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케스 대추방

제노사이드

by 안호용

1. 제국주의의 어두운 그림자

디아스포라 하면 첫번째로 떠오르는 민족은 유대인이다. 2천 년 전 로마제국이 예루살렘을 멸절시킨 후 시작된 유대인의 민족적 유랑은 전 지구적인 이슈를 양산하며 끈질긴 생명력으로 역사를 관통하였고 지금은 시오니즘을 완성하였다. 그런 사례는 역사적으로 전례가 없는 특별한 경우이다. 지금도 원래 자신이 살던 땅에서 추방되어 자치주 형식의 공동체도 없이 지구를 떠도는 민족들이 많다. 그중에 하나가 체르케스인이다. 그들은 현재 튀르키에와 발칸반도의 여러 국가 그리고 시리아 이라크 같은 중동 지역 등 세계 곳곳에서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며 디아스포라를 형성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을 아디게인이라고 부른 반면 오스만에서는 체르케스라고 불렀다. 그들의 인적 구성은 매우 복잡하지만, 그냥 통칭해서 체르케시야 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체르케스인라고 불렀던 모양이다.

체르케시야에 들어가기 전에 그들을 추방했던 러시아에 대해 간략하게 얘기하고 가겠다. 유럽의 동쪽 변방에 자리 잡은 슬라브족 일원인 키예프 루즈 대공국이 13세기 초 동쪽 끝에서 온 악마의 군단 몽골의 바투 칸에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면서 러시아에 대 파란이 일어났다. 1243년 미하일 프세블로도비치 대공이 기개 있게 항전했지만 대장군 수부타이를 앞세운 바투 칸에게 처형당하고 류리크 왕조는 완전히 멸망하였다. 블라디미르 공국과 리투아니아 공국 그리고 모스크바 공국도 바투칸의 손아귀에 들어가면서 러시아 대부분은 칸국의 봉신국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몽골은 자신이 점령한 지역을 킵차크 칸국이라고 선포하고 모스크바에 군사 주둔지를 설치한 후 세금만 거둬들이면서 간접 통치를 했는데, 모스크바 귀족들과 혼인 관계를 맺으면서 권력을 더욱 공고화하였다. 하지만 몽골인들이 서서히 문화적으로 동슬라브화가 되면서 100년 후에는 세력이 위축되어 러시아판 레콩키스타가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몽골인들의 인구가 워낙 적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이에 칸국의 토크타미시 칸은 모스크바 저항군을 격퇴하지만 너무 힘을 많이 쓴 탓인지 이후 같은 피가 섞인 티무르 군에게 패배하고, 자신의 봉신국인 모스크바 공국과 함께 그들의 속국으로 전락한다. 그렇게 몽골 계통의 칸국으로부터 200년 이상 지배를 받았던 러시아는 1480년 이반 3세 때 드디어 그들을 몰아내고 독립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1547년 이반 4세는 러시아 차르국이라고 스스로 칭하고 자주국임을 온 세상에 알렸다. 1724년에는 표트로 대제가 영국을 본보기로 러시아를 제국의 반열에 올려놓으며 팽창정책을 가속화시켜 남쪽으로의 진출을 본격적으로 감행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러시아는 코사크인과 타타르인 같은 우호적인 소수민족을 우방군으로 편입시킨 후 시베리아 정복에 나서 1640년에 예니세이강, 레나강을 거쳐 바이칼호에 진출하고, 1665년에는 아무르강에 주둔지 요새를 구축하여 당시 청나라와 몽골 국경선에서 대치를 하기도 하고 이와 더불어 무역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당시 알타이 산맥의 주도권을 놓게 서몽골의 준가르와 전쟁 일보직전까지 가는 상황을 만들며 호시탐탐 침략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후에도 러시아는 동진의 속도를 멈추지 않고 계속 진군한 결과 종국에는 유라시아의 끝 베링해를 건너 알래스카까지 진출한다.


러시아의 남하정책의 최종 목표는 코카서스였다. 코카서스 산맥을 중심으로 남쪽에는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이 오래전부터 왕국을 형성하고 있었고, 지금은 러시아 영토인 북쪽에는 체르케스인과 체젠인과 압하지아인 등이 산악지역을 중심으로 영지 규모의 자치정부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흑해를 접하고 있던 체르케시아는 조지아와 더불아 러시아가 가장 눈독을 들인 핵심 지역이었다. 흑해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오스만제국을 견제하고 지중해로 진출할 수 있는 무역과 군사의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는 요충지였던 것이다. 18세기에서 19세기를 가로지르는 100년 동안 제국주의적 탐욕에 도취된 러시아 제국과 아주 오래전부터 그 땅에서 살아오던 범코카서스인과 생존을 건 대결이 펼쳐졌다. 뺏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의 피비린내 나는 충돌은 결국 코카서스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생체기를 남겼다. 그 여파 즉 당시 러시아가 민족 분리정책을 행한 결과로 인해 코카서스에서는 현재 기준 불과 18년 전에도 조지아 내에서 소수 민족인 남오세티야와 분쟁이 촉발하였다. 이에 러시아가 개입하여 조지아와 전쟁이 일어나는 등 현재 이 시점에도 소수민족과의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체르케스인은 카스피해와 흑해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코카서스 산맥의 중서부를 중심으로 19세기 이전부터 최소 500년 이상 살아온 민족이다. 체르케스인을 아디게인이라고도 부르지만 여기서는 체르케스인으로 통일하겠다. 그들은 암자흐, 베슬레니, 브제두그, 하투크웨이, 카르바디아, 맘케그, 나투하즈, 샤프수그, 체미그로이, 예계루크웨이, 자네이, 우비흐 등 12개의 백국 형태의 영지로 구성된 왕국을 형성하고 있었고, 그중에 암자흐와 카르바디아가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었다. 인종을 범주화시키는 게 불편하겠지만, 게놈 프로젝트에 의하면 그들은 체첸인, 조지아인, 압하지야인과 친척 뻘이 된다고 한다. 또한 숙명적으로 그들은 몽골과 투르크의 피를 가지고 있는 역사적 서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몽골인들은 자신들이 정복한 영토를 떠나지 않고 계속 그 자리에서 토착민과 섞여 살아온 결과였다. 특히 코카서스 북쪽은 보다 몽골계 피가 많은 타타르인들이 대거 거주하고 있었다. 심지어 불과 17세기 중엽에도 서몽골의 준가르족 일부가 자진해서 볼가강 유역으로 몇 만 명이 한 번에 이주한 기록이 있다.


그들에게 변화가 나타난 것은 18세기에 들어설 즈음 귀족들을 중심으로 이슬람을 받아들이면서 기존의 카프제이즘(전통 민속종교)과 기독교 중심의 문화가 충동하면서부터이다. 이런 변화의 물결은 내부적으로 30여 년 동안 갈등을 겪다가 19세기 초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 왕정이 무너지고 민주정 형태의 정치구조로 급변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그러니까 기독교 왕정에서 이슬람 민주정으로 바뀐 것이다. 이슬람이 추구하는 정교일치의 강력한 권력 구조는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근본적인 힘이었다. 1807년 슈파그웨 칼라웨바테코가 초대 연방 지도자에 선출되었고, 기초의회부터 12개의 영지 의회와 연방 인민회의까지 4단계의 의회가 구성되었다. 이슬람 문화권인 체첸과 압하지야에는 종교정치 최고지도자인 이맘이라는 직위가 있었지만 체르케스에는 아직 이맘이 없는 정치적 구조였다. 국가의 모든 정책과 정치적 결정은 연방의회에게 의결하고 지도자가 승인하는 형식이었다. 또한 각 영지 별로 민주공화정 형태의 자치권을 가지고 있어서 각 지역의 지도자들의 권력은 서유럽의 봉건제처럼 강고했다. 전쟁에 참전할 때도 함께 연맹군을 형성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각 영지의 지도자의 권한으로 단독적인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흑해는 러시아에게 있어 정치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 북쪽의 핀란드와 서쪽의 폴란드,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등의 제후국들과 완중지대를 확보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영토 분쟁을 일으키며 팽창정책을 유지하였고, 남쪽에서도 흑해의 패권을 놓고 끊임없이 오스만과 대립하고 있었다. 러시아가 흑해에 집착을 한 것은 지중해로 진출하기 위한 부동항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러시아 땅이 거대하지만 지리적인 환경을 볼 때 북해 쪽으로 항해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너무나 열악했다. 거의 유일한 통로인 북해에서 배를 띄우는 것은 겨울이면 얼어서 항해를 할 수 없고, 그렇지 않더라도 적대국인 핀란드와 폴란드 그리고 스웨덴 독일 덴마크 더구나 최강국 영국 등 많은 나라들이 공유하고 있는 해상을 통과하는 것 또한 불확실한 위험이 산재해 있었고, 시간적으로도 매우 비효율적이어서 가성비나 경제성이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하지만 흑해는 전부 부동항이었고 오스만 정도만 극복할 수 있다면 지중해 진출은 쉽게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당장 흑해에서 해결할 문제들이 적지 않았다. 서쪽의 루마니아와 몰도바, 북쪽으로는 우크라이나와 크림 타타르 칸국, 동쪽으로는 체르케스와 조지아 남쪽으로는 가장 긴 오스만이 흑해 연안을 차지하고 있었고, 러시아는 북쪽의 일부 크림반도와 접한 케르츠 해협 맞은편 작은 해안 지역만 흑해와 접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흑해에서의 오스만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체르케스와 크림은 무슬림화가 되어 있어 이슬람의 종주국인 오스만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 이런 지리적인 환경에서 러시아가 영향력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은 무력 밖에 없었다. 체르케스 해안지역에 항만과 조선소를 건립하고 무역량을 증대하여 지중해로 진출하는 것이 러시아의 최종 목표였다. 하지만 18세와 19세기는 지구의 절반은 영국의 지배하에 놓여 있다는 사실은 묵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유럽의 주적이었던 오스만을 견제하기 위해 영국은 중동과 동유럽에서 오스만과 끝없이 충돌을 벌여 왔고, 흑해에서도 남하하는 러시아를 견제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현재의 미국과 같은 경찰국가 행세를 당시 영국이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영국의 패권주의는 19세기 중엽 발생한 크림전쟁에 영국을 중심으로 프랑스와 오스만이 함께 참전을 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러시아가 처음 체르케스와 무력으로 충돌한 것은 1763년이었다. 체르케스 동부 카바르디아의 모주도크(현재의 러시아 모즈독)에 코사코 용병과 함께 강제로 진입하여 주둔지를 구축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모즈도크는 체르케스와 체첸을 잇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러시아 영토는 워낙 넓어서 정복지가 모스크바와 블라디미르에서 거리가 멀 경우에는 요새화된 주둔지를 건설하여 그곳에 주둔지 군인이 가족과 함께 살 수 있는 마을을 형성하는 방법을 시행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주둔지가 시베리아 지역이었다. 코카서스 지역도 이에 해당되어 점령을 하면 우선적으로 주둔지를 구축하였다. 아무튼 러시아의 이런 노골적인 침략에 분노한 카바르디아의 지도자들은 오스만의 도움을 받아 무력으로 맞설 것을 주장했지만, 한편으론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유지하자는 정치 세력도 상당하였다. 전쟁에 대한 공포는 누구에게나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그동안 소수민족으로서 강대국에 맞서 어렵게 유지해 오던 외교적 평화를 한 순간의 감정으로 깰 수는 없었다. 이에 다음 해 카바르디아 영주인 미소스트 베마타콰가 손수 러시아 적진으로 가서 포타포프 사령관을 만나 자신의 땅에서 러시아군을 철수해 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였지만 거절당했고, 이에 케이신 케이티코를 대표로 한 평화사절단을 차르가 있는 상테스부르크로 보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차르 캐서린 2세는 그들의 요구를 묵살하였다. 이런 평화적인 노력이 무산되자 가장 먼저 당사자인 카바르다아가 어쩔 수 없이 무기를 들었고, 뒤따라서 쿠반강을 경계로 하는 지역에 위치한 암자흐가 동맹군의 일원이 되었다. 이후 러시아와 체르케스는 치고 빠지는 공방전을 벌였지만 러시아는 상대적으로 대규모 군사를 동원하지는 않고 고삐를 늦추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가 가장 역점을 둔 지역은 크림반도였다. 어떻게 보면 크림반도는 체르케스 보다 더 중요한 지역이었다. 지리적으로 볼 때 그곳은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같은 동유럽에 가까이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선적인 타깃이었는지 모른다. 그곳에는 이미 15세기 중엽부터 유럽인이 타타르인이라고 부르던 몽골계 투르크인이 작은 왕국을 이루고 있었다. 몽골에서 동떨어진 곳에 삶의 거점을 잡은 그들은 기나긴 노매드 서사를 가진 민족이었다. 당시 타타르인은 과거의 영광을 상실한 채 약소민족으로 전락하여 과거 자신들의 봉신국이었던 러시아의 군사력 앞에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러시아 제국은 1783년 크림 칸국을 무력으로 점령을 한 후 수백 년 동안 살고 있던 타타르인 30만 명을 오스만으로 강제 추방하였다. 러시아가 식민 정책에서 지속적으로 추구한 정화작업의 일종이었다. 기존에 살던 사람들을 내쫓고 그 자리에 자신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던 코사크 같은 민족과 자국민을 혼합하여 정착시킴으로써 그 지역을 실질적으로 식민화하는 것이 바로 정화작업이었다. 원주민의 저항을 근본적으로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다. 나중에 좀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그런 방법은 여타의 유럽 식민지에서 볼 수 없었던 그들만의 독특한 식민정책이었다. 그들은 보다 안전하고 강고하고 완벽한 러시아화를 원했다. 이후 많은 지역에서 자행된 식민지 원주민에 대한 대추방은 러시아화의 최종 해결의 일환이었다.


위에서 코사크인이란 단어를 여러 번 사용했는데, 그들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하게 가겠다. 동슬라브 언어를 사용하는 코자크인에 대한 기원은 불분명하다. 그들은 중세 말기에 우크라이나 동쪽과 러시아 남서부에 걸쳐 형성된 대초원에 산재해서 소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었고, 17세기 이후 러시아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동방정교회를 받아들이고 준군사 왕국이라 스스로 밝히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였다. 그들의 생존 전략은 러시아의 용병을 자처하며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경영하는 것이었다. 적절한 보상은 화폐로도 취득을 하지만 많은 경우에는 정복한 땅에서 원주민을 추방한 그 공간에 코사크 호스트라 부르는 공동체를 구축하여 정착하는 것으로서 경제적 이득을 챙겼다. 현재도 그런 지역에서는 여전히 코사크인들이 살고 있다. 그들에게 무기 체계만 공급해 주면 기병과 보병의 조직 운영은 그들 자체적으로 관리하는 방식이어서 러시아는 가성비 좋은 군사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스스로 준군사 왕국을 자처한 스위스가 프랑스와 이탈리아 도시 국가에 용병을 수출하여 경제적 이득을 챙긴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코사크의 경우는 이보다 더 적극적이어서 러시아와 한 몸처럼 행동하는 절대적인 협력 관계였다. 그런 코사크인은 뛰어난 전사로서 러시아의 수많은 팽창 전쟁에 참전하여 훌륭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1917년 볼셰비키 혁명 당시 반볼세비키인 백군의 편에서 내전에 참전하였지만 다 알다시피 혁명이 완성된 후에는 볼셰비키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기에 이른다. 아무튼 18~19세기 전반에 걸쳐 코사크인의 용맹스러운 활약은 반러시아 전선에서 공포의 대상으로 작동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2. 피할 수 없는 전쟁

19세 초 조지아를 완벽하게 복속시킨 러시아는 북 코카서스에 집중하였다. 본격적인 침략은 1817년 알렉세이 예르몰로프가 총사령관으로 임명되면서 시작되었다. 러시아의 남하 정책의 전반적인 실무 책임을 맡은 사람이 예르몰로프였다. 일명 나폴레옹 전쟁으로 불리는 프랑스와의 전쟁 당시 연합군의 일원으로 많은 전투에 참전하여 다수의 훈장을 받았던 그는 페르시아 전쟁에도 참전하여 승리를 일구어낸 전형적인 맹장이었다. 그는 당시 오스만 전쟁 후 확보한 조지아 점령지의 사령관도 겸직하고 있었는데 그의 공과 중에 하나는 조지아를 유럽처럼 만들기 위해 그곳에서 출발해 코카서스를 거쳐 러시아로 가는 도로망을 건설한 것이었다. 이 도로는 이후에도 코카서스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무튼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코카서스 산맥 북쪽을 점령하고 저항하는 무슬림 부족을 척결하는 것이었다. 그는 체르케스인을 비룻한 북코카서스인들을 산악인 혹은 미개인이나 야만인이라고 불렀다. 전략적인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는 철저한 인종주의자이기도 했다. 체르케스 지역은 러시아 정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곳 러시아 사령부는 정부의 간섭을 거의 받지 않고 총독부 같은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지휘관 개인의 인성에 따라 전쟁의 전반적인 행태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인종주의자는 그에 상당하는 식민통치 행위로 이어졌고, 러시아 특유의 기독교적 휴머니즘을 가진 통치자에게서는 상대적으로 온정적인 행태로 나타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이교도에 대한 편견은 변하지 않았다. 더구나 유럽을 삼킨 나폴레옹에게 패배의 쓴 맛을 보여준 러시아이기 때문에 민족적 자긍심이 하늘을 찌르던 시기였다.

예르몰로프의 침공 전략은 테러리즘적인 자비 없는 폭력으로 적을 제압하는 것이었다. 정상적인 전투로 적을 섬멸한 후 도시를 파괴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투 능력이 없는 도시나 마을도 침략하여 주택과 시설들을 모조리 파괴하고, 여자와 어린아이들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초토화 작전을 일삼은 것이다. 전쟁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지만 그에게는 그런 자비나 관용은 없었다. 프랑스 전쟁이나 페르시아 전쟁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잔악한 방법을 사용했는데, 그런 방법을 사용한 것은 정복지에 자국민을 정착시키고 러시아화를 꽤 하고자 하는 수단의 일종일 수도 있고, 무엇보다 예르몰로프 개인전인 취향과 맞물려 인종 청소 같은 최종해결을 자행한 것일 수도 있다. 이런 초토화 작전의 첫 번째 희생 지역은 체르케스 동쪽 끝에 위치한 카바르디아였다. 그곳은 조지아 - 러시아 도로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자연스럽게 예르몰로프의 첫 타깃이었다. 카바르디아는 18세기말부터 러시아의 계속된 침략에 근근이 버티어 오다가, 예르몰로프가 등장한 후부터는 수세에 몰려 결국 1818년부터 균형의 추는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이 전개되자 증오심에 불타오른 타 지역의 체르케스인은 카바르디아를 재정복 하기 위해 결사 항전의 결의를 다졌다. 그동안 상대적으로 온건했던 귀족들도 강경 세력과 손을 잡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지하드의 시작이었다. 무장 조직을 강화하고, 나크슈반디 같은 강경 이슬람 원리주자들이 전면에 나서 저항군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지하드 운동은 러시아의 남하를 두려워한 오스만이 독려한 결과이기도 했다. 이렇게 성전을 불사하려는 체르케스 현지 상황을 보고 받은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는 상황이 당초 생각과 다르게 흘러가자 1827년 과잉적으로 전쟁에 임하여 오히려 이슬람의 저항을 키웠다는 이유로 예르몰로프를 경질하였다. 사실 그런 차르의 조치는 러시아 역사가들이 황제의 권위를 미화시키기 위한 해석이고, 이보다 더 중요한 원인은 예르몰로프는 1825년 데카브리스트 쿠데타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설이 밝혀지고 있는 시점이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참고로 데카브리스트 쿠데타 사건은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하면서 서유럽의 자유주의 사상에 경도된 젊은 장교들을 중심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농노제폐지와 입헌군주제 추진 등 대개혁의 깃발을 들고 반란을 일으킨 사건인데 당시 알렉산드리아 푸시킨도 그 사건에 연루가 되어 당국으로부터 탄압을 받았다고 한다. 아무튼 예르몰로프는 사령관에서 경질된 후 강제로 제대까지 한 것을 보면 과잉 전쟁은 빌미 일뿐 내막은 쿠데타 사건에 연루로 인한 숙청과 다름없었다. 그 후 낙향하여 자신의 영지에서 조용히 살던 그는 시간이 흐른 후 세상이 변하자 복직을 요청받기도 했지만 모두 거절하고 83살까지 장수하였다. 체르케스인에게는 악마와 같은 존재였지만 러시아 사회에서는 많은 무공훈장을 받은 전쟁영웅이었고, 카리스마 넘치는 장군으로서 군의 표본이 되는 인물로 평가를 받았다. 예를 들어 푸시킨은 자신의 서사시에서 그를 전쟁 영웅으로 예찬하기도 했다.

러시아군에 의해 자신의 땅이 유린당하자 여러 지역의 체르케스군의 저항은 더욱 거세지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남하 전쟁에 대해 우려스러울 정도의 관심만 가지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는 아직까지는 체르케스를 지원하지 않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는 그리스 독립전쟁에서 유럽 열강의 주요한 동맹국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자극하지 못하는 형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체르케스군은 전사의 모습을 보이며 러시아군의 침입에 맞서 저항하였다. 이런 극열한 저항에 러시아군은 주둔지 요새 구축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후퇴하는 전선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한발 물러선 뒤에도 이에 대한 보복으로 기습적으로 체르케스 진영을 공격하여 타격을 주었다. 경계선을 넘어 저항군이 은거해 있을 것으로 추정 되는 마을을 습격하여 파괴하고, 또한 저항군에게 지급될 것으로 예상되는 민간인 농장을 공격하여 가축과 농작물을 파괴하고 불살랐다. 러시아군도 주둔지 요새 건설에 난항을 겪었지만 체르케스군도 험준한 코카서스 산맥으로 숨어들어 지난한 게릴라전을 감행해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저항하지 않는 원주민들도 침략자 러시아군을 원망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저항의 강도는 더욱 심화되었다. 그럼에도 우월한 병력을 동원한 러시아군은 다각도로 체르케스 마을을 점령하여 저항하는 원주민은 학살하고 항복을 한 원주민은 강제로 추방하였고 그 자리인 조지아 같은 기독교인이나 코사크인들을 정착시켜 공동체를 형성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도로를 건설하고 숲을 개간하여 키부츠 같은 새로운 마을을 만들었다.

그러한 가운데 카바르디아의 마지막으로 남은 대다스 땅이 1822년 완전히 러시아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카바르디아는 이제 완벽하게 러시아의 소유가 된 것이다. 그 사이에 카바르디아 인구는 350,000명에서 35,000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하지만 예르몰로프는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해 여세를 몰아 주변의 14개 마을을 접수하고 원주민을 강제로 추방하였고, 타 지역 체르케스군의 계속된 박격을 우세한 전력으로 진압을 하였다. 항상 그렇듯 추방당한 원주민들은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코카서스 산맥으로 숨어들어 체르케스군의 보호를 받았다. 인간 청소 같은 테러 전략이 러시아 당국으로 전해져 과하다는 지적을 받자 현지에서는 점령지의 모든 사람들을 강제 추방하는 것으로 방법을 바꾸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살은 끊이지 않고 발생하였다.

그렇게 카바르디아를 접수한 러시아군은 북서쪽의 체르케스 땅을 침공하기 시작했다. 코카서스 산맥을 따라 북서쪽으로 길게 이어진 체르케스는 카바르디아와는 달리 인구 밀도가 높았고 저항의 강도도 더 강하였다. 특히 코카서스 산맥 서쪽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올라갔다가 급격하게 서쪽으로 향한 후 아조프해로 빠져나가는 쿠반강은 러시아와 체르케스를 경계하는 중요한 강이었다. 그 강의 주변은 코카서스 산맥과는 달리 대평원을 이루고 있었고 가장 인구가 많은 압자흐인들이 오래전부터 살고 있었다. 그 강 경계선 너머로 러시아군의 요새들이 만들어져 체르케스 공격의 교두보 역할을 하였다. 쿠반 평원을 점하는 자가 진정으로 체르케스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가장 치열한 교전지였던 것이다.

사실 러시아군과 체르케스군의 전력 차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체르케스군의 전반적인 전력은 러시아의 20%, 많게는 30% 이상이 되지 않았다. 더구나 러시아군에는 최고의 코사크 전사들이 앞장을 서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체르케스 지도자 슈파그웨 칼라웨바테코가 직접 오스만으로 가서 술탄을 만나 지원을 간청하였고, 영국 대사에게도 찾아가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지원을 당부하였다. 이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몸집이 커진 러시아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오스만과 영국은 무기 외에 다양한 방법으로 암암리에 체르케스를 지원하였다, 오스만은 같은 무슬림으로서 지하드를 독려했지만 영국은 별도로 긴밀하게 군사고문을 파견하여 군사전술을 전수하였다. 그렇게 몇 년 동안 꾸준하게 군사적 지원을 하다가 1830년에는 1년 동안 200척의 선박이 체르케스의 소치와 투압세에 가서 상당량의 군사 물품을 전해주기도 했다. 이런 지원이 없었다면 체르케르는 몇 년 버티지 못하고 항복을 했을 것이다.

전쟁 초기 외부의 간접적인 지원 가운데 체르케스군이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고 선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젬불라트 불레토코라는 뛰어난 사령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체미그로이 출신인 그는 트렌스 쿠반 지역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치 지도자이기도 했지만 강철 같은 의지와 전략적 사고를 가진 뛰어난 군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당시 체미그로이의 인구가 3만 명에 불과했지만 다른 영주들과 연합하여 결집력 강한 군대를 만들어 러시아와의 접경 지역에서 대등하거나 우세하게 전세를 이끌기도 하였다. 1823년 800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러시아 영토를 선제 공격하여 바르수클라강 사블 마을에서 코사크 부대를 섬멸하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그 후에도 쿠반 평원 러시아 지역으로 진출하여 크로클로레스크예에 위치한 러시아 요새를 파괴하고 20여 명의 러시아군을 생포하는 등 의미 있는 전과를 얻어내기도 하였다. 불레토코 군에는 카바르디아에서 도피한 전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여세를 몰아 체르케스 연방 지도자들이 볼레토코 마을에서 회합하여 이참에 점령당한 카바르디아를 리콩키스타 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강구하였다.

하지만 러시아군은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예르몰로프군은 잠부트, 아슬란, 모자르 등을 공격하여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1825년 여름에는 아바제흐에서 신망을 받고 있던 종교 지도자 하지 틀람의 거주지를 공격하여 불로 태우고 가족까지 모두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런 소식을 접한 볼레토코군은 응징 차원에서 마레브스코예 요새를 공격하여 파괴하기도 했다. 그렇게 침공과 응징이 수없이 반복해서 일어났다. 그리고 드디어 1828년 6월 볼레토코는 5개의 영주들과 연합하여 오스만 국기를 앞세우고 2,000여 명의 기병과 함께 카바르디아로 원정을 떠났다. 이들의 대규모 이동에 대한 첩보를 얻은 러시아군의 파르케스 사령관은 페르시아 전쟁을 끝내고 귀향하던 러시아군 사단에게 급전을 보내 카바르디아로 방향을 전환할 것을 명령하였다. 체르케스군의 이동 경로를 파악하고 기습적으로 차단을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를 간파한 볼레토코군은 다시 방향을 전환하여 게오르기예프스크 마을로 향했고, 마린스카야에서 이동 중이던 페르시아 파병 연대를 발견한 후 측면에서 공격하여 승전보를 만들어냈다. 그렇다고 섬멸한 것은 아니고 큰 타격을 준 것만큼은 분명했다. 당시 러시아는 1828년~1829년 오스만, 1826년~1828년 페르시아와 전쟁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러시아군은 거의 동시에 3개의 전선에서 화력을 분산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체르케스에서는 집중된 전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이런 와중에 1827년 체르케스 2대 연합 지도자인 이스마엘 베르제그가 취임하면서 아직도 완전체를 이루지 못하고 있던 체르케스를 통합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우르비 출신의 원로인 그는 체르케스를 연방국 형태의 조직으로 구성하는 데 성공하였고,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전통적인 강국인 오스만과 영국과 지속적으로 접촉을 시도하였다. 이제 국가 형태의 공동체를 형성한 베르제그는 떳떳하게 자국의 이익을 위해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열강들의 지원은 이런 적극적인 외교 정치가 발동되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1828년~1829년의 흑해는 러시아와 오스만의 전쟁으로 혼돈의 도가니에 빠져 있었다. 두 제국은 이미 16세기부터 10번 이상의 전쟁을 불사하면서 조용한 날 없이 상존해 왔는데 이번 전쟁도 그중에 하나였다. 당시 400년 동안 그리스를 식민 통치하던 오스만이 그리스 독립을 위해 참전한 연합군(영국 프랑스 러시아)과 전쟁을 하여 패한 후, 연합군의 일원이었던 러시아에게 보복 차원에서 지중해에서 흑해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인 다르다넬스 해협을 봉쇄하면서 이에 대한 갈등으로 쌍방 간에 전쟁이 또 발발한 것이다. 오스만은 나바리노 해전에서 러시아에 완패함으로써 결정타를 맞은 상황에서, 그렇지 않아도 갈등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적대적 관계의 연장선에서 화를 풀기 위한 소심한 결정을 내렸는데, 그리스 독립 전쟁의 여파가 가시기도 전에 러시아의 선전 포고를 촉발하게 만든 것이다. 호시탐탐 오스만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고 항상 촉을 있던 러시아 입장에서는 오스만의 그런 결정을 반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오스만 제국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했다. 그렇게 시작된 전쟁은 발칸 반도의 흑해 서쪽 연안국인 몰다비나,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과 동쪽에 위치한 코카서스 지역 즉 오스만 동쪽지역과 조지아와 그리고 체르케스 해안 지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발생하였다. 이 전쟁의 특징은 큰 폭은 아니지만 체르케스군이 참전을 했다는 점이다. 쿠반강 하류 쪽에 위치한 흑해 연안 도시 아나파에 러시아가 요새를 구축하려고 하자 오스만은 이스탄불에서 가장 거리가 먼 그곳에 군대를 급파하였다. 오스만 군의 파샤는 체르케스의 아나파 지역의 지도자인 세페르비 자네코에게 참전을 요청하였고, 이에 자네코는 체르케스의 보호국 역할을 하던 오스만 군을 지원하기 위해 손수 나섰다. 2개월간 지속된 전쟁은 결과적으로 오스만 파샤가 백기를 들면서 종전이 되었는데, 그 와중에 평화를 위해 러시아와 협상을 하던 자네코는 오히려 포로로 잡히는 황당한 일을 격기도 하였다. 그리고 오스만 파샤로부터 항복을 받아낸 러시아군 사령관 엠마누엘은 오스만 편에 참전한 대가로 쿠반 평원에 있던 체르케스 마을 200개 이상을 파괴하였다.

유럽사에서 항상 그렇듯, 이 전쟁이 끝난 후 1829년 9월 러시아와 오스만은 아드리아노풀에서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서 오스만은 자신의 속국이었던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를 러시아에게 넘겼지만, 사실 큰 형님과 동생 같은 우방 관계였던 체르케스의 해안지역을 러시아에게 양도한다고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체르케스는 유럽 강대국들로부터 준독립국으로 인정받고 있었는데, 두 국가 마음대로 양도라는 형식을 취한 것은 전혀 명분도 없는 일방적인 행위여서 영국과 프랑스로부터도 거센 비판을 받았다. 땅문서는 체르케스가 가지고 있는데 그들 마음대로 양도양수 계약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러시아가 무리하게 밀어붙인 것은 체르케스 흑해 해안 여러 곳에 러시아군 요새를 구축하는 데 있어 침탈이 아닌 합법성과 정당성을 담보하기 위해서였다. 종전 후 지도를 보면 러시아가 조지아 남쪽 오스만 경계 지역 일부와 체르케스 해안가 일부를 점령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해상과 육로에서 러시아군의 영향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공격적인 협상의 결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르케스와 체첸의 핵심 지역은 아직까지도(당시 기준) 러시아의 미정복지로 남아 있었다.

1830년 체르케스 전역의 지도자들이 모여 연방의회가 구성되었다. 아드리아노플 조약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을 의회에서 결의를 하였고, 이에 자네코, 하구르, 트람 3인으로 구성된 항의 사절단을 오스만 이스탄불로 파견하였다. 체르케스로서는 물러설 수 없었다. 조약이 사실인지 서류상으로 확인을 하고, 사실이라면 조약에서 자신의 영토 내용을 삭제해 줄 것을 강력하게 피력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를 인지한 오스만 주재 러시아 대사는 체르케스 사절단의 활동을 방해하였는데, 그들이 쉽게 말을 듣지 않자 오스만 당국에게 그들을 체포할 할 것을 강권하였다. 패전국으로 인한 여파로 늙은 사자로 전락한 오스만 정부는 러시아 대사의 강권을 이기지 못하고 형식적으로라도 그들을 내쫓았다. 하구스와 트람은 이를 버티지 못하고 체르케스로 돌아갔고, 자네코는 오스만 내에서 잠시 잠적을 하였다. 외교적인 활동 없이는 자국의 실질적인 존재를 유지할 수 없다는 국제 정세를 잘 알고 있었던 자네코는 잠시 몸을 숨기고 나서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 오스만 콘스탄티노플에는 영국과 프랑스를 비룻한 서유럽 국가의 외교관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망명객 신분이 된 자네코는 오스만에 있는 다른 체르케스인들과 함께 유럽의 많은 대사관을 방문하고 이집트 무하마드 알리에게도 손을 내밀면서 아드리아노플 조약의 원천 무효를 주장하는 운동을 펼쳤다. 하지만 유럽의 국제 정세가 요동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의 기회주의적인 태도는 모호하게 지속되었고 당시 이집트를 독립시키고 중동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시켰던 무하마드 알리도 자네코의 지원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영국은 그렇다 하더라도 레반트와 시리아까지 정복하고 오스만의 강력한 대항마로 떠오를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던 무하마드 알리가 같은 형제 무슬림으로서 자네코의 요구를 묵살한 것은 의외였다. 사실 무하마드 알리는 알바니아인으로서 유럽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관계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이집트에게 여전히 영향력을 잃지 않고 있던 영국도 확전을 방지하기 위해 그의 개입을 원하지 않았다. 나폴레옹 등장 이후 여유도 없이 이어진 전쟁으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리스 독립전쟁에 어쩔 수 없이 연합군으로 참전한 터였다. 이런 정세에도 불구하고 자코네는 계속해서 러시아에게 체르케스의 독립을 보장하고 자신의 땅에서 떠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였고, 이에 러시아는 무조건 항복만이 답이라고 일갈하였다. 이런 극렬한 대치 상황에서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그는 체르케스의 영주들과 간접적으로 계속 접촉을 하여 중지를 모은 결과 최종적으로 러시아에 복종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도출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피를 보는 것은 자명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자코네는 러시아에게 백색 평화(White Peace) 안을 제안했지만 역시나 평화에 대한 그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이런 자네코의 외교적인 노력과는 상관없이 아드리아노플 조약 후 잠시 숨 고르기를 하던 러시아는 다시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쿠반강의 경계선을 계속 유지한 채 1831년부터 체르케스 해안에 자신들의 요새들을 구축하기 위해 해당 지역 강탈 침공을 중점적으로 감행한 것이다. 그중에 나투하즈라는 도시가 투압세 북쪽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 도시는 마지막까지 기독교를 가지고 있다가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뒤늦게 이슬람으로 개종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고, 오스만과 크림반도와 전통적인 흑해 무역권을 형성하고 있는 상업의 요충지였다. 이런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는 나투하즈를 러시아가 정복하기 위해 도발할 것이다. 나투하즈인이 가장 격렬한 항전의 서사를 일구어냈지만 그럼에도 러시아 제국의 막강한 전력을 극복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프롤로프 장군이 이끄는 러시아군에 의해 수백 명의 전사가 사살당하고 백 명이 넘는 여자와 어린아이들이 학살당하였으며 살아남은 나머지 원주민들은 코카서스 산맥으로 도피하였다. 그리고 러시아군은 주택과 모스크를 파괴하고 약탈하였다. 러시아군이 상부에 보낸 보고서를 보면 이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고 적혀있는데 많게는 몇 백 명 적게는 몇 십 명을 죽였다고 자랑스럽게 자백을 하고 있다. 그렇게, 바로 초토화된 그 자리에 러시아인의 정착지와 거대한 요새가 건축되었다. 이런 군사 요새가 체르케스 해안 곳곳에 세워지면서 흑해에 대한 러시아의 지배력이 한층 공고화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지대한 공을 세운 사람 중에 한 명이 바로 그리고리 자스 대령이었다. 1833년 쿠반강 국경선에 있는 바탈파신스크 요새를 중심에 둔 지역 연대장으로 임명받은 그는 초임 장교 시절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하였고, 바로 직전에는 대오스만 전쟁에 참전한 충직한 군인이었다. 바탈파신스크는 현재의 체르케스크이다. 과격할 정도로 충직했던 그에겐 군사적인 것은 물론이고 사회경제적인 행정 권한도 부여되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런 광범위한 권한으로 인해 그는 다른 전쟁터에서 행하지 못했던 독특한 행동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그는 당시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인종주의의 신봉자였다. 그의 친구들 중엔 그와 관련된 인류학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독일에서 유학을 하는 사람이 여럿 있었고, 그들과 수시로 서신 왕래를 하며 인종주의에 경도되어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는 대단히 위험한 인물이었다. 자신만의 독특한 신념을 가진 그는 체르케스인을 열등한 인종으로 취급했다. 그가 부임한 후 첫 일성은, 그들을 다루는 방법은 야생동물처럼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을 산 채로 화형을 하고, 참수를 하고, 전염병을 퍼트리고, 어린이를 강간해도 되고, 마을을 전체 불태워야 한다는 등의 만행을 적극적으로 선호했고, 사실 대부분 실행에 옮겼다. 그의 사이코패스적인 성향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그의 취미는 체르케스인 해골을 수집하는 것이었는데, 전쟁에서 사살한 체르케스인의 해골을 수집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현지인에게 돈을 주고 구입하기도 했다. 그렇게 수집한 머리를 순수한 해골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막사 앞에 그것을 긴 창에 꽂아놓고 자연 건조하는 행위를 거리낌 없이 행하고 있었다. 이런 기행이 발각된 것은 부대 위문 차원에서 자신의 군영을 방문한 러시아인 무리 때문이었다. 일정을 마친 그들이 자스의 안내로 그의 집무실로 들어갔는데, 역겨운 냄새가 진동하는 것을 느끼고 자스에게 이게 무슨 냄새냐고 물었고 이에 겸연쩍어한 자스가 자신의 침실에서 큰 나무상자를 가지고 와서 아직 완전히 건조되지 않은 머리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손님을 맞이하기 전에 막사 앞에 걸어놓았던 머리를 거두어 자신의 침실에 숨겨 놓았는데 냄새까지는 제거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방문객이 눈살을 찌푸리며 이런 것을 왜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고, 이에 자스는 머리를 깨끗이 씻어서 베를린에서 해부학을 연구하고 있는 친구에게 지속적으로 보내고 있노라고 자랑스럽게 대답했다고 한다. 연구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해골을 수집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방문객은 태연스러운 그의 말에 기겁을 하고 집무실을 빠져나갔다고 일행 중 한 명이 증언했다.

아무튼 새로 부임한 자스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증명하기 위해 차르의 사냥개를 자임하기 시작했다. 베슬레이 지역을 시작으로 압자흐, 샤프수그, 카바라디안 등을 침공하여 마을을 초토화시키고 주민들을 몰살하며 자신이 설파한 복음을 실행에 옮겼다. 그는 교활하고 용의주도한 인물이었다. 체르케스군의 주로 사용하던 산악전술을 역이용하기도 하고, 첩자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하고, 적 깊숙이 정찰병을 보내 동태를 파악하는 등 교묘한 전술로 체르케스 게릴라를 격파하였다. 그의 목표는 적을 회생할 수 없을 정도로 무자비하게 공격하여 공포를 유발하고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보다 잔혹한 방법을 동원해야 했다. 그는 자신이 자행한 학살과 파괴를 정당화하며 미화시켰다. 적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최고의 방법은 그들의 피난처와 음식물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상관인 로젠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자신이 집행한 파괴와 살육을 어린애처럼 자랑하며 구체적인 내용을 기재하였고, 또한 자신이 죽인 체르케스인의 목록을 작성하여 보관하는 꼼꼼함도 보였다고 한다. 체르케스인은 그런 자스를 사탄이라고 불렀다. 초월적 악의 기운을 가진 사악한 자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는 인간계와는 차원이 다른 중간계의 악마였던 것이다.

이런 죽음의 천사 자스는 암수에도 뛰어나서 체르케르의 사령관인 볼레토코를 교묘한 방법으로 사냥하는데 결국 성공한다. 1836년 어느 날 자스는 볼레토코에게 생뚱맞게 평화를 제의하면서 비극은 시작되었다. 자스의 사악함을 모를 리 없었던 그가 왜 그런 제의를 받아주었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그는 평화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자스가 근무하는 프로츠이 요새를 방문하였다. 자스가 평화협상을 미끼로 그를 유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협상 당사자인 자스는 출타 중이었다. 이 상황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없지만 추정해 보면, 볼레토코가 정말로 자신의 군영으로 올지 모르고 출타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무언가 시험을 하기 위한 의도된 행위일 수도 있었다. 이렇게 약속을 어긴 자스는 볼레토코에게 사과를 전하고 다시 방문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순진했던 볼레토코는 다시 경호 병력과 함께 자스의 군영으로 이동하였지만, 결국 도중에 자스가 고용한 저격수에게 암살당하였다. 이렇게 볼레토코 제거에 성공한 자스는 그해가 가기 전에 특진하였다. 볼레토코는 음모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평화를 원하는 염원이 너무 앞선 나머지 사리판단을 하지 못하고 죽음의 길로 발을 내디뎠는지 모른다. 그만큼 체르케르인들은 전쟁에 지쳐 있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그 외에도 자스는 상상을 초월한 방법으로 체르케스군을 괴롭혔다. 1838년, 자신이 중병으로 곧 죽을 것이란 소문을 퍼트려 체르케스군의 경계심을 약화시킨 뒤, 자스의 죽음을 자축하는 연이 벌이지고 있는 체르케스 마을을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초토화시키는 기발한 전술도 자행하였다. 적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일화이다. 이런 자스의 야만적인 행위는 러시아 정부에서조차 불만을 샀다. 이에 1842년 정부는 개선의 정을 보이지 않는 그의 사령관직을 박탈하였다. 전쟁 중에 잔학한 행위로 면직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20년 전 예르몰로프가 과잉 전쟁으로 본국 송환을 당했지만 사실 그것은 정치적인 결정이었다. 그만큼 자스의 잔인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는 인종주의에 매몰된 학살의 확신범이었다. 사악한 개인의 취향은 전쟁이란 무정부 환경에서 고강도 행위로 표출시킬 수 있고, 그러므로 해서 자기만족을 극대화시켜 도파민을 터트리는 결과를 창출하고 그것은 거듭 반복되기 마련이다. 그와 비슷한 인물은 아마도 독일 히틀러 시절 죽음 천사라고 불린 히믈러와 같을지 모른다. 아무튼, 자스는 1883년까지 장수하다 86살에 자신의 고향에서 죽었다. 중간에 코카서스 전쟁이 불붙었을 때 러시아군으로부터 복귀 문제가 대두되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이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러시아-오스만 전쟁 종전 후 러시아는 흑해의 주도권을 쥐고 체르케스 해안 지역에 계속적으로 요새를 구축하였다. 아드리아노플 조약 내용을 벗어나는 일방적인 행위도 망나니처럼 일삼았다. 또한 러시아는 흑해 동쪽을 통제하기 위해 해군 전함을 배치하였다가 영국으로부터 자유무역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경고를 받았다. 그렇게 흑해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었다. 러시아는 영국의 경고를 무시하고 아나파와 레두테칼레 두 항구에만 타국 선박의 입항을 허용하는 조치를 취하여 영국과 오스만을 더욱 자극하였다. 이미 흑해의 패권은 러시아로 넘어가 있었다. 상대적으로 해군력이 약했던 오스만은 러시아의 일방적인 행위에 속수무책이었다. 더 나아가 오스만은 러시아의 강압적인 요구로 다르다넬스 해협에서 영국과 프랑스 선박의 출입을 통제하기에 이르렀다. 마치 흑해 영역을 장악한 지역 조폭과도 같았다. 이는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강력한 불만을 불러일으켰고, 이 사건 이후 영국에서는 반러시아 운동이 촉발되어 범사회적으로 러시아를 규탄하는 성명서와 신문 논설들이 양산되었다. 이미 다 알고 있다시피 이렇게 고조된 긴장을 결국 1853년 크림반도에서 폭발한다.

이런 험악한 분위기가 팽배한 가운데서 1836년 영국 선박 빅센호가 러시아 순양함에 나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러시아 해군은 현재의 노보로시스킨 인 수드즈크 카레 항구에 정박해 있던 수상한 선박을 검문하여 조사한 결과 무기를 밀반입한 것으로 사실을 확인한 후 그 배를 구금하였던 것이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바로 그 빅센호에서 수십 정의 소총과 28,000파운드의 화약을 이미 하역한 상태였다고 한다. 이에 오스만 주재 영국 대사가 자국의 선박을 구금한 러시아 제국의 대사에게 선원과 선박을 당장 풀어줄 것을 요구하였지만 소용없었다. 빅센호 나포 사건으로 영국 정부에서 분노를 표출하였다. 영국 보수당은 체르케스가 러시아의 관할권에 속하지 않는 데도 불구하고 자국의 선박을 나포한 것은 명백한 불법적인 행위라고 규탄하였다. 영국의 강경한 태도에 전쟁의 위협을 느낀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는 흑해 해군에게 전쟁 준비를 지시하였다. 이렇게 일촉즉발의 상황이 벌어졌지만 영국이 한 발 물러서면서 위기감이 다소 줄어들었다. 동맹군 없이 영국의 군사력만으로 거리가 먼 흑해에서 러시아를 상대로 단독으로 전쟁을 감행한다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았다. 러시아의 무도한 행위에 감정이 끓어올랐지만 현실적으로 달리 손쓸 수 있는 방법은 달리 없었다. 최소한 프랑스 한테라도 협조를 얻는다면 모르지만, 그들은 자국 사정으로 내 코가 석자여서 흑해 분쟁에 대해서는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다. 이로 인해 러시아 해군은 이제 흑해 동쪽에서 어느 누구의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고 활개를 치게 되었다.

이 사건의 주요 인물로 지목된 오스만 상주 영국 대사 데이비드 어콰드는 결국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당장의 외교적 마찰을 줄이기 위한 방책이었다. 빅센호의 소유주이면서 선장이었던 제임스 벨과 그의 동업자였던 에드먼스 스펜서와 JY 롱워스는 수드즈크 카레 현지에서 오스만으로 추방되기 전에 이미 탈출하여 체르케스 지역으로 잠입하였다. 그렇게 도피에 성공한 제임스 벨 일행은 체르케스군에 합류하는 데 성공한 후 3년 동안 군사 고문으로 활동하며 그들에게 군사지식을 전수하였다. 이렇게 습득한 군사전술로 체르케스군은 겔렌지크 방어선이 있는 러시아 요새를 공격하여 승리하는 결과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외부에서 비공식적인 라인을 타고 들어와 직접적으로 군사 지원을 한 사람들 중에는 폴란드 군인도 다수였다. 이런 사실들은 제임스 벨이 영국으로 돌아간 후 기행문 형식으로 쓴 저서 ‘Journal of a residence in Circassia, during the years 1837’에서 소상하게 밝히고 있어 체르케스와 관련된 연구에 다방면으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사실 제임스 벨의 이런 행위는 순수하게 개인적인 정의의 발로인지 아니면 영국 당국의 지원을 받은 것이지는 아직도 해명이 되지 않고 있다. 영국의 간접 지원이었다고 하기엔 너무 규모가 작긴 하지만 그렇다고 한 개인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하여 이런 위험한 일을 했다고 하기에도 개연성은 부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튼 이 사건은 영국과 러시아의 갈등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이후 체르케스 전쟁의 양상은 육지에서와 더불어 바다에서도 전개되었다. 1836년 10월 체르케스 해군이 해안에 요새를 구축하기 위해 왕래하던 러시아 전함을 공격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체르케스의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는 반면 러시아의 전쟁 기록은 시시콜콜한 것까지 남아 있는데, 러시아 함장 바르니츠키의 보고서에 따르면 체르케스 해군의 공격을 받아 겨우 목숨을 건지고 탈출하였다고 적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해군은 체르케스 해안을 확보해야 한다는 전략적 지침에 따라 투압세와 수바이 등 해상에 상륙하여 체르케스군과 교전을 하면서 요새 구축에 전력투구를 하였다. 그런 해안 교전에서 승리하여 요새 구축에 성공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실패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패턴은 여러 해 동안 지속되었다. 러시아군은 지상과 바다에서 양면 공격을 했고, 체르케스군도 영국과 오스만의 지원을 받으며 쉽게 무너지지 않고 저항하고 있었던 것이다. 체르케스 군의 저항이 생각보다 완강했기 때문에 코카서스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러시아군의 평범한 공격은 크게 효과를 볼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전쟁 양태는 답보상태에 빠져 지루한 공방전으로 이어졌다. 코카서스에서도 손바닥만 한 체르케스 땅은 후퇴할 곳이라곤 바다밖에 없는 고립무원 가운데서도, 지도에서 지워질 것 같으면서도 무너지지 않고 끈질기게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러시아를 질리게 만들었다.

이렇게 러시아군이 해상에 집중하는 사이에 체르케스는 내부적으로 전열을 재정비하고 있었다. 1839년 겨울, 체르케스는 수도를 러시아군과 인접한 쿠반강 하류 인근 아나파로 정하고, 나투하이 영주인 하우디코 만수르를 새로운 연맹 지도자로 선출하였다. 아나파로 수도를 정한 것은 더 이상 물러서지 않겠다는 강력한 항전의 표시였다. 만수르는 취임 연설에서 ‘우리는 결코 순종하지 않을 것이며 온 세상이 우리를 버리고, 우리 조국이 파괴되고, 우리가 추방되더라도 끝까지 싸울 것이다’라고 천명하였고 그 일환으로 수도를 아나파로 정한 것이었다. 이런 여새를 몰아 1840년 2월 소치 북쪽 프세주압세강어귀에 있는 라자레프스키 요새를 습격하였다. 3개월 전 체르케스인 무사 쇼켄이 러시아군에게 전향의 뜻을 밝히고 요새에 잠입하여 첩자 활동을 하고 있었다. 요새 안에는 중대 규모의 러시아군과 코사크군 그리고 다수의 대포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거사일이 있던 날 밤, 첩자 쇼켄은 요새 밖으로 나가 체르케스군을 데리고 안으로 잠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야밤에 기습을 당한 요새는 힘 한번 쓰지 못하고 파괴되었고 살아남은 러시아군은 혼비백산하며 도망을 쳤다. 당시 긴박한 상황에 대해 탈출에 성공한 마르첸코 대위가 상부에 보고한 문서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다. 하지만 러시아군은 코카서스 산맥으로 숨어 들어간 체르케군을 향해 보복 공격을 하였고 12개의 마을을 초토화시켰다. 이런 게릴라 형태의 전투는 계속 반복되었다.

1840년 3월, 체르케스군이 공세를 늦추지 않고 곧이어 미하일로프스키 요새를 공격하였다. 이 교전에서는 폴란드에서 온 군사 고문이 공성전에 대한 전술 노하우를 전수하였다고 한다. 그 요새는 라자레프스키 요새 보다 규모가 훨씬 더 컸다. 러시아군 4개 중대와 8대의 대포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체르케스군도 1만여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성전은 훨씬 많은 병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함락시킬 수 없었다. 새벽 4시, 경계병이 졸음의 한계에 다다라 있을 때 체르케스군은 여러 조로 나누어 사다리를 가지고 장벽에 접근하였지만 이를 알아차린 러시아군은 그들을 향해 발포를 하였다. 이에 체르케스군은 일제히 장벽을 공략하였고 러시아군도 물러서지 않고 완강히 저항하였다. 이렇게 공성전이 시작되었지만 공성전에 익숙한 러시아군의 방어선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고 이에 체르케스군은 후퇴를 해야만 했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전력을 가다듬은 체르케스군이 다시 공격하여 겨우 장벽 위에 오르는 데 성공하였으며 치열한 백병전이 뒤따랐다. 하지만 서로 밀고 밀리는 백병전이 계속 진행되다가 결국 체르케스군이 마지막 저항선을 뚫지 못하고 물러나야만 했다. 그리고 다음날 잠시 숨 고르기를 한 체르케스군은 다시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번엔 기마병을 이용하여 장벽에 접근하는 방법을 시행했는데, 마침내 고립된 러시아군의 마지노선은 무너졌고 요새 문도 열리면서 미하일로프스키 요새는 함락되었다. 3시간 동안 백병전이 펼쳐진 끝에 러시아군은 거의 섬멸되었다. 이렇게 전세가 완전히 넘어갔다고 판단한 러시아군 장교 아르힙 오시포프는 화약고를 스스로 폭발시켜 자폭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한 요새 사령관인 니콜라이 리코는 체르케그군에게 생포되었지만 며칠 후 당시 입은 부상으로 사망하였다. 자폭한 오사포프는 추후 러시아 전쟁사에서 불멸의 용사로 칭송받았다고 한다.

이후에도 체르케스 지역 곳곳에서 전투는 계속 이어졌다. 쿠반 평원에서 러시아군이 체르케스 마을을 공격하자 산악지역에 있던 체르케스군이 평원으로 내려와 러시아군을 공격하는 패턴이 지속되었다. 하미시에서는 5,000명으로 구성된 체르케스군이 게릴라 전술로 18,000명의 러시아군을 공격하여 기마병 3,500명을 살상하였고, 이에 나머지 러시아군은 함선이 정박해 있는 스코차 요새로 후퇴하였다. 이런 가운데서도 체르케스 지도자 이스마엘 베르그제는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기울였다. 무엇보다 평화를 원했던 그는 러시아군과의 협상을 주도하여 테이블 앞에 앉았지만, 러시아군으로부터 영국의 도움만 원하는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비아냥을 들었다고 한다. 이에 자존심이 상했던 그는 더 이상의 협상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러시아는 애초부터 전쟁을 끝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러시아는 오히려 체르케스에게 영국과 오스만과 관계를 끊으면 전쟁은 종식될 수 있다고 역 제안을 했지만 베르그제는 그것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부 의사를 밝혔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알 수 있듯이 상대방이 기가 질리도록 집요하게 물로 늘어지는 특유의 러시아의 전술과 속셈을 알 수 없는 모호한 전략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전략적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리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3.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다

체르케스 전쟁은 러시아의 북코카서스 정복 전쟁 중의 일부였다. 동쪽에서도 체첸과 타게스탄인들이 러시아의 침공을 힘겹게 견디어내고 있었다. 1840년대 당시 체첸-다게스탄과 체르케스는 러시아와 조지아, 아르메니아 등에 둘러싸인 채 섬처럼 고립되어 있었다. 러시아는 체첸과 체르케스 사이에 있던 카바르니아를 완벽하게 정복하여 남쪽 진출의 길목을 마련한 후 오스만과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확보한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와 그리고 칸국에 속하는 나흐츠반과 카라바르 등을 식민지화시켜놓은 상태였던 것이다. 체첸과 체르케스는 고립무원인 상황에서 마지막까지 러시아의 공세를 막아내고 있었다. 그곳은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마지막 남은 문제의 땅이었다. 이제 시간만이 문제일 뿐 그들의 운명은 과거로 되돌릴 수 없었다. 오스만과 페르시아가 양분하고 있던 코카서스는 이제 러시아가 통째로 삼킬 상황에 직면해 있었던 것이다.

당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던 체첸은 이미 오래전부터 강력한 이슬람 정교일치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공국 규모의 공동체였다. 이곳의 이맘은 코카서스의 이슬람 문화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이슬람의 정통성을 인정받고 있었다. 이에 위기에 처한 이슬람권을 알라의 이름으로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체체 이맘이 발 벗고 나섰다. 당시 체첸의 이맘은 샤밀이었다. 그는 가자 무하마드, 함자트 베크에 이어 3번째 이맘이었다. 그의 이슬람의 통합 추진은 저항의 축을 형성하고자 하는 목적으로서 위험에 저한 체르케스 지도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상대적으로 이슬람을 늦게 받아들인 체르케스인은 이맘 샤밀의 통합 운동에 동참하기로 결정하고 그를 최고 지도자로 인정하였다. 그렇게 해서 이맘 샤밀은 대리자 혹은 대리 통치자라고 불리는 나이브를 파견하여 체르케스를 통치하게끔 하였다. 하지만 이맘 샤밀이 1842년과 1845년 두 번, 하지 모하마드와 슐레이만 에펜디를 나이브 자격으로 체르케스에 파견하였지만, 체르케스의 기득권 세력이 그 나이브의 권위를 순순히 수용하지 않는 등 갈등과 분열의 문제점만 노출시킨 채 결국 결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1846년 하우두코 만수르가 사망하자 차기 지도자 선출 과정에서 권력다툼으로 인해 내분이 발생하여 분열조짐을 보이고 있을 때, 규모가 가장 큰 압자흐에서 이맘 샤밀에게 이 문제를 해결할 나이브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1848년 이암은 무하마드 아민을 압자흐의 나이브로 임명을 하였다. 이에 다른 영지에서도 아민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압자흐로 몰려들었다. 하나의 체르케스 혹은 하나의 무슬림 코카서스를 원하는 사람들이 알라를 중심으로 뭉친 것이다. 그렇다고 완전체가 되어 단일대호를 형성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하고 본격적으로 통일된 지하드를 알리는 일성이었다.

체르케스인은 무하마드 아민에서 절대적인 통치권을 부여하였다. 압자스, 마호쉰, 예게루크웨이, 첨가이와 함께 나머지 소규모 영지에서도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샤프수그는 아민의 영역 안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지원을 약속하고 물심양면으로 그들을 도왔다. 완전한 지배권을 얻은 아민은 자신이 운영하던 무지타지크 부대를 데리고 와서 체르케스의 전력을 증대시켰고 또한 이슬람의 코란을 심도 있게 전파하였으며 이와 더불어 과거 왕정시절의 적폐에 대해 개혁적인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아민은 대 러시아전에서 방어에 치중하는 전략을 버리고 선제공격 전술로 전환하여 부임 다음 해인 1849년 내내 러시아군을 100여 차례에 걸쳐 공격하였다. 그리고 항상 그렇듯 러시아군의 보복 공격을 감내하였다, 아민은 이런 보복을 무서워하면 영원히 러시아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전략적 판단을 했기 때문에 강대강의 대결 양상을 고수하였다.

이런 탈레반적인 강경파 아민의 등장에 러시아 군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체르케스의 저항도 지긋지긋한데 아민이 나타나 문제의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에 러시아군은 전략전술을 다각도로 구사하였다. 그중에 하나가 내분 조장이었다. 체르케스가 다양한 형태의 가치관을 가진 영지들로 구성된 연합체라는 구조적 특성을 활용하여, 아민 정권에 반대하는 기득권 세력을 규합하는데 주력하였다. 아민 등장 후 권력의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던 불만 세력을 명확하게 구분하여 그들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하였고, 정권을 전복시키면 다시 권력과 부를 쥐어주겠다고 달콤한 미끼를 던졌다. 사람이 사는 어디서나 권력의 달콤함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세상이 무너지더라도 권력욕은 없어지지 않는 법이다. 그렇게 해서 아민의 반대 세력은 러시아의 제안을 하나 둘 받아들이면서 아민을 비토 하기 시작했고 그런 분열적 상황은 행정체제가 붕괴되는 상황까지 이르게 했다. 그런 갈등 위기는 내분으로 치달아 결국 내전 형태의 사태까지 직면하게 되었다. 보호국을 자처하는 오스만은 여전히 우유부단한 태도를 취하였고, 러시아의 이간질은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그렇게 체르케스가 분란에 휩싸여 있을 때 전운이 감돌고 있던 흑해의 크림 반도에서 기어코 전쟁이 발발하였다. 그 전쟁의 결과는 체르케스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만들었다. 여기서 크림전쟁에 대해 다 언급할 수는 없고 간략하게 집고 넘어가지면,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러시아의 지속적인 남하를 막기 위한 오스만의 고육지책이었다. 러시아는 흑해 서쪽 해안을 따라 남하하기 위해 발칸반도에서 지속적으로 국지전을 유발하며 분쟁을 유도하였고, 1853년 7월 기어코 몰다비아를 점령하고 도나우강을 건너는 도발적인 상황을 만들었다. 오스만의 속국이었던 그곳이 러시아의 손에 들어가자 발톱 빠진 사자로 전락한 오스만은 전전긍긍 갈필을 못 잡고 있었다. 동유럽에서 나폴레옹 군을 격파한 이후 위협적인 존재로 부상한 러시아의 군사력은 오스만 군을 압도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경찰국가 행세를 하던 영국이 등장하여 오스만에게 부채질을 하였다. 프랑스, 이탈리아와 함께 연합군을 형성하여 참전할 것이니 전쟁 선포를 하라고 부추긴 것이다. 프랑스의 외면적인 참전 명목은 로마 가톨릭의 종주국으로서 동방기독교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러시아의 종교적 팽창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당시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한 포퓰리즘의 일환으로 오스만 술탄에게 서방교회의 종주국을 앞세워 예루살렘의 지배 권리를 요구하였고 이에 술탄은 수용하였는데, 이를 지켜본 러시아는 오스만의 이런 결정을 강하게 규탄하였고, 이런 종교적인 대립은 영국과 프랑스로 하여금 참전의 빌미를 제공하기에 이른 것이다. 아무튼 내적으로는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저지하기 위해 서유럽 열강들이 고육지책으로 총칼을 들 수밖에 없는 정치적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더 이상 밀리면 유럽의 지도는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한 문장으로 설명하면 크림전쟁은 유럽 제국주의자들 간의 파워게임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전쟁은 1856년 결국 러시아의 항복을 받아내고 종식된다.

크림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권위가 땅에 떨어졌던 무하마드 아민의 권력이 되살아났다. 오스만 술탄이 아민과 이맘 샤밀에게 코카서스 전선에 참전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므로 해서 아민은 통치권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민이 지휘하는 체르케스군은 흑해 연안의 러시아 요새를 타격하면서 역설적이게도 종교문화적으로 이질적인 서유럽 연합군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아직 국가 형태의 조직이 아니었지만 오스만 군의 일부로서 참전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오스만 술탄은 아민을 신뢰하지 않았다. 권력욕이 강하고 고집에 셌던 아민이 언젠가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에 술탄은 과거 아드리아노플 조약 이후 오스만에 망명 와서 체르케스의 독립을 위해 외교전을 펼치고 있던 세페르비 자네코를 소환하여 체르케스 현지에 지도자로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아민의 체르케스를 믿을 수 없어서 자네코를 중심으로 체제를 갖추도록 강권한 것이다. 술탄의 그런 조치는 아민으로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다. 자신들의 지도자를 오스만 술탄이 임명한다는 것 자체부터 받아 줄 없는 반정통적인 행위였고 권위 또한 정당성을 담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르케스 내부에서는 아민의 반대세력을 중심으로 자네코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이로 인해 또다시 심각한 내분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불만이 하늘을 찔렀던 아민은 술탄에게 이런 부당성을 항의하고 철회할 것을 주장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술탄은 그의 청원을 받아주지 않았다. 이에 아민은 전쟁 와중에도 바다 건너 오스만으로 직접 가서 술탄을 만나 가신이 될 것을 충성맹세 하였고, 압둘 메지드 1세는 관대함을 표하는 뜻으로 그에게 파샤라는 새로운 직함을 주었다. 술탄은 오스만 내부적으로는 탄지마트 개혁을 감행하여 역사에 남을 인물이 되었지만 체르케스에 대한 이해와 결정은 변방의 소수민족 대하듯이 무지에 가까웠다.

이런 술탄의 우유부단함은 체르케스의 내분을 더욱 가속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렇게 해서 자네코 파와 아민 파로 갈라진 체르케스는 내전을 방불케 하는 심각한 갈등에 빠져들어 셰므즈, 수프강, 투압세에서 무력 충돌이 일어나 양측에서 많은 사상자를 내는 상황까지 다다랐다. 폭력을 동반한 이런 내분은 결국 자멸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이제 체르케스는 응집력을 잃고 모래알처럼 산산이 부서졌으며 치유할 수 없는 상처만 남기게 되었다. 러시아의 내부 분열 전략과 오스만 술탄의 고민 없는 선택은 약소민족인 체르케스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내전 상황은 자네코파의 우세로 나타나면서 아민은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오스만으로 도피를 하였다. 이후 술탄에게 지원을 요청하였지만 이런 사실을 인지한 러시아 대사가 아민을 체포할 것을 오스만 당국에 강력하게 요구하였고 이에 오스만 경찰은 마지못해 그를 체포한 후 아예 시리아로 추방해 버렸다. 하지만 아민은 이에 굴하지 않고 체르케스로 다시 돌아와 재기를 노렸지만 결국 모든 게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자신의 군대인 무르타지크도 와해되어 뿔뿔이 흩어졌다. 이렇게 체르케스의 혼란한 틈을 이용해 러시아군은 자신에게 협조한 세력을 등에 업고 피를 최소화하며 체르케스를 합병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제 스스로 무너진 체르케스는 허무하게 100년 동안 이어져 오던 항쟁을 무색하게 만들면서 완전히 러시아의 손에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평화를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러시아에 협력한 체르케스의 우파 세력은 러시아에서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자신의 모든 역사를 삭제하는 대추방의 원흉이 되었다. 물론 적극적으로 협력한 지도자급은 러시아로 이주하여 미래를 보장받았지만 대다수의 지지자들은 디아스포라의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체르케스의 운명은 이제 스스로 도모할 수 없을 지경에 놓였고, 도마 위에 올려놓은 생선처럼 러시아의 칼질만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후속담을 잠깐 언급하자면, 저항의 의지가 완전히 꺾인 무하마드 아민은 러시아에게 백기를 들고 목숨만 부지한 채 오스만으로 이주하여 세상을 등지고 살다가 1901년 83세로 자연사하였다. 그의 정적이었던 세페르비 자네코는 오스만 술탄에게 버림을 받고 러시아에 마지막까지 항거하다가 1860년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결국 사망하였다고 전한다.

체르케스가 러시아에게 완벽하게 넘어간 것은 내분이 결정적이었지만 무엇보다 외적으론 크림전쟁 후 체결된 파리조약이 합병 시간을 단축시킨 것은 분명했다. 1856년 발효된 파리조약의 중요한 내용엔, 흑해를 중립지대로 만들고, 비무장화를 하는 차원에서 모든 군함의 항해를 금지시키고, 러시아는 체르케스 해안 요새 구축을 금지하고, 또한 아드리아노플 조약을 파기하여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를 오스만에게 반환하다는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코카서스 문제는 전쟁 이전의 국경으로 돌아간다고 적시하였다. 사실 이 조약에서 체르케스의 존재는 미미했다. 영국은 체르케스를 독립국가로 만들어주고 싶어 했지만 프랑스는 이에 찬성하지 않았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영국의 의도는 그렇게 해서 무산되었다. 러시아도 체르케스의 독립만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고 강경한 자세를 취하였다. 몰다비아처럼 오스만에게 반환할 수 있는 당위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국제적으로 애매모호한 상태였던 체르케스는 사실적으로 러시아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왕정이나 공화정을 유지하며 하나의 국가로서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은 상태였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었겠지만 당시 체르케스는 오스만과 러시아 사이에서 모호한 취급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체르케스의 운명은 타의에 의해서 결정지어졌다. 치명적인 내분과 국제정세에서의 소외된 현실을 극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4. 대추방

러시아의 타민족 추방 정책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그들만의 독특한 형태의 식민통치 스타일이었다. 18세 중후반부터 이어져 오던 러시아 오스만 전쟁에서 매번 승리했던 러시아가 1783년 크림반도를 접수한 후 그곳에 상당한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던 타타르인을 오스만으로 강제 추방한 사실이 있었다. 흔히 크림 타타르인이라고 불리는 타타르인은 몽골계를 자임하는 민족으로서 유럽인이 그들을 그렇게 지칭한 것이다. 타타르인의 추방은 이후 100년 동안 꾸준하게 진행되어 인구의 대다수인 80만 명까지 증가하였고 20세기 초에야 중지되었다. 그들은 오스만을 비롯해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으로 디아스포라를 형성하면서 생존을 이어갔다. 이런 추방은 이주라는 명목으로 이후에도 전 러시아에 퍼져 20세기 중반까지 이어졌고 그중에 고려인 이주도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러시아의 소수민족 이주 역사는 인종청소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런 러시아의 강제 이주 정책은 불가역적 식민지 러시아화의 일환이었다. 일반적으로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미지 정책을 펼 겨우 원주민을 상수에 두고 식민지 통치를 하는 게 통상적이었지만 러시아의 경우는 원주민 없는 자신들만의 식민지 세상을 도모하였다. 월래 살던 원주민 다수를 다른 곳으로 강제 추방하고 그곳에 러시아인이나 자신에게 우호적인 민족을 이주시켜 모든 인플라를 다시 구축하고 정착시킴으로써 새로운 사회 창조를 추구하였고 또한 무한한 식민지의 지속을 원했다. 체르케스도 이런 러시아화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그들은 보다 완벽한 러시아화를 도모하여 항구적인 안정과 그로 인한 장기화된 전쟁의 여러 가지 부담감을 해소하고 싶었다. 체르케스인의 항전은 러시아를 지긋지긋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일말의 위험요소도 완전히 제거된 보다 청결한 식민지를 원했는지 모른다. 자신들의 평화로운 공간을 구축하기 위해 폭력적인 인종청소쯤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식민지 정책 기조에 편승하여 1857년 드미트리 밀류틴은 체르케스에서의 원주민 대량 추방 아이디어를 차르에게 제안하였다. 새삼스러운 아이디어는 아니었지만 대외적으로 대추방의 시작을 선포하는 의미에서의 제안이었다. 생산적인 농민을 새롭게 정착시키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체르케스인을 완벽하게 청소하여 적대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그럼으로써 완전한 정화를 이루어낼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정화는 수질을 정화하듯이 인적 환경을 전환적으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정화해야 깨끗하고 안전한 환경을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밀루틴의 제안에 알렌산더 2세는 기다렸다는 듯이 지지하였고, 1861년 6월 공식적으로 정착지 식민지 러시아화 및 기독교화 정책을 발표하고 시행하였다. 하지만 이미 전부터 체르케스의 추방은 체계적으로 시행되고 있었다. 수많은 러시아의 지도층 인사들이 계속적으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한 마디씩 하면서 인종청소의 분위기를 띄웠다. 그들은 체르케스인을 포함한 북코카서스인에게 인종주의적인 표현을 서슴없이 발설하였다. 그들은 야만적인 민족이어서 러시아화의 일원이 될 수 없고, 설령 재교육을 한다고 하더라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재정적으로도 불필요하게 낭비하는 것이므로 최소한 50%는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왕족인 코추베이 같은 경우는 체르케스인은 마치 미국의 인디언과 마찬가지로 길들일 수 없는 미개인이고 그것을 감안할 때 말살하는 것만이 해결책이며 그것은 또한 평화를 유지하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설파하였다. 또한 전쟁 영웅 예르몰로프는 러시아에 충성하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하는 산악인에게 자유를 주는 가장 쉬운 방법은 오스만으로 이주시키는 것이라고 비아냥거렸는데, 그 말은 코카서스에서도 가장 저항적이었던 산악인을 말살하는 것만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복이라 논리였다. 그리고 밀류틴은 ‘정복되지 않는 부족들이 매년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에게 적대적인 산악인의 제거 차원에서 체르케스 밖의 이주 장소를 찾아야 한다.’ ‘바다에 이주자들이 많을수록 앞으로 정복 지역을 관리하기 위한 어려움은 줄어들 것이라 생각한다.’라고 주장했고, 이밖에도 ‘설사 그들이 원할지라도 산악 민족들을 평원으로 이주시키는 것보다 오스만으로 완전히 쫓아내는 것이 훨씬 더 이롭다.’라는 등의 주장들이 지도층을 중심으로 러시아 주류사회에 퍼져나갔다. 이런 범사회적인 프로파간다는 장기적인 평화와 정착을 위한 당위성을 확보하여 마치 진실이나 정의처럼 러시아 사회를 세뇌시켰고 자유로운 사고를 차단하였다. 그렇게 해서 그들의 국가주의에 기반 한 제국주의적 의식은 확증 편향을 낳아 자신들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를 정도로 이성을 무감각하게 만들었다.

사실 1859년 러시아는 오스만 정부와 체르케스인 4만~5만 정도를 오스만으로 이주시키기로 협의를 거의 마친 상태였다. 당시 오스만은 기독교 국가들과 많은 전쟁으로 인해 상당한 영토를 잃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노동인력이나 군사 병력도 고갈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이로 인한 노동력 대체나, 내외부적으로도 다양한 민족들의 무장봉기를 제압하기 위한 충분한 병력도 인구 증가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또한 상대적으로 동방정교회 인구 비율이 증가함으로써 동반되는 그들의 영향력을 제어하기 위해서도 무슬림 인구의 증가도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렇게 러시아와 오스만은 적국임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필요성 부합에 동의를 하고 체르케스인과 체첸인의 이주에 합의를 도출할 수 있었다. 다만 당초 최대 5만 명을 합의했지만 나중에 이 숫자는 무의미해졌다는 점이다.

이렇게 오스만과 러시아가 서로의 충족에 대해 합의를 하고, 1861년 코카서스 전체 이주 총사령관에 미하일 미콜라예비치가 임명되었다. 체르케스 지역에는 니콜라이 예브도키모프가 실무 책임자로 부임하였다. 25년 동안 체첸 다게스탄 전선에서 잔뼈가 굵은 예브도키모프는 사병에서 시작해 장성급까지 진급한 입지전적인 인물로서 이미 체첸 다게스탄 지역을 제압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전쟁 영웅이었다. 더구나 모친이 코사크인이었던 그는 대추방 작전이 성공적으로 완료된 후 그에 대한 보상으로 8,500헥타르의 토지를 하사 받고, 황제로부터 코카서스 총독으로 임명과 함께 백작 작위도 받는다. 그만큼 그는 최종해결을 위해 영혼을 받쳤다는 의미일 것이다.


자신의 어두운 미래를 자각한 체르케스 지도자들은 이런 러시아의 정책에 극열하게 반대를 하였다. 마지막까지 남은 압자흐, 샤프수그, 우비흐 등의 영지 지도자들이 현재의 소치에서 의회의 일종인 메즐리를 개최하여 대책 회의를 했지만 뽀쭉한 수는 보이지 않았다. 오스만으로 사절단을 보내 영국 대사와 프랑스 대사를 만나 간절하게 도움을 청하였지만, 프랑스는 묵묵부답인 반면 영국은 그래도 희망적인 답을 내놓았는데 그것 또한 현실적이지 않았다. 분열된 체르케스를 통합한다면 독립국가로 인정하기 위해 프랑스와 협상하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한 가닥의 희망을 가진 체르케스 지도부는 메즐리를 다시 열어 15명의 장관으로 구성된 신생 국가를 선포하였고, 그리고 그들의 대표단이 2차례에 거쳐 러시아로 가서 차르를 만났지만 결국 거대한 벽을 확인하고 항복문서를 전달하고 돌아와야만 했다. 그 문서에는 체르케스의 모든 통치권을 차르에게 넘길 것이며 대신 자신들은 살던 땅에서 계속 거주할 수 있도록 요청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추방만은 막아야겠다는 의지였다. 하지만 급조하여 국가를 일방적으로 선포를 하긴 했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 자신을 도와줄 주변 국가들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마지막 회의를 하고 있을 무렵 그것마저도 폐쇄하기 위해 러시아군이 소치의 마지막 거점을 점령하고 파괴하였다. 이런 백척간두의 상황에서 한줄기의 빛이었던 영국은 더 이상 간섭하지 않았다. 크림전쟁이 종전된 지 몇 년 밖에 되지 않은 상황에서 다시 러시아와 대립하여 전쟁을 불사하는 행위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크림에서 이미 수십 만 명의 연합군이 목숨을 잃었는데 설령 영국이 긍정적이더라도 프랑스는 절대로 찬성하지 않을 것이란 것을 영국은 잘 알고 있었다. 체르케스가 일찍이 하나의 독립된 국가였다면 어떤 명목을 동원하여 프랑스를 설득하겠지만 체르케스는 그런 조건에 부합하지 않았다.

이제 대추방의 방아쇠는 당겨졌다. 적어도 500년 이상 대대로 삶의 터전이었던 땅에서 강제로 쫓겨나는 것은 체르케스인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 중에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나기로 마음을 먹은 사람들도 있었고 이미 이주를 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추방 과정에서 피를 부를 것은 당연했다. 러시아의 차르는 학살보다는 추방에 중점을 두라고 하달을 하였으나 현장에서의 지휘관들은 추방에 반대하는 체르케스인에게 부담감 없이 학살을 자행하였다. 흑해 해안으로 그들을 이동시키는 것은 러시아군의 입장에도 하기 싫은 궂은 노동이었다. 이미 인종청소가 시작된 마당에 그들을 죽인다고 표시도 나지 않고 죄책감도 들지 않아 살상은 너무도 쉽게 일어났다.

러시아의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러시아는 처음부터 체르케르인을 외국으로 추방하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러시아군이 체르케스를 거의 제압을 하고 있을 즈음에 처음 추방 지역은 쿠반의 대평원이었다. 상대적으로 순종적인 산악인들을 관리하기 편한 평원으로의 이주를 꽤 하고 60,000명 정도의 압자흐인을 그곳으로 이주시키려고 했으나, 막상 농경을 할 수 없는 열악한 거주 환경으로 인해 그들이 완강하게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곳은 러시아인이 보더라도 최소한의 의식주를 해결하며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계획을 포기하고 어쩔 수 없이 흑해 해안으로 이주시켜 오스만행 배를 타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 학자들은 무하지룬 측 종교적인 선택으로 이주하는 체르케스인들이 꽤 많았다고 했고, 대다수의 귀족들은 이 무하지룬을 선호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니까 종교, 경제, 정치적인 이유로 스스로 이주를 했다는 뜻이다. 일정 부분은 ‘전쟁으로 인한 사회정치적인 요인으로 귀족들이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주민들을 압박, 설득, 회유, 선동의 결과’로 오스만으로의 이주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결론은 러시아가 이주를 주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꽤 적지 않은 사람들은 무하지룬 형식으로 이주를 결정했다는 것으로서, 이런 주장은 대추방의 윤리적인 책임을 분산시키려는 자의적인 논리였다.

아무튼 러시아는 1862년 5월 ‘산악인들의 이주에 관한 법’을 발효하였고 이 법에 준거하여 오스만 이주를 돕기 위한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에 러시아 당국은 체르케스 난민을 운송할 선주들과 협상하였다. 인센티브는 물론이고 이동 과정에서 안전하고 신속하게 완료될 수 있도록 다른 목적의 선박들보다 선적과 항해에 우선권을 부여한다는 조건도 붙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선박은 턱없이 부족해 이주를 돕기 위한 위원회의 목표는 거의 사장되어 혼란만 가중시켰다. 이에 체르케스의 부유한 사람들은 아예 자비로 배를 빌려서 안전을 도모하며 오스만으로 스스로 이주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러면 체첸인 즉 북동 코카서스인들은 어떤 방법으로 추방을 당했는가이다. 그들은 체르케스인과는 달리 자발적으로 이주를 하는 경우가 많았고, 소규모로 조지아 도로를 이용하여 조지아나 아르메니아를 거쳐 오스만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또한 러시아 당국은 그들에게 이주하면서 필요한 숙식 의료 등의 비용을 지급하였고, 가축과 가재도구의 이동에도 불편함이 없도록 도와주었다고 한다. 그럼 왜 체르케스인에게는 육로가 아닌 바다를 이용하게 했을까. 추정이지만, 그들에게는 최소한의 자비도 아까웠는지 모른다. 위에서 언급한 러시아의 지도급 인사들의 발언을 유추해 보면, 이교도이며 아메리카의 인디언처럼 교화가 되지 않는 미개인이고 더구나 그런 하찮은 자들이 대러시아 제국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으므로 그들에게는 결코 한 톨의 자비도 필요 없었는지 모른다. 추방 과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추방이란 목표만이 중요했다.

이제 체르케스 전역에서 러시아군은 본격적으로 수많은 원주민들을 흑해 해안가로 내몰기 시작했다. 지도 제작자인 이바노비치 베뉴코프는 국가 테러와 대량 기아를 서슴지 않는 예브도키모프 사령관의 비인도적인 작전을 성토하였다. ‘일정 부분의 원주민을 남겨두기를 원했던 차르의 의중은 러시아군에 의해 차단하였고, 산악부족에게 산에서 살기 불가능해질 때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압력을 넣고 최종적으로는 무력으로 공격을 하였다’ 1862년 4월 이반 드로즈도프는 자신의 군대가 탄약이 떨어질 때까지 체르케스군 잔당을 학살하고 ‘공포와 재앙만이 산악인을 산에서 몰아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라고 자랑하는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그해 10월에는 러시아군이 추방을 거부하는 체르케스 마을을 공격하자 일부 원주민들이 평원의 고립된 숲으로 도망을 쳤는데 이를 본 예브도키모프 장군이 그 숲을 향해 무려 6시간 동안 포격을 하도록 명령하였으며, 그것도 모자라 그 숲에 불을 지르게 해서 결국 생존자 한 명도 없이 몰살시켰다고 한다. 이후에도 예브도키모프는 체르케스에서 산악인을 모두 추방하거나 아니면 반항하거나 도망치는 산악인은 끝까지 추적하여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이 시기에 동남부에서는 항복을 거부하는 체르케스 게릴라들이 러시아에 저항을 했지만 무의미한 준동에 불과했다.

1864년이 되자 러시아는 추방에 총력을 집중했다. 이 상황을 가능하면 빨리 끝내고 싶었다. 더 이상 지체했다가는 비용적인 측면은 물론이고 국제적으로도 도전을 받을 염려가 있었던 것이다. 그해 신년 초에 체르케스 지도자들이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에서 군사적 지원이나 적어도 인도적 지원을 간청하는 편지를 보내는 등 외교적 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영국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직 영국이 간섭할 여건이 조성되어 있지 않아 군사적으로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상황에 어떻게 바뀔지 아무도 장담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러시아군은 속도를 늦추지 않고 인종청소 작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이런 상황에서, 마이코프 근처 호스 계곡에서 우비흐의 남자를 비롯한 여자와 노약자들 전체가 마지막까지 추방을 거부하고 처절하게 항전하였지만 러시아군은 마을의 출구를 막고 포격과 사격을 하여 그들을 몰살하였다. 이 사건을 취재한 러시아의 기자는 이를 피의 바다라고 묘사하였다. ‘남자와 여자들은 무자비하게 학살당했고 강에는 피가 흘러내려 죽은 자의 몸이 피바다에 떠다녔다. 그럼에도 러시아군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아이들을 표적으로 삼아 대포를 발사함으로써 자신들의 본능을 만족시켰다’ 그 외에도 러시군에 포위된 어느 체르케스 마을은 항복을 거부하고 집단으로 자살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소치 근처에 있는 쿠바다 지역에서는 총과 무기를 들 수 있는 남녀노소로 구성된 체르케스인 2,000여 명이 기병과 보병 등으로 구성된 25만 명의 러시아군과 마지막 혈전을 벌였다. 1864년 6월 2일이었다. 그 교전에서 생포된 체르케스의 마지막 전사 100여 명이 공개적으로 처형되었고, 러시아군은 이를 자축하는 군사 퍼레이드들 펼쳤다. 이후 러시아군은 나머지 체르케스 마을을 파괴하고 초원을 불태웠고, 나무도 벌목하여 쑥대밭을 만들었다.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도록 불모지를 만든 것이다. 당시 전쟁에 참전했던 러시아 지휘관은 이렇게 증언했다. ‘1864년은 역사상 전례가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산악인 중 한 명도 이전의 거주지에 남아있지 않았고, 새로운 러시아인을 받아주기 위해 정화작업이 진행되었다’ 이렇게 추방을 거부한 체르케스인은 저항하다 학살되었고 살아남은 그들은 흑해 연안 항구로 대행진을 하였다. 그나마 자비를 베푸는 지휘관은 담당 지역에서는 살상을 자제했지만, 그럼에도 마을의 주택과 건물을 전부 파괴하고 강제로 그들을 해안으로 몰아냈다. 예브도키모프는 철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더 많은 군대를 보낼 것이라고 체르케스군에게 죽음의 경고장을 보냈다. 최소한의 가재도구와 노약자를 실은 우마차와 그리고 그것마저도 없는 사람들이 뒤섞인 채 거친 산악지역을 따라 해안으로 죽음의 행진이 길게 이어졌고, 행렬 뒤에서는 러시아군이 총칼로 돌아가는 길을 막고 있었다. 그들에겐 죽음 아니면 추방, 둘 중에 하나만을 선택할 수 있었다.

이렇게 코카서스 산악지역과 쿠반 평원에서 대다수의 체르케스인들이 강압적으로 쫓겨나 흑해 해안으로 거센 강물처럼 모여들었다. 북쪽의 노보로시스크와 나투하즈, 투압세, 남쪽의 소치에 이르기까지 해안 도시에는 수많은 체르케스 난민들로 인해 아수라장이 되었다. 어느 목격자에 의하면, 노보로시스크 항에 모여 있는 난민들의 풍경은 압도적이었고, 2,000명 정도로 추산되는 난민들이 혹독한 추위 속에서 풍찬노숙을 하고 있고, 전염병까지 창궐하여 죽어가는 사람들도 많이 보였고, 차갑고 습기 찬 땅바닥에 누더기를 걸치고 누워있는 젊은 여인의 몸은 식어가고, 그 옆에는 두 명의 어린아이가 있었는데 한 아이는 병이 들어 간신히 숨만 쉬고 있는 듯했고, 다른 아이는 죽어가는 엄마의 젖을 빨고 있었다고 기록을 했다. 그리고 강제수용소에 갇힌 사람들도 굶주림과 질병으로 쇠약해져 움직일 수조차 없었으며 그렇게 지쳐 쓰러지면 개들이 달려들었다고 중언했다. 그해 겨울은 기록에 의하면 1820년 이후 가장 추웠다고 한다. 또한 이미 도착해서 언제 올지 모르는 선박을 기다리는 난민과 뒤늦게 추방된 난민이 합쳐져 뒤섞이면서 대혼란이 일어났고, 식량을 가지고 온 난민들과 거의 몸만 지탱하고 온 부류들이 섞여서 삶과 죽음이 상존하는 지옥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러시아군은 식량을 지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예브도키모프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해안으로 끊임없이 체르케스인들 내몰았다. 이렇게 체르케스 땅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속절없이 사라졌다. 통곡의 추방이었다.

짧은 시간에 쏟아져 나온 수십만 명 혹은 그보다 몇 배나 많은 난민을 당장 실어 나를 수 있는 선박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처음 오스만과 약속했던 인원수보다 수십 배나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송 과정 또한 생지옥을 방불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러시아 정부에서는 오스만 이주를 돕기 위한 위원회를 조직하여 운송에 책임을 진다고 했으나 인원수가 폭증하자 두 손을 들고 오스만에게 떠넘겨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렇다고 오스만도 당장 이들을 처리할 능력이 없었다. 그렇게 체르케스 난민은 해안에 고립되었다. 처음에 약속한 이주에 대한 재정적 지원이 거의 무산됨으로써 난민들은 불가역 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마지막까지 챙겨서 가져온 물건을 러시아인에게 팔기도 하고, 30명 중에 한 명을 골라 아랍인에게 노예로 팔아서 만든 돈으로 선장에게 뇌물로 주는 경우가 많았고, 그러지 못한 난민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그 상황의 틈바구니를 노리고 있었다. 이렇게 운임이 뒷거래되면서 욕심 많은 선장들은 난민을 과적하는 경우가 만연하였다. 이로 인해 오스만에 당도하기 전에 침몰하는 사건도 여럿 있었다고 한다. 또한 어렵게 승선하는 데 성공하더라도 과적된 상황으로 인해 선상 환경은 최악이었다. 전염병과 질병과 기아로 목숨을 잃는 난민들을 수장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목격자들에 의하면 떠다니는 묘지라고 표현하였다. 어떤 선박에서는 30%의 난민이 오스만 땅을 밟지 못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러시아는 식량, 식수, 의료지원 등을 지원하지도 않았고 노력도 하지 않았다.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선상의 지옥 같은 풍경은 흑해를 피로 물들였다. 이런 가운데서 러시아 선원 1명이 전염병으로 사망하자 러시아는 자국의 선박 운송을 중단하는 결정을 내렸고 이후의 운송을 오스만에게 넘기는 이기주의적인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이를 보다 못한 오스만 상주 영국 대사가 본국에 선박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영국 선박이 긴급하게 투입되었고,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그리스도 자국의 선박을 흑해로 보내 인도적 운송에 동참하였다. 이렇게 아비귀환의 상황이 된 것은 러시아의 추방 작전 사령관인 예브도키모프가 너무 서두른 결과이기도 했다. 몇 달 늦추었다면 이런 참상은 그래도 약화시킬 수 있었다고 당시 언론인들의 분석하였다. 짧은 시간 안에 너무나 많은 체르케스인들이 강제로 물밀듯이 바다로 몰려나와 주체하지 못할 승선 전쟁이 유발되었다는 것이다.

체르케스 난민들은 살아서 오스만 땅에 도착했지만 그곳에서도 환영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던 그들은 라자레토(입국 전 수용시설)에 격리되기도 하고, 그 시설도 인원 초과로 더 이상 사람을 받지 못하자 임시숙소에서 최종 목적지로 이주할 절차를 밟으며 기다렸다. 이 과장에서도 상당한 수의 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체르케스인은 오스만이 필요로 하는 장소로 흩어졌고, 당장 수용하지 못한 잉여 난민들은 시리아, 이라크. 요르단 같은 지역으로 다시 강제로 이주하였다. 오스만 정부는 인도주의적인 이유로 러시아에게 강체 추방 중단을 촉구하였지만 예브도키모프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1864년이 지나가기 전까지도 계속해서 체르케스인을 한 명도 남기지 않고 해안으로 추방하였다. 빠른 시간 안에 정화작업을 완료하기 위한 그의 집착은 결국 대학살의 현장을 만들었다.

러시아 측 기록에 의하면 1830년 체르케스 지역 인구조사에서 400만 명 이상이었다고 하는데, 전쟁 중에 150~200만 명이 사망하였다고 추정하고, 오스만의 기록에 의하면 나머지 인구 중 100~150만 명이 추방을 당했는데 이 중에서 50%가량이 사망했다고 추정했다. 1897년 러시아의 인구조사에서는 체르케스 지역의 체르케스인 인구가 15명이라고 밝혔다. 이런 숫자를 종합해 보면 체르케스인 90%~97%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치 한 도시에서만 10만 명이었던 인구가 98명으로 줄어든 수치가 나왔다. 거의 동시에 감행된 체첸에서도 1847년 150만 명이었던 인구가 1867년 인구조사에서 11만 명으로 줄었다고 러시아 당국이 밝혔다고 한다. 체첸을 포함한 잉구시와 아르슈타 인구는 부족에 따라 적게는 60%, 많게는 100%까지 인구의 변동이 일어났다. 그렇게 소원대로 거의 완벽하게 인종청소가 완료된 북 코카서스 지역에 코사크인과 조지아인 등 동방정교회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하여 새로운 러시아화의 신세계를 건설하였다. 그래서 현재의 지도에는 카바르디노-발라카 공화국, 카라차예보-체르케시아 공화국, 소치 등의 이름이 체르케스의 과거 지도를 대체하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 체르케스인 후손 75만 명이 살고 있고, 튀르키에에 200만~300만 명, 요르단에 25만 명, 시리아에 8만~12만 명이 살고 있으며 다른 15개 국가에서 다양한 디아스포라를 형성하고 있다고 한다.


흔히들 러시아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단어 중에 농노제도와 차르도 있지만 놀랍게도 예술도 순위에 들어간다. 19세기만 보더라도 루빈시테인과 무소륵스키와 차이콥스키 같은 대음악가와 푸시킨과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로 대변되는 대문호를 가진 국가로 인식하는 게 보통이다. 19세기의 러시아는 나폴레옹의 침공을 비롯해 수많은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참전하였고, 무소불위의 절대왕권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예술가들이 억압과 통제를 극복하고 위대한 작품을 생산하였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서유럽을 광기로 몰아넣었던 인종주의를 수입하여 습득한 결과 코카서스인 학살과 강제 추방 그리고 이어진 유대인에 대한 포그롬 등을 유발하는 전대미문의 제노사이드를 창출해 내었다. 20세기엔 철학과 음악의 나라 독일에서 홀로코스트로 학살의 대미를 장식했다면 19세에는 바로 러시아가 대학살의 포문을 열었던 것이다. 20세기에 히틀러가 없었다면 아마도 러시아가 제노사이드 역사에서 독박을 썼을지도 모른다. 사랑과 평화를 설파했던 그리스도의 적자라고 자임하는 러시아에서 그 어떤 예술가나 지식인들도 체르케스인에 대한 탄압과 추방에 대해 인본주의적이거나 적어도 그리스도교적인 입장에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지 않았다. 1850년대 초반 젊은 시절 코카서스 체첸 지역에서 몇 년 동안 군 생활을 했고, 진심 어린 인류애를 행동으로 보여준 톨스토이도 동시대인으로서 러시아 정부의 무도한 인종청소에 대해 어떠한 입장도 밝히지 않았다. 차르의 전제정치에 굴복한 것인지 본래부터 소수민족에 대한 인권 따윈 의중에도 없었는지 모르지만 양심의 목소리는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다. 식민 지배를 당하며 살아도 억울한데 아예 야만적인 방법에 의해 학살과 추방을 당하고, 이후에도 전혀 생소한 세계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영위한 체르케스인에게 러시아인의 유력한 어느 누구도 참회하지 않았다. 그만큼 제국주의의 피가 여전히 그들에게 흐르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체르케스족이란 단어는 푸시킨이 쓴 서사시 ‘코카서스의 포로’에서 주인공을 포로를 잡은 적군의 부족 이름으로 등장한다. 1820년 당시 러시아 외무성 말단 공무원이었던 푸시킨은 약관의 나이에 당돌하게도 농노제와 전제정치에 대한 풍자 시를 써서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힌 후 페테르브르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예카테리노슬라브 주둔 사령부로 강제 전근을 보내진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시베리아로 유배를 보냈겠지만 그는 유력한 귀족의 자녀에다가 아직 나이가 어려 철 좀 들라는 차원에서 현재의 우크라이나 남쪽 아조프해와 접해 있는 예카테리노슬라브로 전근을 보내는 것으로 형을 감해준 것이다. 낭만주의 시의 교주인 바이런을 사랑했던 푸시킨은 머나먼 그곳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얼마 되지 않아 심한 몸살로 매일 끙끙 앓았다. 이를 보다 못한 그의 상관 니콜라이 라예프스키 장군이 마침 자신의 가족과 함께 2달간의 일정으로 코카서스로 여행을 떠나는데 그에게 요양 차원으로 함께 가자고 제의를 했다. 이에 그의 15살의 딸을 몰래 짝사랑했던 푸시킨은 수락하고 1820년 6월 장군의 가족과 함께 남쪽으로 치유 여행을 떠났다. 예카테리노슬라브에서 조지아의 트빌리시까지 가는 길은 멀고 험했다. 특히 쿠반 강과 대평원을 지나 코카서스 산맥을 넘는 구간은 당시 코카서스 전쟁이 진행 중이어서 수십 명 규모의 군대의 보호를 받아야 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는 3000미터~4000미터가 넘는 고봉들이 즐비한 코카서스 산맥을 넘으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이국적인 환경에 푹 빠졌다. 그렇게 지난한 여정을 거쳐 간 곳은 조지아의 트빌리시에 있는 유명한 휴양지였다. 그곳은 1,000년 전부터 조지아 왕국이 정책적으로 유황온천 도시로 개발하여 왔고, 실크로드의 길목인 그곳에 많은 상인들이 찾아왔으며 당시에도 60개의 온천장이 운영되고 있었다고 한다. 푸시킨은 이 휴양지에서 바로 ‘코카서스의 포로’의 서사를 구상하였고, 크림반도를 거쳐 예카테리노슬라브로 돌아온 후 집필하여 1822년에 출간하였다.

<코카서스의 포로>는 푸시킨을 러시아 문단에 데뷔시킨 의미 있는 작품이다. 자신에게 시 창작에 대한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그는 이후부터 15년 동안 다양하고 많은 작품을 생산했다. 이 작품은 낭만주의 요소가 농후한 서사시이지만 그렇다고 바이런적인 낭만이 주가 되지는 않는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젊은 러시아 장교가 어느 날 순찰을 나갔다가 원주민 저항군인 체르케스 부족에게 생포되고, 그 후 비참한 포로 생활을 하면서도 코카서스의 장대한 풍광에 매료되어 그나마 마음의 위로를 받는다. 그리고 체르케스 부족의 젊은 여인과 사랑을 나누게 되고, 대화 중 그 여인에게 러시아에서 사귀었던 애인이 있다고 고백하자, 그녀는 아직도 그 여인을 사랑하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포로는 솔직하게 아직도 그녀를 잊지 못한다고 대답한다. 서사는 여기서 급진전한다. 자신의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체르케스 여인은 그에게 사랑을 찾아 떠나라는 심정으로 탈출로를 열어준다. 그렇게 러시아 장교는 생각지도 않은 그녀의 도움으로 마을을 몰래 빠져나올 수 있었다. 바로 그때, 여인은 무심하게 떠나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강으로 스스로 몸을 던졌다. 이 소리를 듣은 남자는 뒤를 돌아보지만 ‘모든 것을 이해한다’고 중얼거릴 뿐 물에 빠진 그녀를 살리려고 하지 않고 러시아 군영을 향해 말고삐를 재촉한다. 푸시킨은 에필로그에서 이렇게 말한다. ‘굴복하라, 코카서스여, 예르몰로프가 오지 않느냐!... 모든 것은 러시아의 칼 아래 무릎을 꿇었으니, 코카서스의 도도한 아들들이여, 너희는 싸웠고, 처참히 멸망했도다... 너희들의 최후에 대한 어두운 전설 이야기를 드높여 선포하리니.’ 이 서사시는 언 듯 보면 문명세계에서 온 젊은 러시아인과 야생의 세계에서 사는 체르케스 여인의 낭만적인 사랑이 주제인 것 같지만 사실은 아니다. 작품에서 그려진 주인공의 러브스토리와 체르케스인의 삶의 모습과 그리고 대자연의 풍경은 단지 장식물에 지나지 않고, 또한 자아를 찾아 떠나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 같은 성장 스토리도 아니며, 오직 그의 관심사는 러시아인의 우월적 시각으로 본 러시아인의 초상이었다. 그는 당시 동생에게 쓴 편지에서 미개한 체르게스족이 겁을 먹고 이미 그들에게서 대담함이 사라지고 있다면서 1820년 현지의 소식을 전했다. 또한 당시 원주민에겐 저승사자와 같았던 코카서스 전쟁 사령관인 예르몰로프를 훌륭한 능력자라고 칭송하였다. 작품에서는 순화해서 체르케스인을 표현하지만 개인적인 편지에서는 수시로 미개한 체르케스인이나 산악인이란 단어를 습관적으로 입에 달고 이죽거린다. 그런 인종주의적인 편견은 당시 러시아인에게 보편적으로 인식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러시아의 대문호로 불리는 톨스토이도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1851년 젊은 날의 초상을 찾던 시절 체르케스와 인접한 점령지 체첸의 러시아 주둔군에 자원입대한 후 3년 가까이 군 생활을 했고, 이국적인 그곳에서 회심 같은 영감을 얻어 문학의 길로 들어섰다. 당시는 이미 대부분의 체첸 지역은 러시아군에 점령당한 상태였지만, 체르케스군은 러시아군과 대등한 전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톨스토이는 푸시킨의 <코카서스의 포로>를 잃고 문학적 영향을 받아 큰 줄기는 같지만 세부적으론 소설의 플롯을 가미한 <코카서스의 포로>라는 동명의 단편소설을 집필했다. 하지만 그 작품에서도 포로와 탈출에 중점을 둔 서사에 집중할 뿐 푸시킨의 작품처럼 제국주의의 폭력성과 그로 인한 피지배층의 복잡한 내면은 외면한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언론과 문화예술에서 자유주의를 만끽하고 있던 서유럽과는 달리 여전히 절대왕권의 전제정치에 매몰되어 있던 러시아에서 감히 비판적 목소리를 낼 수 없었겠지만, 그럼에도 문학예술 작가는 풍자와 비유적으로라도 인간의 보편적 가치와 정의를 표현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더구나 톨스토이는 인생 후반에 기독교를 기반한 인류애의 상징과 같은 존재로서 사랑과 비폭력을 설파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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