'을 추가해 먹어도 또 맛있다. 큰 펄은 쫄깃쫄깃, 작은 펄은 알알이 씹어먹는 맛이 또 독특하다. 코코는 사실 가오슝에 많지 않아, 타이베이에서 한 번밖에 못 가봤지만 시 먼 점에서 먹었던 라테가 아직도 입에 맴돈다. 오랜만에 부드럽고 맛있는 커피에 눈이 아주 확 떠졌었다.


그렇지만 대만은 밀크티를 한국이 커피 먹는 만큼 먹다 보니, 거기 말고도 맛있는 곳이 많다.

먼저 "밀크 샵 (milk shop)" 은 가오슝에 특히 많은데 타이중이나 타이베이에도 종종 있다. 가서 '시앤 나이차'를 먹는 게 중요하다. (그냥 '나이차'를 시키면 우유 파우더를 넣은 밀크티를 준다. 몸에도 안 좋고 먹다 보면 맛도 없으니 주의할 것. 또는 '홍차 나티에'를 시키는 것도 좋다.) 종종 베트남에서 수입한 질 나쁜 차를 파는 곳도 종종 있는데 밀크 샵은 친구 씨씨 왈, 다른 곳보다 좋은 차를 쓴다고 하니 믿을 만하다.

밀크 샵에서는 개인적으로 푸딩 밀크티가 당연 최고라고 할 만하다. '지아 푸디' 하면 푸딩을 넣어주는데 설탕은 30퍼센트 (웨이탕)으로 먹으면 아주 완벽하다. (단 걸 싫어하면 '0%, 우탕'도 추천한다.)  

만일 밀크티가 별로라면, 초콜릿을 추천한다. 초콜릿에 푸딩이라니. 단 걸 싫어하지만 않는다면 세상 누가 이 조합을 싫어할 수 있을까?


또 최근에는 우노(Uno) 에도 맛을 붙였는데, 우노는 다른 곳들보다 차가 맛있는 게 장점이다. 또한 밀크 샵의 펄은 하얀색이라 어딘가 심심한 맛이 나는데 우노는 펄 역시 검은색이라 먹는 맛이 좋다. 레몬차도 맛이 있고 밀크티를 못 먹는 친구 말로는 돔과 우유 (돔과 차는 대만에서 가장 흔히 먹는 차로, 결명자와 보리차 중간 정도의 맛이 난다)가 특히 맛있다는데 단연 추천한다.


또한 만일 시간적 여유가 된다면, 차로 유명한 찻집에서 전날 밀크티를 주문해 보길 권한다. 가오슝에서 나는 다도에 일가견이 있는 찻집을 하나 발견했는데 이곳은 밀크티를 전통적인 방식으로 제작한다. 즉, 하루 전부터 숙성시켜 우유에 깊에 배어들게 만드는 것이다. 만드는 시간이 오래 걸려 아직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지만 이곳의 차는 정말 맛있기에 기대할 만하다. 다음번에 또 먹어보고 리뷰를 써 봐야지.


어디서 먹었던 훠궈인지 기억도 안나지만 맛있었던것 같다.


2. 훠궈는 무한리필 집보다는 개별 주문이 되는 곳으로 가자.


대만 하면 훠궈, 훠궈 하면 대만이다. 그렇지만 당신이 훠궈를 특히나 좋아한다면 무한 리필 집보다는 고기 따로 야채 따로 시키는 집을 추천한다. 물론 무한리필 집도 고기질이 나쁘지 않은 곳이 있지만 상대적으로 가격과 질을 생각하면 따로따로 주문하는 집이 비교할 수 없이 맛있다. 가오슝의 훠궈 집만 찾아다닌 결과, 훠궈 추천 지도를 만들어볼까 고민 중에 있지만 이 공식만 시켜도 특히 맛있는 훠궈를 먹을 수 있다. 또 당신이 많이 먹지 못한다면 반드시 '고기가 맛이 있고' 깔끔한 집으로 가보기를 권한다.


물론 무한리필 집이 아니기 때문에 아이스크림이나 음료수에 돈을 받는 게 함정이지만 내 경험상, 콜라를 한잔 시켜먹어도 이 편이 더 싸고 맛있다. 가오슝의 훠궈 맛집을 검색해 볼 때는 많이 가는 무한리필 집 대신, 사람들이 어쩌다 가본 집들을 골라보도록 하자.

내가 제일 좋아하는 까페의 부리또. 숨은 맛집이 너무 많다.


3. 딴삥과 총좌빙, 그리고 지팡이는 웬만하면 맛있다. 굳이 야시장이나 유명한 집을 고집하지 말자.


대만의 아침식사로 손꼽히는 곳은 얇은 밀가루 위에 치즈와 속을 넣고 말아서 부친 후 잘라 후추를 찍어먹는 딴빙, 그리고 딴삥과 비슷하지만 좀 더 질기고 내용물이 도톰하며 자르지 않은 것이 총좌빙이다. 대만 하면 얼굴만 한 치킨 파이, 지파이도 여기저기 유명하다.


하지만 대만의 대표음식이다 보니 굳이 맛집이 어딘데 하면서 찾아다닐 필요는 없다. 내 경험상 사실 학교 앞 식당들이 웬만한 맛집들보다 맛있고 싼 것 같기도 하다. 특히 타이베이 물가는 가오슝 기준으로는 살인적인 편이라서 가오슝이나 타이중, 혹은 지방 소도시에서 파는 집들을 발견하면 한 번쯤 먹어보기를 권한다.


내 기준 최고의 딴빙 맛집은 당연하게도 우리 학교 학생 식당이다. 11시나 12시쯤 가면 아무리 만들고 만들어도 도저히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줄이 기다랗게 서있다. 거기서 갓 나와 아직 채 굳지 않은 치즈 베이컨 딴빙을 먹는 게 또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학교의 많은 부분이 별로지만, 이곳을 떠나도 여기의 딴삥만은 그리워할 것이 분명하다.


이곳에서 오래 살게 되면 한국처럼 나를 옥죄게 될까? 나는 한국을 정말 사랑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한국에서는 별로 행복하지 않았다. 해야 할 것도 많고, 내가 나약하다는 걸 오랜 기간 걸쳐 확인받았다. 사실 고향에서는 어쩔 수 없다. 대만이 유토피아라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한국을 떠날 생각이 없고, 그곳의 문화와 사람들을 사랑하지만 한편으로는 한국에 갇혀버린 감도 있다. 환경을 바꾸고 나니 인생의 새로운 점들이 보일 때마다, 내가 얼마나 좁은 세상을 전부로 생각하고 살았던가 새삼 돌아보게 된다. 늘 같은 길로 걸어서는 어느새 새로운 길로 걸을 수조차 없다. 새로운 길만 보면, '에이 그냥 알던 곳으로 가자.' 하고 발걸음을 돌리게 되니까.


완전히 환경을 바꿔본다는 건, 박쥐로 태어나 독수리로 사는 것과 같은 기분이다. 이런 기회를 갖게 된 것에 감사할 때가 많다. 또 외롭고 힘들어도, 버틸 수 있을 만큼 두발로 서는 힘을 익혀 온 것도 다행이고. 맛있는 밀크티를 한 잔 마시면 자연스레 그런 생각이 든다. 음식이 정말 괜히 중요한 게 아니다.


인생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되는 건 늘 즐거운 일이다. 다음에는 어떤 맛있는 걸 찾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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