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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혜 Jan 10. 2019

다시 걸음마를 하고, 말을 배우고

가오슝에서 열한 번째

+ 지난주 주말, 루비와 아만다와 함께 무민 팝업스토어에 갔었다. 나는 마마 인형을 루비는 무민 인형을 가져와서 두 모자의 사이좋은 한때를 찍었다.



어린 시절 나는 오랫동안 한 곳을 떠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인지능력이 생겼을 때부터 우리 집은 늘 하나였다. 

인천에 있고 주위에 상가가 있으며 십 분만 걸으면 역이 두 개. 근처에는 재래시장이 있지만 밤에는 홍등가로 변하니 가까이하면 안 되었고, 유흥업소와 학교 간의 법적 거리 기준에 딱 맞춰 지어진 학교들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 3학년쯤 되니, 반에는 이제 다 언젠가는 한 번쯤 같은 반을 했고 한 다리 건너든 그냥 알든 다 익숙한 얼굴뿐이었다. 


그러다 수능을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고향을 떠나 생전 처음 들어보는 도시에 아직 아무런 건물도 없이 혼자 우뚝 선 산 중앙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그 겨울에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하루 종일 침대에서 잠만 잤다. 눈이 유독 많이 왔고, 어디를 가도 사람 보기가 힘들었다. 근래에 언젠가 썼던 글처럼 나는 그토록 스스로 헤쳐나가야만 하는 변화무쌍한 삶에 익숙지 않았다.


가오슝 토박이 유윈 언니와 함께한 치진의 비밀스러운 바다


대만에 왔던 첫날, 아직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던 방에 홀로 앉아 계속 후회와 후회를 거듭했다. 미쳤지 미쳤어. 말 한마디 안 통하는 곳에 무슨 배짱으로 원서를 썼을까? 어차피 여기서 배우는 글자는 대만식 중국어인데, 차라리 중국으로 가는 게 낫지 않았을까? 룸메이트들은 다 좋은 사람들일까? 우리 학교에서는 나 혼자 뿐인데, 다른 한국인들과 친해질 수 있을까? 등등 고민이 너무 많아서 잠이 쉽게 오질 않았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한 기분이었다. 대관절 무슨 생각으로 이런 타지에서 홀로 살 생각을 했을까. 미쳤다. 이건 정말 미친 짓이다. 


조금 지나니 하나 둘 친구들이 생겼다. 룸메이트들 중 둘은 영어를 잘 못하는 대신 일본어를 아주 잘하고, 하나는 영어를 아주 유창하게 하는 대신 일본어를 한 마디도 못했다. 반면 나는 영어도 잘 못하고 일본어도 잘 못하고 중국어는 전혀 못했다. 첫날 우리는 다소 어색한 분위기에서 첫인사를 하고 영어로 말했다가 중국어로 말했다가 띄엄띄엄 일본어로 말했다가 하면서 이름을 주고받고 서로에 대한 인상을 나누었다. 


타이중 근처 장화 시에서 온 친구이자 일어일문학과인 니나와 핑잔, 그리고 타이베이 출신 번역학과 에리얼. 그리고 각각 서로의 친구들을 소개해 주었다. 니나는 건넌방의 링과 씨씨, 그리고 사오리를 핑잔은 윙을 에리얼은 킴을. 첫날 어쩌다 친해진 올리비아도 룸메이트들이 영영 안 와서 혼자 방을 썼으면 좋겠다고 했으면서 그들과 금세 친구가 되어, 내게 샤샤와 아만다 그리고 루비를 소개해 주었다. 


거기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그 층에 서쪽, 내 방이 위치한 복도에 스무 개 방 팔십 명 중에 교환학생이자 한국인은 오로지 나 하나뿐이었다. 한류가 한창 꽃피던 시기였고 한국 드라마를 한국인인 나보다 많이 본 사람들이 허다했다. 친구와 친구의 친구들은 나를 데리고 다니며 여기저기 인사를 시켜줬고 나는 너무 많은 이름을 들어서 상당 부분 잊어버렸다. 


교환학생. 한국인. 이 두 가지 조합은 대만에서 어딜 가도 자꾸 나를 끄집어냈다. 말도 어눌하니 가게에 가서 딱 눈이 마주치면 모두가 내가 한국인인걸 알았다. 수업에 들어가면 교수님들은 내게 늘 이런저런 말을 시키고 앞에 나와 인사를 시키고, 자꾸 질문을 던졌다. 모두 생에 처음으로 겪는 일들이었다. 


한국에서의 나는, 사실 별 존재감 없는 사람이었다. 4학년이나 되었는데 답사를 빠지는 문제로 면답을 가니 전임 교수님께서 '너는 입학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답사를 빠지면 어떻게?' 하고 말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고. 친구들에게는 재밌는 사람이지만, 친구가 아닌 사람에겐 조용한 사람이었다. 사실 인간관계도 매우 협소했다. 나와 처음 만나 친해진 친구들은 늘 너 생각보다 말이 많구나. 하고 놀라워했던 기억이 났다. 성적도 중간, 어떤 수업에서도 늘 중간 정도. 어디서든지 눈에 띄지 못하는 인생에 가끔은 비참했지만 거기에 적응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도무지 적응할 수 없었다. 언제는 '날 좀 무시해줘!'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냥 나를 여기 사람으로 생각해주면 안 되는 걸까. 나는 볼품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관심을 받으면 치부가 보일 뿐인데. 어눌하게 중국어를 더듬거릴 내게 쏟아진 관심과 시선이 괴로웠고 내가 한심했다. 열심히 중국어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나에게 차라리 영어로 말을 걸어 친절을 베풀면 나를 무시하는 거 같았다. 한국인인걸 알게 되면 북한에 대해 묻고 한국인은 자부심이 지나치지 않냐는 무례한 질문을 하면 때로 화가 나 견딜 수 없었다.

 

나를 흔드는 파도 같은 상황들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때로는 너무 외로웠고 어느 날에는 기숙사에 불이 나 나 혼자만 빠져나가지 못해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종종 했다. 이 층 침대로 향하는 사다리에서 거꾸로 떨어지면 어떨까. 언니도 친구들도, 나를 좀 못 견뎌하던 때가 있었다. 너 지나치게 외로워하고 날카로워. 하고 말하던 어떤 때가. 


그건 마치 이십 년 동안 살았던 내 육신이 죽고, 정신만 남아 가오슝에서 갓난아기로 갓 태어난 것과 같은 심정이었다. 숫자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했고 계절도, 사람도 다시 배워야 했다. 걸음마를 떼는 건 너무 어려웠다. 그러나 어린 시절과 다른 게 있다면, 더 이상 내게는 나를 지켜줄 엄마 아빠, 그리고 할머니가 없고 오로지 나 혼자 뿐이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역시 나 혼자 헤쳐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중국어를 아는데, 입에서 도무지 나가지 않던 한 달 때에는 정말로 힘이 들었다. 아기의 몸에 갇힌 거 같았다. 생각은 나는데 도무지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럴 때면 내가 너무 바보 같고, 한 편으로는 한국에서 멀쩡한 대학생이었던 내가 멀게만 느껴졌다. 다시 전처럼 뭔가를 잘 해낼 수 있을까? 자신감이 떨어졌고, 괴로웠다. 


기숙사 청소를 하는데 나 혼자만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아듣지를 못해, 기다리고 또 실수해 기다리고 다음 날도 꼬박 시간을 버렸다. 어린아이처럼 무력해, 밤새 엉엉 울며 아이들이 이런 심정으로 우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내게는 지식도 경험도 없어, 우는 것 말고는 어떻게 이 상황을 헤쳐나가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괴로움에서 한 발자국 벗어난 건 11월. 친구 민이가 다녀가고 나서부터였다. 나는 그때 민이를 좀 괴롭혔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우리는 별일 없었다. 민이는 잘 돌아갔고 재밌었다고 대답했다. 나는 민이 앞에서 좀 우쭐하고 싶었는데 중국어가 서툴러, 잠깐의 신뢰마저 잃은 게 너무 부끄러웠다. 그럼에도 괜찮았다. 민이는 나를 알고, 우리는 선을 지킬 줄 알았다. 오랜 기간 지속한 관계란 그랬다. 그랬다. 그 순간 이십여 년을 살았던 내 자아가 벌떡 일어났다. 여긴 내 집이 아니라 그래. 근데 내 집에 가면 돼. 하고


크리스마스 때 한국에 잠깐 돌아갔을 때는 삼일 내내 그 생각을 했다. 내게 이십여 년 동안 당연했던 풍경이 여기 이렇게 고스란히 있는데,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뭐든 해낼 수 있고 특별히 눈에 띄지도 낳는 공간이 여기 이렇게 있는데. 익숙한 거리와 간판과 화장실에서의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는 잡담들이 너무나 반가웠다. 내 고향. 내 나라. 내 언어. 그런 것들은 어딜 가도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나를 받아주고 특별하고도 특별하지 않게 받아주었다. 그런 세상이, 그런 공간과 시간이. 지구 어딘가에는 당연하게도 있었다.


팝업 스토어 벽화 속 무민 마마. 나는 마마가 제일 좋다.


삼일 간의 짧은 휴가를 마치고 다시 비행기를 오르는데 마음에 뜨거운 불이 들어앉았다. 이상하게도 그랬다. 그 뒤로 나는 덜 외로워지고, 덜 슬펐다. 대신 한국이 더 보고팠다. 고작 몇 개월만 떠나 있어도 이런데 그 옛날 고향을 잃은 선조들은 얼마나 서글펐을까. 교과서에서 유독 좋아했던 소설, '삼포 가는 길'에 고향에 갈 생각에 연신 신나 있던 주인공이 떠올랐다. 일제 강점기에 셀 수 없이 많은 이유로 고향을 떠나야 했던 많은 사람들과, 남북 전쟁 부랴부랴 남쪽으로 향했다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던 북녘 사람들을 생각했다. 

나는 한국을 떠나서도 잘 살 줄 알았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한국이 있기에 잘 살 수 있는 거였다. 


이곳에 오기 전, 선생님 한 분이 내게 육 개월이 아니라 적어도 1년은 나가 있어야 한다고 설득했던 적이 있었다. 계획상 그럴 순 없었지만 그랬으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도 든다. 지금은 작고 어린 내가, 육 개월 후에는 좀 더 강해져 있지 않았을까. 아기에서 아이가, 혹은 청소년이 되지 않았을까?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이렇게 어리숙한 중국어와 걸음마를 갖고 떠나는 건 참으로 아쉬운 일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한 것 만으로 우선은 만족하고 싶다. 나는 혼자 크지 않았고 주위에 수많은 사랑과 보호, 그리고 도움으로 컸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에. 그리고 이제 이십 년을 넘게 살아 잊고 살았던 일이지만 나도 태어나는 순간에는 여기저기서 많은 관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렸다는 점에. 그 모든 사실에 아쉬움보다는 감사로 끝을 맺고 싶다.


내가 처음 이곳에서 매일매일을 부딪히고 힘들어할 때, 씨씨가 그런 말을 했었다. 

'괜찮아 루시(나의 영어 이름).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어.'

우리 엄마도 언젠가는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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