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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혜 Jan 10. 2019

기억을 캐리어에 넣을 순 없을까?

가오슝에서 열 번째 일기

+ 인천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함께 보낸 윤정이가 지구 반대편에서 사귄 유윈 언니와 치진 섬에서 찍은 사진이다. 친구의 친구에서 친구가 되는 건, 별거 아닌데도 즐겁다.




요즘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바쁘다. 분명 저번 주 금요일쯤 캘린더를 보며 '빨리 다음 주 좀 지나가라!' 하고 빌었던 것 같은데, 열두 시가 지났으니 웃기게도 벌써 문제의 '그' 다음 주 목요일이다.


이번 주 화요일에는 교환학생들을 도와주는 '버디'프로그램, 한국 팀끼리 모여 저녁을 함께했다. 이곳에서 유명하다는 훠궈 집을 갔는데, 이상한 나무 덩굴무늬의 문이 열리자마자 부처님이 마치 바다로 곳 들어갈 것 마냥 물 위에 얼굴만 척하니 내밀고 있는 것이다. 같이 간 나와 연이 언니는 자동문 앞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던 어린 시절처럼 문 앞에서 왔다 갔다 재미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문이 닫혀서 마음이 급한 순간. 발이 뛸 준비를 하고 있다.


그날 간 훠궈 집은 훠궈 냄비 위에 솜사탕이 올라가기로 유명한 집이었다. 냄비 밑에 불을 올리고 육수를 쭉 내리면 솜사탕은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고,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진이 오빠는 인스타 전용 훠궈라고 웃었다. 그렇지만 또 생각해보면, 어딘가에 올릴 일이 없어도 색이 변하고 물체가 허물어져 섞이는 과정은 늘 이유 없이 즐거웠다.


지난여름의 끝물, 친구 넷과 함께 경주에 갔던 기억이 났다. 분홍빛 음료 위에 파란 시럽을 더하면 보라색으로 변하는 음료였는데, 내가 시럽을 들고 비장하게 '자 이제 붓는다' 하니 다들 긴장한 채 핸드폰과 카메라를 꼬옥 쥐고 숨을 죽이고 연하게 반짝이는 연분홍 에이드가 벨벳 색으로 변하는 그 순간만을 기다렸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무언가 빠르게, 과거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그 순간을 지켜보는 걸 언제나 즐거워하는 모양이다. 초등학교,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 과학실에서, 어차피 모두가 알아낸 사실을 딱히 증명할 것도 없는데 준비된 시약을 몇 방울 섞는 행위만으로 일어나는 그 가벼운 변화에도 소리를 꽥꽥 지르던 기억이 여전히 선하다.  하지만 그냥 재밌을 거라고 생각했던 훠궈는 생각보다 맛있었고 우리는 중국어 욕이라던가, 서로의 나이라던가 하는 것들을 사사롭게 물으며 시간을 보냈다.


화요일에는 오랫동안 나를 도와준 친구, 링링과 벼르고 벼르던 태국 음식점에 갔다. 한 번은 내가 타이베이에 여행을 가서. 또 한 번은 링링이 바빠서, 그다음엔 내가 잠시 한국에 갔었고, 근래에는 또 신년이라 링링이 본가에 돌아가느라 가지 못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고작 5분이면 도착하는 거리를 가려고 한 달을 기다린 셈이라니. 그다지 늙지도 않았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가장 귀하고 드문 기회는 아끼는 사람과 함께하는 한 끼인 듯하다.


사실 대만에 가기 전, 나의 친애하는 선생님은 오토바이는 절대 타지 말라고 당부 또 당부를 하셨다. 오토바이를 탔다가 다리 부러져서 오는 애들이 한 둘이 아니라고. 그 말씀을 받들어 몇 달 간은 오토바이를 타지 않았지만 사실 근래에는 누군가가 오토바이를 태워주면 나도 모르게 '아싸!' 하는 생각과, 동시에 진실된 웃음이 난다.


선생님도 가오슝에 오신다면 알게 되실 거예요. 여긴 오토바이가 없으면 마치 조선시대와 같답니다.

대만 사람들도 인정하는 어딘가 엉성한 노선의 버스와 턱도 없이 적은 택시, 딱 정중앙만 다니는 지하철, 그리고 관광지만 좀 돌고 말 뿐인 트램. 두 달째가 되었을 때, 나는 진지하게 오토바이는 때로 무척 실용적인 물건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화요일 점심도 환상적이었다. 대만이 태국과 가까워서 그런지 태국 음식 역시 태국에서 먹은 맛과 그다지 멀지 않은 느낌이었다. 우리는 쫀득한 새우 전병과 (사실 진짜 이름을 모른다.) 공심채 볶음, 팟타이와 밥, 그리고 태국식 밀크티를 시켜 먹었다. 태국의 밀크티는 좀 더 떫은, 느낌상 오래 숙성된 차로 만든 맛이었는데 대만의 거리에서 흔히 먹던 밀크티와는 또 색달랐다.


"진짜 밀크티는 하루 정도 묵어야 해요. 요즘은 다들 빨리 먹으려고 그냥 바로 섞어 버리지만."

최근에 갔던 찻집에서, 높이에 따른 우롱차의 맛에 대해 설명해주시던 사장님은 문득 그런 말씀을 하셨다.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늘 어딘가 아쉬움을 갖고 현대를 바라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남들처럼 오래 된 것을들 뒤쳐졌다고 생각하는게 아니리  영원한 것으로 보는것 깉달까. 그들은 언젠가 전혀 다른 세상이 와도 늘 원래부터 맛있던 음식과 차를 먹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겠지. 젊은 사람들이 왔다고 기뻐하시는 사장님을 보면서 쓸데없이 그런 기분이 들었다. 미래야 모르겠지만.


그리고 수요일이었던 오늘은 지영이와 앞방 친구 씨씨와 함께 떡볶이 체인점 두끼에 갔다 왔다. 맛있는 거 먹여주겠다고 자신만만하게 씨씨를 데리고 갔는데 무슨 두기에 파도 없고 카레 소스도 없어서 결국 어딘가 맹숭한 떡볶이를 만들어 먹었다. 씨씨는 연신 맛있다고 헀지만 우리가 만들어줘 놓고도, 진정 맛있는 떡볶이를 먹여주지 못해 미안함과 아쉬움만 가득했다. 거기에 볶음밥까지 실패한 우리는 결국 국자를 놓고 왜 실패했는가에 대한 피드백을 나눴다. 물론 씨씨와 직원들은 대체 이 한국인들은 왜 이렇게 떡볶이와 볶음밥에 진지하게 구는가 이해할 수 없는 눈치였지만. 우리에겐 중요한 과정이았다. 이상하게 한국인들은 국자와 철판만 쥐면, 셰프라도 된 것처럼 책임감을 느끼는 것 같다. 대만 생활 끄트머리, 한식을 찬양하지 않는 한국인이 없다. 그런 음식은 남들에게 전파해야 한다는 약간의 의무감마저 생겨버린 모양이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가 영어로 떠드니, 기사 아저씨가 씨씨에게 너희 어느 나라 사람이냐 하고 물었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인이고요, 하는데 지영이가 불쑥 '얘는 일본인이에요.'하고 씨씨를 가리키는 게 아닌가. 그런데 씨씨는 그냥 웃으면서 '하이 와타시와 니혼진 데스 (네 저는 일본인입니다.) 하고 대답하는 통에 기사 아저씨는 아아 소오 데스까. 하고 넘어갔다. 택시를 탈 때마다 다른 인생을 살아보는 것도 재밌는 일이다. 마치 미용실을 갈 때마다 다른 인생을 사는 사람처럼 별거 아닌 거짓말에서 오는 짜릿함이 있다.


전에도 공항에서 유심칩을 사러 지영이와 택시를 탔는데 아저씨가 집에 돌아가냐, 하고 물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네 한국은 진짜 가까워서 저흰 그냥 빈손으로 비행기를 타요' 하고 대답한 것도 지영이었다. 하긴, 택시기사 아저씨도 다시 안 볼 사람이라 생각하고 아무 얘기나 하지 않던가. 어쩌면 그렇게 그들의 친척, 아들, 사촌은 모두 명문대 출신이고 북한은 우릴 언제 침략할지 모르다가 별거 아니기도 하고, 정부는 또 잘했다가 잘못했다가 반복할까. 불장난이 집을 태우지 않게만 조심하면 그냥 장난이 되듯, 거짓말도 커지지 않도록 아무도 다치지 않는 장난에서 멈추도록 잘 조심하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지금은 수요일에서 목요일이 된 새벽 2시다. 하루는 참 빠르고 눈코 뜰 새 없이 매일이 지나간다. 하루를 모두 기억할 순 없고, 좋았던 시절이 과거가 되는 건 늘 서글픈 일이다. 짐을 싸야 할 날이 오는데, 어쩐지 귀찮아 한없이 미루고만 있다. 캐리어에 옷가지와 책과 약이니 하는 자질 구레한 것들 대신, 추억만 담을 수 없는 걸까. 매일매일 지나가는 대화들을 실처럼 엮어 천을 짜 걸어 놓으면 좋으련만. 가끔씩 들여다볼 수 있게 바리바리 한가득 싸 가면 좋으련만.


어딘가 담아둘 수 없기 때문에 순간, 또는 찰나의 것들은 너무나 흥미롭고 아름답다. 사실 이곳에서 늘 행복하지는 않았다. 어떤 날은 부끄럽고 어떤 날은 수치스럽고, 하루는 그냥 짐을 싸서 내 책임을 모두 져 버리고 이곳에서 도망치고만 싶었다. 그렇지만 반짝이는 것들은 쉽게 지워지지 않으니 언젠가는 모두 기쁜 기억만 남으리라 믿는다. 인생의 몇 배를 더 살다 보면 육 개월 정도야 아주 찰나일 터, 그럼 나는 반짝였던 찰나만 기억하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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