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노사이드
1. 초원의 강자로 떠오른 준가르
세계사에서 13세기 몽골의 등장은 대충격이었다. 영토 면적으로 따졌을 때 유라시아의 80% 이상을 자신의 땅으로 만든 그들은 알렉산드로스를 능가하는 스펙터클한 규모의 정복사를 보여주었다. 몽골 대칸 태무진의 자손들이 그의 말씀을 복음처럼 여기고 서쪽으로 끊임없는 진격한 결과, 훌라구가 이란과 중동 지역을 정복하여 일 칸국을 세웠고, 차카타이가 중앙유라시아 평원을 정복하여 자신의 이름 딴 칸국을 건설하였고, 주치의 아들 바투와 그의 형제들은 대장군 수부타이와 함께 유라시아 북쪽으로 이동하여 모스크바와 헝가리와 폴란드 깊숙한 곳 레그니차까지 정복하였고 그리고 유럽의 심장이자 합스부르크 본산인 비엔나 코앞에까지 가서 주둔지를 구축하고 킵차크 칸국을 선포함으로써 대제국의 마침표를 찍었다. 호사가들은 오고타이 대칸이 사망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서유럽 또한 악마의 군대에게 정복당했을 것이라고 아쉬운 듯한 감정을 토로한다. 아무튼 몽골의 전사들이 정복한 그곳엔 800년이 지난 지금도 칭기즈칸의 후예들이 남긴 흔적들이 뚜렷하게 남아 당시의 영광을 증거하고 있다. 비록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역설적이게도 누구도 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구 문명의 발전 속도는 늦추어지지 않았다. 이런 오컬트적인 놀라운 역사적 현상은 한편으론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지만, 인간의 욕망의 역사적 배경과 상상력을 동원하다면 적어도 막연한 해석은 가능할 지도 모른다.
이제 얘기하고자 하는 오이라트족은 몽골 연대기에 의하면 현재 소련 접경지역인 토라 지역에서 유목수렵 생활을 하던 부족으로서 칭기즈칸 생전에 그와 혈맹을 맺고 자식들을 서로 주고받으며 선린관계를 공고히 하여 대정복 원정에 적극 동참하였다고 한다, 특히 대칸의 손자인 훌라구가 이끄는 일칸국 건설에 아르곤과 그의 아들 노루즈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후 쿠빌라이가 송나라를 멸하고 중국을 통치할 때는 권력에서 멀어졌다가 주원장이 몽골을 북쪽으로 내쫓을 때 잠시 몽골을 통합하는 등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기도 했지만 오래가지 않고 변방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이후 17세기 초의 몽골은 크게 동쪽에 체첸, 투시예투, 작삭투 그리고 서쪽에는 호트고이트와 오이라트 등이 각자의 울루스를 확보하고 있었고 그들은 서로 패권을 위해 이합집산 합종연횡을 하며 유목세계의 전형적인 권력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분열과 결합은 정주하지 못하는 유목민의 정치적인 특성이었다. 이런 분열된 조직을 하나의 정점으로 모아 강력한 힘을 도출한 인물이 바로 태무진이었다. 하나가 되었을 때는 세계를 정복할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지질 수 있었지만 그런 결집은 그때 딱 한 번이었고 그 후에는 내부 분열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 와중에 가장 먼 서북 땅에 작은 부족의 연합체인 오이라트가 과거의 영광을 뒤로하고 구심점을 잃고 변방 초원에서 유목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오이라트가 다른 울루스들에게 괄시를 받은 것은 쿠빌라이의 피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흔히 말하는 할하 몽골의 여러 칸국들은 자칭 쿠빌라이의 후손이라는 혈통을 내세우고 있었던 반면 오이라트는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진정한 대칸의 후예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오이라트 울루스의 본거지였던 현재의 신장 지역은 알타이 산맥과 톈산산맥과 메마른 초원 등이 가로막고 있지만 강과 호수도 있고 광활하고 풍요로운 초원도 형성되어 있는 유목의 천국이기도 해서 일찍이 까마득히 먼 옛날 호모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과 그리고 데니소바인들이 대를 이어 살아왔던 지역이었다. 그리고 독특한 국경지역 특유의 역동적인 요소도 가지고 있었다. 북쪽에서는 킵차크 칸국으로부터 레콩키스타를 성공한 러시아가 동쪽으로 끊임없이 팽창하여 시베리아와 알타이 산맥까지 접근해서 몽골의 작은 울루스들에게 복속할 것을 끈질기게 강요하고 있었다. 유럽의 문물을 흡수한 러시아는 지리적인 특성상 대항해의 시대에 동참하지 못하고 차선책으로 동진정책만이 살 길이라고 목표를 정한 후, 화약무기를 동원하여 시베리아인을 손쉽게 정복하고 그곳에 요새 규모의 정착지를 세우고 일정한 군을 주둔시킨 후 다시 동진하는 방법으로 계속 땅을 넓혀가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그들이 접수한 곳이 현재의 타라, 토볼스크, 톰스크, 쿠즈네트크 등이었다. 그리고 동쪽에서는 할하 몽골 즉 동몽골의 울루스 중에 하나인 호트라이트 알타 칸이 서진을 하여 오이라트를 압박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희망이 없는 서쪽의 카자흐 칸국이나 모굴리스탄과 기르기스탄 같은 과거의 칸국으로 이주할 수는 없었다. 더 남쪽은 타림분지가 있는 타클라마칸 사막과 티베트 고원지대가 형성되어 있어서 가축을 방목할 수 없었다. 그들은 고립무원의 입장이었다. 그래서 그들 일부는 시베리아의 쿠춤 칸에 복속되기도 하고, 일부는 러시아의 보호를 자청하기도 하고, 일부는 그래도 독립적인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자생적으로 세력을 키웠다.
사실 그 작은 오이라트 울루스도 하나의 피를 가진 공동체가 아니라 더 작은 부족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17세기 초를 기준하면 호쇼트, 준가르, 데르베트, 토구르, 호이트, 초로스 등의 부족들의 느슨한 연합체로서 그들을 4오이라트라고 불렀다. 4라는 숫자는 네 부족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4만호를 의미하는 일종의 관용적인 명칭이라고 하며 그 단어도 처음부터 생긴 것이 아니라 몽골이 여러 울루스로 분리될 당시에 처음 존재감을 나타내면서 사용되었다고 한다. 나중에 구체적으로 얘기하겠지만 4오이라트 중에 핵심적인 부족은 준가르였다.
범 몽골 칸국에서도 변방의 작은 부족의 연합체 불과했던 오이라트는 유목만으로 자신들의 안위를 보존하기 힘들었다. 이에 오이라트는 러시아의 복속 도시인 타라와 접촉하여 대립을 하면서도 협조를 구하기도 했고, 이어서 모스크바로 사절단을 보내 타이가 초원지대인 이르시리강과 오브강 부근에 진출할 수 있도록 허용해 줄 것과 러시아와 동맹을 맺어 줄 것은 요구했다. 초원은 그들의 생명줄이었고, 동맹을 요구한 것은 할하 몽골의 알타 칸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간파하고 있던 러시아는 오이라트에게 자신에게 복속하여 조공을 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러시아의 동진 정책 중에 핵심 방법론은 상대 부족에게 평화로운 복속 아니면 무력 복속 둘 중에 하나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런 러시아의 평화적 복속 요구는 광활한 시베리아를 정복할 때 대다수가 먹혀들어 순조롭게 동진할 수 있었지만 남쪽에 있는 오이라트는 그 복속을 수용하지 않았다. 그렇게 긴장감이 도는 가운데서도 러시아와 오이라트는 무력 충돌을 자제하며 타라와 톰스크 등 접경지역에서 말, 양, 소, 가죽 그리고 서양의 면직물과 신제품 등을 교역하는 경제적인 활동에 치중했다. 특히 오이라트는 중국의 물품을 구해서 시베리아 시장에 내놓고 팔았다. 하지만 러시아는 오이라트가 간절히 원했던 화약 무기류는 정책적으로 거래하지 않았다. 사실 러시아는 중국으로 가는 지름길에 있던 오이라트 지역을 무역의 교두보로 구축하고 싶어 했다. 17세기 당시 중국은 청과 명이 생존을 건 대립으로 혼돈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지만 러시아의 입장에는 여전히 매력적인 시장인 것만큼은 분명했다. 더구나 식민지 개척에 혈안이 되어 있던 당시 유럽에서 가장 쉽게 중국에 접근할 수 있는 루트가 바로 서북 몽골 접경 지역이었기 때문에 러시아에서는 오이라트를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러시아의 남하를 원하지 않았던 중국은 북방의 몽골 영토를 완충지로 이용을 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오이라트 역시 지리적으로 러시아에게 있어 중국 진출을 막는 바리케이드와 같은 존재였다. 그들만 없으면 중국 진출은 훨씬 수월해질 수 있었지만 오이라트는 칭기즈칸의 기개로 절대 물러서지 않았다. 이에 시베리아 지방정부는 계속해서 오이라트에게 평화를 위해 복속을 요구했고 준가르의 카라쿨라와 호쇼트의 바이바가스와 그리고 달라이 타이지 등 울루스의 형제들은 들어줄 수 없는 조건을 붙이며 계속 거절하였다. 통행세라도 내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시베리아 정부는 군사를 동원해서라도 그 바리케이드를 뚫으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하지만 러시아 정부는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몽골 세력이 힘이 약화되었다고 하지만 수부타이 악령은 사라지지 않고 그들의 기억 속에 살아 있었던 것이다. 함부로 대했다가 다시 수모를 당할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험악했던 분위기는 다시 평화의 시대로 바뀌었다. 이후에도 러시아는 오이라트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관계를 유지했다. 때로는 할하 몽골의 칸들과도 필요에 따라 연대를 하며 국경선을 침범하지 않고 중국 진출을 지속적으로 꾀하였다.
그런 가운데 1628년 오를룩 타이지가 이끄는 오이라트의 한 일원인 토구트 울루스 25만 명이 한 번에 서쪽으로 대이동을 하여 우랄강을 건너 불가강 부근까지 접근하여 정착하는 대 파노라마가 펼쳐졌다. 항상 불만이 많았던 그들은 울루스 내에서도 독특한 성향을 가진 부족이었는데, 그들의 이주는 오이라트 권력의 역학관계에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전체적으로 힘은 약화되었지만 한편으론 통합의 기회이기도 했다. 아무튼 러시아는 처음엔 그 무리를 제지했지만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오직 경제적인 활동만 하겠다는 언약을 받고 그들의 이주를 허가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의 투르크 세력의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100년 후 그 땅을 버리고 다시 몽골로 돌아온다. 그렇다고 전부 이동한 것은 아니고 일부는 그곳 남아 원주민과 혼합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들의 대이동은 유목민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한 예이기도 하지만 호모사피엔스가 그랬던 것처럼 인류의 이동의 원형을 보여주는 한 편의 드라마이기도 했다.
당시 호트고이트 알티 칸의 빈번한 침공에 시달리던 4오이라트는 1629년 울루스 내에서 가장 강했던 호쇼트를 중심으로 연합하여 대항하였다. 호쇼트 노욘 홍코르는 자신의 병력 16,000명을 내놓았고, 준가르의 카라쿨라도 7,000명을 내놓았고 나머지 부족에서도 14,000명을 동원하여 4만 명에 가까운 동맹군을 결성한 오이라트는 알티 칸에 맞선 끝에 승리하였다. 이 전쟁은 오이라트가 힘을 합치면 누구도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 대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시베리아와 카자흐로 피난을 떠났던 오이라트인들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이라트 내에서는 울루스 간의 크고 작은 패권 다툼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강력한 구심점이 없었던 오이라트는 2세 타이지들이 등장하면서 세력 확장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준가르 카라쿨라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바투르가 타이지에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야망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지도력과 카리스마를 겸비한 그는 호쇼트의 구시 칸의 딸 아민 다라과 결혼을 하고, 자신의 딸 푼촉 돌마를 구시 칸의 배다른 조카 오치르투에게 시집을 보내면서 호쇼트가와 혈맹을 맺었다. 그리고 바투르는 그들과 함께 1634년 카자흐 칸국으로 원정을 가서 그들을 서쪽으로 밀어냈고, 1636년과 1637년에도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라싸와 코코노르로 원정을 떠나 자신의 힘을 과시하였다. 특히 라싸 원정은 바투르의 성장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동몽골 칸에 대한 호칭 문제를 두고 달라이 라마에게 불만을 표출했던 차하르의 릭단 칸과 할하의 촉투 타이지가 쿠쿠노르를 침공하고, 티베트의 권력을 양분하고 있던 문제의 촉발자 겔록파(홍모파)를 섬멸하기 위해 라싸를 공격하기 시작하자, 겔록파들이 오이라트에게 구원 협조를 요청하였으며 이에 준가르의 바투르와 호쇼트의 구시 칸이 연합하여 촉투 타이지를 공격하여 섬멸하였다. 이로 인해 오이라트는 티베트와 보다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여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고, 자신들의 아들을 티베트로 유학을 보내는 전통을 낳게 했다. 그리고 바투르는 알타이 산맥에서 발원한 이르티시 강 상류 야미시호 부근 쿠바크 자르라는 지역에 석조 요새와 사원을 건축하고 중국에서 구입한 대포 4문도 설치하였다. 그런 건축물을 세운 것은 정주를 위한 의도였다. 투르키스탄에서 농부를 수입하여 오아시스에 밭을 경작하기 시작했는데 그런 일련의 정책들은 유목민의 정체성을 완화시키고 세력을 증강시키기 위한 방편이었다. 또한 바투르는 잠시 뜸했던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기록에 의하면 모스크바에 43차례 사절단을 보냈고 시베리아 지방정부에도 19차례의 사절단을 보냈다고 한다. 이런 적극적인 노력으로 토볼스크, 타라, 튜멘, 톰스크 등에서 면세 교역 허가를 받아 거래를 확대하였다. 거래 물품은 변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예전과 달리 투르키스탄 상인들도 중개인으로 참여하여 시장의 규모도 커졌고 러시아도 적극적이었다. 이런 경제적 호혜관계를 유지하던 때에 바투르는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러시아에게 화약무기를 적극적으로 요구하였으나 러시아는 끝내 거절하였고, 이에 무기 제조 기술자라도 보내달라고 했지만 그것도 들어주지 않았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후환이 두려웠던 것이다. 무기를 밀매했다가 적발되면 당사지의 목숨은 장담할 수 없었다. 무기 매매는 예민한 문제였다. 하지만 작은 규모의 무기 밀매는 암암리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소금 호수인 야미시호의 주도권을 놓고 서로 대립하기도 했지만 무력을 사용하지는 않고 해결하기도 했다.
이렇게 서몽골에서 오이라트의 맹주로 떠오른 준가르의 바루트는 칸이 되지 못했다. 칸의 지위를 받으려면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로부터 승인을 받아야 하지만 그는 칭기즈칸의 피를 이어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마지막까지 칸이 되지 못하고 콩타이지에 머물렀다. 타이지는 부족장 정도 되는 지위이고, 콩타이지는 그보다 높은 레벨의 작위였다. 가령 호쇼트의 수장 구시는 칸의 작위를 받았지만 바투르는 그보다 세력이 큼에도 불구하고 콩타이지에 머물렀던 것이다.
2. 청의 등장과 준가르의 성장
당시 동쪽에서는 누루하치의 아들 홍타이지가 여러 여진족 분파들을 통합하여 만주족이라 칭하고 명나라를 위협할 정도로 세력을 확장하였고, 그의 아들 풀린이 후금의 왕위를 이어받아 내부의 권력 질서를 정리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여 힘을 한 군데로 결집시키고 있었다. 이에 영향을 받은 바투르는 흩어진 몽골세력을 통합하기 위해 1640년 쿠릴타이를 구성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 콘퍼런스는 몽골 부족의 통합 회의체의 일종으로 목표는 몽골 대동맹이었다. 테무진이 그랬던 것처럼 몽골 부족이 뭉치면 천하무적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바투르는 할하 몽골, 코코노르, 불가 칼무크, 타르바가타이 같은 대다수의 울루스들과 그리고 영적인 울루스인 티베트까지 끌어들여 내부 분쟁을 억제하고, 외부 세력이 침입할 시에는 동맹을 결성하여 함께 대항을 하고, 울루스 간 서로 싸우면 벌금을 부과하고, 그리고 티베트의 불교를 국교로 삼는다는 등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 쿠릴라이를 성사시킨 인물은 바투르와 호쇼트의 오치투르, 할하 몽골의 자삭투 칸이었다. 그리고 실무적으로 주도한 인물은 자야 판디타였다. 호쇼트의 바이바가스의 양자인 그는 어렸을 때 티베트로 유학을 가서 불경과 역사철학을 공부하고 1639년 귀향한 후 4오이라트 타이지들을 만나면서 통합을 주장하였다. 오이라트와 할하 몽골의 분쟁을 막기 위해 중재자 역할을 자임하면서도 불교 사원을 세우고, 일생동안 불경을 번역하는데 전념하여 불교를 몽골의 지배적인 위치에 올려놓았고, 수많은 설교와 의례를 집전하였고, 자신의 수행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달라이 라마처럼 오이라트의 어른 같은 존재였고 영적인 지도자였다고 한다. 그는 오이라트 타이지들에게 칸의 환생이라고 칭하며 그들의 권위를 확보해 주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칸의 권위는 타이지들에겐 중요한 칭호였다.
하지만 바투르와 자야 판디타의 대통합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몽골 왕조를 형성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자치권을 유지하는 것에 만족해야만 했던 것이다. 사실 그것만 해도 놀라운 성과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명나라보다 인구수가 동등했던 동쪽의 만주족이 내몽골의 울루스와 동맹을 맺고, 조선을 복속시키는 등 세력을 보다 확장하고 있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그러니까 홍타이지가 살아 있을 때까지만 해도 그들이 명나라를 지배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몽골의 입장에서는 위협의 강도가 크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누루하치나 홍타이지도 명나라까지 접수할 의지는 없었고 단지 혼란한 내부의 권력 다툼을 정리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조의 창건은 하늘의 뜻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다. 당시 명나라는 자체적으로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환관정치의 폐해로 인해 왕실은 회생할 수 없을 만큼 권위를 상실하고 있었고, 수많은 반란군이 지방 권력을 무력화시키고 있었다. 그중에 가장 강력한 반군이었던 이자성이 결국 베이징을 점령하여 자칭 순왕조를 세우는 상황까지 직면하였다. 이자성의 반군은 농민군에 불과함에도 명군은 제대로 힘 한번 쓰지 못하고 무너졌다. 이에 1644년 6월 홍타이지의 아들 풀린은 명의 마지막 생명줄을 끊기 위해 팔기군과 내몽골 동맹군을 앞세워 이자성이 점거하고 있던 산해관으로 진격하여 격렬한 전투 끝에 승리하였고, 그에 힘입어 베이징에 거의 무혈입성하기에 이르렀다. 이자성이 아니었다면 중원의 상황은 어떻게 변했을지 아무도 모른다.
만주족이 중국을 지배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열린 권력이었다. 고집불통이었던 여진 파벌들을 통합시키기 위해 권력자가 먼저 포용해야만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포용은 몽골로부터 문자를 전수받을 수 있게 했고, 전투 능력도 배울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유연함에서 진정함 권위와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그들의 통치 철학은 누루하치 이후 후대까지 이어져 내부적으론 명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고 밖으로는 발전된 서양 문물을 수용할 수 있게 했고 그리고 서역으로의 팽창을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중앙집권적 권력을 추구함으로써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던 권력을 집중한 결과 놀라운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많은 원인이 있지만 칭기즈칸의 후예인 몽골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몽골의 세계 정복은 그들의 표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무튼 1646년 오이라트의 권력을 재편한 준가르의 바투르 콩타이지는 현재 중국의 가장 서쪽 끝 신장의 이리 지역으로 본영을 옮겼다. 당초 이르티시 강 상류에 성을 지어 수도로 삼아 거주하였지만 보다 넓고 정주할 수 있는 이리로 수도를 이전하였던 것이다. 그 결단은 현명한 처사였다. 그곳은 서쪽으로 확장하기에도 최적의 지리적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3면이 높지 않은 구릉으로 감싸져 있고, 강이 흐르고, 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고, 농경이 가능하여 부근의 오아시스 농민을 강제 이주시켜 농업을 장려할 수도 있었다. 과거 차카타이 칸들이 이 지역을 거점으로 국가를 경영한 역사도 가지고 있는 정통성 있는 지역이었다. 하지만 준가르 부국강병의 기반을 다진 바투르는 더 많은 영화를 보지 못하고 1653년 병으로 사망한다.
바투르가 일구어 놓은 준가르 울루스는 그의 유언에 따라 자식들에게 배분되었다. 제후를 승계한 셍게에게는 울루스의 50%, 나머지 울루스는 다른 8명의 자식들에게 분배되었는데, 이런 특이한 유산 상속은 유목 사회에서는 보편적으로 행해지던 방식이었다. 이런 상속 문화로 인해 몽골에서 분열과 다툼이 끊이지 않은 원인이 되기도 했다. 유럽의 봉건제도와 유사하기도 하지만 분열의 양태는 혈통을 중요시하는 유목민의 특성상 몽골이 훨씬 심했다. 이런 분열을 잘 다스리는 자만이 칸이 될 수 있었다. 이렇게 많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바투르의 장례식은 자야 판디타에 의해 진행되었고 곧바로 셍게에게 전례에 따라 권력의 계승을 승인하는 의례가 집전되었다. 당시 셍게의 나이는 15살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용맹과 지략을 갖춘 유능한 콩타이지였다.
이렇게 콩타이지를 이어받은 셍게가 처음 한 일은 형제들 간의 필연적인 권력 투쟁이었다. 절대 권력자가 살아생전에 제아무리 뒤탈 없이 권력을 승계했더라도 막상 그 권력이 사라지면 살아남은 권력들이 충돌하기 마련이었다. 더구나 정당성이 애매모호할 경우에는 그 다툼의 양상은 심각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천하의 칭기즈칸도 이를 염려하여 많은 장치를 하였지만 그의 자식들은 위험천만한 상황을 극적으로 모면하고 결국 툴루이가 양보한 끝에 생각지도 않은 오고타이가 대칸에 즉위하였고, 그럼에도 툴루이의 2세들은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을 연출하지 않았던가. 아무튼 셍게는 호쇼트의 배다른 매형인 오치르트의 도움으로 8인의 형제들과 치열한 내전을 겪은 끝에 겨우 콩타이지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목숨만 부지하고 살아남은 이복형제 체첸 타이지와 초드바 바투르는 자신의 영지에 거의 유폐되어 있다시피 하며 중앙으로 얼굴을 내밀지 못했다. 그들은 17년 후 결국에는 셍게를 암살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호쇼트 울루스에서도 오치르투와 이복형제들 간에 내전이 일어났는데 준가르 내에서도 두 패로 나뉘어 서로 참전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결국 오치르투, 셍게 조가 승리하였다.
콩타이지 승계 절차를 무사히 마친 셍게는 과거 아버지가 개척해 놓았던 러시아 무역로를 다시 찾기 위해 러시아 접경 지역에 있는 텔레우드의 귀속 문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였다. 텔레우드는 바투르 시절 러시아와 영토 관할 문제로 대립하고 있었는데, 바투르 사후 준가르의 어수선한 정세를 틈 타 러시아가 복속시켜 놓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셍게의 문제 제기에 불응하였고 이에 셍게는 전쟁을 불사하겠다며 국경에 군대를 동원하였다. 이런 강경한 입장의 준가르를 상대로 무력 충돌을 원하지 않았던 러시아는 타협안을 내놓으며 협상을 시도하였다. 러시아의 외교의 특징은 자신들이 불리할 때는 항상 애매모함 스탠스를 취하는 것이었는데, 텔레우드 문제에서도 확실하지 않은 모호함을 견지하는 태도를 취했다.
사실 생게의 관심사는 러시아가 아니라 할하 몽골이었다. 1662년 경 할하 몽골 서북쪽에서 내분이 일어났는데, 자삭투 칸국이 호트고이트를 복속시키기 위해 침략하자 호트고이트는 준가르 접경지역으로 남하하기에 이르렀고, 이런 상황에서 호트고이트부 타이지 롭상 에린친이 열세 국면을 벗어나고자 자삭투의 칸을 암살하는 사건을 저질렀다. 이에 작차군 도르지가 그를 죽이기 위해 추적하자 그는 러시아 접경지인 투바로 피신하였다. 호트고이트는 알타 칸 시절 오이라트를 침략한 역사를 가지고 있어서, 오이라트의 맹주인 준가르에겐 항상 적국으로 인식되고 있었는데 이제는 울루스의 존패 위기에 직면할 정도로 세력이 약화되어 있었다. 그렇게 호트고이트가 자신의 땅을 넘으려고 하는 시점에서 셍게는 그들의 공격하여 격퇴하였고 투바까지 원정하여 롭상 에린친을 포로로 잡아 자삭투에 인계하였다. 그리고 호트고이트를 자신의 영역으로 복속시키고 예르세니강 상류지역도 병합하여 그곳에 병력을 주둔시켰다. 그렇게 알타이 산맥의 지배권을 놓고 러시아와 호트고이트와 준가르가 3파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이제는 세력을 키운 준가르가 러시아를 북쪽으로 내몰기 위해 압력을 넣는 등 그 지역의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이르렀다.
이 전쟁은 할하와의 힘의 균형추를 준가르 쪽으로 기울게 만들었다. 이는 준가르가 할하의 자삭투 울루스 내정에 간섭할 정도로 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롭상 에린친에게 죽임을 당한 작삭투 칸의 후임을 놓고 메르겐과 쳉군이 경합을 벌이고 있었는데, 셍게가 추천한 쳉군이 칸에 등극한 것이다. 이에 대한 역사적 기록의 차이는 있지만 셍게의 정치적 영향력이 할하 내부에 강력하게 작동되고 있었던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자삭투의 오랜 적색국이었던 호트고이트를 아예 멸망시키고 롭상 에린친을 제거해 주었기 때문에 내정 간섭의 명분은 충분했던 것이다.
이후 셍게는 시선을 모굴칸국으로 돌렸다. 모굴리스탄이라도 불리는 그들은 칭기즈칸의 둘째 아들 차카타이가 중앙아시아를 원정하여 세운 차카타이 칸국의 후예로서 투르크 무슬림과 혼종 되어 티무르 같은 대제국을 형성하기도 하는 등 흥망성쇠와 그리고 빠른 분열을 겪은 끝에 마지막 남은 잔존 세력이었다. 중국에서는 이들을 동차카타이라고 부른다. 이들도 이미 몽골계와 투르크계가 혼종 되고 이슬람화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수백 년이 흐른 당시에는 몽골계 투르크인으로 분류되고 있었다. 이제 힘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모굴은 칸국이라는 명예만 가진 채 당시엔 톈산산맥 북쪽 초원지대에 정주하다가 카자흐와 오이라트의 등쌀에 못 이겨 산맥 남쪽 타림분지 오아시스에 도시를 형성하고 있었다. 망해가는 왕국이 항상 그렇듯 모굴칸국 내부에서도 권력 투쟁이 심각할 정도로 벌어지고 있었다. 압둘 라티프 칸이 사망하자 혼란한 정세를 이용해 압둘라 칸이 쿠데타를 일으켜 많은 정적을 제거하였고 이에 저항하는 세력이 오이라트 울루스로 망명을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모굴의 혼란한 정치 상황은 오이라트에게도 전파되어 세력이 양분되는 양상을 보였다. 특히 오치르투의 아들 갈담바가 이 분쟁에 뛰어들면서 그동안 끈끈한 동맹을 맺어왔던 준가르와 등을 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 압둘라 칸이 자신의 아들 욜바르스와 부자간의 권력 투쟁을 하는 혼탁한 상황이 이르자, 욜바르스가 준가르로 망명하고 이에 셍게는 적극적으로 모굴의 내전에 뛰어들었고, 갈담바도 반대파 쪽을 지원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셍게는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영향력만 남겨둔 채 수렁과 같았던 모굴에서 철수를 하였다. 그리고 내부 분쟁을 해결하지 못한 압둘라 칸은 같은 티무르 왕족의 후예인 아우랑제부가 황제로 있던 무굴제국으로 망명을 하였다. 당시 무굴제국은 인도를 지배하면서 영국과도 대등한 외교 무역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렇게 모굴리스탄 내정에 간섭했다가 실패를 맛본 준가르 세력은 급격하게 약화되기 시작했다. 쿠릴타이를 주도하여 몽골에 평화를 유도하고 이후 호트고이트를 섬멸하는 등 서몽골에서 맹주를 자처하던 준가르의 세력은 이제 4오이라트의 다른 울루스로부터 견제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와 더불어 절친이었던 반가 반디와 세금 문제로 갈등을 초래하여 내분을 겪고 있었다. 더구나 호쇼트의 오치르투 또한 형제들과 내분 중이어서 셍게의 주변은 어수선했다. 1670년, 이렇게 실의에 빠져 있던 셍게는 그의 이복형제인 초드바 바투르에게 암살을 당한다. 셍게의 약점을 발견한 초드바 바투르와 체첸이 결국 형제의 난을 일으킨 것이다. 더구나 셍게의 자식들이 아직 어렸기 때문에 쿠데타를 하기에 후안도 없는 아주 좋은 적기였다. 그의 죽음은 바투르 사후 형제들과의 내전에서 승리한 셍게가 그들을 살려둔 것이 결국엔 쿠데타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반란자들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바로 셍게의 동생 갈단의 등장이었다. 그는 7살 때 고승 앤사 후톡트의 전생으로 인정을 받아 티베트로 가서 출가를 하여 승려 생활을 하다가 1666년 준가르로 귀향한 후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종교 활동을 하고 있었다. 티베트는 종교와 문화를 겸비한 울루스로서 몽골 칸국들에게 있어서는 영적인 고향이나 다름없었다. 티베트 유학파인 갈단 또한 오이라트에서는 보기 드문 지식인이며 종교인이었다. 이렇게 금의환향한 그는 자야 판디타처럼 종교와 권력의 합치를 위해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영향력을 넓혔고 그것은 준가르 콩타이지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강력한 밑거름이기도 했다. 이런 활동으로 인해 그는 셍게의 죽음 이후 사건의 수습과 자신의 세력을 빠르게 규합할 수 있었다.
갈단의 등장을 예상하지 못했던 반역 세력은 암살이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급격하게 무너졌다. 준가르의 후계자로서 정당성을 확보한 갈단은 그들을 공격하여 체첸을 처단하였고, 주범인 초드바 바투르는 코코노르로 도주하였다. 그리고 셍게에게 반기를 들었던 반가 반디를 제거하고, 오이라트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라던 그의 아버지 추쿠르 우바시는 티베트 순례길에 이 소식을 접하고 준가르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렇게 내부의 적들을 정리한 갈단은 1675년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주변 울루스들을 병탄 하기 시작했다. 먼저 반란을 일으킨 이복형제들을 보호하고 있던 호쇼트의 오치르투와 갈등을 빚다가 결국 무력 충돌을 일으켰다. 오치르투는 선대 때부터 피를 나누는 형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아들 때에는 결국 균열이 생겨 전쟁까지 일으키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그런 배신과 분열은 유목민 사회에서 비일비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쇼트와의 전쟁은 사막의 비정한 약육강식의 현장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고 보면 죽고 죽이는 그들은 모두 같은 피가 흐르는 형제이자 가까운 가족이었다. 아무튼 오치르투는 갈단과의 전투에서 대패를 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다. 이후 갈단은 오이라트의 다른 울루스들을 장악하고 새로운 정치질서를 재편했다. 또한 그는 셍게가 씨를 뿌려놓았던 타림분지의 모굴의 야르켄트 칸을 합병하고, 동쪽으로는 하미와 투르판 등을 준가르에 복속시키고, 서쪽으로는 카자흐를 공격하여 일정한 부분의 영토를 확보하여 한층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에 달라이 라마는 라마 출신인 그에게 신성한 칸이란 뜻의 보슈그트칸이라는 최고 호칭을 수여하여 그의 패권 장악을 정식으로 인정해 주었다. 사실 칸이라는 호칭은 혈통 문제로 인해 받을 자격은 없었지만 준가르를 제국화시킨 의미에서 특별한 케이스로 수여한 것이다. 당시 영토 확장과 세력으로 볼 때 준가르 제국이라고 불러도 전혀 민망하지 않은 규모였다.
그렇게 준가르를 서몽골의 절대 강자로 부상시킨 갈단은 동몽골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자신의 조카들과 내분을 겪고 있었다. 바로 셍게의 정실 자식들이었다. 셍게의 장남인 체왕 랍단이 성인이 된 후 카자흐 사이람으로 출병하여 승승장구하자 이에 갈단은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를 보다 못한 그는 체왕 랍단의 세력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오치르투의 혈육이었던 조카의 약혼녀 아하이를 강제로 탈취하자 그들 간의 갈등이 고조되었다. 오치르투는 콩타이지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던 체왕 랍단 편에 서있었던 것이다. 객관적으로 볼 때 갈단은 체왕 랍단의 섭정자로서 머물러야 했지만 갈단은 승려의 초심을 어기고 세속 권력의 수렁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튼 급기야 권력의 화신이 된 갈단은 체왕 랍단의 동생 소놈 랍단을 반역으로 몰아 처형함으로써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 또한 다른 조카들도 정적으로 삼아 제거하려고 하자 체왕 랍단은 선친의 가신 출신인 소수의 인원과 함께 에렌하비르가로 망명을 하였다. 이런 숙질간의 권력 다툼은 갈단의 최후를 앞당기는 원인이 된다. 사실 라마 출신인 갈단의 이런 무자비한 행태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행보였다.
그렇게 친정 체제로 구축한 갈단은 동몽골의 정치상황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17세기 중후반의 동몽골은 크게 두 개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서쪽의 자삭투와 알틴을 우익이라 불렀고, 동쪽의 투시예투와 체첸을 좌익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좌우익의 대립은 1662년 알틴 칸국의 칸인 롭장 칸이 자삭투 칸국을 공격하여 완슈케 칸을 죽임으로써 힘의 균형이 깨지고 갈등이 촉발되었다. 그리고 좌군의 투시예투가 우군의 자삭투를 지원하는 기묘한 상황이 벌어지면서 분쟁의 양상으로 치달았다. 이에 달라이 라마와 청의 강희재가 중재를 하고 나섰지만 내분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몽골은 중국을 평정한 청과 조공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입장에서는 몽골 내전은 자신들에게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을 때 내전을 막고자 하는 중재안들이 주변국들에게서 나왔다. 1686년 10월, 몽골에서 달라이 라마급의 승려인 젭종단마 쿠톡투가 주동이 되어 쿨렝 바르치르에서 회합을 열었다. 이 회합에는 분쟁의 당사자들과 달라이 라마가 보낸 사절단과 그리고 동몽골에 상주하던 청의 관료 수십 명이 참석하여 회의를 진행한 결과 다행히 영원한 평화를 맹세한다는 서약을 하고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갈단은 이 회합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젭종단마 쿠툭투가 달라이 라마보다 급이 낮은 데도 그와 동등한 위치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것인데, 이는 몽골의 정통적인 위계질서를 어기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더구나 그는 투시예투 칸의 동생이었다. 달라이 라마에게 직접 수업을 받은 승려 출신인 갈단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없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침공의 명분이 될 수는 없었다. 이런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청에서도 갈단에게 사람을 보내 회유하였다. 그러던 차에 1년 후 투시예투의 차툰도르지 칸이 자삭투를 공격하여 쉬라 칸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쿨렝 바르치르 회합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좌우익은 다시 내전으로 치달은 것이다. 그런데 사건을 더 키운 것은 갈단의 동생 도르지자부가 자삭투 편으로 참전하였는데 투시예투와의 전투에서 전사를 한 것이었다. 이 죽음은 갈단에게 있어 결단을 하게 하는 결정적인 촉발제가 되었다. 1640년에 체결한 오이라트와 할하 몽골의 평화협정은 이렇게 파탄을 맞고 말았다.
외견상 복수의 칼을 빼 든 갈단은 직접 동몽골로 진격하여 투시예투 군을 격파하고 오이라트 역사상 처음으로 동쪽에 위치한 에르데니 지역으로 진출하여 여러 도시를 약탈하고, 젭종단마 쿠툭투가 만든 불교 경전을 파괴하기에 이르렀다. 달라이 라마에 대한 무례한 행위를 응징한 것이다. 이런 갈단의 침략 행위에 동몽골은 연합하여 대응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혼돈의 도가니에 빠졌다. 이에 좌익 몽골의 난민들이 러시아와 청의 국경으로 몰려들었다. 청의 입장에서는 조공국의 백성인 그들을 받아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수만도 2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시간이 갈수록 난민의 수는 증가하였는데 청에서 그들을 전부 받아주면 당장 먹여 살릴 곡식도 해결하지 못할 형편이었고 그렇게 된다면 자국 내에서 큰 사회적인 문제로 부각될 게 뻔했다. 정말 골치 아픈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 내전에 자신이 참전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관용적 자세로 방관만 하기에도 황제국의 체면이 말도 되지 않았다. 지금은 청의 창업을 벗어나 수성하는데 진력을 해야 하는 판국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골 내전은 강희재의 마음을 흔들어 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한껏 기세가 오른 갈단은 청의 국경선까지 남하하여 청에게 사신을 보내 달라이 라마를 모독한 젭종단마 쿠툭트를 송환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청은 당연히 그 요청을 들어줄 수 없었다. 이에 청은 1만여 명의 병력을 군경선에 배치하여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였다. 갈단이 국경선을 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리 없었지만 그럼에도 국경을 비워둘 수는 없었다. 갈단은 이미 청에게 위험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도피 중이던 투시예투 칸이 청에게 자신들을 도와줄 것을 필사적으로 요청하였지만 그래도 청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렇게 청이 개입하지 않는 가운데 갈단 군은 1688년 8월 투치예프군과 대회전을 벌여 승리를 하면서 동몽골 점령을 공고화하였다. 백척간두에 놓인 동몽골 울루스 연합체는 전쟁의 원인을 두고 논쟁만을 일삼았을 뿐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문제를 해결할 사람은 사실 청의 황제 강희제 밖에 없었다. 이에 황제는 달라이 라마에게 이 문제를 풀어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수호와 사제(Yon-mchod)관계인 티베트에게는 중재의 의무를 배제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이를 활용하여 황제는 자신은 몽골의 평화를 원한다는 것을 거듭 밝히며, 갈단의 복수의 행진을 저지시키지 않는다면 티베트와의 모든 교역을 중단시키겠다고 엄포를 주기도 했다. 이에 티베트의 권력자 테파는 투시예프 칸과 그의 동생 젭종단마 쿠툭투를 우선 갈단에게 넘겨야 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노라고 해결책을 제안했지만 이 조건만은 황제는 받아주지 않았다. 지금까지 경험한 몽골의 칸국들의 행태를 볼 때 그런 조건은 신뢰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실 테파는 갈단의 용단을 지지하고 있는 입장이었는데 황제는 이런 내막까지는 파악하고 있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갈단은 달라이 라마에게 수학한 승려 출신이었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티베트의 중재는 요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동몽골의 잔존 세력과 명나라를 멸한 막강한 청과 대치하고 있을 때 준가르 본영에서 그동안 세력을 규합한 체왕 랍단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소식을 접한 갈단은 우선 자신의 본거지를 지키기 위해 전력의 50% 정도를 준가르로 이동시켰다. 이로 인해 잠시 동몽골의 긴장감이 완화되었고 그들과 대치하던 청군도 일부 철수하였다. 그렇게 갈단이 준가르로 가서 체왕 랍단과 내전을 벌이고 있을 때 청은 국경지역에 있던 동몽골의 병력 체계를 개편하였다. 패잔 몽골군을 모아서 이들을 팔기군 체계에 편입을 시켰고, 이들에게 초원가 있는 정착지를 할당하여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 주었고, 이 전쟁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왕 랍단 반란군을 척박한 호드브로 몰아내고 어느 정도 내정을 정리한 갈단은 다시 동몽골로 돌아와서 3만 명의 기병을 이끌고 가장 동쪽에 위치한 체첸을 공격하였다. 1690년 6월이었다. 이에 청은 다시 국경선으로 병력을 증파하였다. 이런 망나니 같은 갈단의 침공에 더 이상 참지 못한 강희제는 드디어 관용을 해제하고 갈단을 처단하기 위해 장검을 빼들었다. 그렇게 해선 청과 준가르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해 9월 청군은 먼저 갈단에게 직접 만나서 협상을 하자는 유인술을 써서 현재의 내몽골에 위치한 울랑부퉁으로 갈단 군을 꾀어낸 후 그들을 공격하였고, 이에 급습을 당한 갈단은 겨우 목숨만을 건지고 할하로 황급히 도피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전쟁은 강희제가 직접 참전하여 지휘하였다. 이 모든 사태에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던 강희제는 자신의 이런 덕치에 손상을 입었다고 생각하였고, 그것은 황제의 마지막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는 매우 불손한 짓이었던 것이다. 황제의 모욕감은 결국 사태를 확대시켰다. 황제의 자본심과 분노가 엮인 전쟁이었기 때문에 무리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원정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척박한 머나먼 서역으로의 원정은 청에서도 처음이었다. 이로 인해 엄청난 국고 손실이 발생한 것은 물론이고 인력 손실 또한 상상을 초월하여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지옥 같은 상황을 연출하였던 것이다. 수성에 힘써야 할 마당에 이렇게 국고를 낭비하는 것은 자국 내에 또 다른 저항 세력을 낳게 하는 빌미를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신들은 철군할 것을 간청했지만 황제의 결연한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아무튼 여기서 그에 대한 얘기를 다할 수 없고, 1696년까지 이어진 기나긴 전쟁 끝에 갈단은 울란바토르 동쪽 텔레지 준모르 전투에서 대패를 하고, 전쟁 과정에서 누구보다 자신을 도와주었던 왕후 아누도 잃은 채 수십 명의 병력만을 데리고 서쪽으로 후퇴를 하였다. 하지만 갈단은 돌아갈 곳이 없었다. 이미 준가르의 수도는 체왕 랍단이 접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그는 알타이 산맥으로 잠입하여 재기를 노렸지만 결국 실패하고 1697년 4월 수하들과 함께 음독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죽음에 대해 음독자살이냐 음독 암살이냐를 두고 설이 많은 데, 당시 그가 처한 정황상 그의 심복인 단지라에게 독살되었을 가능성이 많지만, 청의 기록에는 황제의 예견을 받들어 자살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황제의 권위를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갈단은 자결할 것이라고 황제 자신이 대신들에게 자신 있게 예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후 일화를 보면 갈단은 죽어서도 파란만장한 사건을 겪었다. 독살했다고 의심되는 단지라는 갈단의 유해를 티베트로 가지고 가서 불교 예식에 따라 봉안하려고 했는데 마침 티베트에 와 있던 체왕 랍단에게 체포되어 유해를 빼앗겼다고 한다. 그리고 그 유해를 가지고 준가르로 온 체왕 랍단은 자신들의 정통적인 장례의식에 따라 마지막 예를 갖추려고 했으나 이를 간파한 강희제가 청에게 보낼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그와 더불어 갈단의 자식들과 참모들도 모두 보내라고 덧붙였다. 이에 체왕 랍단은 처음엔 자신들의 예에 따라 처리하겠노라고 하며 거부하였으나, 황제의 압력이 워낙 강권했던 관계로 유해를 보내는 대신 갈단의 부하들은 자신의 군에 편입시켜 카자흐 정벌에 사용하겠노라고 조건을 제시하였다. 이에 다소 화가 누그러진 황제는 그럼 갈단의 유해와 가족만은 보내야 한다고 절충안을 제시하여 체왕 랍단의 승낙을 받아냈다. 그렇게 해서 갈단은 죽어서 청의 중심 베이징에 도착했다. 그리고 갈단의 유해는 가루가 되어 황제의 한이라도 풀듯이 베이징 광장에 뿌려졌고, 그이 가족들은 죽이지 않고 청의 왕실에서 직접 관리를 하였다. 또한 갈단을 지원했던 티베트의 지룽 쿠툭투 역시 사면해 주어 황제의 관대함을 만천하에 알렸다.
3. 준가르의 평화
사실 셍게의 적통자는 정통성을 따졌을 때 체왕 랍단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비록 나이가 어렸더라도 그가 제후에 오르고 갈단이 섭정을 하는 게 순리적인 절차였다. 하지만 셍게가 갑자기 암살을 당하는 바람에 후계자를 선정하지 못했고, 이런 혼란한 틈을 타 갈단이 야망을 표출하며 체왕 랍단을 밀어내고 자신이 콩타이지 자리에 오른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모후 아민 다라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였다. 그렇게 정통성을 확보하지 못한 갈단은 조카들과 권력 투쟁의 원인을 자초하였고 결국 체왕 랍단의 반란에 시달리다가 자체 세력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아무도 없는 알타이 산속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권력욕은 유목사회에서 자연스러운 것이기에 그에게 어떤 윤리적인 잣대를 들이대지는 않는다. 아무튼 그는 대제국 청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것은 사실이었다.
준가르의 콩타이지에 오른 체왕 랍단은 이미 갈단이 청과 전쟁을 할 때 준가르를 양분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후에 오르는데 별다른 저항은 없었다. 그리고 당시 그 전쟁에 개입하지 않으므로 해서 청과의 관계도 원만하였다. 그렇게 순조롭게 콩타이지에 오른 체왕 랍단은 잠시 관심을 서쪽으로 옮겼다. 그의 전략은 옳았다. 전쟁으로 산산이 부서진 준가르를 재정립하기 위해서는 청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는 게 우선이었다. 그렇게 그는 청이 차지한 준가르 동쪽 하미와 바르콜 초원을 그대로 둔 채 카자흐를 공격하여 옛 영토를 확보하였고, 유목민 정복자의 정체성을 꺾고 정주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마치 영지의 제후처럼 행동하였던 것이다. 청과 합의한 국경선을 넘보지 않고 농업과 수공업 생산에 주력하여 러시아와 투르키스탄의 전쟁 포로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그들 중에는 러시아를 거쳐 몽골에 온 스웨덴인도 있었다고 한다. 특히 볼보강 근처로 이주하였던 토구트 타이지와 긴밀하게 접촉하여 손실된 인력을 보충하기 위해 그들의 재이주를 협의한 결과 아유키 타이지의 아들 산지브를 필두로 1만여 명의 양민과 상당한 량의 가축을 수혈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산지브가 아버지의 명을 어기고 할하 몽골로 너머 가려고 시도를 하자 체왕 랍단은 그를 체포하여 아버지에게 보내고 대신 이주민은 보내지 않고 남도록 했다고 한다.
이렇게 내치에 치중하고 있을 때 러시아 접경지역에서 계속 충돌이 발생했다. 준가르 세력이 약화된 것을 감지한 시베리아 정부는 계속 남하를 시도하면서 영토권 분쟁을 유도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항상 그렇듯 자신들에게 복속하여 조공을 바치면 청으로부터 보호를 해주겠다고 강권했다. 시베리아는 자신들이 부족한 목축업 부분을 준가르로부터 조공 형식으로 보충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즈음에 준가르 영역에 위치한 야르칸드 강 유역 이스켈 지역에서 금광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시베리아에 퍼지자 그들이 그곳에 금광 정착지를 구축하겠노라고 하면서 강제로 밀고 들어왔다. 이에 체왕 랍단은 1716년 침임자를 공격하여 정착지를 파괴하고 시베리아인들을 러시아로 몰아냈다. 하지만 그런 충돌만으로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체왕 랍단은 깨달았다. 보다 유연한 태도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청을 견제하는 차원에서 금이라면 환장을 하는 러시아에게 카자흐 국경지역에 금광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곳에 시베리아인을 정착하도록 허락을 해주었다.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체왕 랍단은 청의 황제에게 건강을 걱정하는 대규모 사절단을 매년 보내 선린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사실 당시엔 청이 준가르를 공격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 강희제는 갈단과 싸우느라 심신이 지쳐 있었고 이제 나이도 들어 어려운 일을 원하지 않았다. 그렇게 평화의 시대는 유지되었다.
하지만 강희제의 말년에 티베트에서 사달이 나고 말았다. 여생을 편하게 보내고 싶었던 강희제는 다시 한번 노익장을 발휘해야만 했다. 티베트의 정치 상황은 매우 복잡하게 흐르고 있었다. 당시 티베트에는 호쇼트의 제후였던 구시 칸의 손자 라짱이 자신의 형을 죽이고 권력투쟁 끝에 칸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티베트를 혼란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티베트인이 아닌 자가 칸이 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던 경우여서 정통성을 두고 혼란이 가중되었다. 그는 정권을 잡자 선조 때부터 혼인 정치로 혈맹을 유지해 오던 준가르의 체왕 랍단의 딸과 자신의 아들을 결혼시키며 우호적인 관계를 추구하였다. 하지만 이미 청과 동맹관계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라짱은 체왕 랍단의 동맹 관계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다. 아직까지도 청과 준가르의 관계가 개선이 되었다고 하지만 갈단 시절 너무나 많은 손실을 보았기 때문에 20년이 흐른 당시에도 매우 껄끄러운 관계였던 것이다. 청에서도 혹시나 하고 라짱의 행태를 예의 주시하는 입장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달라이 라마 옹립 문제를 두고 티베트 내에서 겔록파(홍모파)와 카르마파(황모파)가 극열하게 대립을 하고 있었다. 겔록파는 라짱과 청의 입장을 대변하는 파벌이고, 카르마파는 반대하는 파벌이었는데, 체왕 랍단은 바로 카르마파의 편을 들어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라짱을 몰아내기 위해 앞장을 섰다. 그렇게 해서 1715년 드디어 준가르군은 호쇼트 출신 라짱과 청의 세력을 티베트에서 내쫓기 위해 그들의 거점이었던 하미를 공격하였다. 이에 청은 동몽골족과 만주족과 한족 병력을 차출하여 전체 10만 대군을 확보하였다.
노구의 황제는 준가르를 처단하기 위한 목적보다도 그들의 준동을 막기 위해 서쪽 요충지에 주둔지를 구축하는 데 주력하였다. 황제에게는 준가르족은 지긋지긋한 존재였다. 우선 하미에서 준가르군을 내쫓고 그 부근 바르콜에 전초기지를 구축한 후 더 서진하여 투르판에 주둔지를 설치하는 것이 첫 번째 과제였다. 투르판에 위치한 가오창과 자오허에는 오래전 한, 당 시절에 건설한 주둔지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거리상으로는 갈단과의 전쟁 때보다 훨씬 더 멀리 원정을 해야 하는 어려운 사업이었다. 그런 관계로 보급 문제가 대두되었다. 장거리 원정은 항상 보급로를 구축하는 게 관건이었고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면 원정은 성공할 수 없었다. 몽골이 유라시아 서쪽 끝으로 확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유목민 특유의 육식 문화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초지만 있다면 식량 보급 문제는 해결할 수 있었고 더 많은 것을 원한다면 정복한 도시에서 약탈을 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청군은 이미 유목 유전자를 상실하여 육식만으로 민생고를 해결할 수 없었고 쌀과 밀 같은 곡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둔전을 할 수 있는 지역에 주둔지를 건설할 수밖에 없었다. 둔전은 기간이 없는 장기간의 주둔이 필요할 경우 현지에서 병사들이 직접 경작을 하면서 민생고를 하는 것을 일컫는다. 그럼에도 이런 장거리 원정과 주둔지를 운영하는 데는 많은 비용과 위험이 뒤따랐다. 기본적으로 1만여 명의 병력과 그에 따른 가족들을 주둔시키기 위해서는 둔전뿐만 아니라 작지 않은 하나의 도시를 운영하는 정도의 비용이 들어가야 하는 큰 사업이었던 것이다. 이에 중앙관료들은 황제의 무리한 원정을 비판했지만, 70살이 가까운 황제는 그들을 오히려 벌하면서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게 청이 서북쪽으로 진출을 꾀하고 있을 때, 체왕 랍단은 라짱에게 계속 자신과의 동맹을 요구하였지만 그는 끝내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이에 체왕 랍단은 체링 돈둡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1만 군사를 라싸로 원정을 보냈다. 준가르에서 라싸로 가는 길은 청에서 가는 루트보다 훨씬 힘든, 세상에서 가장 높은 길을 가야 하는 살인적인 노정이었다. 당시 라싸에 있었던 예수회 선교사 이폴리토 데시데르가 쓴 기록을 보면 보급부대 없이 거대한 설산 3개를 넘어 1년 동안 1만 리를 행군하는 대장정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굳건하게 살아서 라싸에 도착한 체링 돈둡 군은 라짱에게 항복을 받아내고 그를 포찰라궁에 가두었다. 그리고 체롱 돈둡 군은 목숨을 건 원정에 대해 보상이라도 받아야 하겠다는 듯이 라싸를 약탈하고 이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죽였다. 그래도 세렝과 갈단이 다스리던 시절에는 준가르에게 좋았던 라싸의 민심은 한순간 깨지고 말았다. 라짱에 대한 민심도 좋지 않았지만 그들의 약탈과 학살에는 민심이 더욱 사나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라짱은 강희제에게 자신을 도와줄 것을 호소하는 서신을 보내 탄원하였다. 하지만 체렝 돈둡은 그런 라짱을 죽이고 그것도 부족하여 달라이 라마도 체포하는 극단적인 행태를 보이며 마치 포악한 점령군처럼 행동하였다.
이런 일련의 소식이 강희제에게 전해지자 격분한 황제는 티베트로 병력을 급파하였다. 이제 지긋지긋한 준가르를 섬멸시켜야 한다는 당위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렇게 궁극적인 목표를 설정한 황제는 어룬터를 사령관으로 한 대군을 라싸로 파견했지만, 1718년 9월 살윈강 케라우스에서 치열한 교전이 벌어진 끝에 청군은 궤멸 수준의 대패를 당하고 사령관도 전사하는 참사가 일어났다. 이에 황제는 자신의 14번째 아들 윤제를 원정대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동몽골과 한족을 중심으로 30만 명의 병력을 모집하여 시닝에 집결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준가르에 반대하는 세력도 규합하였다. 대신들은 쓰완과 코코노르까지만 경계로 삼고 더 이상의 서진을 하지 말자고 청했으나 항상 그렇듯 황제는 이참에 아예 준가르와 티베트를 동시에 정복하는 것으로 마음을 굳혔다. 이에 청의 연합군은 호쇼트군과 함께 손쉽게 라싸를 점령한 후 달라이 라마를 다시 세우고 티베트를 아예 청의 속국으로 만들었다. 현재 티베트가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원하는 것도 바로 이 사건 때문이다. 청군이 라싸에 무혈입성을 한 원인은, 이미 티베트에서 민심을 잃은 준가르군은 저항군 칸체나스의 게릴라 전술로 인해 상당한 피해를 받고 있었고, 이에 청의 수십만 명의 연합군이 몰려온다는 사실을 접하고 상대할 엄두를 내지 못한 채 퇴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렇세 거의 무혈입성 하다시피 한 청의 연합군을 라싸 시민들은 해방군으로 취급하며 열렬히 환영해 주었다.
이렇게 라싸를 해방시킨 강희제는 준가르의 정복을 보지 못하고 1722년 12월 붕어하였다. 뒤이어 황제에 즉위한 옹정제는 강희제와는 달리 소모적인 정책을 지양하여 서몽골 지역에 주군하고 있던 병력을 축소하였다. 10,000~15,000명이던 병력을 1,500~2,000명으로 대폭 줄이고 티베트에도 소수의 병력만 주둔시켰다. 그리고 철수한 병력은 시닝과 쓰촨 서부에 주둔시켰고, 준가르와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태세전환을 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대국으로서의 관용을 베푸는 것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강희제의 무리한 서몽골 원정으로 국고가 위험 수준에 도달하여 잠시 숨 고르기에 나선 것이었다. 옹정제는 즉위 당시 700만 냥이었던 국고를 8년 만에 3000만 냥으로 증가시켰고 말년인 1735년에는 6000만 냥까지 국고를 채웠다고 한다. 그의 통치론은 내치를 강화하여 부국강병에 힘을 기울이는 것이었다.
한편, 잠시 평화롭던 서몽골은 1727년 다시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국경 문제로 껄끄러운 사이였던 청과 러시아는 카흐타 조약을 맺어 몽골을 중간 완충지를 두고 국경선을 확립시켰다. 이 국경선은 거의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는데 이는 대제국이 서로 국경선을 맞대지 않고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신의 한 수로 작용한다. 이 조약을 맺기 전에 청에서 내세운 조건 중에 하나는 러시아가 준가르를 어떠한 형태로든 지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준가르의 체왕 랍단 콩타이지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갈단 체렝이 새로운 콩타이지가 되었다. 이는 또 다른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코코노르의 타이지인 롭짱 단진이 청에 반란을 꾀하다가 진압을 당한 후 준가르의 수도인 이리로 망명을 하였는데 그것은 나중에 청이 준가르를 침공하는데 명분이 되기도 했다. 또한 준가르는 청의 거듭된 조공무역 제안을 거절했는데, 그 이유는 청이 제시한 국경선 확정에 동의를 하고, 티베트와도 관계를 완전히 단절을 해야 한다는 조건을 덧붙였기 때문이었다. 국경선 문제는 그렇다 하더라도 티베트와의 연결고리만은 끊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황제의 이런 관대한 요구도 무시한 준가르는 한번 혼내주어야 하는 대상으로 감정의 수치를 높이고 있었다. 크고 작은 모든 몽골의 울루스들은 청에게 복속하였지만 유독 준가르만이 경거망동을 하고 있었으니 황제의 심사는 서서히 꼬이기 시작했고 급기야 1729년 평화 정책을 폐기시키고 준가르 원정을 세부적으로 계획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전쟁의 명분은 지극히 주관적이기 마련이다. 옹정제는 준가르를 정복해야 할 명분 쌓기에 열중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서북 귀퉁이의 작은 부족’에 불과한 준가르 울루스를 정복하는데 무슨 명분이 있느냐고 하겠지만 누루하치 때부터 관대한 통치를 지향해 왔기 때문에 그 관대함을 해제시키려면 그만한 명분이 있어야만 했고 그것은 자신의 권위를 지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황제는 정당한 궤멸을 원했다. 굴복하는 자에게는 평화, 저항하는 자에게는 죽음, 이 논리에서 저항을 어떻게 규정하느냐가 문제였다. 청이 제시하는 평화는 보편적인 평화를 강제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그럼에도 이 논리는 당시에는 청 제국을 운영하는 이데올로기와 같이 작동되었다. 관용과 죽음은 항상 동행했던 것이다. 그냥 간단히 말하면 황제의 관대함을 모욕하면 마음대로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내리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옹정제가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롭짱 단진의 송환 거부에 대한 응징과 강희제의 과업을 계승하여 숙원 사업을 완수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명분 논리로 시간을 보내던 옹정제는 여전히 신중했다. 그렇다고 그냥 관망한 것은 아니고 1729년 6월 북로군과 서로군을 창설하여 베이징에서 사열식을 열었다. 북로군은 북쪽 울리아스타이와 호브드를 거쳐 이동하여 준가르에 이르는 부대로서 푸르단이 대장군으로 임명되었고, 서로군은 하미와 투르판 루트로 이동하는 부대로서 악종기가 대장군으로 임명되었다. 매사에 신중했던 옹정제는 서로군에게는 기존의 투르판과 하미의 주둔지에서 방어에 치중하라고 명령했고, 북로군에게는 흡도에 주둔지 요새를 구축하라고 세부적으로 지시를 했다. 강희제는 직접 전쟁터에서 지휘를 하는 스타일이라면 옹정제는 왕실에서 전장을 관리하는 스타일이었다. 현장 경험이 없던 옹정제는 그래서 사령관들과 항상 마찰을 겪었다.
숨통을 조이는 이런 청의 전략은 준가르 입장에서 피 말리는 압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렇다고 기가 죽을 갈단 체렝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청이 원했던 롭짱 단진을 넘기겠다고 제안을 했다. 이에 마음을 누그러뜨린 황제는 계속 증강 중이었던 원정대를 다시 귀환하라고 명령하였다. 하지만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갈단 체렝은 바르콜과 코코노르를 습격하여 말을 탈취하고 투르판에 주둔해 있던 청군을 공격하였다. 이에 서로군 장군 악종기는 황제에게 반격할 것을 강권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방어에만 치중하라고 하달하였다. 조용히 기다리라는 황제의 명을 거역할 수 없었던 악종기는 전쟁 경험이 없는 황제를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사령관에게 권한을 주지 않는 이런 전쟁이 어디 있는가. 이렇게 반격을 하지 않는 청군을 향해 준가르군이 계속 도발을 하자 이에 대한 보고를 받은 황제는 그제야 악종기의 제안을 승인하였다. 투르판 주둔지를 서쪽으로 170km 거리에 있는 우르무치로 이전하는 내용이었다. 그곳은 투르판보다 넓은 평원이 있어서 둔전을 운영하기에 안성맞춤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준가르와 더 가까운 데 위치하고 있어 그들에게 더 강도 높은 압박감을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갔다. 지형을 잘 알고 있던 초원의 황제 갈단 체렝은 흡도에 주둔지를 구축하고 서쪽으로 이동하던 북로군을 게릴라전과 다각적인 전술로 공격하여 동쪽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북로군은 80%의 병력을 잃고 겨우 2,000명만 살아 흡도로 돌아왔지만 계속된 준가르군의 공격에 결국 흡도도 버리고 파한 소르로 퇴각을 하였다. 그리고 서로군도 우르무치에 성공적으로 안착을 하는가 싶었지만 준가르군의 분산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결국 투르판보다 더 동쪽에 위치한 바르콜까지 물러나야만 했다. 결과는 준가르의 승리였다. 청의 원정이 실패한 원인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중에 준가르군의 집요한 유목 전술과 자체 보급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이 중요한 패인이었고, 무엇보다도 당시 준가르군은 체왕 랍단 재위 기간 20년 동안 평화의 시대를 이끌며 충실하게 내실을 다지고 강병을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갈단이 말아먹은 준가르의 세력을 그가 다시 일으킨 것이었다.
청과의 전쟁에서 처음으로 승리한 갈단 체렝은 고무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그는 작은할아버지 시절의 갈단처럼 동몰골과 청에 공격적인 대립을 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할하의 체렝 칸에게 칭기즈칸의 후예로서 청에 굴복하지 말고 자신과 동맹하여 화려한 옛 영화를 이루자고 제안하였다. 청과 전쟁을 벌이자는 뜻이 아니라 청에 복속되지 말고 독자적인 칸국을 형성하자는 의도였다. 하지만 체렝 칸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강력한 청과 대립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었고, 그리고 과거 좋은 관계로 지낸 적도 거의 없고 특히 갈단 시절 때는 호되게 당한 상처가 있어서 준가르 울루스를 신뢰하지 않았다. 이에 준가르의 회유를 거부한 체렝 칸은 오히려 그들과 무력충돌을 불사하였다. 괜히 호의적으로 접촉했다가 청의 눈에 나면 자신들에게 결코 좋을 게 없었는지 모르는 것이었다. 이렇게 할하 몽골과의 전투에서 패배함 준가르는 결국 알타이 산맥 서쪽으로 퇴각하였다. 중국의 기록에 의하면 1731년 에르데니 자오 전투에서 준가르군 10,000명이 죽었다고 한다. 이 결과로 청의 황제는 자신을 대신하여 싸워준 체렝을 정변좌부장군으로 임명하고, 궁궐도 지어주고, 사후에 최초로 태묘에 그의 신위를 봉안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고 전한다. 비록 큰 규모의 전쟁은 아니었지만 준가르가 패배한 이 사건에서 황제는 대단히 큰 위안을 받은 것만큼은 분명한 것 같다.
이후 다시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1734년 갈단 체렝은 청의 요구로 평화협상 테이블이 앉았다. 하지만 영역 구획에 대해 서로의 주장이 달랐다. 준가르는 항가이 산맥을 기준으로 하자고 주장했고 청은 알타이와 이르티시강을 경계로 하자고 요구했다. 그들은 서로의 요구 안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 협상이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서로 평화를 원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언제 평화가 깨질지 장담할 수 없지만 현재는 그것만이 최선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준가르와 청은 조공무역의 문을 개방하였다. 그런 가운데 1735년 옹정제가 붕어하고 건륭제가 즉위하였지만 데탕트 기조는 변하지 않았다. 오리려 새 황제는 더 많은 교역을 장려하며 평화를 유도하였다. 청의 입장에서는 과거 서북 정벌에서 너무나 많은 국가적 손실을 보았기 때문에 이이제이 정책을 유지하는데 중점을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과거 경험을 무시할 수는 없었던 청은 항상 준가르를 경계하고 의심하였다.
그렇게 평화무드에 돌입했을 때, 1739년 준가르와 청은 정식으로 화친 협정을 맺고 본격적으로 폭넓은 교역을 하기 시작했다. 준가르는 매해 200~300명 규모의 조공사절을 보내 조공무역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사실 중국과의 조공무역이라는 것은 전통적으로 일방적으로 황제에게 조공을 받치는 것이 아니라, 조공 품목을 받은 황제는 그보다 더 많은 보답품을 하사하였기 때문에 전체적인 양으로나 질적으로나 조공국이 오히려 더 많은 이익을 남기는 거래였다. 황제의 이런 관용적 태도는 중국 왕조의 전통이어서 청에서는 조공을 반대하는 관료들도 많았다고 한다. 아무튼 이런 조공무역 외에도 하미와 쑤저우 같은 국경 도시에서도 100명이 넘는 상인들이 모일 정도로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준가르에서는 변함없이 말, 양, 소, 낙타, 모피 등을 팔았고, 청에서는 차, 수단, 대황, 은 같은 물품을 내놓았다. 이런 교역으로 인해 준가르의 기준으로 볼 때 10년 사이에 4배 이상 교역량이 증가하였다고 한다. 조공무역이나 국경무역에 임하는 준가르의 상인들은 보다 많은 이익을 챙기기 위해 청의 관료들과 상인들에게 집요하게 상술을 부렸고, 이는 시장을 교란하는 행위로 간주되어 사회적인 문제로 발전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에 청은 교역량을 규제하기 위해 시장에 개입하였다. 하지만 이런 활발한 교역에도 불구하고 화약과 소총 같은 무기류는 엄격하게 거래가 금지되었다.
4. 파멸의 서막
하지만 평화의 시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준가르 내에서 권력투쟁이 일어나면서 평화에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1745년 그나마 평화의 시대를 열었던 갈단 체렝이 사망한 후 준가르의 정국은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콩타이지의 유언으로 즉위한 둘째 아들 체왕 도로지 남잘은 성격이 난폭하고 괴팍하고 편집적인 성향을 보여 백성들은 그의 폭정에 시달려야만 했다. 이에 콩타이지 형제들로부터 불만을 샀지만 콩타이지의 통치 행태는 시정되지 않았다. 이렇게 준가르 정국이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포탄처럼 미래가 불투명할 때, 티베트에서도 권력투쟁이 발생하여 반란이 일어났고 그 영향으로 체왕 도로지는 엉뚱하게 티베트와 단교를 하였다. 이로 인해 준가르에서는 콩타이지의 무능에 대한 원성이 자자해졌고 기어코 그의 형인 라마 다르자가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빼앗았다. 이 쿠데타에 동의를 하지 않은 그의 동생 다시 다와와가 반기를 들자 다시 형제의 난으로 이어졌다. 이에 다와와가 청으로 도망을 가자 새로운 콩타이지는 다와치를 보내 그를 죽이라고 명령을 하였다. 다와치는 체렝 랍단 시절 티베트 전쟁 당시 사령관이었던 체링 돈둡의 손자였다. 하지만 다와치는 정통성 없는 콩타이지의 명령을 거역하였고, 이에 격분한 콩타이지는 그를 체포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그리고 다와치는 그들을 피해 카자르로 도피를 하였다. 당시 그를 따르는 참모 중에 아무르사나가 있었는데, 그는 라짱의 손자로서 체왕 랍단의 외손자이기도 했다.
준가르의 정세는 이에 머물지 않고 더욱 혼탁해졌다. 1752년 12월 다시 한번 다르자 콩타이지가 내부 반란으로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권력의 공백이 생기자 카자흐로 망명을 갔던 다와치가 돌아와 반군을 일으켜 다자르의 부하들과 전투를 벌여 승리한 끝에 권력을 잡았다. 그의 등극은 준가르 왕족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관계로 인해 콩타이지 칭호는 받지 못했고 그저 타이지 칭호를 받아야만 했다. 이제 100여 년 전 바투르가 이루어놓았던 준가르 콩타이지의 후예도 절멸되고 칭호도 말살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권력을 잡은 다와치는 평소 보여주었던 개혁적인 태도에서 돌변하여 주색에 빠져 정국 운영을 게을리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영특했던 그의 참모 아무르사나는 호쇼트, 데르메트, 호이트 등 오이라트 울루스와 친교 관계를 맺으며 미래 세력을 꿈꾸고 있었다. 어느 정도 영향력을 확보한 그는 다와치에게 준가르의 영토 절반을 분할해 줄 것을 요구하였지만 다와치는 이를 수락하지 않았다. 당시 준가르는 크게 다와치파와 아무르사나파 둘로 분열되어 있다시피 했다. 이렇게 금방이라도 내전이 벌어질 상황으로 치닫자 상대적으로 힘이 약했던 아무르사나는 이에 자신의 부대 5,000명의 병사와 다와치 폭정에 불만이 많던 세력들을 규합하여 청으로 대규모 망명을 감행하였다. 그렇게 청으로 넘어간 아무르사나는 청에게 준가르를 정벌해 줄 것을 은연중에 내비치며 로비를 하였다. 정통성이 없는 다와치의 준가르는 청의 위협으로 변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욕망이 남달랐던 건륭제는 관용적 외교정책을 폐기하고 드디어 준가르에게 칼을 빼들었다. 이참에 오래전부터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던 준가르를 섬멸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1754년이었다. 황제의 명분은 이랬다. 다와치가 준가르의 타이지에 오른 것은 권력을 찬탈한 것이기에 정통성이 없고 이에 황제로서 그의 권력을 인정을 할 수 없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폭정을 일삼아 백성들은 핍박을 받고 자신의 땅을 등지고 떠나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였으며 바로 그 준가르의 백성을 위해서라도 다와치는 제거되어야 한다. 또한 다와치는 할하 몽골 울루스들을 자신의 편으로 포섭을 하려는 무례한 행위를 일삼았기 때문에 몽공 전체의 안위를 보호하고 또한 국경의 안보 확립 차원에서 무력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설파하였다. 청에게 조공을 받치는 모든 울루스는 황제가 보호를 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에 북로군과 서로군에 각 각 25,000명의 군대를 편성하여 울리아수타이와 바르콜로 원정에 나섰다. 바로 북로군 부사령관에 아무르사나가 자진해서 임명되었다. 황제는 당시 그의 진심을 받아주었는지 모른다. 이런 대대적인 준가르 정벌군이 원정을 떠나자 다와치는 러시아와 카자흐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런 절박함에도 불구하고 다와치는 주색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보다 못한 그의 참모들도 분열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심각한 내부 참사로 인해 1755년 6월 아무르사나가 이끄는 북로군이 준가르 보르탈라에 도착하자 다와치는 1만 명의 군대를 데리고 거덩산으로 도망을 갔고 이를 쫓아간 청군은 치열한 전투 끝에 다와치를 체포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500여 명의 병력을 이리에 주둔시킨 후 청군은 다와치를 베이징으로 호송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관대함이 폭발하여 그를 죽이지 않고 황족의 여성과 강제로 결혼을 시키고 황실 깊이 유폐를 했다. 그런 유폐는 황실 감옥 같은 곳으로써 완벽한 정신 개조를 목적으로 한다.
이에 건륭제는 매우 만족하였다. 할아버지 때부터 오랜 숙원이었던 준가르 토벌을 자신이 해결한 것에 대해 황제는 흡족해마지 않았다. 옹정제는 아예 수많은 국고만 낭비하고 결국엔 성공을 하지 못하지 않았던가. 무엇보다 자신이 행한 준가르 원정은 불과 1년 만에 끝낼 수 있었고 비용적인 측면에서도 몇 배나 절감할 수 있었기에 이에 대한 너그러움으로 탕평책 차원에서 다와치를 살려준 것이었는지 모른다. 이제 두 발 뻗고 편히 잘 수 있었다. 하지만 건륭제는 아무르사나가 살아 있다는 것을 간과하였다.
다와치 제거에 혁혁한 공을 세운 아무르사나는 황제에게 이에 대한 응분의 보상을 원했다. 그는 준가르의 칸의 작위를 요구했으나 황제는 준가르의 4개 하위 울루스 중에 하나인 호이트 콩타이지만 주겠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심을 들어낸 아무르사나는 황제의 안을 무례하게 거부를 하고 준가르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는 갈단 체렝이 사용했던 옥쇄를 자신이 사용하면서 준가르 전체의 콩타이지 행세를 하기에 이르렀다. 마음이 풀어져 있던 황제는 이렇게 투정을 부리는 아무르사나의 서운함을 달랬지만 잘 통하지 않았다. 사실 준가르에 새로운 왕조를 세울 만도 했지만 황제의 이런 권력 분산 정책은 차후 준가르의 준동을 예방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황제의 의중을 모를 리 없었던 아무르사나는 그럼에도 자신의 권력욕을 숨기지 않았다, 이렇게 황제와 갈등을 빚은 아무르사나는 티베트 라마들에게 뇌물을 주면서 칸의 작위를 구하려고 집요하게 행동하였고 또한 과거 오이라트 울루스의 일부였던 여러 타이지들을 만나 세력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행위였다. 이런 사실을 인지한 황제는 그를 다독이기 위해 월래 요구했던 준가르 콩타이지 작위를 하사하겠노라고 했는데, 이제 아무르사나는 생각을 바꾸어 아예 황제의 마음도 거절하고 독자적인 행보를 강행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몽골의 대통합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그렇게 갈단의 망령이 청에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이런 아무르사나의 배신에 황제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자신의 관대함에 모욕을 당한 황제는 당장에 그를 제거하기 위한 원정군을 만들었다. 사사로운 감정이 다분한 원정이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만하자면 그 원정은 실패하였다. 준가르 원정에 항상 사용해 오던 북로군 서로군 두 부대로 편성된 원정대가 똑같은 방법으로 서역으로 진군하고 있을 때, 준가르의 수도 이리에 주둔하고 있던 500명의 청군은 이미 준가르군의 도발에 이미 도망을 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준가르군은 머나먼 길을 걸어온 북로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여 대승을 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북로군 대장군 반디는 자결을 하였다. 또한 서로군은 이리에 당도하기 전에 준가르군의 공격을 받고 우르무치에서 바르콜로 퇴각을 하고 증원군을 요청하였다. 가볍게 본 준가르 원정은 또다시 황제의 심각한 숙제가 되었다. 아무튼 이에 격노한 황제는 할하의 몽골 칸들에게 연합군을 형성하여 준가르를 공격할 것을 강권하였다.
하지만 할하 몽골 내에서도 청에 저항하는 세력이 등장하여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1756년 호트고이트의 후손인 칭군자부가 청의 집요한 식민 정책에 반기를 들고 군사를 일으키자 몽골 전체가 동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준가르 정벌을 할하에서 이행해 줄 것을 강권한 청의 요구를 순순히 받아줄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아무리 조공을 바치는 속국이지만, 동족의 내분을 노골적으로 조장하면서 이익을 챙기려는 황제에 대한 불만이 할하의 여러 칸들에게서 터져 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1691년 이후 청에서 관료를 파견하여 주도면밀하게 행정적 경제적 통제를 하고 있어서 몽골인의 불만이 쌓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특히 청의 자본이 몽골을 점령하여 고리의 채권 관계가 난무하는 등 착취에 가까운 피해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부채를 탕감해 준다는 조건으로 준가르 원정 연합군에 동참하라는 황제의 요구에 더더욱 민심이 횡횡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의 통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칭군자부의 호소는 다른 칸국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 내부의 동조자는 미미하였고 준가르의 아무르사나에게도 동맹할 것을 요구했지만 그 역시도 성사되지 않았다. 결국 저항의 깃발을 올린 칭군자부 반군은 2,000여 명의 병력으로 청의 토벌대와 맞서 싸운 결과 장열하게 산화하였고 그의 가족들도 모두 죽임을 당했다. 이 사건 이후로 청은 그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준가르 원정대에서 할하 몽골군을 제외시켰다.
이렇게 할하 몽골의 지원을 받지 못한 청은 원정대 사령관을 여러 차례 교체하면서 집요하게 서북 지역에 주둔지를 구축하고 보급로를 혁신적으로 개선하면서 아무르사나를 압박했다. 이미 이리에서 빠져나온 아무르사나는 초원의 지리적 특성을 활용하여 청군의 추적을 피해 다녔다. 하지만 준가르에 천연두가 창궐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상황이 벌이지고 있었다. 이런 갑작스러운 전염병이 자신의 근거지인 보르탈라에도 창권 하자 아무르사나는 카자흐로 피신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감지한 청군은 카자흐에게 당근과 채찍을 주면서 그를 체포하여 돌려줄 것을 요구하였다. 거부할 시에는 카자흐를 초토화시키겠다고 겁박도 주었다. 그래도 카자흐가 응하지 않자 청군은 화북 평원에서 이리를 거쳐 악수와 야르칸드까지 보급로를 확보한 후 카자르를 침공하여 아무르사나군과 카자흐군을 섬멸하였다. 하지만 아무르사나는 그 전쟁에서 천운으로 탈출에 성공하여 북쪽으로 도망을 갔다. 이 소식을 접한 황제는 아무르사나에 대한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생포한 준가르군 포로를 전부 학살할 것을 명령하였다. 자비는 없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전 원정에서 너무 관대했다. 우리 군이 예전처럼 행동한 후 철수 한다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이에 청군은 도망 다니는 준가르 잔당들을 추적하여 소탕을 하였고, 심지어 러시아까지 추적하였다. 이 청소 작전에 성공적으로 마친 장군에게는 포상을 주었고,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관대하게 처사를 한 장군에게는 엄벌을 내렸다. 물론 항복하는 준가르군도 모두 예외 없이 죽였고, 말을 탈 수 있을 정도의 남자들도 마찬가지로 모두 학살하였다. 살려둔 사람은 여자와 노약자와 어린아이들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도 모두 할하 몽골인에게 보내 노예로 삼게 했고, 그들에게 감시와 감독의 의무를 부여하였다. 단순한 반란 진압이 아니라 준가르의 저항을 뿌리 채 뽑아내는 멸절을 황제는 원했다.
황제의 최종 해결 의지는 결연했다. 준가르를 지원했던 티베트의 라마들도 학살하려고 했지만 몽골 전체의 반감을 우려하여 선별적으로 처형하였다. 그리고 카자흐 땅 깊이 숨어들었던 아무르사나는 카자흐의 아블라이 칸의 보호를 받았지만 계속된 청의 공격으로 인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러시아로 도피를 하였다. 추방에 가까운 방조된 도피였다.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던 청은 계속 공격하여 카자흐의 여러 울루스로부터 항복을 받아냈지만 도피한 아무르사나를 찾을 수 없었다.
이렇게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1757년 아무르사나는 포기하지 않고 러시아에서 몰래 준가르 지역으로 잠입하여 저항세력 규합을 시도하였다. 사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 세를 키우는데 한계가 있어 위협적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는 대 준가르 제국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군대를 이끌고 결사적으로 동쪽 할하 몽골로 진격을 하였다. 이에 지독스럽게 발악을 하는 아무르사나에 격노한 황제는 이 사실을 묵과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필히 생포하여 자신 앞에 무릎을 꿇히라고 천명을 내렸다. 사실 아무르사나군는 청국에게 적수가 되지 못했다. 결국 아무르사나는 청의 반격을 피해 다시 러시아로 몸을 숨겼다. 청과 러시아의 조약에 따라 아무르사나가 러시아로 도주를 할 경우 범인 인도 요건이 작동될 수 있었지만, 국경을 통해 도주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러시아는 청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아무르사나는 러시아의 세미팔라친스 요새에 몸을 의탁했는데 이미 그는 천연두에 감염이 된 상태였다, 이에 그는 요새가 있던 마을과 멀리 떨어진 곳에 격리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두 달이 지난 1757년 9월 사망하였다. 그의 나이 35살 때였다. 그는 마지막 준가르인이었다. 그의 죽음을 뒤늦게 확인한 황제는 시신이라도 송환해 줄 것을 러시아에게 강력하게 요구했지만 러시아는 조약의 유권해석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면서 끝내 거부하였다. 갈단의 경우처럼 아무르사나의 뼈를 베이징 광장에 뿌리겠다는 황제의 강한 의지는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당시 아무르사나의 반란 사건에 대한 일련의 학살 내용이 놀랍게도 청의 기록에 남아 있다. 청의 군사 원정기 성무기(聖武記)를 보면 준가르 전체 인구 60만 명이라 추정하고, 천연두 40%, 러시아와 카자흐로 도주 20%, 학살 30%, 그리고 나머지는 노예로 팔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철저한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객관성을 담보할 수는 없다. 먼저 준가르 인구가 60만 명이라고 하지만 100만 명이라는 설도 있다. 당시 인구조사를 한 것도 아니고, 더구나 한 도시에 정주하지 못하는 유목민의 특성상 정확한 인구수를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런 상황을 토대로 보면 60만이라는 숫자는 다분히 자의적인 최소한의 숫자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천연두로 40%가 사망했다고 하는데, 천연두 바이러스가 준가르 울루스의 드넓은 지역에서 한 번에 집중적으로 창권 했다는 게 현실적이지 않다. 당시 천연두는 이미 2,000~3,000년 전부터 인간과 함께하고 있어서 말라리아나 페스트처럼 치명적인 전염병이 아니었다. 물론 백신이 발명되기 전까지는 사망률이 낮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인구의 40%를 갑자기 사망하게 만들 정도의 위력은 아니었고, 더구나 인구 밀도가 극히 적은 지리적인 특성을 감안할 때 신뢰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위의 수치는 학살에 대한 윤리적인 책임을 약화시키기 위한 작위적 기록이라고 의심받을 당위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전쟁이 끝났을 때 황제는 자신이 자행한 폭력 규모가 너무 크다는 것을 알고 유교적 기준과 황제의 관대함을 최소한 손상시키지 않는 선에서 숫자를 조정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준가르 울루스 사람들은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청은 그 땅에 한족과 만주족과 그리고 위구르족을 이주시켜 자신의 영토임을 만천하에 공표하였다. 바로 인종 청소의 완성이었다. 그렇게 해서 현재의 신장위구르주가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도 그 땅에는 자신이 준가르의 후손이라고 밝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한다. 당시 가까스로 살아남은 소수의 준가르인들은 각 부족에 흡수된 채 몇 대를 거치면서 자신들의 유전자를 완벽하게 상실하였다.
인류사에서 수많은 종족들이 명멸하였지만 준가르의 경우처럼 100만 명에 가까운 인구가 멸절되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전쟁에서 적을 죽이는 것은 한편으론 생존하기 위한 당연한 결과이고 때로는 도시를 약탈하고 본보기로 학살을 하는 것 또한 최소한으로 긍정은 구할 수 있다. 그 밖에도 어떤 형태의 전쟁이든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죽기 마련이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를 앞세운 로마제국은 카르타고 시민들이 3년 동안 저항한 본보기로 15만 명을 학살하고 도시 전체에 소금을 뿌려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로 멸절을 시도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전쟁에서 살아남은 카르타고인들은 죽이지 않았고, 100년이 지난 후에는 알렉산드리아와 비견될 정도의 대도시로 성장시켰다. 정복자의 그런 행위는 여러 가지 면에서 자기 자신에게 전략적으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대몽골도 정복지에 학살을 일삼았지만 항복하는 자는 살려주고 우군으로 만들어 병력을 증강시키는 전략을 섰다. 하지만 청 황제는 준가르의 울루스들을 속국으로 삼거나, 내몽골처럼 아예 복속을 시키는 것이 일반적인 정복 관례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최종 해결’을 원했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 같은 멸절과 대학살은 단지 황제의 분노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기록을 보면 황제는 집요하게 준가르에 대한 멸절을 신하들에게 설파한 것을 알 수 있다. 관대함을 배신한 행위에 대한 모멸감이 황제의 분노를 유발했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그런 논리로 이 불행한 사건을 보편타당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역사는 독일이 자행한 홀로코스트를 아직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데, 청의 준가르 대학살 또한 인간의 상식적인 정의의 척도로 볼 때 아직도 설명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사건을 추동한 중심에는 적어도 하나의 개인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인간의 폭력성은 언제나 분노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모멸감에 사로잡힌 권력자의 인격 분열은 역사를 피로 물들이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가운데 악의 존재처럼 여전히 역사의 행간에서 숨을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