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노사이드
1. 암흑의 심연
우월적 지위에 있는 한 개인의 집요한 욕망과 그 욕망을 하나의 복음처럼 신봉하는 추종자들이 결합했을 때 그 폭발력이 얼마나 큰 여파를 만들어내는지 현재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히틀러가 그랬고, 무솔리니가 그랬고, 스탈린도 그랬다. 타고난 사냥꾼인 호모사피엔스의 후예인 인류세에게는 누구나 욕망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욕망이 강력한 카리스마와 집념과 결합되어 사우론 같은 거대한 존재가 된다면 그 존재는 시스템화되어 진화를 하게 되고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인간의 탐욕은 끝없이 팽창되기 마련이고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런 경우는 전쟁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제국주의의 결정판인 식민지 지배 과정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그들은 전쟁과 식민지 지배에서 한 보 후퇴는 할지 모르지만 결코 도태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아메리카에서 그 땅의 고혈을 전부 뽑아 먹은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고, 영국과 프랑스도 뒤이어 온갖 방법으로 정복욕을 관철시켜 지구의 영양분을 거의 다 흡입하지 않았던가. 전쟁과 식민지라는 수단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류 진화의 발판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식한 것이다. 물론 여기서 인류는 서유럽인이다. 그래서 이런 통찰은 인종주의와 적자생존을 거쳐 우생학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고, 그 법칙에 따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위선과 거짓과 폭력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욕망의 역사에서 작지만 가정 강력한 결과를 낳은 레오폴트 2세에 대한 욕망의 보고서이다.
19세기는 유럽의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이미 지구 전체가 유린당하고 있을 때였다. 아메리카는 16세기부터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 전통적인 열강들에 의해 식민지화가 되어왔고, 19세기에는 식민지 지배가 무너지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아이티의 경우는 다르지만, 멕시코와 브라질의 경우처럼 당시 식민지에서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던 크리올과 메스티소에 의해 독립을 이룬 국가들도 많았다. 그런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아직도 배가 고픈 열강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눈을 돌려 빨대를 신나게 꽂고 있었다. 당시엔 기존의 열강 외에도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벨기에 같은 국가에서도 식민지 러시에 뛰어들었다. 예를 들면 중국 같은 데서는 거의 유럽 전체가 벌떼처럼 달려들어 살점을 뜯어먹는 제국주의의 끝판을 보여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에서는 큰 파이를 놓고 나누어 먹기 위한 협의와 조정 등이 신사협정 같은 그들만의 룰에 따라 추진되었다. 가능하면 서로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땅따먹기 하자고 무언의 합의를 한 것이다. 이브의 땅이었고, 루시가 살던 땅이었으며 적어도 수십만 년 동안 살아오던 땅 주인의 의견 따위는 필요 없었다.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초토화되었던 유럽은 이제 더 이상 자신들끼리는 싸우고 싶지 않았고 이런 욕구불만을 밖으로 돌려 식민지에 올인을 한 것이었다. 그중에 가성비 측면에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던 아프리카가 요리의 대상으로 떠올랐던 것이다. 중국과 동남아시아는 자신들보다 더 오래된 각각의 훌륭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술수에 쉬게 넘어가지 않아 애를 먹었던 반면, 아프리카는 상대적으로 그보다 훨씬 수월했다. 물론 당시 유럽을 휩쓸고 있던 인종주의, 유전학, 진화론 등으로 인해 흑인에 대한 편견이 최악이었던 원인도 한몫했다. 그러니까 유럽인에게 보인 아프리카는 식인종들이 난무하는 미개인의 땅이었던 것이다.
15세기 포르투갈인이 처음 서아프리카 해안 지역을 탐험하기 전에도 아프리카에는 제국화 된 왕국들이 많았다. 동쪽에는 에티오피아와 악숨왕국이 이미 고대 때부터 건재해 왔고, 서쪽으로는 가나왕국, 말리왕국, 콩고 왕국이 제국 형태의 문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사하라 사막 남쪽에는 카넴제국이라는 강력한 왕국이 당시 기준 1,200년 전부터 계승되어 왔고, 남쪽으로는 1,000년의 역사를 가진 그레이크 짐바브웨라고 불리는 문명권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크고 작은 왕국들이 서로 욕망의 쟁탈전을 하며 자신들의 문화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유럽인이 서아프리카에 진출하면서 그곳은 지옥이 되었다. 유럽인이 처음 자행한 것은 노예무역이었다. 시작부터 피의 역사가 펼쳐진 것이다. 아프리카인은 유럽의 화약 무기와 기술 문명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와 더불어 중동의 아랍인들도 이 노예무역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유럽에서는 불법화된 노예매매를 19세기말까지 지속적으로 이어갔다. 이렇게 대서양과 인도양을 중심으로 행해진 노예무역은 아프리카를 초토화시켰다. 대서양 노예무역에서만 수백만 명이 생명을 잃었으며 그보다 훨씬 많은 아프리카인들이 노예 신분으로 아메리카로 강제 이주를 당하였다. 그리고 백인들은 그것도 모자라 19세기에는 아프리카 내륙 깊이 탐험하기 시작하여 본격적으로 식민지화에 기치를 올렸다. 적어도 호모사피엔스의 기원지이기도 한 아프리카는 선사시대를 거치며 자신만의 고유한 문명권을 형성하여 왔지만 결국 이제는 유럽의 배를 불리는 철저한 도구로 전락하게 되었다. 현재 지명으로 보면, 이집트, 수단, 우간다, 케냐, 남아프리카, 보츠나와는 영국의 식민지였고, 프랑스 땅은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모리타니, 말리, 차드 등이었고, 앙골라와 모잠비크는 포르투갈, 탄자니아와 나미비아와 카메룬은 독일이 그리고 이탈리아와 스페인 등이 나머지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강대국들 사이에서 벨기에라는 당시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소국에서 마지막 남은 콩고를 집어삼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벨기에가 노린 땅은 열강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지역이었다. 모든 제국주의자들이 아프리카의 해안을 따라 식민지를 만들었지만 대륙의 중심에는 여전히 미답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곳은 거칠고 긴 콩고강과 험준한 산악지역과 함께 죽음의 그림자가 빼곡한 열대우림지역으로 형성되어 있어 아프리카인이라도 아무나 출입을 할 수 없는 ‘암흑의 심연’이었다.
19세기는 흔히 말하기를 탐험의 시대였다. 제국주의자들은 지구에서 마지막 남은 땅과 바다를 찾기 위해 많은 탐험가들을 미지의 땅으로 보냈다. 아프리카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아프리카 내륙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다. 아프리카는 너무나 거대했고, 뜨거운 사막과 사바나 지역, 말라리아 같은 전염병, 그리고 울창한 밀림과 거친 강줄기로 어지럽게 짜여있는, 조셉 콘래드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둠의 공간’이었다. 본격적인 아프리카 내륙 탐험은 1830년대 스코틀랜드인 맥그리거 레어드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수로 탐사에 적합하게 개조한 증기선을 타고 서아프리카 나이저 강을 따라 상류로 탐험하였다. 하지만 열대성의 고온다습한 더위와 전염병 등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지 못하고 선장이 사망하는 상황에 봉착한 끝에 중도에 돌아오고 말았다. 뒤이어 영국 왕립지리학회의 지원을 받은 리차드 프랜시스 버튼이 1853년 유럽인 최초로 탕가니카 호수와 빅토리아 호수를 발견하였고, 나중에는 존 해닝 스피크와 함께 나일강의 기원을 찾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또한 독일인 게오르그 슈바인푸르트가 아프리카 동북부를 탐험하여 백나일강, 봉고를 거쳐 콩고-나일강 유력까지 진출하였고, 역시 같은 독일인 구스타프 나르티갈은 중부 사하사 사막을 탐험하여 바기르미, 와가이, 쿠르도판, 사헬까지 죽음의 행진을 하였다. 프랑스 출신 폴 뒤 샤이유도 서아프리카 가봉의 오고우에강 부근을 탐험한 끝에 피그미족을 처음으로 발견하였고, 고릴라에 대한 연구도 심도 있게 개진하여 유인원 연구의 대가가 되기도 했다. 아프리카 탐험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데이비드 리빙스턴이다. 의사이며 선교사였던 그는 1849년 응가미 호수를 발견한 후 잠베지강, 빅토리아 폭포, 사이어강, 니아사 호수 등을 여행하며 원주민과 함께 삶을 영위하다가 1873년 2월 현재의 잠비아 치푼두에서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사망하였다. 이후 영국에서 성인으로 추앙받은 그는 2년 전인 1871년 10월, 몇 년째 영국으로 소식을 전하지 않는 자신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찾아온 헨리 스탠리와의 조우로 인해 유럽 탐험사에 길이 남을 사건의 주인공으로 회자되었다. 이외에도 총으로 무장한 수많은 백인들이 미지의 아프리카 곳곳을 들쑤시고 다니며 지역의 거의 모든 정보를 자신의 국가에 팔았다. 이는 식민지 개발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그리고 그 탐험가 중에는 리빙스턴 찾기 프로그램의 주인공이었던 헨리 모턴 스탠리도 아프리카 중심부에 하나의 굵은 선을 그었다.
2. 레오폴드의 꿈
이렇게 아프리카가 유럽인에 의해 난도질을 당하고 있을 때 유럽의 소국 벨기에에서는 문제적 인간 레오폴드 2세가 1865년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독일 베티 가문의 튀링게 공작 중에 한 명인 프란츠 프리드리히 안톤 작센 공작의 적자 레오폴드 1세가 1830년 네덜란드에서 독립한 신생국가이면서 입헌군주제를 내세운 벨기에의 국왕으로 옹립되었고, 그의 사망 후 레오폴드 2세가 왕위를 이어받은 것이다. 레오폴드 1세 책봉 때부터, 나폴레옹 전쟁 후 유럽 정치의 복잡한 헤게모니와 그에 따른 권모술수가 횡횡하는 가운데 어렵게 성사된 대관식이었기 때문에 왕권에 대한 정통성은 항상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19세기에 탄생한 유럽의 신생 국가들은 강대국들에 의해 입헌군주제가 중심인 정치체제를 받아주었는데 이 과정에서 누구를 국왕으로 옹립하느냐를 두고 몸살을 알고 있었다. 대게는 오래된 정치 관습에 따라 강대국들을 중심으로 선출한 정통적인 왕족이나 유력한 공작의 적자들이 신생국가와 어떤 공동체적인 연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올랐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오스만제국으로부터 독립한 그리스에서도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1세의 차남인 오토 프리드리히 루트비히가 열강들의 정치적 계산에 따라 왕위에 추대되었다. 처음엔 그리스 독립을 인정하는 런던 의정서를 발표한 후 위에 언급한 레오폴드를 왕위로 추대하려고 했지만 레오폴드가 거부하는 바람에 17살의 오토 왕자가 왕위에 오른 것이었다. 이런 추대 형식은 통일 이탈리아에서도 시행되었다. 아무튼, 그러므로 해서 레오폴드 2세 또한 정통성과 더불어 이런 권력구조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왕으로서의 권위 행사보다 개인사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의 최우선적인 관심은 당시 유럽에서 광풍이 불고 있던 식민지 개척이었다. 누구보다 욕망이 강했던 레오폴드 2세는 강대국이나 여타의 제국주의 국가들처럼 노골적으로 식민지 개발에 뛰어들 수 없는 형편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영국이 완성시킨 인도와 버마의 식민지사를 공부하였고, 특히 가장 가까운 관계인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에 관심을 갖고 자바섬에서 운영된 식민지 경영에 대해 집중적으로 학습을 하였다. 그는 동인도 회사의 대주주이기도 했다. 식민지에서의 철도와 운하 건설, 커피와 설탕과 담배 등의 플랜테이션 운영에 대해 구체적인 정보를 습득하였고, 그 가운데서도 어떻게 해서 네덜란드 국왕이 민간회사와 교섭권을 확보했는지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또한 ‘자바 식민지 관리법’의 저자와 서신 왕래를 하면서 보다 심도 있게 과외를 받았다. 그 저서에는 강제 노역에 의존해야 막대한 이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레오폴드는 식민지에 대한 열망이 대단하여 남아메리카, 남태평양의 군도, 남아시아 등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식민지가 완성되었거나 아직도 진행 중인 지역에 그래도 혹시나 자신이 개발할 자투리 땅이 있는지 현미경을 들이 밀고 찾았다. 마치 부동산업자처럼 땅에서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이에 그는 그들 국가나 관련 사업가들에게 측근을 보내 틈새를 타진했지만, 해군력도 전혀 뒷받침할 수 없는 약소국이란 이유로 상대방은 미온적이었다. 필리핀 일부를 스페인으로부터 매입하려고 접근하였지만 실패하였고,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귀족의 작은 식민지 땅에도 관심을 가져보았지만 협상은 성공하지 못했다. 기존의 식민지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엘도라도를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은 벨기에 정부도 아니고 상징적인 권력만 보유한 국왕에 불과한 레오폴드를 자신의 파트너로 수용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작은 동네 골목대장 정도로 취급했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레오폴드는 자신을 파트너로 삼지 않는다고 해서 포기할 위인은 아니었다. 그냥 조용히 평안하게 왕으로서 영광을 누리더라도 어느 누가 탓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보다 모험적인 인생을 갈망하며 제국주의자들이 점령한 사바나에 뛰어들기 위해 온갖 방법을 강구하였다. 성취욕의 노예가 된 전문 탐험가처럼 그는 야생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그는 아프리카로 눈길을 돌렸다. 아프리카는 거대한 대륙이었고 아직도 탐험이 왕성하게 진행되는 미답지가 많았다. 비록 기존의 식민지처럼 편하게 시작할 수 없었지만, 그리고 실패할 가능성이 농후했지만, 아프리카 지도를 깔고 도박판을 벌려보는 것도 흥미는 있다고 그는 생각했는지 모른다. 집요하고 주도면밀한 성격의 소유자인 그는 발톱을 숨기고 아프리카 모험을 체계화하기 시작했다.
1875년 기준으로 볼 때, 아프리카는 유럽의 웬만한 국가들이 식민지를 구축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80%의 땅은 거의 주인 없이 무주공산으로 남아 있었다. 미정복지의 정보와 빠르게 변하는 주변국의 헤게모니 여하에 따라 주인이 만들질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이에 레오폴드는 그들의 틈바구니에서 정보를 취득하고, 탐험가와 접촉을 꽤 하고, 투자도 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성서는 되지 못했지만 아프리카를 동서로 횡단을 한 스코틀랜드 출신 탐험가 버니 로베트-카멜론에게 10만 프랑을 기부 형식으로 투자를 하기도 했다. 그는 영국으로 직접 건너가 많은 귀족과 식민지 관련 전문가들을 만나 자신이 어떠한 인간형인지를 선전하였는데, 그 와중에 당초 영국 방문의 목적이었던 탐험가 카메론을 만나 아프리카에 대한 전반적인 상황을 직접 경청하는 자리도 만들었다. 또한 1876년 9월에는 노예무역 척결과 과학적 진보 등의 비영리적인 비전을 주제로 브뤼셀에서 24명의 탐험가와 지리학자 등을 초대하여 콘퍼런스를 주관하였다. 그들은 호화로운 연회와 융숭한 대접을 받았는데, 그들 중에는 프랑스의 콩비누에, 독일의 게르하르트 롤프스 같은 탐험가도 있었고, 역시 탐험가이자 베를린 지리학회 회장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과 프랑스 지리학회장 론시에르 드 누리 등이 참가했고, 그 밖에도 노예폐지론자인 영국의 토머스 포웰 벅스터, 선교회 의장 존 케너웨이, 영국 인디아라인 해운회사 사주 윌리엄 매키너, 영국 제독 레오폴드 히드 등 저명인사들도 참가하여 회의를 빛내주었다. 회의 의장에는 러시아 출신 탐험가 포트르 세메노프가 레오폴드의 추대로 임명되었다. 레오폴드는 이 회의에서 아프리카를 문명화하고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고 아프리카로 진출하겠노라고 연설하였다. 사실 자신의 사업 구상을 밝히는 프레젠테이션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았다. 또한 가치 있는 십자군운동, 만연한 노예무역 폐지, 부족 간의 평화정착, 평등하고 공정한 중재를 알선하는 협의체 설립 등 실천 사항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사람 크기 만 한 아프리카 지도를 벽에 걸어놓고 콩고강 유역을 점찍으며 이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 회의에서 그는 <국제 아프리카 협회> 설립을 이끌어냈다. 본부는 브뤼셀에 정하고, 지부는 참석 인사들 국가에 설치하였고, 초대의장에는 레오폴드 2세가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 이 회의는 유럽의 강대국으로부터 환영을 받아 기부금이 쇄도하였고, 당대 최고의 금융가인 로스차일드 가문으로부터도 관심을 받았다.
레오폴드는 이렇게 인도주의에 입각한 사회 환원 사업회를 개최함으로써 대중적인 호감도가 상승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본래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철저하게 인간애가 넘쳐흐르는 박애주의자임을 각인시키는 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의 대외적인 이미지는 온건하고, 사심 없고, 기독교적인 인간형으로 완벽하게 세탁되었다. 여우 같은 계략이었다. 그렇게 이미지 변화에 성공한 그는 상대적으로 강대국들의 관심이 덜한 지역 즉 유럽인의 접근을 거부하던 아프리카 중심을 향해 첫걸음을 내디뎠다.
3. 콩고강으로 가는 길
1871년, 당시 30살의 패기 넘치는 젊은 언론인이었던 헨리 모턴 스탠리가 혜성처럼 아프리카 탐험 무대에 등장하였다. 그는 영국 웨일스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거의 고아원에서 살다시피 하다가 18살 때 꿈을 안고 미국 뉴올리언스로 이주하여 홀로 자립하였다. 남북전쟁 당시 남군에 입대하여 미국인임을 증명한 후 우여곡절 끝에 제대를 한 그는 세인트루이스로 가서 언론계에 진출하여 나름 괜찮은 입지를 다졌다. 그가 저널리스트로서의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다분히 선정적인 기사를 양산함으로써 판매부수를 올리는데 기여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연유로 그는 당시 최고의 발행 부수를 자랑하던 뉴욕 헤럴드로 스카우트되었다. 제임스 고든 베넷이 사주인 이 일간지는 신문의 기능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독자를 놀라게 하고 즐겁게 하는 것이란 기조를 가지고 있었고 이에 따라 사람들의 눈길을 끌 수 있는 기사라면 의도된 오보와 사기극까지 마다하지 않는 선정적인 성향을 보였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황색저널리즘의 전형이었다. 이런 공격 성향의 신문사에 취업을 한 스탠리는 사주의 의도에 충족하는 기사를 양산하여 고용주의 눈에 띄었고, 그렇게 해서 1868년 이집트 카이로 상주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영국과 에티오피아 전쟁을 취재함으로써 아프리카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당시 아프리카 중앙 지역에서는 나일강의 원류를 찾는 붐이 불어 영국을 필두로 리처드 버튼과 존 스피크 등에 의해 탕가니카호와 빅토리아 호수가 세상에 알려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 데이비드 리빙스턴도 한몫을 하고 있었다. 의사이며 선교사였던 리빙스턴은 당시 살아있는 신화적인 아프리카 탐험가였다. 개인적인 사익보다 기독교적인 선교를 목적으로 시행된 탐험이었기 때문에 유럽에서 주목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의학과 신학으로 무장한 그는 1841년부터 케이프타운에서 마차보를 거쳐 은가미 호수까지 여행하였고, 아프리카 서해안에 위치한 앙골라의 루안다에서 동쪽으로 탐사하여 빅토리아호를 처음으로 발견하였고, 차후에는 탕카니카호, 니아사호, 잠예지강 등을 목숨을 걸고 집중적으로 탐험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였다. 특히 두 번에 나누어 실현되었지만, 아프리카 대륙을 횡단한 최초의 탐험가로도 이름을 남겼다.
하지만, 유럽인에게 신화적인 탐험가로 기억되던 리빙스턴의 소식은 어찌 된 영문인지 1866년 이후 전해지지 않았다.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궁금증이 언론을 타고 확산되자 그의 거취를 찾아야 한다는 이슈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중동 특파원으로 활약을 하고 있던 스탠리가 이 이슈에 호출되었다. 그것은 개인적으론 그의 인생을 바꾸어놓은 전환기적인 사건이었고 대외적으론 콩고 식민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1871년 스탠리는 뉴욕 헤럴드 사주 베넷으로부터 리빙스턴 구출 기획 원정을 추진할 것을 제의받고 곧바로 190명의 대규모 원정대를 꾸렸다. 이 기획 원정 탐험대는 베넷의 동물적인 감각으로 신속하게 추진된 선정성이 다분한 기획이었고, 스탠리 또한 사주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고리타분한 특파원 생활에 지쳐있던 그에겐 귀가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숙명적으로 모험적인 삶을 살아온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런 자극적인 기획은 그의 본능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는지 모른다. 그의 심장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렇게 잔지바르에서 시작한 스탠리 원정대는 1872년 습기 가득한 늪지대와 숨 막힐 것 같은 열대우림 지대를 지나고, 아랍 노예상들의 방해와 말라리아와 이질 같은 전염병 그리고 맹수들의 공격 등으로 많은 원주민 포터들이 사망하였고, 유럽인 2명도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는 등 8개월간의 험난한 여정이 이어졌다. 그런 죽음의 행진 끝에 스탠리는 탕카니카호 인근에 위치한 우지지에서 운명처럼 리빙스턴을 찾는 데 성공하였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전부 할 수 없고, 아무튼 스탠리는 리빙스턴이 살아있다는 생생한 기사를 뉴욕 헤럴드에 타전함으로써 일약 유명 특종 저널리스트가 되었다. 이 불굴의 기자가 죽음과 맞서 싸우며 성인 리빙스턴을 찾았다는 기사는 센세이셔널 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이 탐험의 기록자는 스탠리가 유일했다. 그의 말과 글은 모두가 진실이 되어 수많은 대중에게 전파되었고, 그가 속한 뉴욕 헤럴드는 본전을 뽑고도 남았다. 그가 남긴 일기와 기사 내용은 맞지 않은 점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반박할 어떤 증인도 없었다. 전기 작가들에 의하면, 진실이 왜곡되거나 과장되기도 했고 많은 부분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세상에 알렸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에 대한 흥미진진한 서사는 이후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어 유럽은 물론이고 전 세계로 퍼져 신화화되었다. 성인의 모습인 리빙스턴과 불굴의 탐험가이자 기자인 스탠리, 두 사람은 그렇게 이미지화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사실 그런 등식을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인도주의적인 탐험가 리빙스턴, 냉혹한 목표지향적인 탐험가 스탠리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스탠리는 이에 멈추지 않고 본격적으로 아프리카 탐험가의 길을 택했다. 그것이 그가 진정으로 원하던 길었는지 모른다. 그는 리빙스턴과 만나고 온 지 1년도 채 안되어 다시 기획 탐험에 흔쾌히 동참하였다. 보통은 몇 년 휴지기를 갖는 것이 상례지만 그의 열정은 누구도 저지할 수 없었다. 뉴욕 헤럴드와 영국 일간지 데일리 텔레그래프 두 언론사가 합작한 기획 탐험에 스탠리가 대장을 맡았던 것이다. 이 탐험의 목표는 리차드 버튼이 발견한 빅토리아 호수와 탕카니카 호수와 그리고 앨버트 호수의 발원지를 찾고 그 강물이 어디로 흘러 가는지 명확하게 확인하고, 루알라바 강과 콩고강이 어떻게 연결되어 대서양으로 유출되는지 탐사하는 것이었다. 콩고강을 중심으로 아프리카 대륙을 동서로 횡단하는 이 대장정은 뉴욕 헤럴드다운 야심적인 작품이었다.
1874년 9월 잔지바르에 도착한 스탠리 원정대는 드디어 장도에 올랐다. 원정대의 규모는 사상 최대였다. 스탠리를 필두로 포곡 형제와 프레드릭 바커가 그를 보좌했고, 356명의 인부와 7톤에 이르는 식량과 장비, 그리고 특이한 것은 스페인에서 특별 주문 제작한 선박 레이디 앨리스호였다. 그 선박은 흘수가 낮은 수로용으로서 5개로 분해 조립이 가능하게 제작되었고, 강의 완류 지역에서는 조립을 하고, 급류지역에서는 분해하여 인력으로 운반하는 신박하고 특화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당시 최신식 윈체스터 연발 소총으로 무장한 원정대는 수많은 원주민과 상대하며 생사를 넘나드는 난관을 헤쳐 나갔다. 그 무기의 화력은 상당하여 크고 작은 100여 개의 적대적 원주민과 전투를 벌여 제압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그 지역의 상거래를 지배하고 있던 티프 팀 같은 아랍 노예무역상과 거래를 하기도 하고, 우호적인 원주민 족장들의 협조를 받기도 하였다. 그가 집필한 <검은 대륙 횡단기>를 보면 의심스러운 부분도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탐험에 대한 내용은 세밀하게 기록했다. 정교한 지도, 가옥의 평면도, 물자 목록, 아프리카 왕의 계보, 100여 개의 삽화 전투 상황 등 세부적이고 시시콜콜한 것까지 전부 기록되어 있다. 분리되지 않는 16미터짜리 카누를 잡목을 제거하며 통나무 궤도를 만들어 운반을 하였고, 54미터 이동하는데 37일이 소요되기도 했고, 급경사를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면서 스탠리는 끝끝내 카누를 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절망감, 삶과 죽음의 경계선, 흑인 인부들의 폭동, 대량 탈주, 아사, 전염병, 식수 부족 등과 혈투를 벌이며 그는 콩고강을 따라 대서양으로 탐험하였다. 그는 개척 루트 곳곳에 스탠리 폴스와 스탠리 풀 같은 자신의 이름을 딴 명칭을 붙였다. 스탠리 풀스는 급류가 끝나 완류가 시작되는 지점이고, 스탠리 풀은 완류가 끝나는 지점이었다. 이 두 지역은 나중에 콩고강 개발에 매우 중요한 핵심적인 거점이 된다. 어찌 되었든 이 탐험의 성과 중에 하나는 루알라바강은 나일강의 지류가 아니라 콩고강의 본류의 하나라고 밝힌 것이었다. 나중에 더 설명하겠지만 10년 후 바로 그 루알라바강에서 흑인들의 피눈물이 흐른다. 아무튼 스탠리가 콩고강 하류 보마에 도착했을 때 자신의 몸무게가 27kg이나 빠져있었다고 그는 일기에서 밝혔다.
1878년 1월, 4년 만에 프랑스 마르세이유 항에 살아서 도착한 스탠리는 금세기 최고의 영웅이 되어 있었다. 탐험 도중에도 투철한 기자정신을 발휘한 그는 현 상황에 대한 기사를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연락병을 통해 잔지바르로 보냈기 때문에 영국에서는 이미 스탠리에 대한 동태는 마치 생중계하듯이 기사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사로만 접하던 야생의 스탠리의 모습이 유럽에 등장하자 카퍼레이드를 방불케 하는 열광이 그에게 쏟아지지 않을 수 없었다. 리빙스턴의 생사를 취재해 특종 기사를 썼던 스탠리가 불과 몇 년 만에 아프리카를 동서로 횡단한 첫 번째 유럽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교차 검증과 증언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탐험의 역사에서 한 획을 긋는 큰 사건임에는 틀림없었다.
스탠리의 활약과 대중적 인기에 주목하고 있던 레오폴드는 그가 자신의 아프리카 사업의 파트너로 적임자라는 사실을 동물적으로 직감하였다. 레오폴드에겐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을 갖춘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런 능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목표를 향해 큰 발을 내디뎠다. 런던 주재 영사관에게 ‘이 거대한 아프리카의 케이크 조각을 우리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말하면서 스탠리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친서를 전달하게 하여 자신의 존재를 알렸고, 벨기에에 상주하고 있던 미국인 헨리 셜턴 샌포드를 중재자로 픽업하였다. 미국 내에서 준 재벌급의 사업가로 활동하던 샌포드는 자타가 공인하는 유럽주의자로서 주로 거주하는 곳은 벨기에 브뤼셀이었다. 유럽의 귀족 문화에 어떤 로망처럼 심취해 있던 그는 벨기에 왕실과 유대관계를 형성하며 유럽의 상류생활을 만끽하고 있었다. 레오폴드에게 있어 이런 샌포드는 같은 미국 출신인 스탠리와의 매개 역할을 하기에 최적의 적임자가 아닐 수 없었다. 신은 레오폴드 편이었다.
자신이 태어난 영국에 금의환향한 스탠리는 많은 연설회에서 콩고의 무한한 가치를 주장하였다. 영국 정부가 자신이 탐험한 자료를 바탕으로 콩고를 식민지화하면 경제적 가치를 무한하게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역설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영국 당국은 스탠리의 생각과 달랐다. 당시 영국은 지구상의 가장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그 식민지 곳곳에서 여러 가지 형태의 저항이 계속에서 발생하는 등 많은 난제에 봉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식민지 개발엔 투자할 여유가 없는 형편이었다. 더구나 국내에서도 불경기에 몸살을 앓고 있어서 아프리카에서도 오지 중에 오지인 콩고 내륙에 관심을 갖기엔 임팩트가 강하지 못했다. 또한 자신의 탐험에 모든 것을 지원했던 뉴욕 헤럴드 사주도 탐험으로 인한 대중적인 인기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어서 스탠리의 구상을 홍보하지 않았고, 미국 당국 또한 산업 인프라가 거의 없는 아프리카 대륙의 식민지 개척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리스크가 너무 컸던 것이다. 따라서 스탠리의 주장은 구두선이 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스탠리에 대해선 탐험가로서의 성공은 존중하지만, 대부분의 브레인들은 그 험지에 식민지를 만들어 투자를 하라는 주장에는 경제적 가치를 공감할 수 없었다. 그런 무관심한 분위기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그를 포옹하고 나섰다.
1878년 여름, 레오폴드의 특사 샌포드가 드디어 영국으로 날아가서 스탠리를 만나 국왕의 아프리카에 대한 뜨거운 관심사를 피력한 후 벨기에 방문을 제안하였고, 이를 수락한 스탠리는 그해 6월 10일 벨기에로 출발하였다. 레오폴드와 스탠리는 서로의 부족한 점을 충당할 수 있는 각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지리적 상상력이 누구보다 뛰어났던 레오폴드는 식민지 놀이에 대한 욕망과 돈, 스탠리는 콩고에 대한 자연환경과 인문사회지리의 정보 그리고 불굴의 탐험 능력이 그것이었다. 그들 브로맨스의 공통점은 식민지에서 창출되는 부였다. 그렇게 첫 대면에서 의기투합을 한 그들은 그해 겨울 계약기간 5년, 연봉 5만 프랑(콩고 체류 시), 원정대의 경비 전액을 지급한다는 조건으로 콩고 개발사업에 합의를 하였다. 시행사는 레오폴드였고 시공사는 스탠리였다. 이 합의 후 레오폴드는 <콩고 상류지역 연구 위원회>를 조직하여 네덜란드, 영국의 사업가와 자신의 대리인인 벨기에 은행가 등을 중심으로 주주를 구성하였고, 위원회 의장에는 벨기에의 유력한 금융가인 맥시밀리언 스트라우치를 추대하였다. 이 위원회는 형식적인 조직일 뿐 사실상은 레오폴드가 모든 것을 관리하였다. 또한 레오풀드는 표면적으로는 과학적인 탐험, 단순한 비영리를 목적으로 한 자선사업 등의 내용을 기재한 정관으로 위장을 하였다. 또한 벨기에는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소국이어서 식민지에 투자할 여력이 안 된다는 뜻을 이 정관에 담았고, 레오폴드의 평상시 언행에서도 그런 견지를 표하며 새로운 식민지에 대한 강대국들의 견제를 피해 갔다. 강대국들은 벨기에와 레오폴드에게 식민지 개발권을 주는 것은 또 다른 경쟁자를 양산하는 것이기 때문에 단호하게 불허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식민지 개발에 대한 의심을 갖게 한다면 시도조차 해보지 못하고 파국이 날게 뻔했다. 이를 불식시키기 위해 레오폴드는 <국제 콩고협회>를 조직하였다. 유럽의 여러 왕족과 탐험가들로 구성된 이 조직은 기존의 <아프리카 협회>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으며 주된 모토는 박애주의였다. 레오폴드는 ‘이 조직은 사심 없이 봉사하는 일종의 적십자사’라고 설파하였다. 레오폴드는 이 조직을 정점으로 거의 같은 혈통으로 이루어진 유럽 귀족 사회의 인맥을 총 동원하여 제국주의 열강들에게 외교 전을 펼쳤다. 샌포드는 뉴욕으로 가서, 콩고 내륙에 ‘여행자를 위한 개방적인 게스트하우스를 제공하고, 인도주의적인 영향력으로 노예무역을 척결’하겠노라고 연설하는 등 정관계인사들을 만나면서 레오폴드를 대변하였다. 미국은 당시 흑인 노예를 해방시킨 후 서아프리카 대서양 해안가에 해방 노예들을 귀향시켜 라이베리아라는 국가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민간단체인 미국식민협회에서 주도한 이 정책은 호불호가 많지만, 보다 획기적인 노예폐지 운동을 창조적인 방법으로 시행시킨 점에서는 유럽에서도 신선하게 받아주고 있었다.
이렇게 레오폴드가 기초 작업을 하고 있던 1879년 2월, 스탠리는 준비된 대규모 원정대를 이끌고 세 번째로 아프리카를 향해 장도에 올랐다. 콩고강 개발에 초석을 깔기 위한 탐사와 인프라 구축이 목적이었다. 적도를 중심에 놓고 야구모자 형태처럼 흐르는 콩고강은 지리책에서 아마존 다음으로 많은 물을 바다로 토해내는 거대한 강이라고 설명한다. 전체적인 강의 길이는 지구상에서 순위 안에 들어가지 못하지만 유량으로 따지면 지구에서 두 번째라는 뜻이다. 이 강은 대규모 급류와 폭포로 형성된 험악한 지대와 깊고 낮은 완류지역으로 구분되어 있어서 결코 사람에게 관대하지 않다. 더구나 외부인에게는 더욱 그랬다. 오래전 전설 속의 포르투갈인들이 현재의 앙골라 북쪽에 위치한 콩고왕국과 협력 관계를 유지하면서 바다와 같은 거대한 콩고강 하류에 접근하여 강을 따라 80km 올라가 주둔지 마을을 구축하였는데 그 마을 이름이 보마였다. 그 후 보마는 자유무역도시 같은 성격을 띠면서 노예무역의 교두보 역할을 하였다. 그러니까 노예시장이 섰던 곳이다. 하지만 유럽인들은 위험성이 너무 커서 보마를 지나 상류로는 거의 진입하지 못했다. 암흑의 콩고강은 쉽게 외지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콘래드가 쓴 암흑의 심연을 보면 주인공 말로우의 시선에 잡힌 콩고강과 그 주변 풍경은 이렇게 표현된다. ‘... 진흙냄새, 원시의 진흙냄새가 내 코를 찌르고 높은 원시림이 소리 없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어. 강물이 육지를 침식해 들어와 만든 웅덩이 위에는 번쩍이는 반점들이 있었어. 달은 모든 것을 위에 엷은 은빛으로 도금을 하고 있었어. 무성한 잡초 위에 진흙 위에, 사원의 담벽보다 높게 초목들이 뒤엉키며 이룩한 장벽 위에, 어두운 골짜기 사이로 소리 없이 폭넓게 흘러가며 번쩍번쩍 빛을 발하는 거대한 강 위를 한결같이 도금하고 있었어. ... 이곳에 흘러들어온 우리는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우리가 이 말 없는 존재를 지배할 것인가, 아니면 그것이 우리를 지배할 것인가? 저 말도 못 하고 귀도 먹은 존재가 얼마나 큰지, 얼마나 엄청나게 큰 것인지를 나는 느꼈어.’ 그리고 그는 증기선을 몰고 수많은 모래톱과 암초들을 사이를 비집고 상류로 올라가면서 앞에 펼쳐진 콩고강을 보며 이렇게 되뇌었다. ‘텅 빈 강물, 거대한 침묵, 관통할 수 없는 숲 공기는 덥고 텁텁하고 무겁고 나른했어. 찬란한 햇살 속에서도 기쁨이라고는 없었어...“ <어둠의 속: 문예출판사 이덕형 옮김>
스탠리가 처음 2년 동안 콩고에서 한 주된 작업은 콩고강을 이용하여 내륙으로 진출하는 교통, 통신망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지난번 탐험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인적 물적 자원을 가장 원활하게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탐사한 후 실제로 실행에 옮겼다. 그의 추진력은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냈다. 보마에서 마타디까지 80km 거리를 분해조립 가능한 증기선으로 이동한 후, 360km에 이르는 급류지역에서는 그 증기선 2척을 분해하여 도로망을 개척하며 인력으로 운반하였고, 그렇게 급류지대가 끝나는 지점에 도착한 그는 그곳을 레오폴드빌이라고 명명하였다. 그 레오폴드빌에서 1,500km에 이르는 콩고강을 수로로 이용하여 다시 급류가 시작되는 스탠리 폴스까지 이동하였다. 그곳은 콩고분지로서 인도의 면적보다 넓은 열대우림지역이었고, 본류와 맞먹는 크기의 지류들도 많았으며, 유럽인을 미치게 만든 상아의 본산지이기도 했다. 또한 추후 발견되는 천연고무의 천국이기도 했다. 스탠리는 콩고분지에 1,200km의 수로를 구축하여 콩고 무역의 중심으로 만드는 게 목표였다. 증기를 이용한 상업선과 유람선이 아프리카 중심 열대우림지역에서 떠다니는 레오폴드의 상상이 현실이 되었던 것이다. 콩고분지에는 스탠리에게는 신천지였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아프리카인들이 살아온 인구 밀집지역이어서 400개 이상의 언어와 방언이 존재하고, 200개의 종족이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하며 공존하고 있었다. 당시엔 아랍의 노예상들이 동쪽 끝 잔지바르에 근거지를 두고 이곳까지 진출하여 장기간 노예를 사냥하고 있어 원주민간의 다툼과 분쟁이 끊임없이 발발되고 있었다. 아랍 노예상과 노예를 공급하는 원주민 부족장의 결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식인을 한다는 송예족의 한 부류인 자포 잡스족은 외부 세력과 협력하고 있어서 생존경쟁이 치열한 인간 사바나를 방불케 하였다고 한다.
콩고강 개발은 아프리카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스펙터클 하고 지난한 사업이었다. 특히 마타디와 레오폴드빌을 잇는 도로망 구축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차후에 시행될 철도건설공사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사람과 짐을 나를 수 있는 도로망을 험준한 미지의 땅에 새롭게 조성하는 것은 인간의 한계와 맞닥뜨릴 수 있는 어려운 공사였다. 마타디에서 레오폴드빌까지 해발 표교차가 300미터이다. 중간중간에 산악지역의 경사면이 수없이 연결되어 있어서 스탠리는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하면서 길을 뚫었다. 그런 결과 무리한 탓인지 스탠리는 두 번의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사경을 헤맨 끝에 간신히 유럽으로 돌아갔는데 당시 그는 포기하려고도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하지만 레오폴드는 겨우 살아서 온 스탠리를 만나 다독이고 한편으로 독려한 결과 2달 만에 스탠리는 다시 지옥불 속으로 들어갔다. 불굴의 스탠리도 대마왕 레오폴드의 아우라 앞에서는 도리가 없었는지 모른다. 그 후에도 레오폴드는 콩고 회사의 CEO 입장에서 스탠리에게 콩고의 지배권과 경제활동에 대한 전반적인 통치관리에 대해 계속적으로 업무 지시를 하였다. 현지 원주민 족장들을 적절하게 이용하고 때론 무력으로 점령하는 방안과 은밀한 상아 수집과 그리고 개발한 주둔지와 도로를 통과하는 외부 사람들에게 통행료 징수하라는 등 많은 사항을 지시하였던 것이다. 또한 치안에 필요한 소총, 대포, 기관총 등으로 무장한 사병을 보유할 권한을 스탠리에게 부여하였다.
무엇보다 레오폴드의 대리인 스탠리는 콩고에서 시행되고 있는 모든 사업이 유럽 법을 따르고 있다는 증빙을 남기기 위해 450개의 부족과 상거래에 대한 조약을 체결하였다. 말이 조약이지 강제 독점 교역권이었다. 유럽 열강들이 합의한 자유무역에 대한 증빙으로 형식상의 조약서를 작성한 것이다. 이를 염려하여 레오폴드는 원주민 부족을 주권 국가로 대우하는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조약 문서를 상법학자들에게 법적 자문을 구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문서만 보면 흠잡을 데 없는 어엿한 교역 문서였다. 하지만 이런 문서는 일반적인 유럽인도 금방 이해하기 어려운데 콩고 원주민에게 그것을 바란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억지였다. 그렇게 해서 원주민들은 자유무역의 대가로 허접한 옥양목과 면직물, 금속 냄비와 유리구슬 같은 장식품, 값싼 알코올 등을 받았다. 조약 내용을 보면, ‘... 자발적으로 그들의 상속권과 계승권을 당 협회에 양도하고, 그들의 영혼에 대한 모든 주권과 통치권을 영원히 포기한다... 모든 지역에서 당 협회가 시행하는 사업의 노동력과 기타 수단을 지원한다... 모든 도로와 수로의 통행권, 모든 수렵, 어업, 광산, 산림 개발권은 당 협회가 절대적인 소유권을 가진다...’ 등의 내용이 들어있다.
이렇게 5년 동안 백인 28명과 기록되지 않았지만 수백 명의 아프리카인의 생명을 짓밟고 콩고에서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친 스탠리는 1884년 6월 계약 만료 후 콩고를 떠났다. 그리고 레오폴드는 스탠리가 다져놓은 콩고를 합법적으로 점유하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열강들을 상대로 로비를 했다. 먼저, 가장 가능성이 높은 미국에 샌포드를 다시 보내 체스터 아서 대통령으로부터 콩고 사업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받아냈다. 샌포드는 자신의 미국 인맥을 활용해 존 타일러 모건 상원 외교위원회 의장을 접촉하며 적극적인 지지를 받아낸 후 대통령을 공략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심지어 이와 더불어 콩고 개발에 필요한 노동력을 미국의 흑인으로 일부 보충하는 구상안도 얻어냈고, 마지막 관문인 하원의회도 샌포드의 다각적인 활동으로 통과되었다. 1884년 4월 22일은 열강 중에서 처음으로 레오폴드의 콩고 소유권을 승인하는 발표일이었다.
이밖에도 레오폴드는 프랑스로 시선을 돌려 문화계의 유력한 인사인 미술상 아서 스티븐스를 정관계 로비스트로 채용을 하고, 유력 일간지 <르 탕>의 기자를 매수하여 자신에게 우호적인 기사를 쓰도록 하면서 대중을 직관적으로 공략한 끝에 결국 지지를 받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영국은 이미 암묵적으로 지지를 하고 있어서, 이제 당시 제국주의 시대를 풍미하던 강대국 3국은 모두 자신 편이 되었다. <콩고국제협회>는 이제 콩고 개발사업이 1차적으로 완료됨으로써 의미를 상실하였지만 대외적으로는 해체를 하지 않았다. 이제 그 단체 대신 레오폴드가 직접 나서 자신의 이름으로 자선단체를 만들어 콩고인을 관대하게 보호한다는 박애주의적인 명목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도록 전반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장애물은 독일의 비스마르크였다. 사람 볼 줄 아는 그는 처음부터 레오폴드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오폴드는 독일의 투자가 게르손 블라이히뢰더를 앞세워 집요한 설득 끝에 승인받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비스마르크는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이 지지하는 대세를 꺾지 못했고, 아예 콩고가 다른 열강들보다 소국의 국왕 개인에게 돌아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였다. 외형적으로는 콩고에서 필히 자유무역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조건으로 콩고 자유국을 승인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1884년 11월 15일, 비스마르크의 주도로 베를린에서 아프리카란 큰 파이를 놓고 어떻게 분할할 것인지 대한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 결정하는 회담을 개최하였다. 이 회담에는 식민지를 운영하고 있거나 관심 있는 거의 모든 유럽 국가들이 참석한 대규모 회의였는데, 그 회의에 참석한 열강의 대표 중에는 미리 심어둔 레오폴드 사람들이 다수였다. 이 회의의 의장에 레오폴드와 친한 벨기에 대표가 선출되었고, 영국에서는 스탠리에게 투자했었던 사업가와 대표단의 법률 고문 트래버스 트위스가 있었고, 미국 대표단에는 레오폴드의 복심 샌포드와 기술고문인 스탠리도 이름을 올렸다. 4개월간 지속된 이 회의 결과에서 중요한 점은 독일이 현재의 카메룬, 탄자니아, 나미비아를 소유하는 것과 서아프리카 중부 현재의 콩고공화국과 앙골라 지역을 프랑스와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최종적으로 경계선을 확정하고, 그 사이에 바로 콩고강을 따라 형성된 현재의 콩고민주공화국을 레오폴드 2세 개인에게 할당한 것이었다. 공식적으로 승인한 실체는 <콩고국제협회>였지만 실질적인 소유자가 레오폴드라는 것은 만인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이 결과에 대해 포르투갈은 자신 소유의 앙골라를 잠식한 경계선에 대해 불만을 품고 이의를 제기했지만 영국과 프랑스가 이를 묵살하고 레오폴드의 손을 들어주었다. 콩고강과 콩고분지는 사실상 열강들이 관심 없는 버려진 땅이어서 레오폴드의 적극적인 구애, 즉 박애주의와 노예폐지 그리고 유럽 전 국가에게 자유무역지대로 개방하겠다는 천명이 먹혀들었고, 열강들이 형식적이지만 그 의도를 존중하여 승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결정에는 열강들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결부되어 있었지만 어찌 되었든 결과적으로는 레오폴드의 승리였다. 무엇보다 약소국의 일개 국왕이 제국주의적인 발상으로 식민지를 경영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믿었고, 그와 더불어 접하고 있는 다른 식민지와 분쟁을 유발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도 믿었다. 그렇게 해서 레오폴드는 오랜 숙원이었던 콩고를 자신의 소유로 만들 수 있었다. 1885년 5월 29일, 레오폴드는 자신이 받은 케이크 조각에게 콩고자유국이라 칭하고 만천하에 선포하였다. 벨기에 땅보다 76배나 큰 땅을 국왕 개인이 부동산처럼 소유하는 사실상의 초유의 식민지가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사는 레오폴드 개인에게만 기쁨을 주었을 뿐 대다수의 벨기에 대중에게는 자극을 주지 못했다. 그저 아프리카의 쓸모없는 땅을 국왕 개인이 소유하게 되었다는 정도로만 인식되었고 그것도 중상류층에서만 조용히 회자될 정도였다고 한다. 아무튼, 그렇게 레오폴드의 도박은 시작되었다.
4. 콩고강 속으로
영국과 네덜란드가 식민지를 슬기롭게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은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 같은 기업체를 내세워 식민지 운영에 전반적인 권한을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권한에는 자체적인 경찰권까지 포함되었다. 레오폴드도 1886년 12월 이런 형태의 민간 회사를 설립했는데 그 이름이 바로 <콩고산업무역회사(Compagnie du Congo pour le Commerce et l’Industrie, CCCI)>였다. 명칭에는 무역이란 단어가 들어가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철도, 운하수송, 광업, 무역, 은행, 농업, 서비스, 등 모든 산업 분야를 포함하는 종합상사이기도 하고 지주회사이기도 했다. CCCI의 창업과 사업은 레오폴드의 실질적인 식민지 사업 비서관인 알베르 티스가 마에스트로 역할을 했지만, 외형적으로는 유력한 금융가인 조르주 브루그만이 창업자에 이름을 올렸고 레오폴드는 대주주로 뒤로 물러나 있었다. <콩고산업무역회사>는 1887년 3월 콩고자유국과 협정을 맺어 사업에 필요한 토지를 양도받고 철도건설과 99년간의 운영권을 확보하였다. 초기 중점 사업은 인프라 구축으로서 철도와 수로 사업이 급선무였고 이 사업은 알베르 티스가 총괄하였다. 또한 이 외에도 많은 자회사를 설립한다. 농축산물을 담당하는 콩고제품회사, 호텔과 소매업을 총괄하는 콩고종합상사, 상아와 고무 무역 전반을 포괄하는 벨기에 콩고 무역협회(SAB: 나중에 여러 개의 전매회사 관리), 콩고 은행, 투자회사인 방크 도트르메르를 설립하고, 1889년 7월에 콩고철도회사(Compagnie du chemin de fer du Congo, CCFC)를 창업한다. 그리고 1891년에는 <콩고산업무역회사>가 주도하여 도메인 시스템을 작동시킨다. 콩고국 전체 땅을 크게 4개의 구역으로 분할하여 북부에 콩고 앤트워프 상업협회, 남부에 영국-벨기에 인도 고무회사(A.B.I.R), 남부 일주에 카탕카 회사. 동부에 그랑 락스 회사 등에게 상아와 천연고무의 전매권을 부여함으로써 경영의 큰 틀을 마련한 것이다.
콩고자유국을 건국한 레오폴드는 처음 5년 정도는 재정 부족에 허덕였다. 식민지 사업을 시작은 했지만 인프라 구축에 상당한 재정이 소비되었고, 중요한 종목인 상아 무역도 운송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여 매출이 상대적으로 증가하지는 않았다. 이에 레오폴드는 벨기에 정부에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지만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까다로운 절차가 있었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의회는 국왕 개인의 식민지 투자에 회의적이었던 것이다. 또한 처음엔 호의적이었던 로스차일드도 더 이상의 투자를 경계하는 등 기존 투자가들도 꺼려하였고, 이에 신규 투자가를 모으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을 했지만 관심을 얻지 못했다. 채권을 발행하여 교황에게도 매입 청원을 하는 등 모든 인맥을 동원하였지만 이 역사도 소규모로 매매되었다. 생각과 달리 재정 압박이 타개되지 않는 가운데 그는 폭식과 불면증에 시달렸다.
부족한 재정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레오폴드는 1889년 11월 반노예제도 회의를 브뤼셀에서 개최하였다. 참석한 열강들 대표들에게 레오풀드는 노예제도를 정착하기 위해 일선에서 싸우는데 필요한 경비를 조달할 목적으로 약간의 무역 품목에 세금을 부과하겠다고 요청하는 연설을 하였다. 이에 열강들은 그 정도는 동의하는 의사를 표했다. 박애주의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일정한 비용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니까 당초 주장한 자유무역지대는 수정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에 레오폴드는 자금 조달 캠페인을 강화하여 유럽의 상류층 인사 2,500명을 왕궁으로 초빙해 호화로운 파티를 열었다. 이 자리에 초빙되어 국빈에 버금가는 호사로운 대접을 받은 스탠리는 레오폴드를 위대한 군주라고 칭송하며 콩고자유국의 밝은 미래에 대해 연설하는 립서비스를 발휘하였다. 레오폴드의 이런 각고의 노력 끝에 벨기에 의회를 움직여 2,500만 프랑(현재의 가치로 1억 2천만 달러)을 차관받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차관의 조건으로 자신이 사망하면 콩고자유국 모든 것을 벨기에 정부에 헌납하겠다는 유언장을 공개하였다. 마치 부동산을 정부에 상속 기부하겠다는 것처럼 말이다. 레오폴드의 이런 행보에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사람은 그의 특사였던 샌포드였다. 철저하게 자유무역주의자였던 그는 레오폴드의 순수성이 변질된 것에 실망하여 배신감과 환멸감에 빠졌으며, 콩고자유국 투자금에서 겨우 6톤급 증기선 한 척만 남긴 채 전 재산을 탕진한 후 이듬해 사망하였다고 한다. 결국 레오폴드의 사악한 욕망을 곁에서 지켜본 그는 이용만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스탠리가 구상하고 탐사한 콩고강 개발은 레오폴드에게 놀라운 지리경제학적인 영감을 주었다. 360km에 이르는 급류지역에 철로를 건설하여 분해조립 가능한 증기선 부품을 운송하고, 완류 지역에 다시 조립한 증기선을 띠워 콩고강을 수로로 사용한다는 발상은 당시로서는 신박한 아이디어가 아닐 수 없었고, 이 아이디어를 실재 사업화 하여 실행한 것 또한 놀라운 추진력이 아닐 수 없었다. 토목 관련 기술자들이 철로공사 전반에 걸쳐 현지 조사와 설계를 하고 있을 때, 임시 도로를 험악한 지역에 구축해 나가면서, 뒤이어 자체 제작한 카트를 이용해 5대 증기선 분량의 부품을 380km에 이르는 거리를 운반하였다. 말이 카트이지 인력으로 캐러번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도로를 이용해 식민지와 관련된 백인들은 당나귀를 타고 다녔고 그들의 짐을 짊어진 흑인들이 히말라야의 포터처럼 길게 뒤따랐다. 이렇게 운반된 수많은 물품들로 레오폴드빌에 조선소를 건축하였고, 1888년 3월 처음으로 조립한 증기선을 진수하였다. 그 증기선의 이름은 벨기에의 군주호였다고 한다. 열차가 운행하기에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레오폴드의 염원이었던 실질적인 철도 공사는 1890년에 착공되었다. 처음 2년은 현지 원주민 7,000여 명을 모집하여 노동력으로 활용했지만 과중한 노동으로 인해 50%가 사망하거나 도망을 가버렸다. 유럽의 평원지대에서 철로를 설치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산악지역이나 빼곡한 산림지대의 열악한 환경에서는 노동자의 죽음을 담보하지 않고서는 작업을 할 수 없었다. 원시림을 벌목하여 수평을 맞추고, 무쇠덩어리인 철로와 침목을 인력으로 운반하는 등의 모든 작업은 노예화된 노동력이 없으면 시행될 수 없는 힘든 공사였다. 1890년 콩고강에서 증기선을 몰았던 콘래드가 쓴 어둠의 심연을 보면 화자 말로우의 시선에 잡힌 철도공사 현장 장면이 이렇게 길게 묘사된다.
‘... 나는 썩어가는 기계의 파편 몇 개와 철도 레일 더미와 마주쳤어... 묵직하고 무딘 폭음이 대지를 흔들더니 연기가 푹석하고 솟아났는데 그것이 전부였어... 공연히 다이너마이트 만 계속 터트리는 것이 작업의 전부였어... 여섯 명의 흑인이 줄을 지어 헐떡거리며 길을 올라오더군... 그들은 흙을 가득 담은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죄다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나 보였고 사지의 관절이 밧줄의 매듭 같더군. 저마다 목에는 쇠굴레를 차고, 모두 쇠사슬에 묶여서 그들 사이에 사슬 꼬리가 늘어져 규칙적으로 딸랑거리는 거였어... 그들의 앙상한 가슴팍은 일제히 헐떡이고 결렬하게 벌어진 콧구멍은 바르르 떨리고 눈은 돌처럼 굳어진 채 언덕 위로 올려다보더군... 불행한 야만인의 완벽한 무관심, 죽음 같은 무표정... 그런데 여기는 그 작업을 돕던 자들이 죽기 위해 물러난 장소... 해안 여기저기에서 합법적인 기한부 계약으로 끌려와 낯선 환경 속에 던져져 낯선 음식을 먹고 병들어 일을 못하게 되면 기어 나와 이렇게... 죽어가는 형체들은 공기처럼 형체가 없었고... 그 밖에 주변의 모든 형체들은 뒤틀린 채 쓰러진 자세로 흩어져 있었는데, 대학살이나 흑사병을 묘사한 어떤 그림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었어. 내가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그중 하나가 두 손과 두 무릎으로 일어나 엉금엉금 기어 강가로 물을 마시러 가는 것이었어. 그는 손에 묻은 물을 핥아먹고 나더니 그 뙤약볕에서 책상다리로 앉았다가 얼마 후 머리카락이 덥수룩한 머리를 가슴뼈 위로 떨구고 말더군...'
현지 원주민으로 공사를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자 콩고철도회사는 바베이도스와 중국에서 대대적으로 노동자를 구인했다. 바베이도스인은 카리브해에 위치한 영국령 출신이지만 거의가 아프리카 노예의 후손들이었고, 중국은 이미 호주와 미 대륙 횡단 철도건설공사 현장에 수만 명의 건설노동자를 보낸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인이 아프리카 철도공사 현장에 투입되었다는 것인 지금 생각해 보면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멋모르고 돈을 벌기 위해 콩고에 온 수백 명의 바베이도스인들은 도착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열악한 환경에 참지 못하고 폭동을 일으켜 여러 명이 사살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어렵게 현장에 투입되었고, 미국 철도 현장 노동자에게 얻은 정보를 위안 삼아 적어도 미국보다는 못하지 않겠지 하는 마음으로 콩고자유국에 왔던 중국인 노동자들도 540명 중 300명이 사망하는 등 고초를 겪다가 도주하는 경우도 많아서, 어떤 노동자는 동쪽으로 800킬로미터 떨어진 밀림지역에서 아사상태로 발견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력이 절실했던 철도회사는 콩고자유국이나 주변 국가에서 수만 명의 흑인 노동자를 달콤한 사탕으로 모집하여 현장에 강제로 투입되었다. 한번 들어오면 살아서 나갈 수 없었다.
철도현장은 죽음의 현장이었다. 콩고자유국에서의 노동은 근로계약서를 작성했지만 노예와도 같은 참혹한 현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질, 말라리아, 수면병 같은 전염병과 극심한 영양실조와 무차별한 폭력, 무리한 공사로 인한 다량의 안전사고, 시험 운행하던 기관차의 탈선 사고 등으로 기록되지 않은 많은 사상자들이 다량으로 발생하였다. 각자 자신이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결코 족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현장에 이런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고 한다. 침목 하나에 노동자의 목숨 하나이고 전신주 하나에 유럽인 하나가 사망했다. 공사 초기에는 시에라레온에서 온 노무자 300여 명이 폭동을 일으켜 마타디 항구에 정박 중인 배를 강탈하고 도망치려고 했지만 잔지바르 용병들에 의해 진압이 되었고, 이로 인해 일부는 인근 포르투갈 식민지인 앙골라로 탈출하였다. 철도공사 완공 이후, 공식 집계에 의하면 착공 2년 후부터 완공 때까지 백인 132명, 유색인 1800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이 숫자는 매우 보수적으로 조사한 숫자이고 실재 이유도 없이 뜨거운 밀림에서 사라진 사람들은 이보다 훨씬 많았다고 전한다.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다가 불의 객이 된 영혼을 달래기 위해 준공 때 레오폴드빌에 위령비가 세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98년, 8년간의 대역사 끝에 마타디에서 레오폴드빌까지 387km에 이르는 철도 공사가 완료되었다. 철로 궤간은 750mm으로서 협궤철도였고, 합이 20km인 99개의 철교가 중간에 세워졌고, 크리스탐 산맥 넘어 내륙으로 들어가는 가장 높은 해발 741m 지점에 철도공사를 총괄한 알버트 티스의 이름을 딴 티스빌 역이 만들어져 그의 이름을 기렸다. 현재 그 역의 이름은 음반자응긍구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이 철로가 만들어짐으로 해서 마타디에서 레오폴드빌까지 한 달 가까이 걸리던 시간이 2일로 단축된 것은 혁신적인 결과였고 이제 죽음을 감수한 노동력은 필요로 하지 않았다. 증기 기관차를 이용해 증기선의 분해된 선체와 부품 운반이 수월해져 레오폴드빌 조선소에서 500톤급 화물 증기선과 60톤급 유람선도 건조할 수 있게 되었고, 연간 수천 톤의 천연고무도 운반할 수 있었다. 그와 더불어 많은 유럽인을 1,600km 이르는 콩고강 상류 아프리카의 중심 콩고분지 스탠리 폴스까지 실어 나를 수 있었다. 인프라 구축이 산업의 발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레오폴드가 증명한 것이다. 콩고인의 피와 땀이 밴 상아와 천연고무는 그렇게 그 길을 따라 끊임없이 운반되었다.
콩고자유국의 정식 수도는 보마였다. 총독은 있었지만 권한이 제한적이어서 주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벨기에에 있는 각료들이 지시를 했고 그 각료를 통제하는 사람은 레오폴드였다. 행정구조는 어엿한 국가처럼 조직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레오폴드의 사심이 가득한 일인 체제였다. 입헌군주제인 벨기에서는 더구나 정통성 없는 국왕의 권력은 미미한 수준이었지만 콩고자유국에서 만큼은 절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신만의 왕국이었다. 그는 공한지 즉 무한정 널려있는 자신의 토지를 민간회사에 임대를 하고, 상아와 야자 같은 물품에 대해 장기 전매권을 주고 이익의 50%를 받는 등 고수익을 창출하였다. 수익이 미약한 업체는 가차 없이 축출하면서 강도 높은 생산력을 독촉하였다.
천연고무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상아 거래가 콩고자유국의 대부분의 매출을 담당하였다. 수컷 아프리카 코끼리 한 마리에서 평균적으로 상아 50kg을 수확할 수 있다고 하는데, 그 정도면 피아노 건반 수백 개를 만들 수 있고, 의치는 수천 개를 만들 수 있는 양이었다고 한다. 인간이 상아를 이용한 것은 수만 년 전 호모사피엔스 시절부터이다. 그들은 상아로 여러 가지 조각품과 도구와 장식품을 만들었고 시베리아 같은 곳에서는 집을 짓는 자재로도 사용하는 등 다방면으로 활용하였다. 이런 상아는 당시 유럽에서는 커피와 설탕처럼 인기가 대단하여 고가로 거래되었다. 상아는 수집은 대부분 원주민에 의해 이루어졌다. 거대한 수컷 코끼리를 사냥을 해야 하고, 물리적으로 해체를 해야 하기 때문에 주로 원주민 대리인들이 주도하여 수행하였던 것이다. 유럽의 상인들로부터 입수된 허접한 물품이나 유럽에서는 통용되지도 않는 콩고국 화폐를 주고 상아를 헐값에 구입을 하였고, 때에 따라서는 전매회사 자체적으로 직접 수집을 하기도 했다. 이런 상아 유통은 전매회사 외에는 거래할 수 없었는데, 암암리에 비정상적으로 유통되는 경우도 많았다. 콩고국에서의 상아는 곧 화폐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어서 누구나 상아를 구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암흑의 심연에서 말로우는 주재소 책임자들에 대해 ‘... 유일하게 현실적인 감정은 상아를 얻을 수 있는 무역 거점을 지명받아 할당금을 받는다는 욕망뿐이다’라고 일갈한다. 그 세계에서 주인공 커츠는 상아 수집에서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하였는데 그것은 곧 포기할 수 없는 권력화 혹은 권력욕으로 변질되어 결국 파멸에 이르게 한다. 그런 과정에서 흑인에 대한 착취는 필수불가결이었다.
상아의 메카인 콩고분지는 열대우림지대여서 사람이 유목민처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었다. 콩고강울 중심으로 지류 곳곳에 상아를 수집하고 관리하는 주재소들이 조성되었고, 그중에 증기선의 종착지 스탠리 풀스는 상아 수집의 핵심적인 지역이었다. 콩고분지에서 수집되는 모든 물품은 콩고 운하를 따라 1,600km를 이동하여 레오폴드빌에 도착 후 하역하였다. 각각의 전매회사들이 관할하는 드넓은 열대우림지대에서 상아를 취득하여 주재소로 운반하는 것은 죽임을 넘나드는 노동이 필요로 했다. 철도 건설도 그러했듯이 상아와 야자 같은 채취물을 거두고 운반하는 과정은 노동집약적인 작업이었다. 노동력 확보는 언제나 최우선 과제였다. 하지만 콩고자유국 사업가들은 최저 비용 대비 최고의 이익을 남기기 위해 노동자들을 한 끼 정도의 싼 임금으로 강제 동원하였고 그것도 부족해 도망가지 못하게 목에 사슬을 묵고 채찍질을 마다하지 않았다. 백인 관리들이 가장 많이 사용한 폭력 도구는 하마 가죽으로 만든 채찍이었는데 그것을 시코트라고 불렀다. 그 시코트로 맞으면 생체기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고 하고, 악랄한 관리인 경우는 시코트로 등짝을 수십 대 때린 후 그 터진 피부에 소금을 뿌렸다고도 증언했다.
수백만 명의 콩고 노동자를 전반적으로 관리하는 것은 벨기에인이나 다른 유럽인으로 직접 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프리카계 대리인을 앞세웠다. 이런 간접 경영 방식은 식민지 지배의 기본이었다. 아프리카 관리자를 카포 혹은 프레드루키라고 불렀고, 흑인 사병으로 구성된 정부군을 공안군이라고 불렀는데 레오폴드가 하명한 공식적인 명칭은 평화 정찰군이었다. 공안군은 일종의 용병으로서 콩고국의 내부 치안과 타 부족 간의 전투와 반란 등을 제압하는 중추적인 조직이었다. 1개 수비대는 1~2명의 장교급 백인과 수십 명의 흑인 사병으로 구성되었고, 1900년에는 183개의 부대가 운영되었다. 레오폴드 말년 콩고의 통치가 최고조로 치달았을 때인 1908년에는 313개 부대가 콩고자유국을 지배했다고 한다. 자신의 통치 기구의 일종으로 사용한 이 공안군에 대해 레오폴드는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예산의 상당한 비중을 할당하였다. 평상시에는 그들을 놀리지 않고 전매회사의 자체 민병대와 함께 강제노동 현장을 지원하였다. 그들 대부분은 타 지역에서 구인하여 온 흑인이었고 특히 공안군은 잔지바르 출신들이 많았다. 그것은 반란을 방지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사실 콩고자유국에 저항하는 세력은 만만치 않았다. 여기서 부족의 명칭까지 알 필요는 없지만, 특히 야키족, 초크웨족, 보아족, 부드자족, 상가족, 은잔스족 등이 활개를 쳤다. 이들처럼 전투적인 부족들은 식민지 정부에 저항도 했지만 오래전부터 부족 간의 전쟁이 만연해 있었고, 이런 특성을 활용하여 콩고국은 분열을 조장하고 이간질하여 서로의 싸움을 유도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들 중에는 콩고국에 노골적으로 협조하고나 이해관계에 따라 우호적인 관계를 원하는 부족들도 상당수였다. 이런 현상은 스페인이 아메리카를 정복할 당시에도 써먹은 전통적인 전략이었다. 아무튼, 콩고국 남부의 카탕카 지역에 거주하던 상가족의 족장 물루메 니아마는 수천 명의 저항군을 조직하여 게릴라전으로 저항의 축을 이끌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안군이 대대적인 반격을 하자 쫓겨서 어느 동굴로 숨어 들어갔는데, 이를 발견한 공안군이 동굴 밖에서 연기를 피워 안으로 밀어 넣고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지공전략을 펼친 끝에 상가족은 결국 나가지 않고 그 암흑 안에서 죽음을 택했다고 한다. 나중에 시신을 확인한 결과 178개의 해골을 찾았다고 전한다. 또한 악명이 자자한 은자수군을 빼놓고 저항군을 논할 수 없을 것이다. 1893년 12월 은잔수는 저지대 급류지역 주재소를 공격하여 백인 관리인 외젠룸멜을 살해한 후 주재소 건물을 불태우고 인근 초소도 방화하였으며, 2명의 관리인도 죽이고 여러 명에게 부상을 입힌 후 도주하였다. 이 사건은 콩고자유국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콩고자유국은 마타디에서 레오폴드빌로 가는 캐러밴 루트를 폐쇄하였고, 백인 장교 15명과 흑인 용병 200명으로 구성된 평화정찰군을 파견하여 8개월간의 치열한 토벌작전을 펼친 끝에 은잔수군을 물러나게 했다. 이후 은자수의 생명이 어떻게 되었는지 오리무중이었지만 이후에도 은자수군으로 보이는 저항군이 산발적으로 주재소를 공격하였다고 한다.
이런 원주민 부족의 저항이 지속적으로 콩고국을 괴롭혔지만, 공안군 용병들의 내부 반란도 간과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1895년 콩고 중남부 사바나 지역 룰루라부르그의 공안군부대 내에서 용병 처우에 불만을 품고 있던 부사관 칸돌로 일파가 부대장 마티외 펠처를 살해한 후 반란군을 형성하였다. 마티외 펠처 부대장은 부대 내에서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반란군은 이후 백인 장교 여러 명을 사살하는 등 다수의 게릴라전에서 승리한 후 주변의 원주민 부족과 결탁하여 세력을 확장시켰고 이후 카사이 지역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열대우림지대에서의 게릴라전으로 인해 정부 공안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했다. 사실 그곳에서의 전투는 누가 승자이고 누구 패자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이렇게 반군의 세력이 확장되자 1년 후 15명의 장교와 500명의 흑인 용병으로 구성된 공안군 토벌대가 대대적으로 진압에 나섰지만 수십 명이 전사하였고, 1897년 초 전투에서는 27명이 반군 매복조에게 습격을 당해 사망하였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칸돌로가 전사를 했지만 그의 부하 얌바얌바와 킴프키는 나머지 반군을 이끌고 우림 깊숙이 숨어 들어갔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콩고국을 괴롭히다가 1908년 전투 중에 장열 하게 산화하였다고 한다. 이런 용병들의 반란은 여러 곳에서 발생하였다. 반란의 원인은 흑인 용병에 대한 비인간적인 처우 때문이었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정상적으로 이행해야 할 급여를 지급하지 않거나 늦추는 경우가 많았고, 사소한 잘못에도 폭행을 하였고, 심하면 교수형에 처하기도 하였다. 또한 명령을 거부하는 경우에는 총살로서 처형하는 등 마치 노예처럼 다루었던 것이다. 그런 처우는 원주민 노동자와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 피부가 검으면 모두가 노예화하였던 것이다. 이런 야만적인 대우에 고향에서 멀리 떠나온 용병들이 죽음을 불사하고 반기를 들어 새로운 세력을 구축하였던 것이다. 이런 반군의 형태는 60년이 지난 후 콩고에서 발생한 반식민 게릴라 전쟁의 원형이 되었다.
콩고자유국 동부지역은 아프리카 대륙 동쪽과 북쪽에서 진출한 아랍 상인과 그에 따른 세력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형성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콩고자유국과 접촉하면서 공존과 분쟁을 일으키며 주도권 싸움을 하고 있었다. 아랍상인들이 주로 취급한 것은 흑인 노예였다. 유럽과 아메리카에서는 흑인 노예무역을 금지하고 기존의 노예마저 해방시키는 상황이었지만 아랍에서는 여전히 흑인 노예의 수요가 지속되고 있었다. 이에 레오폴드는 노예무역 철폐를 주장하며 콩고자유국을 건국했는데, 그런 취지에도 불구하고 그 지역에서는 여전히 노골적으로 노예 매매가 성행하였다. 노예무역의 무법지대였던 것이다. 콩고 공안군 용병 중에는 이곳에서 매입한 노예들이 다수였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1인당 25프랑이면 건강한 흑인 남성을 구할 수 있었다. 노동력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전매회사들은 송예족 족장들에게 노예를 싼 가격에 구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들이 직접 사냥을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런 경우는 지점장으로부터 보너스를 받았다고 한다.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최고였다. 이렇게 수집한 남자 노예는 노동현장에 투입되기도 했지만 공안군이나 전매회사 민병대에 배속되는 경우도 많았다. 증언에 의하면 그렇게 해서 취득한 징집병들을 쇠사슬로 엮어 각각의 부대로 배속시켰는데 이 와중에 많은 흑인들이 사망하였다고 한다. 콩고자유국에서 자행된 이런 형태의 야만적 식민지 운영은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궁극의 식민 양태였다.
콩고자유국 동쪽, 상업의 허브인 스랜리빌 부근에는 티푸 팀이라 불리는 아랍 노예상이 지배권을 확보하고 있었다. 잔지바르에 기반을 둔 그는 콩고강의 일부인 루알라바 강을 중심으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었는데, 1887년 남수단에 주지사로 봉직하던 독일인 에민 파셔를 구조하기 위해 스탠리가 콩고국 동쪽으로 원정을 왔을 때, 구면인 그와 협력 관계를 맺고 필요한 노예를 제공해주었다고 한다. 이후부터 그는 콩고분지에서 콩고국의 전매회사들과 꾸준하게 전략적 협력관계를 유지하며 노예들을 수급해주어 왔고, 이에 스탠리는 유럽으로 돌아가 레오폴드에게 그의 필요성을 설득한 끝에 아르위미강과 루알라바강 경계선에 이르는 스탠리 폴스 지역의 주지사로 임명을 제청하여 서명을 받아내었다. 식민지에서 지배 통치 시스템의 일종인 현지인에 대한 간접통치 형식이었다. 티푸 팁은 처음 백인들이 그곳에 주둔지를 만들고 사업을 펼치고 있을 때부터 선별적 협력자로서 크고 작은 갈등을 일으켜왔기 때문에 그와 친교를 맺어야 그곳에 정착을 할 수 있다고 조언을 한 것이었다. 이에 서로의 이해관계가 교집합을 이루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티푸 팁은 장사꾼답게 이를 수락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푸 팁은 콩고국 관리들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상인 기질이 강한 위험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영역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콩고국에서 제시한 주지사직을 받아준 것이지 사실은 이보다 더 권한이 많은 내각제의 총리 같은 권한을 지향하고 있었다. 완전한 통치는 아니지만 사실적으로는 로마의 프린켑스나 최소한 스페인의 엔코미엔다 같은 지위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위험한 협력 관계는 오래가지 못하고 1892년 3월 기어코 깨지고 말았다. 공안군 지역 사령관인 반 케르츠코벤이 아랍 상아 상인들에게서 무력으로 상아를 강취했다는 이유로 티푸 팁 군이 공안군 주둔지를 공격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몇 년째 불길한 징조가 보이기 시작하다가 이 사건으로 갈등이 폭발한 것이다. 아랍의 상아 상인과 노예 상인은 연합하여 공공의 적인 공안군을 서쪽으로 몰아붙였다. 이에 프란시스 다니스 대위가 지휘하는 공안군이 카탕카로 출격하여 주둔지를 구축하고 티푸 팁 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 와중에 당시 티푸 팁 군과 연합하여 공안군과 전선을 구축하고 있던 송예족 족장 응궁고 루테테는 당시 전세에 위기위식을 느끼고 다른 족장들과 함께 공안군에 전향하여 합류하였다. 루테테는 이후부터 콩고자유국의 적극적인 협조자가 되어 당시 개발이 시작되고 있던 천연고무 사업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이렇게 밀고 당기는 전선이 지속되던 1892년 10월에 루테테 - 다니스 연합군은 티푸 팁의 아들 세프 하마드가 보유한 10만 병력이 주둔하고 있던 로마니강 유역의 여러 마을을 공격하였고, 주변의 다른 아랍군 주둔지로 진군하였다. 이참에 아랍 노예상들을 모두 몰아내기 위해 전면전을 펼친 것이다. 그들 부대는 노예 해방군 같은 역할을 하여 점령지에서는 아랍의 법을 없애고 자신들의 법으로 통제를 하였다. 당시 루알라바강 하류 탕카니카 호수 서쪽 지역은 노예상이면서 유력한 통치자인 루말리자가 포진하고 있었다. 공안군에게 있어 루말리자라는 존재는 마지막으로 제거해야 할 표적이었다. 루말리자는 10만의 병력으로 공안군과 맞섰지만 600명에 불과한 그들을 방어하지 못했다. 연발식 소총과 기관총 1문, 대포 6문을 보유한 공안군의 화력 앞에 구식 머스킷총으로 무장한 루말리자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레오폴드빌에서 상당수의 지원군이 합류하면서 루말리자군을 남쪽으로 밀어붙여 그들의 주요 거점인 음양웨와 카송카를 점령하였다. 그 마을은 무역품의 허브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안군이 루말리자 주둔지를 점령하면서 전쟁은 종식되었다. 루말리자는 간신히 목숨만 유지한 채 동쪽의 독일 식민지로 도망을 쳤다. 수만 명이 사망한 이 전쟁은 콩고분지의 헤게모니 지형에 큰 변화를 가져와 콩고자유국 동쪽 루알라바강 지역과 탕카니카 호수 서쪽 지역은 완벽하게 콩고자유국의 소유로 넘어갔고, 이에 스탠리빌은 상아와 천연고무의 최고의 허브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전쟁은 흔히 아랍 노예무역업자들과의 전쟁으로 기록되어 레오폴드가 주창한 노예무역 폐지를 실제로 실천한 본보기로 기록되고 있다. 사실상 내부를 들여다보면 그런 맥락과는 거리가 멀지만, 결과적으로는 노예무역 해방 전쟁으로 세탁하였다고 보아야 옳다. 좀 더 깊이 드려다 보면 노예매매에 관여한 자신들의 행위를 감추기 위한 전쟁이라고 보아도 이해 못 할 것은 없었다.
콩고자유국은 여타의 식민지에서 볼 수 없는 매우 신박한 경영을 보여주었다. 그중에 하나가 고급 인적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아동 집단촌이라는 괴이한 조직을 만들었던 것이다. 보마, 레오폴드빌, 스탠리빌 3군데에 병영 같은 집단 교육시설을 만들어 그곳에 1,500명 정도의 부모 없는 남자아이들을 기숙시켜 문명화된 콩고자유국 식민을 양성하였다. 가톨릭과 개신교 교단에서 위탁관리를 한 집단촌은 사실은 미래의 완벽하게 식민화된 인간을 양육 생산하는 역할을 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흔히 고아선병이라고 불린 그들은 수집되어 이동하는 과장에서 거의 50%가 사망하는 등 인간취급을 받지 못했다. 이 집단촌은 유일하게 콩고자유국에서 예산을 지원하는 학교였다. 실제로 이렇게 운영된 학교에서 많은 흑인 병사를 배출하였다고 한다. 인종주의와 우생학이 결부된 인간 개조의 한 단편이었다.
이렇게 콩고가 식민지화되고 있을 때 유럽의 젊은이들이 신분 상승을 노리고 그곳으로 몰려들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열강들의 식민지가 항상 그렇듯 젊은 남자들에겐 꿈의 무대였고 기회의 땅이었다. 회사의 주재 직원이나 관청의 말단 관리나 치안을 담당하는 공안군이나 어디든 취업을 하면 거의 신분이 보장되었다. 단 풍토병과 열악한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육체와 정신력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이런 3D 같은 근무 환경을 극복하고 전매회사와 일반적인 무역회사의 주재 소장이나 행정직 관리인이 되면 그곳에서 귀족처럼 생활할 수 있었다. 봉급 또한 본국의 비슷한 직종보다 훨씬 많았고, 잘만하면 부수입도 봉급보다 훨씬 많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본국이라면 꿈도 꾸지 못할 우월적 지위를 가지고 다수의 흑인 위에 군림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환경이 인간을 악마로 만들어 영혼을 황폐화시키지만, 그 공간을 떠나면 다시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인간의 특징 중에 하나였다. 처참한 전쟁터가 아니라면 트라우마 같은 정신질환이 발생할 소지는 거의 없다. 소설 암흑의 심연에 보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자신의 이해득실을 위해 생존하는 것을 실감 나게 확인할 수 있다. 욕망을 좇는 인간군상이 바로 콩고자유국을 지탱하고 있었던 것이다.
레오폴드는 이와 같은 상황을 잘 알고 있어서 기회가 넘쳐흐르는 자신의 땅으로 젊은 유럽인을 골드러시처럼 유인하였다. 지원자 중에는 군인과 무역회사 구직이 가장 많았고, 총독부의 행정관도 상당수였고, 상인과 탐험가와 사냥꾼들도 이런 골드러시에 동참을 하였다. 이렇게 유입된 유럽인 중에는 상식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도 있는 반면 개인적 성향에 문제가 많은 사람들도 다수였다. 일종의 콩고자유국을 도피처로 삼아 잠입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콩고국에 꿈을 안고 왔다가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삶의 흥미가 전혀 없는 이곳에 마지막까지 꿋꿋하게 남아 있는 사람들 중에는 때로는 완벽하게 적응하여 커츠처럼 괴물이 되기도 했다. 그들은 흑인들에게 자행하는 무자비한 학대에 대해 죄의식의 수치가 낮아져 어느 순간부터는 유럽이라면 꿈도 꾸지 못할 잔혹한 행위를 일삼았고 더욱 대범해졌다. 조셉 콘래드의 암흑의 심연은 이런 인간군상에 대한 고발이었다. 악마화된 인간의 몰락을 보여준 그 작품은 제국주의의 탐욕을 비유했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숨 막힐 것 같은 열대우림지대에서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고 인간성을 상실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보다 큰 욕망을 끝없이 탐할 수 있는, 바로 추악한 탐욕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커츠란 괴물은, 당시 잔악하기로 소문이 났던 백인 관리들의 복합체라고 한다. 스탠리폴스에서 상아수집 상인이었던 조르주 앙투안 클렝, 스탠리의 에민 파샤 구조 원정에 참전했고 이후 광기로 인해 살해되었던 에드먼드 바틀롯, 아랍 상인과 상아거래의 영역을 놓고 목숨을 건 다툼 끝에 잡혀 참수당한 아더 호디스트, 공안군 장교로서 반란군 토벌에서 사살한 흑인 두개골 12개를 자신의 거쳐 주위에 화려하게 장식을 했던 레옹 룸 등 많은 원형들이 커츠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런 악명 높은 백인들에 의해 실재 현장에서 수많은 흑인들이 무고하게 고통을 받고 학살되었다. 그 광경은 부조리극의 한 단면이었다. 때로는 그들의 폭력이 총독부에 적나라하게 고발된다고 하더라도 대게는 벌금 정도의 처벌로 끝나기 마련이었다. 그들은 그런 초현실적인 세계에서 고도로 숙련된 고급 인력자였던 것이다. 인간의 폭력은 계속 지속될수록, 아니라고 하지만 생리학적으로 도파민을 생산하게 되고, 그렇게 중독이 되면 사디스트적 행위가 끝없이 반복되기 마련이다. 그런 행위를 차단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그 공간을 벗어나는 것인데, 디어헌터에서 베트콩에게 포로로 잡혀 러시안룰렛의 제물이 된 니카노어 체보타레비치처럼 게임에 도취된 어둠의 폭력은 결코 뇌에서 떠나지 않고 다시 공간을 찾게 만든다.
4. 죽음의 천사 천연고무
1890년은 레오폴드의 입장에서 볼 때 대단히 특별한 해였다. 자신의 땅에 철도개설공사 첫 삽을 뜬 해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천연고무의 재발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수의사로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던 존 던롭이 자신의 아들이 타고 다니던 세발자전거를 개선하는 과정에서 바퀴 표면을 고무로 대체하는 아이디어를 내어 요철 현상을 방지할 수 있었는데 이는 순식간에 모든 자전거 타이어에 적용되었던 것이다. 천연고무는 이미 19세기 초중반부터 방수복 코팅제로 쓰여 왔고, 미국의 찰스 굿이어는 굳지 않는 성질을 가진 천연고무에 유황을 혼합하면 영구적으로 형태를 유지시킬 수 있다는 것을 발명하고 그것은 고무장갑과 레인코트의 원재료로 사용되었다. 이런 천연고무의 재발견은 거듭되어 호스, 튜브, 전기절연체 등 각종 산업용품과 생필품에 적용되었다. 무엇보다 19세기말부터 불붙은 가솔린 자동차의 급속한 발전은 폭발적인 수요를 창출하였다. 고무타이어가 없었다면 안락성이란 측면에서 볼 때 자동차는 상대적으로 대중화를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자동차의 발전과 맞물린 고무의 발견은 레오폴드에게는 하늘이 준 선물과도 같았다. 콩고분지에 천연고무나무가 지천이었던 것이다. 사우디아리비아에서 어느 날 갑자기 석유가 발견된 것처럼 천연고무는 레오폴드에겐 생각지도 않은 로또 당첨이었다. 당시엔 고무 제품의 수요는 증가했지만 원료인 천연고무는 아시아의 싱가포르, 인도네시아나 브라질 같은 한정적인 지역에서 채취되고 있어서 고가로 거래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코르테스가 메소아메리카를 정복하면서 함께 발견되었던 천연고무는 이후 영국과 브라질을 중심으로 품종 개량에 힘을 기울여 왔지만 항상 수요를 쫓아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콩고에서 발견된 란돌피아 종의 고무나무는 30cm 굵기에 30미터까지 성장하였고 줄기 표면을 약간만 절재 하여도 많은 양의 품질 좋은 라텍스를 뽑아낼 수 있었고, 이런 나무는 자연사할 때까지 계속해서 사용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재배에 필요한 개간과 재식 품종 관리에 소요되는 경비가 필요하지 않아 수익률은 하늘을 찔렀다. 노동력은 거의 노예에 가까운 현지 원주민으로 충당할 수 있었고, 운송 또한 기존의 인프라인 콩고강 수로와 철도를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경쟁력과 수익률은 높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런 천연고무사업은 기존의 상아 전매회사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새롭게 생산유통망을 구축할 필요도 없이 매우 효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었던 것이다. 1890년대 기준으로 1kg당 생산단가가 1.35프랑이었지만 판매단가는 10프랑이었다고 한다. 수익률이 700%인 것이다. 이에 1890년에서 1904년까지 기준으로 볼 때 지주회사인 CCCI의 주가는 30배나 상승하였고, 무역 수익도 96배나 증가하였다고 한다.(출처 레오폴드왕의 악령) 이에 20세기 초 레오폴드의 콩고자유국은 유럽에서 가장 수익률이 높은 식민지로 부상하였다. 초기 투자로 인해 빚에 쪼들려 불면증에 시달렸던 레오폴드는 부채를 상환할 수 있었고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열정을 쏟아부었다. 사실 채권자는 벨기에 정부였기 때문에 부채 상환은 수익률에 비해 형편없이 적었다. 아무튼, 이제야 평온해진 레오폴드는 자신의 우아한 왕궁 집무실에서 재벌 총수처럼 콩고의 고무 생산 현황과 수요 추세 등을 점검하고, 그에 따른 필요한 사안을 계획하고 지시하는 내용을 비서를 통해 작성하여 콩고로 보냈다. 이제 그의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게 레오폴드가 호사로운 자신의 궁전에서 보고서를 넘기고 있을 때, 뜨거운 콩고분지에서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 모호한 지옥 같은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전매회사는 관할 구역의 여러 출장소에서 수거한 천연고무를 상업 허브에 집결시켜 증기화물선으로 레오폴드빌까지 수송하였다. 이는 다시 화물열차를 이용해 마타디까지 운송한 후 화물선으로 보마까지 가서 리버풀 소재 엘더 뎀스터 해운회사의 선박이 선적하고 유럽으로 향했다. 이런 기나긴 대량 운송 시스템은 여타의 식민지에서 볼 수 없는 드라마틱한 광경이었다. 이런 물류 운송 시스템을 가진 식민지는 아프리카 어디에도 없었고 그것은 결국 경쟁력과도 결부되었다. 그런 경쟁력의 핵심은 바로 노동 착취로부터 시작되었다. 콩고강 주재소 가까운 곳부터 처음 시작된 라텍스 채취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거리가 멀어져 운반 시간이 오래 걸렸고 이는 노동력과도 직결되었다. 고무나무를 찾아 밀림에 길을 만들고 들어간 흑인 노무자들은 채취량을 올리기 위해 나무 밑에는 물론이고 나무 높이 타고 올라가 레텍스를 채취하였다. 때로는 당장의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나무를 절단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는 불법이었다. 고무나무 절단은 콩고국에서 법적으로 금지하는 사항이었기 때문에 이를 어길 경우에는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았다. 그렇게 채집한 라텍스는 항아리에 모아 중간상인이나 전매회사 수집 출장소로 운반하였다. 중간 상인들이 개인적으로 수액을 가져오는 경우엔 수량에 따라 두둑한 가격으로 매입하였다. 이를 맛본 중간 상인들은 하나의 소규모 사업체를 구성하고 조직적으로 라텍스를 수집하여 팔아 많은 수익을 창출하였다고 한다.
문제는 노동력이었다. 한번 작업을 나가면 열대우림 속에서 야영을 하며 며칠씩 노동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채취는 물론이고 액체 상태의 라텍스를 운반하기 쉽게 건조하는 것도 힘든 노동을 필요로 했다. A4용지 만한 넓이에 나무판자 두께 정도 되는 크기로 건조하기 위해 각각의 임시 거주지에 건조장을 만들었고 어떤 곳에서는 빨리 건조하기 위해 사람의 등짝에다 수액을 발랐다고 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린 천연고무를 짊어지고 콩고강가로 운반을 하였다. 이 운반 거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멀어졌다. 자유롭게 드넓은 우림지대에서 대대손손 살아왔던 원주민들에겐 이런 힘든 노동은 익숙하지 않았다. 코끼리를 잡아 상아를 발라내는 작업이 훨씬 수월했다. 이에 아무리 많은 물품을 대가로 받는다 해도 이 작업을 하겠다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원주민들 사이에서도 기피하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서는 살인적인 노동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원주민들은 현장에서 도망치는 경우도 빈번하여 노동력은 저하되기 시작했다. 고무나무는 지천에 깔려 있었지만 사람을 구할 수 없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물리력을 써서라도 노동력 확보하는 것이었다.
콩고자유국에서는 <콩고 거주민과 여행자를 위한 지침서>를 발간했는데, 내용 중에는 원주민 생포 요령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는, 일종의 생포 가이드를 제공했다고 한다.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그런 발상은 노동을 착취하기 위한 근본적인 추동력을 만들어내기에 충분했다. 레오폴드는 아니라고 하겠지만 현지에서는 온갖 폭력적인 방법이 동원되어 천연고무의 생산력을 높이는데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볼모와 할당제이다. 처음엔 본국으로부터 독촉을 받은 전매회사 출장소 직원들이 마을을 급습하여 여자를 볼모로 잡은 뒤 족장에게 할당량을 가져와야 풀어주겠다고 협박을 했고 이를 어길 시에는 채찍질은 물론이고 본보기로 살해까지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극단적인 방법은 전반적으로 생산 프로세스화 되어 많은 전매회사에서 사용하였다. 각각의 마을에 2주 동안 성인 남자 1명당 건조된 라텍스 3~4kg을 할당하였는데 이 양은 하루 종일 쉬지 않고 노동을 해야 달성할 수 있었다. 이 볼모 할당제는 장소와 시간에 따라 조금의 변화는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시간이 갈수록 강화되고 고착화되는 현상을 보였다. 혹독한 노동에 지쳐있던 원주민 남자들은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때로는 맹수들의 습격에 목숨을 잃기도 하면서 깊은 곳으로 이동한 후 높은 고무나무 위에 매달려 라텔스를 채취하였고, 너무 힘들고 지쳤을 때는 나무를 절단하여 할당량을 맞추기도 했지만 이런 경우 대게는 발각되어 온갖 고초를 겪었다. 시코트의 매질은 살이 터지는 고통이었고 때로 저항 시에는 며칠씩 거꾸로 매달리는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했을 경우에는 볼모로 잡힌 가족들의 손목이 절단되기도 하고 무고하게 고문을 당하고 목숨을 잃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그 밖에도 기아와 질병으로 속절없이 주검이 되었다.
라텍스 수집 출장소에는 장터처럼 항상 사람들이 붐볐다. 중간상인들이 가져온 라텍스를 전매회사 직원이 흥정을 하고 있었고, 할당제 계약에 묶인 원주민들은 각자 가져온 라텍스 무게를 달아 할당량 유무에 따라 천당과 지옥이 결정되는 장면들이 연출되었다. 그리고 볼모로 잡아온 여자와 어린아이들은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에 울타리를 지어 가두어 놓았다. 때로는 여자들은 전매회사 관리인의 욕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고, 백인 남성 여행자들의 성노리개로 팔려가기도 하였다. 때로는 노동의 대가로 주어야 할 물품이 동이 났을 때는 대신 관리인들은 다른 데서 잡아온 여자와 아이들을 족장들에게 주었다고 한다. 간접 노예 거래인 셈이다.
당시 손목 절단이란 초현실적인 끔찍한 행위는 일상적으로 당연하게 벌어졌다. 처음엔 할당제와 결부된 볼모 여자들의 손목을 잘랐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공안군 용병의 개인적 이익을 위한 도구로 자행되기 시작했다. 라텍스 생산 노예노동자들이 도망가는 일이 비일비재해지자 그들을 추적하여 생포하거나 사살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고, 이에 전매회사는 이런 탈주자들을 잡거나 최소한 죽였다는 증표를 가져오면 이에 대해 보상하는 시스템을 가동한 것이다. 일종의 포상이었다. 때로는 공안군 용병들의 실탄 사용과도 연결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각자에게 지급된 탄알의 사용처를 확인하기 위해 그들은 저항하는 원주민을 사살했다는 증표로 시체의 손목을 잘라 제출했지만, 실재로는 불특정 다수의 어린아이들의 손목을 잘라 제출하고 탄알 한 발을 사재기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는 개인적인 사냥이나 반란에 사용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당국의 조치였지만 지켜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공안군 용병들의 만행과 더불어 콩고자유국에 협조적인 현지 원주민 부족장들은 적대적인 부족을 공격하여 수십 명을 살해한 후 그 시신에서 손목을 절단하고 훈연 처리하여 콩고국 출장소에 폐지처럼 갖다주고 보상을 받기도 했다. 손목뿐만 아니라 코와 귀도 해당되었다고 한다.
손목 절단은 이제 콩고국의 상징이 되었다. 기이하게도, 손목은 이제 화폐처럼 유통되어 라텍스 할당량 대신 사용되기 했다. 공안군 용병 사이에서는 여자아이의 손목을 자른 후 살려주기도 하였고, 복무기간 단축을 받기 위한 방편으로 손목은 물론이고 발목까지 절단하여 제출하는 경우도 있었다. 피해자들은 대다수가 저항력이 약한 여자와 어린아이들이었다. 할당량 미달로 남자의 손목을 자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렇게 자른 손목은 오래 보관하기 위해 훈연을 하였다고 한다. 처음으로 콩고의 폭력적인 상황을 유럽에 폭로했던 미국인 목사 윌리엄 셰페드는 자포 자프족 마을을 방문했을 때 81개의 손목이 훈연되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하였다. 이런 목격담은 시간이 갈수록 다양한 경로를 통해 증가하였다. 광기의 손목절단 행위는 콩고자유국의 묵인 하에 천연고무 산지 곳곳에서 광범위하게 자행되어 아프리카 내륙까지 여행하던 많은 유럽인들에게 노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중에는 선교사들도 많았고 양심 있는 내부 고발자도 적지 않았다. 손목절단 행위는 하나의 실체적인 사례에 불과할 뿐, 보다 보편적이면서 거대한 노동착취와 폭력이 콩고자유국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살아있는 콩고인의 고혈을 흡입한 결과, 천연고무 무역량을 화폐로 따졌을 때 1887년 116,678프랑이었던 물동량이 1895년 2,882,585프랑으로 증가하였고, 철도 완공 후인 1899년에는 10배나 증가한 28,100,917프랑에 다다랐다고 한다. 1899년 콩고자유국 전체 무역 규모는 총 36,067,959프랑이었다고 하는데 그중에 천연고무 비중이 78%에 이르러 거의 중동의 석유 산유국처럼 하나의 품목이 과점유하는 현상을 보였다. 야스퍼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콩고강은 생명체의 정적은 평화로움과는 조금도 닮지 않았다. 하늘로 치솟는 천연고무 생산량은 그만큼의 실제적으로 노예였던 흑인들의 살인적인 노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수많은 잘린 손들의 절규가 그것을 증거하고 있는지 모른다. 제국주의자들이 구축해 놓은 지구상의 어느 식민지에서도 이런 성과를 이루어낸 곳은 없었다. 커츠가 말한 대로 ‘야만인을 절멸’하라고 외쳐야만 자신의 탐욕을 채울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커츠가 옳았는지 모른다.
콩고자유국 산업 전반에 투입된 현장 관리 실무자들이나 협조자들은 대다수가 흑인이었다. 그런 행정부 하급 관리자들을 카피타스라고 불렀고, 잔지바르와 나이지리아와 라이베리아 등에서 모집되어 온 용병들로 구성된 공안군이 10%도 안 되는 백인 장교들의 지휘를 받았고, 식인종으로 알려진 악명 높은 송예족의 일파 자프 잡스 부족 같은 원주민들은 콩고자유국과 동맹을 맺은 후 뛰어난 공예품을 생산한 것으로 유명한 쿠바왕국 대학살 등에 앞장서며 적극적으로 협조하였고, 전매회사에서 운영하였던 민병대에도 타지에서 온 흑인들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었다. 이 같은 다수의 흑인들은 소수의 백인들이 달아준 완장을 차고 전면에 나서 콩고 원주민들에게 야만적인 방법으로 관리를 하였는데, 그들이 백인에게서 배운 것은 잔혹함이었다. 수많은 잔혹행위 중에서 손목을 경제활동의 일환으로 삼았다는 것은 백인들이 그렇게 유통화를 시켰기 때문이었다. 콩고강은 제국주의자들이 침략하기 전까지는 오래전부터 사람과 공유하며 도도하게 흐르는 평화롭고 성스러운 강이었지만 레오폴드가 어느 날 갑자기 폭력을 동원하여 강탈함으로써 피의 강으로 변하였던 것이다. 이제 콩고강은 죽음이 흐르는 강이었다.
이렇게 폭력적인 노동으로 수백만 명의 흑인들이 고통을 받고 있을 때 신은 아직도 그에 만족을 못하는 듯 천연두, 말라리아, 수면병 같은 온갖 전염병을 살포하였다. 그중에 풍토병의 일종이었던 수면병이 콩고자유국 전역에 창궐하여 폭력으로 초토화된 땅을 다시 악령처럼 뒤덮어 버렸다. 감비아파동편모충이란 기생충이 체체파리를 숙주삼이 서식하다가 인간의 몸속으로 침투하면서 증상을 유발하는데, 열병과 협응 저하, 경련 등을 겪다가 극심한 수면 장애를 빠져 의식을 잃고 사망하게 만드는 열대우림지역 특유의 전염병이었다. 수면병의 발생은 건강상태가 악화된 노약자, 기아자, 외상자들 사이에서 급격하게 확산되었다. 나중에 벨기에 당국은 콩고자유국 원주민들의 50%에 이르는 사망률은 수면병 같은 전염병이 창궐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런 전염병의 발원은 원주민들의 건강상태와 면역체계와 직결된다는 의학적 인과관계를 볼 때, 그런 주장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콩고국에서 원주민의 육체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학대를 하여 신체를 취약하게 만들었고 결국 면역체계를 교란시켜 전염병에 무방비 상태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스탠리 폴스의 행정관인 샤를 드 셍제르맹은 편지에서 ‘질병은 지칠 대로 지친 사람들에게 참혹하게 피해를 입혔는데, 이것은 수면병의 끊임없는 증가의 원인으로 보아야 한다.’라고 썼다. 또한 이런 원인을 포괄적으로 설명하자면, 천연고무의 무자비한 남벌과 그에 따른 폭력은 생태 질서의 파괴를 불러와 원주민들이 오랫동안 거주해 오던 삶의 공간을 불가역적으로 바꾸어 놓았고, 이는 전염병과 온갖 질병이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었던 것이다. 수면병은 풍토병의 일종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어느 순간 면역체계가 허물어진 것은 외부의 영향 때문이라는 것은 병리학적으로 충분히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 있다. 절대 빈곤과 질병의 악순환의 고리는 생태인류학적 공간에 급진적 파괴를 불러오게 하여 결과적으론 포괄적 대학살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 불과 300여 년 전 신대륙 아메리카에서도 이런 재앙적 메커니즘으로 대다수의 원주민이 사망하지 않았던가. 급격한 삶의 공간의 인위적 변화는 재앙을 불러오는 지름길이라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알고 보면 네안데르탈인도 호모사피엔스의 급진성에 적응하지 못하고 멸종되었는지도 모른다.
5. 폭로 전쟁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당시는 전 유럽에서 인종주의와 사회진화론과 우생학이 광풍이 불고 있을 때였다. 지구상의 모든 인종을 유럽인 중심으로 범주화시켜 자신들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 생물학적인 근거와 더불어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도 활용하였다. 제국주의 국가에서는 이런 직관적인 대중적 공연이나 전람회 등이 횡횡하였다. 1897년 벨기에 브뤼셀에서도 세계박람회를 개최하여 한 부스에 당시 자신의 식민지였던 콩고자유국에서 267명의 원주민을 데려와 가설 마을을 조상하여 생활상을 재현하기도 하고, 춤과 노래를 공연하는 문화행사를 열었다. 이는 인종 전시의 시초였다. 이후에도 여러 형태의 인종 전시가 열렸는데, 대표적으로 1906년 미국 뉴욕 브롱크스 동물원에 있는 원숭이 관에 피그미족 출신의 오타벵가를 오랑우탄과 한방에 전시를 하였고, 그것도 모자라 식인 풍습을 재현하게 만들었다. 당시 미국은 유럽의 여느 국가보다도 인종주의와 우생학에 열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비인도주의적인 행위는 당시에도 기독계를 중심으로 지탄을 받았고, 이에 흑인 목사가 동물원으로부터 오타벵가를 구출하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오타벵가는 10년 후 당시 당한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을 했다고 한다. 브롱크스 동물원 전시는 극단적인 형태지만, 다양한 형태의 인종 전시 붐은 가장 먼 일본까지 전파되어 1903년 오사카 박람회와 1907년 도교 박람회에서 열성인 조선인을 전시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아마도 일본은 자신이 제국주의의 일원으로서 우성임을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제국주의, 식민주의, 인종주의, 우생학 등이 혼합되어 빚어진 이런 행위의 형태는 결국 20세기에 발생한 인종청소와 제노사이드의 밑거름이 되었다.
콩고자유국에서 발생한 만행에 대한 고발은 처음엔 미미하게 시작되었다. 지구를 지배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유럽의 우성인들은 가장 낮은 수준의 인종이 사는 아프리카 중심부 오지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려고도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에 의해 찻잔 속의 태풍처럼 시나브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선구자적 폭로 자는 보스턴 출신 침례교 목사이면서 오하이오주 의원과 언론인, 작가, 변호사 등 다양한 경력을 가지고 있던 조지 워싱턴 윌리엄스였다. 1890년 7월, 브뤼셀로 가서 레오폴드를 만나 인터뷰를 한 후 그의 식민지 철학에 감명을 받은 윌리엄스는 기사를 쓰기 위해 콩고자유국으로 취재 여행을 떠났다. 1890년은 콘래드가 처음 콩고강에 간 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곳에서 본 실상은 레오폴드가 설파한 박애주의와 인도주의와는 거리 먼 생지옥과도 같은 세상이었다. 현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인적인 노동과 폭력과 노예매매가 성행하는 상황을 목도하고 이에 실망한 그는 실상을 고발하는 ‘벨기에 국왕이자 콩고 독립국 군주인 레오폴드 2세 폐하께 드리는 공개서한’을 만행의 온상인 스탠리 폴스에서 작성하여 유럽에 보내 팸플릿 형식으로 출간하였다. 콩고자유국의 처참한 인권 상실 상황을 ‘인도에 대한 범죄’로 규정한 그는 그 실상에 대해서 광범위하고 세밀하게 작성하였고, 레오폴드의 거짓과 위선에 대해서도 적나라하게 폭로하였다. 이 폭로로 인해 그는 거센 반격을 받았다. 벨기에 언론과 진실 공방이 이어졌는데, 신성을 모독한 자, 검둥이라는 인신공격을 받으면서도 그는 물러서지 않고 외로운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레오폴드는 콩고자유국 백서를 발간하여 윌리엄스의 고발을 희석시키면서 온갖 방법을 동원해 그를 공격하였다. 이로 인해 윌리엄스는 후원자도 잃고 오히려 외톨이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레오폴드와 유럽의 백인 우월주의자들과 힘겹게 싸웠던 그는 1891년 8월 공개서한 발간 1년 후 영국에서 폐결핵으로 쓸쓸하게 사망하였다. 그가 유럽인 목사였다면 적어도 무시는 당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아쉽게도 그는 흑인이었다.
콩고자유국의 식민지 만행은 폭로자와 레오폴드와의 전쟁이라고 표현할 만큼 진실을 밝히는데 지난한 시간이 필요했다. 또한 폭로자들의 역사라고 부를 정도로 그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윌리엄스와 비슷한 시기에 콩고자유국에 들어간 윌리엄 헨리 셰퍼드는 장로교 목사의 직함으로 사무엘 랩슬리 목사와 함께 선교 활동을 하였다. 아프리카계이기도 했던 그는 콩고내륙에 위치한 쿠바왕국을 주무대로 선교활동을 하면서 윌리엄스처럼 비인도적인 폭력 현장을 접하였다. 하지만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그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중에 손목 잘린 콩고 원주민 사진이 많았는데, 그 사진은 추후 확실한 폭로전쟁의 귀중한 증거로 사용되었고, 전율이 흐르는 그 사진은 현재까지 전해져 누구나 볼 수 있다. 그 밖에도 20년 동안 장기 체류하면서 원주민과 함께 생활했던 그는 꾸준하게 레오폴드의 학정을 고발하였고 이로 인해 전매회사인 카사이에게 고소를 당하여 송사에 휘말리기도 하였다. 그 외에도 스웨덴 침례교 목사인 E.V.쇠볼롬도 선교활동에서 목도한 식민지 만행을 폭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 산발적인 폭로는 사실 유럽에서 각성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이슈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자신들에게서 아주 먼, 세상의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둠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희미한 아우성에 불과했는지 모른다. 폭로자들의 외침은 거대한 벽에 다 퍼붓는 것처럼 무의미하게 메아리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메아리는 보다 많은 정보를 가진 정의의 기사가 등장하면서 서서히 진실의 불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콩고자유국 실상 폭로 전쟁은 시작되었다. 난공불락의 레오폴드에 맞서 가장 앞에서 치열하게 싸운 사람은 에드먼드 딘 모렐과 로저 케이스먼트였다. 1900년 당시 모렐은 콩고자유국 무역품 해상운송을 전담하는 해운회사 엘더 뎀스터의 말단 직원이었다. 17세기 이후 아프리카 무역 운송업의 중심지였던 리버풀은 노예무역으로도 악명이 높은 도시였다. 당시에도 벨기에를 비롯해 서아프리카 무역품 대부분을 운송하고 있었는데, 모렐의 업무는 벨기에로 운송되는 선박의 물품 전표를 검토 관리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콩고자유국 무역소 관리들과 업무 연락을 주고받으며 재직하던 중 수상한 거래가 있다는 것을 동물적인 감각으로 발견하고 추적하기 시작했다. 상아와 천연고무가 앤트워프로 운송이 되지만 콩고로 가는 선적 물동량은 거의 전무하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상아와 천연고무의 거래가 물물교환 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모렐은 결국엔 콩고 현장에서 무임금 노동 즉 노예노동 형식으로 생산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직감하고 브뤼셀로 가서 콩고자유국 본국 행정관 같은 실무자들을 만나 자신의 의도를 숨기고 인터뷰를 하며 사실 파악에 나섰다. 그는 일기에서 자신이 만나본 관리자들의 표정을 보고 ‘콩고에서 자행한 잔악한 행위로 인해 표정에도 그런 형상이 배어 있었고...’라고 쓰고 있다. 그런 결과 자신이 추론한 데로 콩고자유국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폭력적인 상황들이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했고, 보다 많은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콩고에 갔다 온 전매회사 직원과 식민정부 관리 그리고 선교사들을 탐문하여 조사를 하였다. 그의 이런 일은 순수하게 개인적으로 은밀하게 진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 확인된 사실들을 언론사에 투고하여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벨기에의 무역 물동량을 책임지고 있던 회사에서는 자사의 직원이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 것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했고, 폭로 후 콩고자유국 브뤼셀 정부에서 압력이 들어오는 곤란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회사는 근무시간 단축과 처우 개선과 급여 몇 배 인상 등을 내세우며 모렐을 회유했지만 그는 1901년 아예 퇴사를 해버렸다. 28살이었던 청년 모렐은 콩고자유국의 만행을 폭로하는 것이 운명이나 어떤 계시처럼 받아주었는지 모른다. 강직하고 정의로웠던 그는 2년 후 리버풀의 기업가인 존 홀트의 후원으로 <서아프라카 통신> 신문을 창간하여 본격적으로 레오폴드에게 선전포고를 한다. 이런 공식적인 콩고국 폭정 폭로 운동이 언론에 활자화되면서 선교사, 여행자, 내부 고발자, 인권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서 만행에 대한 제보가 잇따랐다. 그의 콩고 개혁 운동에 소수지만 찰스 딜크 상원의원, 원주민 보호협회, 노예제도 반대협회, 메리 킹슬리 같은 유력인사들과 단체들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모렐의 이런 열정적인 노력으로 1903년 6월 영국 의회에서 콩고 항의 결의안이 통과되었고, 영국 외무부에서도 콩고 실태조사를 하기 위해 콩고 영사에게 보고서 작성을 지시하였다. 당시 콩고 영사는 로저 케이스먼트였다.
당시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아일랜드 출신 케이스먼트는 자국의 독립을 염원하는 애국심과 의로움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당시 아일랜드에서는 가난을 피해 아메리카 같은 신세계로 이주하는 엑서더스가 일어나고 있었는데 약관의 케이스먼트도 이에 동참하여 1883년 고국을 떠났다. 하지만 그가 당도한 곳은 신대륙이 아니라 서아프리카의 콩고였다. 모렐의 경우처럼 그도 엘더 뎀스터 자회사인 콩고 항로 전담회사의 사무직 신분으로 근무를 시작하였다. 처음엔 콩고 상주 직원으로 자잘한 일을 하면서 근근이 생활을 했지만 점차 시야가 넓어지면서 프리랜서 성격의 업무를 받으면서 생활을 유지하였다. 그래서 1888년에는 에민 파샤 구출 원정에 나섰던 스탠리 원정대의 보급품 보조 업무에 관여하기도 하였고, 다음 해에는 콩고에 투자를 하였던 샌포드 회사의 보급기지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1890년 당시 콩고강 증기선 선장직으로 내정되어 마타디에 왔던 조셉 콘래드와 조우하였던 것이다. '암흑의 심연'을 보면 화자가 레오폴드빌로 캐러밴을 하기 전 대기생활을 하면서 대화를 나누었던 주재소 직원이 등장하는데 그중에 한 명이 게이스먼트였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 작품이 발표되기 전까지는 케이스먼트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콘래드는 그를 모델로 삼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콘래드는 콩고 내륙으로 캐러밴을 떠나기 전 10일 동안 실제로 케이스먼트와 함께 같은 숙소를 쓰면서 그의 도움을 받았고, 콘래드가 계약기간 만료 후 콩고를 떠나기 전에도 한 번 더 만났으며, 10여 년 후 케이스먼트가 콩고 폭로 운동 중심에 섰을 때도 다시 만났다고 전해진다.
콩고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던 케이스먼트는 이후 나이지리아로 가서 식민 정부의 하급 관료로 재직을 하였다. 당시 그는 아프리카 식민지 원주민의 탄압에 대한 실태를 상부에 보고서 형식으로 수시로 제출하는 등 인권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고, 이후엔 영국 외무부로 전직하여 남아프리카 여러 식민지의 영사 직원으로 근무를 하였으며, 1900년엔 첫 번째 콩고 영사로 부임하였다. 영사라고 하지만 1인 영사여서 온갖 시시콜콜한 업무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1903년 5월, 본국 외무부로부터 콩고 실태조사 지시를 받았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콩고의 참혹한 실태를 상부에서 보거나 말거나 줄기차게 보고서를 보내고 있던 차에 이런 하달을 받았으니 그의 열정은 더욱 불타올랐다. 이렇게 영국 외교관 신분을 가지고 공식적으로 조사에 착수한 그는 100여 일 동안 콩고분지를 여행하면서 지옥 같은 현장을 목도한 끝에 수백 페이지의 보고서를 본국으로 보냈다. 그는 이 조사 과정에서 보다 심도 있는 사실을 수집하기 위해 수난을 감수하고 죽음도 불사했다고 한다. 하지만 영국 외무부 내에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보고서가 출간되었지만 내용이 전반적으로 완화된 것을 그는 확인하였다. 레오폴드의 극열한 방해 공작이 먹혀들어 외교적인 문제가 대두되기도 하고, 엘더 뎀스터와 벨기에의 통상적인 문제 등이 겹치면서 상당 부분이 여과된 것이었다. 가령 등장인물 이름이 이니셜도 아닌 그저 AA, CC, HH 등으로 표시되어 현실감이 반감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실망한 그는 상부에 항의 서신을 보내며 불만을 표출하였다. 주위 사람들한테는 상사들을 향해 비굴한 헛소리만 해대는 어리석은 패거리라고 원색적인 토로를 하였다고 한다.
이후 휴가를 내 귀국한 그는 모렐의 초청으로 그의 집을 방문하였다. 모렐은 이미 케이스먼트 보고서를 읽고 그에 대한 활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서로에게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던 그들은 지향하는 목표가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첫 만남인데도 불구하고 밤새도록 대화를 하였다고 한다. 동지의식을 확인한 것이다. 종교와 같은 확실한 신념의 소유자였던 두 사람은 운명처럼 이 상황을 수용하였다. 그들의 만남은 철옹성 같은 레오폴드 성을 공략하는 첫 번째 포성이었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케이스먼트는 <콩고 개혁협회>를 조직할 것을 제안했다. 자신은 공무원 신분이어서 대외적으로 활동은 할 수 없지만 뒤에서 기부금 모금, 지도층 급 인사 모집, 현지의 정보 제공 등 여러 가지를 지원하겠노라고 약속했다. 이렇게 도원결의로 의기투합하여 조직한 <콩고 개혁협회>는 1904년 1,000여 명을 동원하는 성과를 내며 첫 회의를 개최하였다. 성황리에 끝낸 이 회의에서 그동안 두 사람이 수집한 레오폴드 콩고에 대한 추악한 실체가 적나라하게 폭로되었고, 영국과 미국 등 열강들을 압박하는 기재로 작동하게 만들었다. 또한 이에 힘입은 모렐은 <콩고 개혁협회> 기관지를 정기적으로 간행하면서 기존의 <서아프리카 통신>에서 못다 한 세밀한 내용을 담았다.
모렐의 그런 활동에도 불구하고 고위 관료들은 복지부동이었다. 언론 또한 수동적인 입장을 취하여 운동의 진척은 생각보다 더뎠다. 아직도 대다수의 고위 관료들은 제국주의적인 사고방식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외교적인 문제도 결부되어 쉽게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하지만 모렐은 이에 굴하지 않고 불같은 열정으로 콩고개혁 캠페인에 항상 앞장을 섰다. 그는 뛰어난 연설가이기도 해서 매년 수십 차례의 집회에 참석하여 레오폴드가 악의 화신이라는 주제로 대중 연설을 하였다. 집회마다 셰페드가 촬영한 손목 절단 사진 등 60여 장의 만행 사진을 전시하였고, 지역의 성직자나 의원과 시장과 대학 학장 등이 참석하여 호응을 해주었다. 특히 사진 전시는 빼박 증거로서 운동의 신뢰성을 한층 상승시켰다. 그런 가운데 1906년 모렐은 <붉은 나무 : 1906년 콩고에 활개치고 있는 고무 노예무역의 이야기>를 출간하였다. 그가 이렇게 다방면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인 많은 정의로운 사람들이 그를 도왔기 때문이었다. 윌리엄 셰페드를 필두로 영국의 이름 없는 많은 콩고 파견 선교사들과 내부 고발자, 초콜릿 제조업자이자 대표적인 재정 후원자인 윌리엄 캔드버리와 인도주의 복음 단체인 분리파 교회를 이끌고 있던 반노예 운동가 윌리엄 윌비포스와 그리고 존 해리스 목사와 앤드루 샤누 등 어떤 이득도 요구하지 않은 봉사자들이 모렐을 지원하였다. 또한 미국에서는 유력한 소설가인 마크 트웨인이 모렐의 운동에 적극 지지하여 사기꾼 이미지를 풍자한 <레오폴드 왕의 독백>이라는 작품을 발표하여 레오폴드를 신랄하게 풍자 비판하였고, 아서 코난 도일도 <콩고의 범죄>에서 콩고자유국에서 자행된 폭력을 고발하였다. 모렐은 그들로부터 20만 건의 고발 편지를 수집하여 출판물과 여러 활동의 자료로 활용하였다. 그 가운데 앤드루 샤누는 나이지리아 출신의 영국 시민권자로서 처음엔 친 벨기에 파로서 콩고자유국의 행정 관료로 활동을 하였는데, 1903년 케이스먼트를 만나면서 의식의 전환을 하여 반 콩고주위자가 전향한 인물이었다. 이후 그는 모렐과 서신으로 협력 관계를 맺고 밀월적 동조자로서 내밀한 내부 정보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중에 콩고 관리자들이 저지른 만행에 대한 형사재판에서 거짓 증거들과 부당한 판결들이 비일비재하다는 첩보를 접수한 모렐은 그런 부당성을 밝히기 위해 샤누에게 재판 기록들을 보내줄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자료를 보내주는 과정에서 샤누는 경찰 국장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이런 기밀유출 사건으로 인해 그는 파면되었다. 다행히 영국 시민권자여서 당국은 더 이상의 물리적인 보복 조치는 취해지지 않았지만 대신 파면과 더불어 벨기에 국왕이 수여한 훈장을 취소하였다. 또한 그에 멈추지 않고 벨기에서 소규모로 운영하던 사업체도 방해를 받아 파산하였으며, 주위의 따돌림 등으로 그의 삶은 파괴되었다. 이렇게 내부 고발자로서 혹독한 보복에 시달리던 그는 이를 감당하지 못지 못하고 1907년 결국 안타깝게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점차 무게의 추가 모렐 쪽으로 기울어지자 레오폴드는 극열하게 반격을 시도하였다. 그의 대리인들은 모렐을 비롯한 폭로자나 비판자들의 주장에 대해 깨알 같이 조목조목 반론을 하였고, 대중을 자신들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언론을 통한 프로파간다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영국과 프랑스 같은 열강들의 정관계 인사들에게도 적극적으로 로비를 하였다. 레오폴드와 폭로자들의 전쟁은 점입가경이었다. 이에 레오폴드는 결정적인 한방을 날리기 위해 콩고에서 발생한 잔혹행위에 대한 조사위원회를 스스로 구성하여 콩고국으로 파견하였다. 공평성을 담보하기 위해 벨기에인 외에 스위스인과 이탈리아인 등으로 인적 구성을 하였다. 폭력 행위가 폭로자들이 주장한 내용처럼 심하지 않았다는 것을 국왕의 이름으로 조사하기 위한 마지막 결단이었다. 그는 정말 자신의 땅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진 야만적인 폭력에 대해 스스로 눈을 감고 있었던지 아니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으면서도 자의적으로 여과하여 확증을 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모함과 음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진상조사를 원한 것만큼은 분명했다. 너희들이 떠드는 것처럼 그런 행위들은 결코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레오폴드가 받아본 150페이지 분량의 보고서에는 현재 세상에 알려진 진상보다 더 많은 내용과 증거들이 즐비했다. 조사위원들은 레오폴드의 의중과는 상관없이 작심하고 조사하였는데, 원주민과 유럽 각국에서 파견된 선교사 370명을 인터뷰하였고, 지역별로 청문회를 열어 원주민들의 목소리를 청취하였고, 공안군이 자행한 폭력 감사 조서과 각종 문서들을 조사하였다. 전혀 격이 다른 실질적인 보고서였던 것이다. 이런 보고서를 본 레오폴드는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박의 논리가 필요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판세가 기울어 회생할 수 없었지만 이 보고서는 그에게 마지막 펀치를 날렸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무덤을 자신이 판 꼴이기도 했다. 더구나 뛰어난 정보력의 소유자인 모렐의 <콩고 개혁 협회>에서 이 보고서를 입수하여 유럽 각국의 언론에 유포하였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1908년, 그는 자신 소유의 콩고자유국을 채권자인 벨기에 정부에 양도하는 문서에 서명을 하였고, 다음 해 74세로 색전증으로 사망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콩고인은 독립을 한 것처럼 자유를 찾은 것은 아니었다. 벨기에의 공식적인 식민지로 변경만 되었을 뿐 콩고분지 열대우림에서는 여전히 천연고무를 채집하기 위한 죽음의 노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렇게 콩고는 철저하게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착취를 당한 끝에 빈 껍데기로 1960년에서야 독립할 수 있었다.
그러면 콩고자유국에서 레오폴드 식민지 시기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였을까? 이런 숫자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를 정도로 심각하게 많은 흑인들이 죽은 것은 분명하다. 현존하는 콩고 전문가인 잔 바시나 교수는 자신이 심도 있게 조사한 결과 폭력과 전염병과 기아 등으로 1880년~1920년 사이에 약 1,000만 명이 사망하였다고 주장한다. 이 숫자는 당시 콩고 전체 인구의 50%에 해당된다고 한다. 다른 학자들은 적어도 500만 명 이상은 사망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1924년 벨기에 정부에서 대대적인 인구조사를 한 결과를 가지고 역으로 추정한 결과 값이다. 정말 이런 숫자를 산출하고 기록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흑인들은 그저 백인들의 탐욕 앞에 끝없이 죽음의 행렬로 이어져 하찮은 벌레처럼 취급받고 속절없이 무너졌다. 흑인들을 잔혹한 방법으로 짓밟은 백인들은 정말 악마적인 인간성을 가지고 있었을까.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현장의 실무자였던 독일인들처럼 그들도 악의 평범성이란 공식에 대입시켜야 하는가. 어떤 상황에 봉착했을 때 인간은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가. 굳이 폭력을 쓰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보다 더 잔인한 방법으로 고문하고 살해하는 것을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나. 집단 살인을 자행했던 르네 드 페르망리에, 클레망 브라쇠를, 레옹 세르켈, 기욤 드 커크호벤 등은 정말 온갖 욕망으로 가득 찬 악한 본성을 가진 인간들이었을까. 레오폴드가 탐욕의 화신이었다면 그의 지휘 계통의 가장 말단에 있는 관리자나 용병들은 실행자로서 당당하게 악한 본성을 발현시켰을 것이다. 폭력의 정당성은 공기처럼 그들을 지배했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견뎌야 하고 죽어야 하는지 레오폴드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레오폴드 자체가 제국주의의 진정한 실체였는지 모른다. 단지 너무나 솔직했을 뿐이다. 콘래드는 커츠를 제국주의 메타포라고 동의하지 않았던가.
19세기 유럽인은 아프리카 흑인은 열등하고 게을러서 자신들이 그들을 계몽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게으름을 부지런함으로 바꾸어야 아프리카가 발전될 수 있다는 논리이다. 그들은 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한 것은 게으르고 미개한 흑인을 개화시키기 위한 일종의 방편이었노라고 합리화시켰다. 아시아 식민지화하고는 다른 논리였다. 16세기엔 노예로서 그 후엔 식민지로서 아프리카에 빨대를 꽂고 고혈을 빨아먹은 유럽인은 여전히 아프리카가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를 과거의 논리로서 설명한다. 왜 아프리카는 현재도 극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을까. 하지만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제국주의 유럽인의 끝없는 탐욕 때문이다. 이에 대한 연구는 수없이 많지만 한 마디로 요약하면 유럽인이 재기하지 못할 정도로 아프리카를 갈기갈기 찢어놓았다는 것이다. 불가역적으로 황폐화시켜 놓고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면 이처럼 무책임한 것은 없다. 현재도 대다수의 국가에서 내전의 터널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상황은 레오폴드가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유럽의 제국주의 유령이 아프리카를 떠돌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0세기 제노사이드 중에 하나인 르완다 대학살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1994년 종족 간의 갈등으로 후투족이 투치족을 100일 동안 80만 명을 학살하였는데 그 근본적 원인이 20세기 초 벨기에 식민 정부가 내부 분열을 조장하는 정책이었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제국주의자들이 뿌려놓고 간 권력과 돈 그리고 제 마음대로 그어 놓은 국경선과 종족 간의 갈등은 아프리카를 여전히 검게 물들이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