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트루가니니의 눈물

제노사이드

by 안호용

1.태즈메니아의 비극

2014년 6월 15일 자 세계일보 인터넷 판을 보면 ‘미 박물관, 100년 전 멸족 호주 원주민 두개골 3점 반환’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1950년 시카고 자연사박물관에서 영국의 박물관 수집가 A.W.F 풀러로부터 구입한 19세기의 태즈메니아인 유해였다. 그 기사에는 이런 인터뷰도 포함되었다. 필드뮤지엄의 유물 송환 담당 디렉터 헬렌 로빈스는 "당시 귀족들 사이에는 벽난로 선반에 태즈메이니아인 두개골을 전시하는 것이 유행이었다"며 " 일부에서는 인체 뼈가 특이 수집물로 간주됐고 인간 두개골은 당시 화폐단위로 개당 50 달러(약 5만 원)에 판매됐다"라고 설명했다. 1800년대 1달러는 현재 약 20~30달러에 해당한다.


호주의 태즈메니아인 유해 송환은 이미 20세기말부터 그들의 후손들에 의해 꾸준히 추진하고 있었던 연장선의 한 부분이었다. 19세까지 호주 대륙을 식민 지배했던 영국이 당시 수집한 수십 점의 태즈메니아인 유해를 국가적인 차원에서 추진한 결과, 소장하고 있던 자연사박물관은 10년이 넘는 반환 운동에 굴복하고 여러 법을 제정한 후에야 마침내 2007년 유해를 그들의 후손들에게 돌려준 것이었다. 그 과정도 지난했다고 한다. 그렇게 영국과 미국 등을 떠돌면서 박물관의 소장품으로 전시되었던 테즈메니아인들은 150년이 지나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수많은 유해들은 지금도 어느 부자들의 저택에 기이한 장식품으로 놓여 있을지 모른다. 그들은 왜 자신의 땅에 묻히지 못하고 머나먼 유럽에서 유령처럼 떠돌았을까.


19세기 초 당시 인종주의의 발상지였던 영국과 후발 주자인 여타의 제국주의 국가에서는 자신들이 개척한 식민지에서 미개인들을 데리고 와서 사육을 하며 오랑우탄처럼 인간 동물원 우리에 가두어 전시를 하였다. 또한 서커스의 괴물쇼처럼 리얼리티 쇼의 대상으로 삼아 문명인의 흥미를 유발하는 따위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성행하였다. 그러던 차에 다윈의 <종의 기원>이 세상에 등장하면서 생물학에 기반한 진화론이 확산되어 사회학적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이 형성되었다. 그에 힘입어 다윈의 배다른 외사촌 동생인 프랜시스 골턴이 우생학이라는 해괴망측한 인종주의의 결정판을 세상에 내놓기에 이르렀다. 멘델의 유전학과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학적 적자생존과 그리고 신의 뜻을 거스른 진화론으로 인해 인종주의는 과학적인 확신을 얻게 되었고 그에 따라 우생학이 미국과 독일로 확산되고 증폭되었다. 이런 기류를 타고 바로 태즈메니아인에 대한 관심도가 갑자기 높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다윈도 인류의 진화론의 입장에서 네안데르탈인과 더불어 태즈메니아인을 살아있는 화석으로 간주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인종주의의 계보에 따라 네안데르탈인으로 이어지는 인류 진화론에 태즈메니아인도 편승하게 된 것이다.


태즈메니아인의 골상은 오스트레일리아 본토 원주민과는 다른 형태로서 당시 인류학자는 그들을 진화의 속도가 더딘 호미닌의 일종으로 분류하였다. 처음엔 본토와 거의 같은 인종이었지만, 기원전 12,000년에 지구의 기온이 상승하면서 해수면이 높아졌고 이에 오스트레일리아 본토 사이에 바닷물이 들어와 고립이 된 후, 태즈메니아 섬은 새로운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를 해온 ‘잃어버린 고리’의 일종이라고 그들은 주장하였다. 테즈메니아인에 대한 진화론적 연구와 논란은 이제 ‘멸종한 인간의 중간 단계에 위치한 인간종’이라는 학설이 확립되면서 거의 정설이 되었다. 그들은 급기야 태즈메니아인을 ‘호모 프리미니지니어스’라는 새로운 인간 종으로 분류하였고, 네안데르탈인의 원형이며 인간의 기원에 가장 가까운 살아있는 인간 화석이라고 칭송하였다. 고생물학의 유배지이며 살아있는 박물관인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온 태즈메니아인의 유골은 인류 기원을 밝히는 증거물로써 중요한 해부학적 연구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미개한 인종이며 역사 속의 낙오자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 연유로 19세기 당시 태즈메니아에서는 순혈 원주민 유해를 취하려는 행위가 성행하였다. 태즈메니아인의 순수 혈통이라고 여겨지는 죽은 자의 시신을 마치 보물 찾기처럼 찾아 나서거나, 학살당한 그들의 시신을 기다렸다는 듯이 탈취하기도 하는 웃픈 상황이 펼쳐졌다. 태즈메니아인의 개체수가 극심하게 감소하면서 그들의 두개골은 희귀하고 아주 특별한 것이 되었다. 그중에 영국 자연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남성 래니와 여성 트루가니니 유해는 마지막 남은 태즈메니아인의 순수 혈통 유해로서 그 가치가 매우 높았다고 한다. 특히 마지막 태즈메니아인이라고 불리는 트루가니니는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생전에 자신이 죽으면 고향 땅에 필히 묻어줄 것을 가족들에게 유언했고 다행히 그렇게 이루어졌는데, 하지만 그녀가 사망한 후 며칠 뒤 그녀의 머리는 영국인의 손에 들어가고 있었다. 당시 유럽인은 그들이 멸절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이렇게 설명했다. 문명과 동떨어진 채 수만 년 동안 고립되어 야만성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동물처럼 미개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현대 문명을 수용할 능력을 상실하였고 이에 네안데르탈인처럼 멸절은 불가피했다고 말이다.


6만 년 혹은 7만 년 전, 아프리카를 탈출하는 데 성공한 호모사피엔스의 한 무리가 아라비아 반도를 거쳐 현재 동남아시아 대륙붕 지대인 순다랜드에 이르렀다. 그리고 여정은 다시 이어져 어느 씨족 무리가 남쪽으로 난 땅을 따라 이동한 후 바다를 건너 현재의 뉴기니아와 오스트레일리아가 연결되어 있던 사훌 랜드에 도착하였다. 인류학자들은 이 과정에서 호모사피엔스가 어떻게 당시 바다였을 것으로 확신하는 월리스 라인을 건넜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무리는 분명 사훌랜드에 당도하였다. 이주하는 과정에 호모 에렉투스의 아종인 솔로엔시스인과 플로레시엔시스인과 접촉했지만 전문 사냥꾼이었던 호모사피엔스는 그들을 다 물리치고 세상의 끝을 향해 계속 이동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기원전 12,000년 지구 환경이 홀로세에 접어들면서 해수면이 120미터 상승하여 그 땅은 순다랜드와 뉴기니 섬과 완전히 분리되었고 다시는 왔던 땅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렇게 고립된 채 1만 년 이상 더 지난 후 다시 그 땅에 또 다른 호모사피엔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바로 호모사피엔스 잉글랜드인이었다. 그들은 6만 년 전의 호모사피엔스와는 다른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는 피부가 하얀 종족이었다. 그렇게 오스트랄라시아에 도착한 그들은 원래 땅 주인이 아메리카 원주민보다 더 미개하다는 것을 알고 그들의 땅을 강제로 빼앗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대다수의 많은 선주민들이 저항을 했지만 대부분 학살되었다.


그들이 침략자에게 이길 수 없었던 것은 무기 체계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침략자들의 무기는 처음엔 화승식 머스킷 소총이었다가 라이프 머스킷으로 바뀌었고, 1850년경부터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스나이더 라이프와 마리니 헨리 라이프 같은 혁신적인 소총이 개발되어 빠른 연사가 가능해졌다. 또한 미국 남북 전쟁 당시 개발한 다연발이 가능한 환상적인 윈체스터 라이프도 수입되어 능력을 과시하였다. 하지만 원주민의 무기는 석기시대에 수준에도 못 미치는 무기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백인들이 침략할 때부터 창과 부메랑 그리고 단단한 나무로 만든 몽둥이인 와디 등이 전부였다. 더구나 태즈메니아에서는 아예 부메랑도 없었다. 그것은 그만큼 생존하는 데 폭력이 필요 없는 세계였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오스트레일리아 땅에서 그 흔한 활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인데, 오래전 호모사피엔스가 이 땅에 왔을 때는 활이 있었지만 활을 사용하지 않아도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수렵채집이 용이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용불용설처럼 퇴출된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순다랜드 시절까지만 해도 동물 사냥에 절대적이었던 활은 그 후 무용지물이 되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평화롭던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 어느 날 머스킷 소총을 든 백인이 들이닥치면서 무력충돌이 불가피해진 결과 결국 원주민들은 일방적으로 죽임을 당해야만 했다. 특히 초창기엔 백인의 기마병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고 한다. 일부 지역의 부족들은 아메리카의 인디언처럼 백인에게 빼앗은 머스킷 소총을 돼 사용하기도 했다고 하지만 월래 기계 같은 물품을 다루는 데 감각이 무뎠던 탓에 활용은 극히 미미했고, 다시 전향한 원주민 경찰들이 머스킷 소총을 가지고 탈영했을 경우에도 적절하게 사용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화약 무기류가 원주민에게 전해지는 것을 백인 정부에서 법적으로 철저하게 차단한 결과이기도 했다. 아무튼 이런 무기의 현격한 차이는 지배적인 전쟁 양상을 초래하여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게 했다. 그것은 전쟁이라고 할 수 없는 사냥이었다.


이 글에서는 태즈메니아와 퀸스랜드 두 지역에서 발생한 학살 사건을 다루면서 오스트레일리아에서의 전반적인 원주민 학살 문제를 개괄적으로 반추해 보고자 한다.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이 문명의 향기를 전혀 맡을 수 없는 머나먼 유형의 땅이었다면 태즈메니아는 그중에서도 더 극악한 유형의 땅이었다. 뉴사우스웨일즈 총독인 필립 킹은 1788년부터 영국 본국으로부터 수송되기 시작한 죄수들이 매년 증가하여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되자 1803년 8월 아직 미지의 땅이었던 태즈메니아에 추가적으로 형무소를 더 만들기로 작정을 하였다. 그 섬은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 여부를 알고 있었지만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하나만 해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에 태즈메니아 같은 섬 따위는 염두에 둘 형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섬이라는 자연적인 고립 상황은 형무소로서의 기능에 더해 이중적인 장점을 부여할 수 있었고 그것을 이용해 보다 악질적인 죄수를 분산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탐사 선발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된 조 보웬 중위는 그해 9월 49명의 인원을 데리고 고래잡이 선박을 이용해 태즈메니아 남쪽 해안가 깊은 곳에 접근한 후 현재 리스턴 코부라고 불리는 지역에 임시 주둔지를 구축하였다. 그 구성원 중에는 군인과 선원과 정착민 소수와 그리고 노동을 해야 할 죄수 24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다음 해 2월 보웬 중위의 상관인 데이비드 콜린스 중령이 정식으로 주지사로 임명되어 308명의 죄수를 데리고 그곳에 도착했다. 그렇게 태즈메니아에 처음으로 영국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곳은 사람이 온전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개천 수준의 강물은 식수로서 적당하지 않았고 우물을 파도 물이 잘 나오지 않았다. 토양도 경작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좋지 않았다. 음식과 주거시설은 나름 해결할 수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식수 문제는 적당히 넘어갈 수 없었다. 이에 콜린스는 죄수를 포함한 이주민을 데리고 다른 지역을 탐사하여 조사한 결과 현재의 호바트를 가장 적합한 장소로 정하고 정착지를 조성하였다. 그곳은 뒤로 1,000미터가 넘는 웰링턴 산이 자리 잡고 있어서 많은 물이 바다로 흐르고 있었고 북쪽으로는 농사와 목축을 할 수 있는 적당한 땅도 있었다. 그 과장에서 콜린스를 포함한 수백 명의 개척민들은 본토의 지원 없이 생존을 해야 하는 극한의 상황에 봉착해 아직 백인의 손이 타지 않는 거친 태즈메니아의 대자연과 사투를 벌여야만 했다. 이 와중에서 태즈매니아 원주민과 처음으로 무력 충돌하는 상황도 직면하였다. 현재의 역사가들이 명명한 리스턴 코부 학살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사건의 진상은 발생 후 26년이 지난 1830년 에드워드 화이트의 증언으로부터 밝혀지기 시작하였다. 당시 테즈메니아 주정부는 소문으로만 무성하던 이 사건에 대해 재조사 위원회를 구성하고 당시 관련자들과 목격자들의 소환하여 정밀하게 조사에 착수하였다. 이 조사에 가장 협조적이었던 사람이 바로 당시 초기 정착민 중에 한 명이며 사건의 당사자이기도 한 에드워드 화이트였다. 사건의 발단은 1804년 5월 3일 수십 명의 원주민들이 정착지 캠프 주변에서 자신들을 주시하며 위협적인 소리도 지르는 등 신경을 거슬리게 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어느 누군가가 그들을 향해 대포 몇 발을 발사하였다. 그 포격으로 원주민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사태는 ‘회복 불가능한 상황’으로 이어졌다. 그 후 원주민들은 멀리 도망가지 않고 기회 있을 때마다 정착지로 창과 돌을 던지는 등의 공격을 하였으며 이에 경찰은 머스킷 소총으로 반격을 하였다. 화이트는 이 사건으로 많은 원주민들이 죽고 부상을 당했다고 증언하였다. 그 예로 당시 정착지의 외과의사였던 자콥 마운트가렛이 원주민 시신을 두 개의 나무 상자에 넣어 시드니로 보냈다고 하는데 그 수만도 최소한 6명은 될 것이라고 역사가들은 추정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다른 사람들도 위원회에 나와서 증언을 했는데 적게는 2명 많게는 50여 명까지 원주민을 살해했다고 각각의 숫자를 밝혔다. 하지만 학살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에드워드 화이트의 신분이 신뢰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의 증언을 수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죄수 신분이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의 증언과 더불어, 상세하고 정확한 그의 일관된 증언은 충분히 신뢰를 확보할 수 있었고 이에 사건의 진상조사에 핵심적인 증언으로 채택되었다.


사실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던 사람들이 처음 조우하면 어디에서든 대부분 결과가 좋지 않다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때로는 죽음의 냄새가 진동하는 열악한 상황을 헤쳐 나가야 할 절박함에 사로잡혀 있던 불법거주자들과 그리고 자신의 땅을 침범한 괴상한 무리에 대한 경계심과 긴장감이 고조되어 있던 선주민이 아무런 준비 없이 조우했다면 적어도 양방은 그냥 물러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유럽인은 그들을 유해한 동물쯤으로 취급했을지 모른다. 당시 영국 당국은 식민지를 개척할 경우 그곳의 원주민을 학살하지 말고 가능하면 방어에만 치중하라는 지침을 현지에 내려놓고 있는 상황이었다. 다른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에서는 아직도 식민지에서 잔혹한 행위를 일삼고 있었지만 영국은 이제 조금은 정신을 차렸는지 상대적으로 비폭력(?) 정책을 추구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현지에서 그런 지침을 따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아무튼 리스턴 코부 사건에 대해 학살이란 개념 성립 요건을 갖추고 있는지 조차 애매하다고 주장하는 역사가들도 있지만, 당시 상황을 종합해 보면 폭력의 양상과 실체는 암묵적으로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불법을 감추기 위해 사실을 오염시켜 애매모호하게 만드는 것은 너무나 쉬웠고, 사건의 진상을 캐겠다는 당국의 의지 또한 미미했기 때문이다. 사건의 유력한 증인은 거의 모두가 가해 용의자였다는 점을 주목하면 사건의 진실에 다가가는 게 결코 쉽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원주민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영국인은 태즈메니아 호바트에 정착지를 순조롭게 구축하였다. 다른 식민지 땅에서의 개척보다는 한결 손 쉬었다. 죄수들을 더 많이 데리고 와서 포트 달리플, 포트 아서, 맥쿼리 하비 형무소를 건축하였고, 해군의 전함도 정박할 수 있는 기지도 건설하였다. 그렇게 빠르게 많은 건물과 농지를 개간할 수 있었던 것은 죄수들의 무상의 노동력이 절대적이었다. 죄수들의 숫자는 빠르게 급증하여 20년 후에는 80,000명까지 증가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정착민의 인구도 1824년에는 12,600명으로 늘어났고, 양 200,000마리, 소 50,000마리로 증가하였다. 정착민이 개척한 목장과 농장 면적도 몇 만 헥타르에 이르렀다. 그 숫자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 증가하여 1830년 기록에는 태즈메니아 땅을 30% 이상 잠식하여 죄수를 제외한 인구가 24,000명이 되었고, 양과 소의 숫자도 680,000과 100,000마리로 증가하였다.


이렇게 태즈메니아가 영국인에 의해 장악되고 있는 가운데 치안을 유지하는 경찰과 군인들의 숫자도 늘었고, 불과 20년도 안되어 처음과는 전혀 다른 환경이 조성되었다. 목장의 면적이 늘어남으로 해서 기존의 자연 생태계에 큰 변화가 생겨 캥거루를 비룻한 동물들의 개체수가 줄어들었고 수많은 나무들도 벌목되었다. 또한 부시레이저라고 불리는 탈옥한 죄수들이 무리를 이루어 산속에 살면서 강도짓을 일삼아 현상수배하기에 이르렀고, 그들을 전문적으로 추적하는 사냥꾼들이 활동할 정도가 무법이 활개를 쳤다. 부시레이저의 만행은 사회적인 문제가 되어 선량한 정착민을 공포로 몰아넣었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원주민과의 갈등이 증폭되었다. 원주민에게 영국인은 침략자였다. 처음엔 큰 충돌 없이 그들을 관망했지만, 침략자들의 숫자가 빠르게 늘어나면서 듣도 보도 못한 수십만 마리의 양과 괴물 같이 거대한 소를 방목하는 목장들이 계속 자신들의 사냥터를 잠식하여 삶의 터전이 급격하게 줄어들자 생존에 대한 위기감에 휩싸이게 되었던 것이다. 자신들의 가장 좋은 식량 자원이었던 캥거루의 개체수도 줄어든 것은 물론이고 수렵채집 할 땅도 백인들이 강제로 빼앗아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백인들이 점거한 땅은 수만 년 동안 자손 대대로 살아온 자신들의 땅이었다. 이제 그들은 이 땅에서 지배적인 최상의 포식자가 아니었다. 사람이 사는 좋은 조건은 원주민이나 백인이나 다를 게 없었다. 그럼에도 공존이라든가, 타협이라든가, 보상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이에 식견 있는 원주민들은 이런 불합리한 상황을 수습하려고 했지만 영국인들은 그들을 야만인 취급을 하며 무시하기 일쑤였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들은 아프리카 밀림에 사는 부시맨 보다도 못한 원시인에 불과했다. 그렇게 자신의 땅을 빼앗기고 식량마저 부족하게 되자 선주민은 부족한 식량을 구하기 위해 불법점거자들의 목장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들에겐 생존이 달린 문제였다. 이렇게 시작된 갈등과 다툼은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는 식으로 복수와 또 다른 복수를 낳게 했다.


이제 선주민과 불법거주자는 서로 살아남기 위해 폭력적인 대립을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양상은 일방적이었다. 과거 중남미나 아시아에서는 원주민과의 공존을 도모하기도 했지만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 정책은 미국처럼 철저하게 분리 정책을 고수하였다. 분리정책이라는 것은 인종주의에 기반을 둔 실천적 행위로써 21세기에도 해소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아무튼 생존 게임이 된 이런 상황에서 절박했던 원주민 부족들은 자신의 땅에 세워진 백인 목장을 습격하여 양이나 음식물 탈취를 시도하였고 이 과정에서 무력충돌이 일어나 서로 죽고 죽이는 경우가 비일비재해지기 시작했다. 이에 응징이라는 이유로 불법거주자들은 피고용인들을 시켜 주변의 원주민들을 소총으로 사냥하였다. 마치 경작지를 침범하여 해코지를 한 멧돼지나 야생동물을 사냥하듯이 그들도 그들에게 가차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그들은 위험을 방지하고 억제하기 위한 정당방위의 차원이라고 주장을 했지만 적어도 원주민을 동물처럼 취급한 것은 속일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살상을 하더라도 종교적으로나 인륜적으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은 것이다. 이런 형태의 학살을 두고 국경 학살이라고 역사가들이 명명한다. 자신의 부족이 다른 부족으로부터 죽임을 당하면 필히 복수를 해야 하는 전통적 규범에 따라 목장을 습격하여 영국인을 죽이는 경우가 도돌이표처럼 반복되었다. 복수는 복수를 불러왔지만 결국 선주민들만 파리 목숨처럼 속절없아 죽어 갔다.


더구나 원주민을 더욱 분노하게 만든 것은 백인들의 성폭력이었다. 죄수들의 숫자는 예외로 하더라도, 불법거주자 남자의 수는 여자들보다 훨씬 많아 기록에 의하면 남녀 비율이 6:1이었다고 한다. 이런 불균형의 남녀 비율로 인해 원주민 여성들이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 목장주 정도 되는 사람들이나 고위 공직자들은 가족과 함께 거주하였지만 그렇지 정착민들은 그런 형편이 되지 못해 욕정의 분출구를 원주민 여자들에게서 찾은 것이다. 발정 난 수컷 늑대처럼 백인들은 욕정의 야수가 되어 원주민 여성을 납치하고 무자비하게 강간을 일삼았다. 그런 그들의 행위를 보고 역사가들은 탐욕스러운 식욕(voracious appetite)이라고 일갈하였다. 그런 납치 사건을 겪은 후 원주민 남자들이 보복을 하기 위해 백인들을 공격하였지만 무기에서 현격한 차이가 났기 때문에 정상적인 결투가 되지 못했다. 이런 원주민 여성에 대한 무자비한 성폭력은 영국인과 화해할 수 없는 원인이 되었다.


불법거주자들에겐 원주민 여성들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평화를 확보하기 위해 태즈메니아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로 여겼다는 사실이다. 그들에겐 죄수들이 있었기 때문에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원주민과 타협을 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원주민의 개체수를 확실하게 줄이든지, 아니면 멸절시켜도 좋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어서 폭력은 타당한 인식의 발로의 형태가 되었다. 본국에서는 원주민과 함께 공존할 것을 계속해서 주문을 했지만 본국으로부터 가장 먼 곳에 위치한 테즈메니아에서는 자신들의 법칙만이 통용되고 있었다. 이런 무질서를 해결하기 위해 1824년 뉴사우스웨일즈 정부는 조지 아서를 태즈메니아 부지사 겸 책임 행정관으로 임명하여 현지에 파견하였다. 새로 부임한 아서는 군 출신으로서 전 근무지와 직책은 남미의 온두라스 부지사였다. 당시 악명 높은 유형지이면서 가장 거친 땅이었던 태즈메니아에 부임한 그는 원주민 정책에 심혈을 기울였다. 사실 정책이라는 것은 특별한 것은 아니고 어떻게 하면 원주민을 정착지와 분리를 할 것인지에 대한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었다. 외딴 목장과 농가에 군경으로 구성된 수비대를 배치하여 정착민을 보호하는데 치중하였고, 만약 원주민이 접근할 시에는 소총을 발포하여 내쫓았으며, 원주민들이 수비대의 경계를 뚫고 침입하여 양이나 물건들을 훔쳐갈 시에는 끝까지 추적하여 사살하거나 체포하였다. 그것은 공권력에 의한 법적인 행위였다. 이와 더불어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에서는 정착민이 자경대를 조직하여 원주민을 마음대로 사살하였다. 지역마다 상황마다 원주민을 죽이는 방법은 가지각색이었다. 조지 아서가 부임한 후 2년 동안 법적인 절차를 거쳐 교수형에 처한 원주민은 36명이었다고 한다. 사실 생포하는 경우 보다 현지에서 사살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고 이런 경우는 숫자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아무튼 식민정부의 이런 강경한 입장에 원주민들이 거세게 저항을 하자 1826년 11월에는 적대적인 원주민에게 무기를 사용하여 몰아낼 수 있다는 포고문을 발표하였으며 각 지역에 추가로 경찰을 배치하였다. 원주민에 대한 전쟁 선포였다. 또한 조지 아서는 태즈메니아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원주민들을 아예 베스 해협에 있는 섬으로 분리 이주를 시켜야 한다고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성난 목장주들에 의해 짐승처럼 사냥을 당해 박멸될 것이라고 격앙된 주장을 하였다. 아서의 정책은 일관성이 없었지만, 분명한 기조는 원주민은 매우 유해한 동물로서 극단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주민의 저항은 들불처럼 일어나 1827년 노스미들랜드, 오이스터 베이, 빅 리버 지역의 원주민들이 농장을 습격하여 가축을 죽이고 약탈하는 사건들이 증가하였다. 그중에 리치먼드 뱅크 힐 농장을 습격했던 오이스터 베이 원주민들이 자경대에 의해 14명이 사살되고 9명이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약탈 과정에서 무력 충돌이 일어나 목부가 사망하자 그에 따른 보복 차원에서 범인이 누군지 특정하지도 않고 불특정 원주민들을 학살한 것이었다. 또한 그해 4월, 론세스턴 마운트 오거스타 목장에서 목부 2명이 원주민의 습격을 받고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에 경찰과 정착민으로 구성된 응징 추적대가 원주민 주거지를 찾아내 40명을 사살하였다. 이 사건은 집단학살의 한 예이다. 한 달 후에도 이와 유사한 사건으로 인해 원주민 6명이 학살당했다. 하지만 원주민 저항군은 몇 만 년 전부터 씨족 단위로 평화롭게 살아왔기 때문에 전투에 직면했을 때 다른 씨족과 연합하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거의 모든 충돌 방식이 각각의 씨족이 독단적으로 감행한 것이었다. 또한 서로에 대한 네트워크도 미흡하여 공동체적 공감대가 개입될 여지가 별로 없었다. 이런 독고다이식 독립적인 관계는 서로의 충돌을 피할 수 있어 평화로울지 모르지만, 공동체적 삶의 공진화의 측면에서는 결정적인 약점으로 작동될 수 있어서 이로 인해 수만 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원시성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원인이 되었는지 모른다.


아무튼 조지 아서는 이런 사건들이 빈번하게 발생하자 보다 경계를 강화하였다. 경찰관 26명과 군인 55명을 목장들이 위치한 각각의 정착지 경계선에 분산 배치하였다. 사건 일지 시작점인 1826년 11월부터 1828년 3월까지 16개월 사이에 기록된 사망자 숫자를 보면 전체적으로 정착민 4명, 원주민 350명으로 집계되어 있었다. 이 숫자는 기록에 불과하였고 접수되지 않는 사건들은 이보다 훨씬 많았다. 사실 자신의 목장에 침입한 원주민 몇 명을 사살하고 신고하지 않으면 누구도 알 수 없었고, 캥거루 사냥을 하듯이 원주민들을 흥미 삼아 사냥을 한 후 그대로 방치하더라도 인구 밀도가 극히 낮은 현지에서 세상의 이목을 끄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런 비공개 살인 사건들은 많은 시간이 지난 후 현지에서 소문으로 떠돌다 누군가에 의해 언론에 제보되어 세상에 밝혀지기도 했다. 하지만 대게는 증인과 증거가 신뢰할 수 없다는 이유로 묵살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나중에 더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태즈메니아에 당초 원주민 인구가 초기엔 5,000명에서 많게는 7,000명이었을 것이라고 추산을 하는데, 그 숫자는 학살의 규모를 축소하기 위한 다분히 의도적인 수치로 보인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최소한 태즈메니아가 고립이 된 후 적어도 1만 년 동안 그들 선조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일정량의 개체수가 충족되어야 하는데, 많게 잡아도 7,000이라는 숫자는 이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거의 70%에 가까운 면적을 가지고 있는 태즈메니아에서 7,000명이 그 땅의 최상위의 포식자로 살았다는 것은 생존의 원리로 볼 때 허점이 많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시 태즈메니아 원주민의 인구가 그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으면 이 같은 학살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이런 혼란한 와중에 1828년 초 태즈메니아 북서부 케이프 그림에서 중요한 사건이 발생했다. 일명 케이프 그림 사건 혹은 학살 사건이라고 일컫는다. 그곳은 주 수도인 호바트와 가장 멀리 위치한 외진 곳이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절벽과 접한 넓은 초지에 양모 관련 회사 밴 디멘스랜드에서 투자해 만든 대규모 목장이 있었는데 지사장은 에드워드 커였다. 커 사장은 가톨릭 신자였지만 냉혹하고 독재자 스타일의 리더라는 좋지 않은 평판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는 원주민과 대립하고 있는 목장의 상황을 파악한 후 직원들에게 폭력을 조장하는 지시를 하여 강대강의 대결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간혹 다른 목장에서는 원주민과 유화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밴 디멘스랜드 목장은 매몰찬 방법으로 원주민을 대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직원들은 원주민 여자를 산 채로 잡아 와 개처럼 목에 사슬을 매고 사육을 하면서 성 노리개로 삼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수십 명의 굶주린 늑대들을 상대한 여인은 오래 살지 못하고 결국 폐기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당시 목장 직원의 고백에 의하면 어느 원주민 여성은 한 달 동안 그렇게 사육되었다고 전한다. 이런 상황을 인식한 피어랜드 부족은 복수를 하기 위해 그 목장에 침입하여 자신의 여성을 유린한 토마스 존이라는 사내를 찾아내 죽이려고 했지만 실수하여 다리를 찌르는데 그쳤고, 그런 사이에 다른 직원들이 소총으로 사격을 하는 상황에 직면하자 그들은 재빨리 도망을 쳤다. 피어랜드 부족은 이에 그치지 않고 며칠 후 다시 밴 디맨스랜드를 침입하여 양 118마리를 창으로 찔러 죽여 그 사체를 절벽 아래로 버리는 사건을 저질렀다. 이후 에드워드 커는 원주민 전문 사냥꾼 리차드 프레드릭을 응징 부대의 대장으로 임명하여 본격적으로 원주민 토벌에 나섰다. 그렇게 조직된 징벌 원정대는 2개월 후 타네리유어에서 피어랜드족이 임시로 거주하는 장소를 발견하고 무차별한 사격을 가했다. 그리고 도망가는 원주민을 향해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당시 목장 직원의 증언에 의하면 30명 이상을 사살했다고 전하고, 다른 관계자는 매우 많았다는 표현으로 당시 살해 숫자를 대신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에드워드 커는 심각한 부상자 외에 6명만 죽였다고 본사에 보고했다. 사실 심각한 부상자라 함은 마지막 숨을 내쉬고 있던 죽음 직전의 시신을 말한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잡은 원주민 성인 남성 시신을 목장으로 끌고 와서 그들이 양을 절벽 아래에 버렸듯이 같은 방법으로 절벽 아래로 던졌다. 여러 구의 시체는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백색의 유해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사건 이후에도 밴 디멘스랜드 목장은 악명이 자자해서 1829년 8월에 목부 4명이 원주민 여성을 같은 방법으로 유린을 한 후 원주민의 보복을 받고 살해되었고, 1831년 7월에는 목부 3명이 원주민에 의해 살해되고 그와 함께 양과 소도 수십 마리도 죽었다고 전하며, 그 외에도 원주민 습격이 16건이 발생했다고 상부에 보고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원주민의 피해는 어디에도 밝히지 않았다. 목장 직원들이 원주민을 죽이는 것은 멧돼지를 사냥하는 것처럼 일상적이었기 때문에 기록을 남기거나 주검을 수치화할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후에도 요르단 강 라근 습지에서 17명, 엘리자베스 강 동부에서 17명, 코카트 밸리 홀로우 트리에서 6명, 세인트 폴 강가에서 9명, 톰스 호수에서 10명 등 원주민 학살 소식이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응징 살인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단순 사냥에 의한 살인 사건도 게 중에는 많았다. 이 중에는 당시 언론에 보도된 사건도 있었지만 그 건수는 제한적이었고 다수는 시간이 지난 후 밝혀지거나 아예 소리소문 없이 묻히는 경우도 많았다. 태즈메니아 크기는 본토와 비견할 수 없지만, 그래도 원주민 정착민 포함한 전체 인구인 몇 만 명이 생활하는 공간으로서는 거의 빈 땅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광활했다. 그만큼 드러나지 않는 미제 사건들이 많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태즈메니아에는 전문적인 현상범 사냥꾼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이 존 배트맨이었다. 사실 그 무렵에는 원주민보다 더 위협적인 존재는 부시레이저였다.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그들은 탈옥한 죄수들로서 소규모로 무리를 지어 다니며 도적떼처럼 민간인을 공격하여 식량과 물품을 약탈하며 자신들만의 고유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잡히면 교수형에 처해질 게 뻔했기 때문에 그들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 바로 암적인 존재였던 그들에게 일정한 현상금이 붙어 있었는데, 그들을 검거하거나 사살할 시 현금도 받을 수 있었지만 주정부로부터 토지를 대물로 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현상범 사냥꾼들은 토지를 현상금으로 받아 부를 축척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중에 한 명이 바로 존 배트맨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부시레이저를 사냥하러 태즈메니아에 왔던 그는 원주민 사냥이 더 돈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방향을 선회했다, 물론 부시레이저도 아주 사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목장주에게 사례비를 받고 원주민을 소탕하는 작업이 훨씬 수월했던 것이다. 부시레이저들은 교활하고 싸울 줄 아는 만만하지 않은 상대였지만 원주민은 그에 비하면 오합지졸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영악했던 그는 아예 백인에게 전향한 본토 원주민으로 구성된 원주민 경찰 일개 분대를 데리고 와서 본격적으로 원주민 사냥에 참전하여 상당한 성과를 이루어낸다. ‘순회 파티’라고 불릴 정도로 전문 사냥꾼으로서 면모를 보여준 그는 주로 야간을 이용해 원주민 거주지를 공격하는 전술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는 그렇게 태즈메니아에서 악명 높은 원주민 학살자라는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그가 자행한 사건 중에 하나를 소개하지면, 1829년 1월 주정부로부터 순찰 위탁을 받은 그의 부대는 벤 로몬드 동쪽 지역에서 원주민 60~70명이 자고 있는 캠프를 새벽에 공격하여 17명을 처형했다고 자랑스럽게 지역 순회 판사에게 자백하였고 이 사건은 콜로니엄 타임지에 1829년 9월 18일 보도되었다. 이 사건에 대한 경찰 조사에서 배트맨의 부하는 그런 처형은 흔히 볼 수 있는 보복 차원이 아니었다고 증언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개인적 취향의 사냥이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어떠한 법적인 제재를 받지 않았다. 같은 백인들도 배트맨에 대한 평판이 좋지 않아 사기꾼, 흑인 살인자, 도둑, 가장 사악한 사람 등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고 한다. 태즈메니아에서 원주민이 거의 사멸되어 더 이상 수익을 올릴 수 없게 되자 그는 본토에 있는 멜버른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그리고 신분 세탁을 하고 지역에서 사회활동을 시작한 그는 멜버른 도시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원주민과의 협상을 주도한 결과 일명 ‘배트맨 조약‘을 이끌어냈다고 한다. 그런 공로를 인정받아 멜버른에는 그의 이름을 붙인 도로, 교량, 공원, 심지어 기차역과 행정구역 등이 아직까지 남아있다고 한다. 태즈메니아에서는 악명 높은 원주민 사냥꾼이었지만 놀라운 변신술로 본토에서는 사회적으로 대단히 성공한 인물로 아직까지 기억되고 있다는 것이다.


2. 계엄령

공권력을 증강시키고 용병 조직까지 투입하여 원주민의 준동을 막으려고 했지만 한계가 있음이 드러났다. 중요한 것은 충돌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었다. 이에 조지 아서는 본토 총독에게 원주민 분리 정책을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보호구역을 만들어 그곳에 원주민을 강제로 거주시키고 모든 의식주를 제공하고 엄격하게 관리를 하여 문명화 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외딴섬이라면 최적의 조건이었다. 물론 다시는 저항할 수 없는 완전한 항복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그는 첨언했다. 자신의 이런 제안서가 본토에서 검토를 하고 있는 와중에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1828년 4월에 자체적으로 원주민과 정착민의 분리 조치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원주민은 정착민이 구축한 지역 안으로 허가 없이 절대로 침입할 수 없으며 이를 어길 시에는 폭력으로 방어할 수 있다는 일종의 정당방위 허가였던 것이다. 모법인 식민지법에 따라야 하는 관계로 폭력에 대한 제한이 애매모호했지만 사실상의 합법적인 살인을 용인하는 처사였다. 이에 군경을 300여 명으로 증원하여 14개의 정착지에 분산 배치하였고, 이런 강력한 조치에 원주민의 침입은 잠시 잦아들었다. 하지만 그해 하반기 3개월 사이에 39건의 습격 사건과 15명의 정착민 사망 사고 보고가 올라오자 조지 아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11월 1일 계엄령이란 초강수를 들고 나섰다. 그는 계엄령 발표문에서 적대적인 원주민을 영국 국왕의 공개적인 적이라고 간주하고, 항복하는 부족은 최대한 인도적인 대우를 받아야 하며, 하지만 저항하는 부족은 국왕의 공개적인 적으로서 사살을 해도 무방하다고 선언한 것이다. 불법거주지에서는 이미 군경에게 저항하는 원주민을 사살할 권한을 부여하고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정착민도 그것이 가능했다. 이런 내용은 공적인 상황에서 논할 수 있는 행정적인 행위였지만, 이미 사적인 공간에서는 정착민이 어떠한 연유로 원주민을 죽였다고 해서 기소된 경우는 한 건도 없었다. 본토의 뉴사우스웨일즈에서는 간혹 원주민을 이유도 없이 살해한 백인을 교수형에 처한 경우도 있었지만, 악명 높은 유배지인 태즈메니아에는 아직까지 본토의 공권력의 영향을 덜 받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에 계엄군을 최대한 증원하여 8~10명이 한 조로 구성된 23개의 순찰조를 운영하였다. 이 조직에는 민간인도 대거 참여하였다. 또한 본토에서 본격적으로 원주민 경찰 조직을 수입하여 처음으로 운영을 하였다. 당시 존 베트멘이 자신이 대동하고 온 원주민 경찰로 재미를 보고 있었던 것을 확인한 조지 아서는 원주민 경찰의 필요성을 절감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특단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원주민 습격과 이에 대한 징벌적 추적은 여전히 멈추지 않아 몇 개월 사이에 원주민 60명을 사살하고 20~30명을 체포하였는데, 행정 기관에 보고되지 않은 것을 합치면 최소한 200명이라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그 기간 동안 정착민의 사망 숫자도 수십 명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계엄령을 발령하고도 제대로 효과를 보지 못하자 조지 아서는 온건 정책으로 돌아서서 원주민과 화해의 제스처를 시도하였다. 백인이 흑인을 죽이면 교수형에 처하고, 흑인이 백인을 죽이면 역시 그 또한 교수형에 처한다는 영국의 식민지법에 준하여 화보까지 만들어 배포하면서 평화를 유도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쪽에서는 여전히 폭력적인 충돌이 횡횡하였다.


계엄령 발령 후 4개월이 지난 1829년 3월까지 계엄령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원주민 습격 사건이 60건이나 접수되었다. 그런데 습격의 성격은 양이나 소를 죽이거나 탈취하는 경향에서 건물이나 작물을 방화하는 행태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이는 보다 강력한 저항의 표시였다. 특히 이런 경향은 클라이드, 오클랜드, 리치먼드 지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에 지역의 경찰서장들은 조지 아서 부지사에게 병력을 3배 이상 증강해야 하는 필요성을 보고서로 작성하여 기안을 올렸다. 이에 아서는 원주민에게 현상금을 거는 조치를 취했다. 성인 1인 체포 시 5파운드, 어린아이는 2파운드의 현상금을 내 건 것이다. 그렇게 별별 수단을 다 동원해도 효과를 보지 못하자 1830년 1월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원주민 위원회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윌리엄 브로튼 성공회 대주교를 위원장으로 주정부 관료와 각 지역에서 민간인을 대표한 대의원들이 위원회에 구성원으로 참여하였다. 결정권은 주지사에게 있었지만 그 위원회에서 나온 해결 방안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이라고 했다. 이에 얼마 후 보고서가 작성되어 조지 아서 책상 위에 놓였다. 그동안 원주민에 의해 피해를 입은 정착민의 실태 현황이 자세하게 적혀 있었고 이어서 해결 방안이 나열되었다. 독이 든 댐퍼나 설탕을 미끼로 사용하고, 사냥개도 최대한 활용을 해야 하고 또한 뉴질랜드의 마리오족을 데려와서 원주민을 포획하게 한 후 뉴질랜드로 데려가 그들의 노예로 삼아야 한다는 기발한 방법도 적혀 있었다. 그리고 현상금 제도를 적극 지지하고, 더 많은 기마병도 배치할 것을 촉구하였다. 조지 아서는 위원회의 제안을 다 받아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많은 것을 수용하였다. 그 방안을 본국 식민지 장관인 머레이 경에게 보고하고 본국의 죄수를 더 많이 보내줄 것을 요구하였다. 비록 탈옥하여 부시레이저가 되는 죄수들도 있었지만 예전보다 많이 줄어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적어도 죄수들은 정착민 치안과 그에 따른 노동력으로 요긴하게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그림 케이프 그림 지역은 원주민과 목장주들의 대결 양상이 심각해서 지역의 치안이 절실하기도 했다.


조지 아서는 과거 다른 식민지에서 근무했던 경험으로 볼 때 그래도 강경책만으로 모든 게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당근과 채찍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에 그는 조지 오거스트 로빈슨과 월시 육군 대위를 원주민 사건의 조사와 갈등 조정자의 권한을 주고 케이프 그림 지역에 파견하였다. 로빈슨은 호바트에서 건설업으로 성공한 후 사회활동에 적극적이었다. 호전적인 원주민과 우호적으로 접촉하여 대화의 장으로 유도하기 위해서는 비교적 온건하고 진실된 인물이 필요했는데 바로 로빈슨이 제격이었던 것이다. 또한 아서는 목장주들에게 식량을 찾는 원주민들을 가능하면 해치지 말고, 적대적이지 않는 원주민을 개인적인 놀이의 일환으로 절대 죽이지 말 것을 당부하는 통지문도 전달하였다. 이를 어길 시에는 기소할 수도 있다는 경고 메시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이프 그림 지역의 긴장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지역 정착민 사회에서 지도자급으로 활동하던 인사가 원주민에게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정착민들은 주정부의 유화정책에 반발하여 강력한 대책을 촉구하는 서한을 주지사에게 보냈다. 원주민 위원회도 이에 대해 호응하여 강경한 자세를 취하였다. 폭도로 변할지도 모를 정착민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라도 조지 아서는 그 지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착민들은 원래 주인이었던 원주민을 거주지에서 아예 추방하기 위해 대규모 캠페인을 펼쳤고 언론도 이에 동조하며 적극적인 참여를 촉구하는 기사를 썼다. 바로 원주민과의 완전한 차단만이 해결책이었던 것이다. 이젠 돌이킬 수 없었다. 그 여파는 태즈메니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830년 10월이었다. 군경 550명, 죄수 738명, 민간인 912명 등 전체 2,200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수색대가 조직되었다. 흔히 블랙라인이라고 하는 인간 쇠사슬 몰이가 시작된 것이다. 계단식 횡으로 진영을 형성하고 멧돼지 몰 듯이 북쪽에서 남쪽 방향으로 원주민을 몰아내는 식이었다. 그 길이가 장장 약 300km나 되었고, 이스트 베이넥과 포레스티어 반도를 가로질러 마지막 종착지인 태즈먼 반도까지 이어지는 넓이였다. 그 공간 사이에는 9개 부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지스러운 방법이 않을 수 없지만 그것은 역사적 사실이었다. 아무튼 호바트 동남쪽에 위치한 태즈먼 반도는 거의 섬이라고 무방할 정도로 고립된 지역으로서 원주민 보호구역으로서는 제격이었다. 그곳은 세상의 끝이었다. 하지만 추위와 험난한 지형 그리고 식량 보급선 문제에 봉착하면서 인간 사슬은 무너졌고 참여한 정착민들이 이탈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달 반 만에 무모하고 어처구니없었던 불랙라인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그 사이에 많은 목장에서 원주민의 습격을 받았는데 그 수만 해도 50건이 넘었다.


그럼에도 테즈메니아 식민 당국의 최종해결책은 어떻게 하는 원주민 보호구역 설정이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그것만이 더 이상의 폭력을 방지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원주민들의 최종 목적지는 북쪽 배스 해협에 위치한 플랜더스 섬이었다. 이 정책에 대한 실무책임자는 원주민 공동체와 중재자 역할을 했던 로빈슨이 맡았다. 평소 조정자로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공정성을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던 그는 태즈메니아 원주민에게 적어도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백인이었던 것만큼은 분명한 것 같았다. 적어도 그렇다는 말이다. 현재의 시각으로 볼 때 그가 추진한 공적 행위에 대해 많은 부분에서 긍정할 수는 없지만, 당시 원주민 사회와 최소한의 대화는 할 수 있었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런 진실성을 담보로 그는 많은 원주민들을 직접 만나 플랜더스 섬으로 이주한다면 식량과 주택과 안전 등을 보장할 것을 약속하겠노라고 설득해 나갔다. 그가 이렇게 원주민과 접족 할 수 있었던 것은 트루가니니와 우레디 같은 지도자급 원주민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트루가니니는 당시 20살 안팎의 여성으로서 원주민 사회에서 신망이 높은 인물이었다. 백인 문화를 어렸을 때부터 접한 그녀는 이주 정책에 진심으로 동조하였다. 1876년에 사망한 후에는 그녀의 유골이 1948년까지 태즈메니아 박물관에 전시되는 수모를 겪다가 결국 위에서 언급했듯이 1976년에서야 화장된 후 안장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우레디는 한때는 뛰어난 지도자이자 전사였다. 그의 활약상은 아직도 원주민 사회에서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다고 한다. 그런 그가 회절을 한 이유는 전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부족이 절멸에 가까운 죽임을 당하고 마지막에는 가족마저 거의 잃으면서 결국 투쟁을 포기하고 로빈슨의 설득에 넘어간 것이었다. 그런 결과의 결정적인 계기는 홀로 된 그에게 로빈슨이 어린 트루가니니와 결혼을 시킨 것이었다. 그렇게 말년의 우레디는 어린 아내와 함께 로빈슨을 적극 도왔다.


사실 당시엔 너무나 많은 원주민들이 죽어서 저항할 세력이 거의 소멸된 상태였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던 원주민 수장들은 이주 정책에 대체적으로 부정하지 않았다. 빅 리버와 오이스트 베이의 실력자였던 마날리게나도 로빈스의 요구에 순순히 응했고,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몽펠리아타와 통겔로게터도 끝내 항복을 선언하고 자신의 터전이었던 태즈메니아 본토를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결국 무장해제가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먼저 플랜더스 섬과 태즈메니아 사이에 있는 6평방 킬로미터 밖에 되지 않는 반시타트 섬에 53명을 이주시켰고, 1835년까지 플랜더스 섬의 와이발레나 보호구역에 300명이 안착함으로써 이주가 거의 완료되었다. 그 사이에 아서 강에서 타르키너족 29명이 백인과 무력 충돌을 했다는 이유로 맥쿼리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플랜더스 섬으로 강제로 이주시키는 경우도 있었고, 그 외에도 산발적인 작은 충돌이 있었지만 무시될 정도로 미미했다. 소규모 씨족이 산속에 숨어들어 자급자족하는 것이 목격되기도 했지만 위협적이지 않아 포획하려고 하지 않았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태즈메니아는 말끔하게 청소되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1847년 플랜더스 섬에서 인구를 조사하였는데 당초 이주 인구의 10%인 47명만이 살아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식민 당국은 그들에게 유럽식 교육과 문화를 이식하고 기독교로 개종시키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당초 로빈슨이 자신들에게 안전하게 이주하는 조건으로 전통적인 삶의 방식과 종교의식 등을 보장하겠노라고 했지만 그것은 전혀 지켜지지 않고 오히려 강제로 백인 문화를 접목시키려고 한 것에 대해 그들은 분개하였던 것이다. 백인들은 자신의 우월적 문화에 도취하여 미개인을 개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그런 일방통행식 문화정책이 성공하는 예도 없지 않았지만 태즈메니아의 경우와 같이 문화의 격차가 너무 많이 나는 경우엔 효력이 나타나지 않았고 오리려 부작용만 낳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뉴사우스웨일즈의 원주민들의 경우에도, 백인 문화에 동조했다가 다시 원주민 세계를 되돌아가 백인과 투쟁을 하다 장열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원주민도 많았다. 고립된 섬에서 1만 년 이상 살아왔던 태즈메니아인은 이런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더욱 인구가 감소하였으며 마침내 이 지구에서 비극적 종말을 맞게 되었다. 그리고 로빈슨은 자신의 임무를 완료한 후 투잡으로 태즈메니아인의 해골을 수집하는데 열중한 결과 그것을 본국의 인종주의자들에게 팔아 적잖은 수익을 올렸다고 한다. 사업가답게 살아있는 화석의 가치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처음 언급했던 것처럼 확인되지 않은 많은 유골들이 영국으로 유출되어 여러 박물관에 전시가 되고, 마치 동물의 박제처럼 귀족의 서재에 장식되었던 것이다.


역사가들은 태즈메니아의 당초 인구가 5,000~7,000명이었다고 추정한다. 그 가운데 878명 혹은 600명, 191명, 많게는 1,000명이 영국인들에게 학살되었다고 자신들만의 고유한 계산법을 동원하여 추산했다. 사실 그 숫자들에 대한 부적절성을 논하기 이전에, 전반적인 사태의 추이를 볼 때 그런 조사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고 자문해보지 않을 수 없다. 태즈메니아에서 최소한 1만 년 혹은 수만 년 동안 대대로 살아왔던 선주민들은 완벽하게 사라지고 다양한 혼종과 백인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더 외딴곳에 위치한 뉴질랜드나 폴리네시아에서는 선주민들과 어떻게 하든 공존을 모색했는데 태즈메니아에서는 공존은커녕 자신의 일방적인 평화를 위해 무자비한 학살과 보호구역 분리 정책을 시행하여 결국 그들을 멸절에 이르게 했다. 그것도 부족하여 살아있는 호미닌 화석 운운하며 자신들이 개발한 인종주의에 기반 한 인류학과 우생학의 연구물로 이용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3. 퀸즈랜드 대학살

퀸즈랜드는 1859년 뉴사우스웨일즈로부터 분리된 주이다. 그만큼 인구가 많다는 것을 방증한 것인데 당시에 이미 원주민의 인구수가 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30~40%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처음 영국의 탐험대가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을 출입한 곳은 남쪽 해협을 거쳐 당도한 멜버른과 시드니 지역이었다. 동남쪽 지역이 상대적으로 사람이 살기 좋은 자연조건을 가지고 있기도 했지만, 영국을 기점으로 해서 전체적인 항로를 볼 때도 남아프리카 희망봉을 거쳐 인도양 남쪽으로 가는 게 훨씬 빨랐고, 싸이클론도 피할 수 있는 평온한 바다 환경이 놓여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항로는 오스트레일리아뿐만 아니라 뉴질랜드나 폴리네시아 같은 남태평양 제도에 갈 때도 이용하였다. 상대적으로 인도네시아와 토레스 해협을 지나 시드니로 가는 항로는 시간도 더 오래 걸리고 결코 지리적인 환경을 볼 때도 평안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시드니와 멜버른을 중심으로 처음 형무소가 만들어지고 영국과 여타 유럽인들로 구성된 이주민들이 속속 들어와 정착하였다.


정착에 성공한 이주민들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영역을 확장하면서 험난한 개척의 시대를 열었다. 누군가 얘기했듯이 오스트레일리아는 텅 빈 땅이었다. 원주민이 있었지만 인구수는 턱없이 적었다. 이주민들은 개척 과정에서 아주 먼 옛날 먼저 와서 살고 있던 선주민과 피비린내 나는 충돌을 겪어야만 했다. 1824년 존 옥슬리라는 측량사이자 탐험가가 레드 프리트에 임시 정착지를 구축하고 형무소 부지에 대한 타당성 조사를 하였다. 이 과정에서도 원주민을 포함한 거친 자연환경과 싸우며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였다. 그렇게 해서 처음 오스트레일리아에 정착하고 37년이 지난 1825년이 되어서야 브리즈번에 형무소를 건설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이를 기반으로 뉴사우스웨일즈 정부는 그곳에 정착하려는 자국민에게 1인에게 기본적으로 1,000 에이커에 상당하는 토지를 무상으로 분양하여 양 목장을 운영하도록 장려하였다. 일손이 부족할 경우엔 무급 노동자인 죄수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거의 빈 땅이나 마찬가지인 퀸즈랜즈에 목장과 농장들이 빠르게 조성되었다. 좁은 영국 땅에서의 양모 산업에 비하면 수십 배의 생산량을 보장하는 광활한 땅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 과정에서 원주민들과의 무력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원주민들에겐 백인은 불법거주자들이었다. 땅을 뺏으려는 불법거주자와 지키려는 원주민은 서로 무력 충돌하여 피로 얼룩진 갈등의 드라마가 연출된다. 그 연속된 사건들은 태즈메니아의 경우처럼 하나의 서사로 엮을 수 없고, 광대한 지리적 구조적 환경과 더불어 지역마다 개개의 부족이 각각의 상황에 따라 저항을 했기 때문에 수많은 사건들이 단편적으로 폭발하듯 터지고 사라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주요 사건을 건별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드려다 보는 형식으로 다음 이야기를 풀어가겠다.


브리즈번에 형무소가 건설되면서 서쪽 내륙지역으로 진출한 불법개척민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이 신세계의 꿈을 안고 텅 빈 대지에 도착하여 집을 짓고 땅을 일구고 양과 소를 방목하였고 자신들이 먹어야 할 농작물도 재배하였다. 함께 일할 사람도 고용하면서 영국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광활한 농장을 형성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빠르게 농장에 수많은 울타리 지주들이 박히고 각각의 경계선이 형성되면서 불법거주자들의 영역은 확장되었다. 하지만 원주민들이 많아 살던 달링 다운소, 브리즈번 밸리, 사우스 베넛, 길코이 지역 등에서는 폭력을 동반한 충돌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정도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졌다. 퀸즈랜드에서 원주민 여러 명이 살해된 첫 번째 사건은 기록에 의하면 시간이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1795년 9월 시드니 북쪽 호크스베리였다. 호크스 강기슭에서 오랜 항해에 지쳐서 잠을 청하던 개척민을 창과 와디로 무장한 수십 명의 원주민이 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원주민의 급습으로 개척민 여러 명이 부상을 당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개척민들이 소총을 동원하여 반격을 한 결과 원주민 7~8명을 사살하였다. 이후 서쪽 개척지인 웨스트오스트레일리아와 동쪽의 뉴사우스웨일즈와 그리고 테즈메니아에서도 크고 작은 수많은 충돌이 일어났고 그때마다 원주민들은 적게는 한두 명에서 많게는 몇 십 명씩 죽임을 당했다. 초창기에는 대게 영국 군대에 의해 사건이 진압되었지만 개척민들이 정착하고부터는 민관이 협동하여 저항하는 원주민을 소탕하는 양상으로 변하였다. 소총과 대포와 기마병으로 무장한 영국의 무기체계에 석기시대에 머물러 있던 원주민들은 속수무책이었다. 더구나 원주민 전사들의 숫자도 많지 않아 전면전을 할 수 없는 현격한 전력 차를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원주민은 포기하지 않았다.




퀸즈랜드에서의 충돌 양태는 의외로 독극물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842년 2월, 지금은 평화로운 킬코이에서 에반 맥킨지가 운영하던 목장에 원주민 여러 명이 음식물을 훔치기 위해 침임을 했다. 하지만 목장 피고용인 한데 발각되어 집단 싸움이 벌어졌고, 그 와중에서 원주민들은 목부 두 명의 다리에 창을 찌르는 부상을 입히고 달아났다. 이 사건으로 맥킨지는 단단히 화가 났다. 이런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에 맨킨지는 목부들에게 원주민 도적들이 자주 출몰하는 곳에 비소와 스트리크닌을 섞어 만든 댐퍼 한 소쿠리를 갖다 놓게 했다. 비소와 스트리크닌은 독극물이었다. 과거 원주민들에게 화친을 하기 위해 댐퍼를 주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가져갈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미끼 사냥이었다. 결과는 맥킨지의 예상이 적중했다. 다음날 아침에 확인해 보니 댐퍼가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댐퍼를 가지고 캠프로 돌아간 원주민들은 그것을 가족과 함께 나누어 먹었다. 밀가루로 만든 질퍽한 빵을 맛있게 먹었지만, 30분도 채 안되어 그들은 배를 움켜잡고 나뒹굴기 시작했고 몸이 활처럼 휘는 고통을 겪다가 30분도 안되어 대다수가 숨을 거두었다. 다행히 조금 늦게 먹은 사람들을 댐퍼를 토하면서 스스로 응급처치를 하였다. 이 사건이 불거진 것은 그로부터 19년이 지난 1861년이었다. 그동안에는 그들이 몇 명이 죽었는지 밝혀지지 않았었다. 이런 사건은 인구 밀도가 극히 낮은 퀸즈랜드에서 일정 시간 안에 진실이 밝혀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1861년 원주민 학살 사건을 조사하던 존 콜리라는 사람이 해당 지역 원주민들을 탐문하여 조사하다가 우연히 이 독극물 사건을 수집하였고, 이에 뉴사우스웨일즈 경찰이 사건을 뒤늦게 수사를 하여 결국 매킨지를 기소하기에 이르렀다. 경찰은 독극물로 인해 사망한 숫자가 50~60명이라고 추정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킨지는 재판에서 경고만 받았을 뿐이었다. 독극물을 댐퍼에 섞은 것은 사실이지만 원주민들이 그것을 먹고 죽었다고 하는 직접적인 증거나 정황이 없었으며 그런 심증만으로 그에게 죄를 물을 수 없었다. 원주민에게 입은 피해에 대한 응징 의도는 인정되어 그에게 경고만 주었던 것이다.


이런 희대의 독극물 사건은 최소한의 윤리적인 문제로 인해 백인 사회에는 회자되지 않았지만 희생의 당사자인 원주민 사회에서는 널리 알려져 분노의 파고가 일었다. 특히 이 사건에 분노한 자게라족의 부족장 물루게라는 주변 부족들을 규합하기 위해 부족 연합회의체 격인 번야 스크럽을 개최하였고,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백인에 대한 전쟁 선포를 하기에 이르렀다. 원주민 사회에서는 흔하지 않은 부족 연합이 그의 노련한 정치력으로 인해 1,200~2,000명 정도의 원주민 전사를 규합할 수 있었다. 저항의 시작이었다. 이렇게 부족이 연합한 것은 거의 전례가 없는 특별한 현상이었다. 자신들의 땅을 불법으로 침탈하여 사냥터를 빼앗았고, 그로 인해 생존의 위기에 봉착하게 했으며 그것도 부족해 비겁하게 독약으로 자신들을 죽이려 드는 백인들의 행태는 결코 묵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죽음은 죽음으로 복수하는 것은 전사들의 최고 덕목이었다.


그렇게 병력을 모은 물루게라는 1843년 9월 드디어 작전을 개시하였다. 윤 트리 힐, 퀸즈랜드주 테이블탑 마운틴에 위치한 도로가 있었는데, 그 도로는 브리즈번과 달링 다운스를 연결하는 핵심적인 주요 도로로서 많은 양모 원자재와 생필품과 가축들이 빈번하게 왕래하고 있었다. 그날도 항상 그렇듯 18명의 백인과 소 50마리 그리고 3대의 화물마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 캐러밴은 윤 트리 힐 지점에 이르렀을 떼 길 중앙에 통나무로 엮어 만든 바리케이드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정지하였다. 당시만 해도 원주민의 장난쯤으로 치부하고 백인들이 말에서 내려 그 바리케이드를 치우려고 할 때, 매복해 있던 물루게나군 수십 명이 그들을 급습하여 창과 와디를 휘둘렀다. 이에 기겁을 한 백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줄행랑을 쳤다. 승전고를 올린 저항군은 약탈한 소 몇 마리를 가지고 자신들의 캠프로 가서 코로보리(축제, 소통 모임)를 열었다. 그들은 승리에 도취한 채 춤을 추고 고기를 마음껏 먹었다. 하지만 도망친 화물 운송 무리는 가장 가까운 마을로 가서 호텔에 묵고 있던 백인들을 설득하여 응징 추적대를 모집하였다. 감히 미개인들이 백주대로에서 우리를 공격해라는 분노의 공감대가 순식간에 형성되어 빠른 시간 안에 30여 명의 백인 추적대가 조직되었다. 인근 경찰서에 이런 사실을 신고하고 지원병을 보내줄 것을 당부하는 전령을 인편으로 보낸 후, 다음날 추적대는 사냥개를 대동하고 사건 현장 주변을 샅샅이 수색하였다. 그 결과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테이블 탑 지역에서 도적 무리를 찾아냈다. 그들은 경찰이 당도하기 전에 도적 떼가 도망칠 것을 우려해 당장 공격을 감행하였다. 소총이 발사되자 원주민들 여럿명이 동시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이에 놀란 원주민들은 황급히 산으로 도망을 쳤다. 그들은 뒤따라오는 백인들에게 창과 돌을 던지며 거세게 저항을 하였다. 미처 도망가지 못한 원주민들은 와디와 창으로 치열하게 저항을 하였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나머지 원주민들이 산으로 도망을 치자 백인 추적대는 더 이상 쫓지 않고 퇴각하였다. 경찰은 그때까지도 도착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도로 봉쇄 작전은 원주민들의 유용한 게릴라 전술로 인용되어 이후 다른 지역에서도 마차 수송대를 피습하는 사건이 다량으로 발생하였다. 그 전술은 인적 물적 이동의 맥을 끊는 것으로서 백인의 불법거주지 팽창에 장애물로 작용되기에 충분했고, 이에 그들로 하여금 방지대책에 골머리를 앓게 만들었다. 처음으로 원주민 연합군을 만들어 저항했던 물루게나는 이후 1846년 백인과의 전쟁이서 사망했다는 설과 노년까지 살았다는 설이 있다. 현재 퀸즈랜드 남부 워레고 고속도로에는 그의 이름을 딴 800미터짜리 교량이 있다고 한다.


이 사건은 백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백인들에겐 원주민들이 왜 이런 사건을 일으켰는지에 대한 원인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이유를 알고 싶지도 않았던 불법거주자들은 일방적인 원한만 품고 원주민 소탕 작전에 보다 강도 높은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였다. 치안판사이자 경찰서장인 스티븐 심슨은 브리즈번, 웩스위치, 모레톤 등에서 100여 명의 경찰을 모집한 후 로키어 밸리 지역을 중심으로 원주민 부족의 캠프를 습격하여 학살을 일삼았다. 이런 폭력적 사냥식 공격은 5년 동안 지속되어 백인과 흑인의 갈등 구조는 전혀 개선되지 않고 극단으로 치달았다.




기록에 의하면 독극물 독살 사건은 이미 1824년 처음 발생한 것으로 보이며 이후에도 20세기 초까지 꾸준하게 발생했다. 19세기 중반까지는 빈번하게 발생하다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불법정착민들은 농산물 경작과 목축 관리에 사용하던 비소, 수은 화합물, 스트리크닌과 그리고 아코니툼 같은 독극물을 밀가루와 합께 반죽하여 빵의 일종인 댐퍼나 조니케이크로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푸딩과 비스킷, 고기 등에 섞기도 하고, 심지어 우유나 웃물에도 타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원주민 사냥에 이용하였다. 월래 비소는 살충제나 표백제로, 스트리크닌은 동물 사냥에 사용하여 왔고, 아코니툼은 오래전부터 인간이 사용해 오던 전통적인 방식의 약재이지만 독초이기도 했다. 예전에는 지구상의 많은 지역에서 독극물로 토끼나 꿩 같은 동물을 사냥했으나 현재는 불법으로 되어 있는데, 당시 오스트레일리아의 백인들도 동물 사냥하듯이 원주민에게 독극물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그들에겐 미개한 원주민은 독극물로 죽여도 전혀 감정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캥거루와 같은 존재였다. 자신들이 만든 빵을 먹고 육체가 타들어가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숨을 거두는 장면을 그들이 목격했다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가장 비인륜적인 폭력 행태가 바로 불특정다수를 노린 독살 행위일 것이다. 운이 좋으면 살고 그렇지 않으면 죽고, 그런 의도를 가진 독살은 가장 잔혹한 학살의 일종이다. 또한 감정의 변화를 의도적으로 차단한 작위적 사이코패스 학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길코이 독살사건 이후 자잘한 독살사건이 계속 발생했지만 가장 큰 사건은 1847년 발생한 화이트 사이드 독극물 사건이었다. 1843년 브리즈번 부근 화이트 사이트에 영국인 프랜시스 그리핀이 불법으로 땅을 점유를 한 후 자신의 두 동생 존과 윌리엄과 함께 1,000 에이커 상당의 목장을 조성하였고 2년 후에는 부모도 모시고 와서 대가족을 형성하였다. 영국 땅이었다면 감히 이런 영광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2년 후, 그의 피고용인이었던 브라운이 경찰서에 자진 출두하여 독살사건의 전말에 대해 내부자 고발을 하였다. 목장주 그리핀이 목부들에게 비소가 섞은 댐퍼를 원주민 침입자들이 가져갈 수 있는 곳에 놓으라는 지시를 하여 그렇게 따랐으며 다음 달 아침 자신이 확인한 결과 먹이가 사라져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고백한 것이다. 브라운이 고용주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어서 이렇게 내부자 고발을 했는지 확인되지 않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고발은 고발이니 만큼 경찰은 목장주와 목부들을 소환하여 심문을 하였다. 사건의 전말은 브라운의 고백처럼 다를 것이 없었다. 단지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원인만 부각되었다. 사건 며칠 전, 원주민들이 목장에 몰래 침입하는 과정에서 목장주에게 발각되어 순간적으로 육탄전이 벌어졌는데, 당시 목장주가 그들이 휘두른 와다에 맞아 한쪽 눈이 실명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한 징벌의 목적으로 독극물을 살포한 것이라고 목장주와 목부들이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리핀의 눈을 확인한 결과 그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이 아니었다. 그전에 목부들이 불분명한 이유로 자신의 부족을 살해한 복수의 차원으로, 같은 부족 전사들이 목장을 습격한 것이었다. 이런 근본적인 원인을 숨긴 백인들은 독극물 피해자가 딱히 없는 것으로 확인되자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독극물을 살포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사실적인 살해의 목적을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그 독극물을 먹고 사망한 피해자도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866년 에드거 포먼이라는 사람이 화이트 사이트 지역을 여행하던 중 우연히 동물 뼈 같은 물질을 발견했는데, 완전한 골격을 갖춘 표백된 사람의 뼈였다고 한다. 이에 포먼은 주변 원주민들을 만나 이 표백된 유골의 실체를 조사한 결과 화이드 사이트 목장에서 독극물이 섞인 댐퍼를 먹고 50~60명의 원주민이 죽었다는 충격적인 증언을 들었다. 이에 그는 이 사실을 <더 오스트레일리 아지>에 제보를 하여 기사화되면서 베일에 가려져 있던 독극물 사건이 미미하지만 공론화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총성도 없이, 세상에 알릴 틈도 없이 대지의 침묵 속에서 흙이 되어버린 원주민의 숫자는 아무도 모른다. 단지 사건의 특성상 알려지지 않는 주검이 훨씬 많을 것으로 합리적 추정을 할 뿐이다. 세상에서는 아무도 모르는 침묵의 살인이었지만 당사자는 가장 고통스러운 저주의 죽음이었다. 그렇게 거대한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은 거대한 주검으로 얼룩져 가고 있었다.



1848년 오스트레일리아 초기 개척자인 그레고리 블랙스랜드의 아들 그레고리 블랙스랜드 주니어는 클라렌스 강변에 불법으로 정착한 후 대규모 양 목장을 만들어 목장의 이름을 진진목장이라고 불렀다. 현재도 그 마을을 진진마을이라고 부른다. 목장에 경계 울타리가 세워지면 항상 그렇듯 그곳에 살고 있는 원주민의 저항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1849년 6월, 목장에서 목부로 일 하던 피그 형제가 목장에 침입한 원주민들과의 충돌로 인해 와디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블랙스랜드 가족을 중심으로 주변 농장주와 목부들을 규합하여 50여 명으로 구성된 징벌대를 조직하였다. 그들은 버넷강 하류를 수색하던 중 울창한 삼나무 숲에서 훔친 양고기를 구워 먹고 있던 원주민 100여 명을 발견하였다. 징벌대는 즉시 공격하지 않고 새벽이 오기를 기다렸다. 잠을 자고 있을 때 공격하는 것이 가정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개척 선배들로부터 배워온 터였다. 그렇게 동이 틀 무렵 양고기를 잔뜩 먹고 늘어지게 자고 있던 원주민들을 향해 징벌대는 기습적으로 공격하였다. 새벽 공기를 가르는 소총소리가 삼나무 숲을 진동시켰다. 느닷없이 새벽에 백인의 공격을 받은 원주민들은 황망히 깨어나 살아남은 일부는 강으로 뛰어들었고 나머지는 체포된 후 즉석에서 총살을 당했다. 이 학살이 있은 후 몇십 년이 지난 어느 날, 시더스에서 밭을 일구던 농민이 60여 개의 두개골과 부메랑과 돌도끼 같은 유물을 발견하여 관청에 신고하였다고 한다.


이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시더스 사건이 발생한 후 1년이 지났을 무렵 블랙스랜드 주니어가 원주민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복수는 복수를 부르는 게 이 땅의 생존 논리였다. 이에 처음보다 훨씬 큰 징벌 원정대가 만들어졌다. 재차 보복을 당한 경우는 보다 강력한 응징을 해야만 야만인의 준동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징벌대에는 진진목장 주변 11개 목장주들이 중심이 되었고 그들이 거느린 목부들도 당연히 참여하였다. 무엇보다 목축업자이자 정치인인 윌리엄 헬리 웰시와 귀족이자 행정 관리 출신인 모리스 찰스 오코넬 같은 저명한 인사들도 이 원정대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이렇게 형성된 징벌대는 베넷강어귀 패디 섬에서 원주민 무리를 추적한 결과 수백 명의 원주민을 사살하였다. 수백 명이란 숫자는 당시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20년 후 웰시가 퀸즈랜드 의회에서 발설하면서 사건의 규모가 드러난 것이었다. 사실 수백 명이라고 밝혔지만 그 애매한 숫자가 매우 많다는 것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인지 아니면 성과를 과시하기 위한 과장된 표현인지 정확한 숫자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최소한 보수적으로 볼 때 백 명까지는 안 되더라도 그에 상당한 숫자인 것만큼은 분명한 것 같다. 하지만 학살된 원주민이 블랙스랜드 주니어의 죽음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지에 대한 어떠한 물적 증거는 없었다.




다음에 소개할 호넷 뱅크 사건은 한 편의 드라마를 만들 만큼의 다양한 서사를 가지고 있다. 흔하지 않게 이 사건에 대한 내용이 상대적으로 자세하고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게 특징이다. 1857년, 유툼바 호넷 뱅크 지역에 윌리엄 프레이저 목장이 있었다. 그 역시도 원래 그 땅의 주인이었던 이만 족으로부터 거센 저항을 받았다. 그해 어느 날, 12명의 이만 족이 스트리크닌이 섞인 푸딩 미끼를 먹고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자신의 양을 훔쳐가는 원주민을 혼내주기 위한 처방이었지만 그 정도가 심하여 주변 정착민들로부터도 좋지 않은 시선을 받기도 했다. 프레이저 형제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 것은 그들이 암암리에 이만 족 여성들을 납치하여 강간을 일삼는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표면적으론 친절하고 교양 있는 그들이었지만 사실은 이중적인 삶을 살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이런 연유로 인해 이만 족이 그냥 있지 않을 것이란 불안감이 호넷 뱅크 지역에 퍼져 있었다.


이 사건에 대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던 인물은 이만 족의 베일바였다. 그는 원주민 저항군의 지도자였다. 그 저항군에는 백인 쪽에서 원주민 경찰질을 하다가 다시 이쪽으로 전향한 2명이 가담하여 있었고, 프레이저 목장의 노예로 있던 원주민 바울리도 그런 상황이었다. 그렇게 준비를 완료한 베일바 게릴라군은 그해 10월 프레이저 목장을 기습적으로 공격하였다. 당초엔 여자 1명만 납치하려고 했지만 목장 식구들과 무력 충돌이 일어나면서 상황이 악화되어 걷잡을 수 없이 확전 되었고, 이 와중에 프레이저의 식솔 11명이 살해되고 개들도 모두 죽는 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당시 목장의 상황은 처참했다. 베일바 무리는 극렬한 충돌로 인해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감정을 억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경찰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프레이저 가족 8명과 가정교사 1명 그리고 목부 2명의 시신이 참혹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이 사건은 정착민 세계를 경악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 사건의 해결을 맡은 사람은 월터 파월 경감이었다. 사건의 규모로 볼 때 공권력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만든 징벌대는 그해 12월까지 주변 지역을 샅샅이 수색하여 40명의 원주민을 죽였고, 이후에도 다른 경찰들도 이 응징 작전에 투입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양이 차지 않는 듯, 에드릭 모리셋 경찰서장이 직접 지휘봉이 잡는 등 주요 경찰 간부들도 총 출동하였다. 그렇게 증강한 징벌대는 이 잡듯이 넓은 지역을 수색하면서 기록에 남지 않은 수많은 원주민을 죽였다. 당시 참전한 다른 목장주의 증언에 의하면, 징벌 대원들이 12명의 원주민을 체포한 후, 들판에서 그들을 도망가게 명령하고는 뛰어 달아나는 그들 등을 향해 사격을 하여 처단하였다고 전했다. 그러니까 동물 사냥처럼 흥미 삼아 원주민을 사냥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조지 세로콜드라는 사람은 자체적으로 10여 명으로 구성된 기마 자경단을 조직한 후 6주 동안 원주민 토벌에 가담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한다. 기마대는 원주민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부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만 족과 여타 부족들은 계속 게릴라 작전으로 불법정착민을 공격하면서 저항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아무리 토벌군이 많다 하더라도 땅은 넓고 숨을 곳을 많았다. 이에 경찰도 병력을 증원하였고, 토벌대 지원자도 늘어났다. 이들은 프레데릭 워커 경감의 주도로 순찰대를 만들어 지역 곳곳에 암약하고 있는 원주민의 준동을 막았다. 수색대와 순찰대는 그렇게 양분한 채 운영되었다.


이 징벌 전쟁에서 가장 무자비했던 사람은 바로 사건의 피해 당사자였던 윌리어 프레이저였다. 그는 사건 당일 출타 중이어서 다행히 사건 현장에는 없었다. 그 사건 후 자신의 가족 전부를 잃은 그는 복수의 화신이 되어 무자비한 살인을 일삼기 시작했다. 그는 록햄튼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던 선량한 원주민 두 명을 권총으로 사살하는 무법자의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지방 정부는 그에게 12개월 동안 가족 학살에 대한 복수를 하게끔 암묵적인 권한을 부여하였다. 공인된 살인병기였다. 그러니까 원주민을 이유 없이 살해하더라도 눈감아 준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다른 원주민을 프레이저가 아니라 다른 정착민들이 대신 처단해 주는 사건들도 일어났다. 바로 동정 살인이었다. 프레이저의 아픔에 공감하고 복수도 대신해 준다는 기발한 논리였다. 당시 원주민 경찰 사령관이었던 프레드릭 워커가 식민지 장관에게 쓴 편지에서 백인들이 무죄를 선고받은 원주민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살해를 했고, 두 명은 시체를 묻기 위해 살려두었으며, 그리고 시신 처리가 완료하자 그들에게 총을 발사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그중에 한 원주민은 실탄이 부족하여 살아났다고 첨언하였다. 사람 목숨은 정말 파리 목숨이었다. 웨스트다운스 지역에 인구 1,000명도 안 되는 작고 평화로운 도시인 완도안에 프레이저 리벤지라는 장소가 있다. 바로 프레이저와 동정 살인으로 학살당한 원주민들이 묻힌 곳이라고 한다.


살인병기 프레이저는 1867년엔 아예 경찰관이 되어 원주민 토벌에 앞장을 섰다. 그는 최소한 100여 명을 죽였다고 하는데 오스트레일리아 역사상 가장 잔혹한 살인범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런 살인병기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착민 사회에서 영웅으로 부각되었고, 원주민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으며 저승사자였다. 일명 호넷 뱅크 학살 사건이라고 일컫는 일련의 집단 학살 과정에서 원주민이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 집계된 것은 없다. 수백 명이라는 설은 설득력은 있지만 정확한 숫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후에게 원주민의 저항은 계속되었지만 이 학살의 당사자인 이만 족은 아마도 멸종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방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고 정착지를 개간한다고 해서 모두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중에는 정착에 실패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원주민들은 정착지 건설을 방해하기 위해 가축들을 초원으로 몰아내기도 하고, 괴성을 지르고 북을 치면서 여기서 나가라고 외치기도 하고, 때로는 불법거주자들을 찾아가 떠날 것을 주장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폭력적인 충돌이 발생하기도 하는 등 순조롭지 않은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어떤 경우는 3번의 시도 끝에 결국 정착지를 포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위협을 극복하고 목장 건설을 완성했다고 하더라도 불법거주자들은 자신의 농가를 마치 요새처럼 꾸며야만 했다. 모든 출입문과 창문을 위급할 시 아예 봉쇄할 수 있도록 특별한 장치를 하였고, 벽에 구멍을 뚫어 언제든지 침입자에게 사격을 할 수 있게끔 구조를 변경하였다.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도 척박한 땅을 개척하려는 백인들은 끊이지 않고 퀸즈랜드로 몰려들었다. 호라티오 윌스도 그중에 한 명이었다. 1861년 10월, 그를 중심으로 25명의 개척 이주민이 소와 양 10,000마리를 이끌고 컬린라링고에 도착하여 캠프를 설치한 후 집을 짓고 목장 울타리를 설치하고 있었다. 그렇게 꿈에 부풀어 자신만의 세계를 건설하고 있던 그들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당시 주변에 거주하던 가이리 족은 레이워드에 사는 제시 그레이슨에게 자신의 부족 일원을 살해한 것이 대해 보복하려고 했는데, 부족 간에 정보가 잘못 전해져 죄 없는 윌스 가족을 공격하기에 이른 것이다. 간혹 원주민들이 주변에서 자신을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위협적인 행동을 하지 않아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그런 어느 날 가이리 족이 갑자기 자신의 파라다이스를 덮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컬린라링고 목장에서 죽고 죽이는 치열한 혈전이 벌여졌다. 총이 필요가 없을 정도로 다급한 상황으로 인해, 윌스 가족은 육탄전으로 원주민을 방어했는데 아무래도 육탄전으로는 원주민을 상대하는 것은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이에 25명 중 19명이 전사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원주민의 사망 숫자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10명 이상인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에 주변의 불법거주자들로 구성된 자경단과 원주민 경찰이 응징 추적조를 만들어 코멧강과 도슨강을 중심으로 가이리 족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당시 브라운 주지사는 자신의 지인에게 쓴 편지에서 ‘복수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욕망이 모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라고 당시 정착민의 심정을 토로하고, 11명의 우리의 복수자들이 원주민 30명을 처형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아무튼 1861년 11월 말, 징벌대는 한 달 이상 가이리 족을 추적한 결과 노아강 북서쪽에서 그들을 찾아내어 살육을 하기 시작했다. 증언에 의하면 탄약이 고갈될 때까지 사격을 하였고, 원주민 경찰은 달아나는 야만족을 끝까지 추적하여 죽였다고 한다. 때로는 원주인들이 몸을 던져 공격하였지만 결국에는 백인을 이길 수 없었다. 호주 역사가들은 이 사건에서 원주민이 370명가량 학살되었다고 주장한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1872년 경, 조지 프레이저가 이끄는 8명의 불법점거자들이 소 700마리를 블레이던스버그 지역으로 끌고 와서 자신들의 신천지를 만들고 있었다. 이후 사건의 패턴은 거의 비슷하게 진행되었다. 자신의 땅을 강탈당한 원주민들이 그들을 습격하고, 피비린내 나는 격전이 벌어지고, 그렇게 해서 징벌대가 구성되는 사건의 프로세스는 변하지 않았다. 당시 그곳을 삶의 영역으로 삼았던 구와 족이 불법침입자들을 공격하여 1명을 죽이고 달아났다. 이에 프레이저는 이 사실을 경찰에 신고하였고, 로버트 모란 경감이 이끄는 경찰 추적조가 1주일 만에 현장에 당도하였다. 사건의 규모가 크지 않은 탓인지 경찰 추적대는 불과 대여섯 명에 불과했다. 사실 당시엔 이런 사건들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경찰 병력이 항시 부족한 형편이었다. 그래서 목장 구성원이 경찰 추적대에 합세하여 총 14명이 구와 족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몇 주 동안 추적한 결과 포 사이드 산맥 미스테이크 크릭 상류에서 구와 족 몇 백 명이 거주하는 대규모 캠프를 발견하였다. 절벽 아래에 비교적 큰 연못이 있는 넓은 공간에 원주민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징벌대는 즉시 사격을 하지 않고 절벽을 제외한 3면으로 분산 배치한 후 새벽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여명이 밝아올 즈음에 징벌대는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였다. 10개의 소총소리가 굉음을 울리며 새벽 산속에 메아리쳤다. 이에 아직 잠에서 덜 깬 구와 족 사람들이 황급하게 도망가느라 거주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징벌대는 움직이는 타깃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하였다. 당시엔 그들이 무장하고 있는 소총은 화승식이 아닌 연사가 가능한 혁신적인 스나이퍼 라이프 같은 소총이었다. 절벽에 막혀 도망가지 못한 원주민들은 연못으로 뛰어들어 총알을 피했고, 그런 그들을 향해 백인들의 총구에서 광기의 불꽃이 튀었다. 도망가지 못할 외통수에 멧돼지를 몰아넣고 사격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흑인들은 무참히 죽어갔다. 이 사건을 두고 스컬홀(skull hole) 학살이라고 후대의 호주 역사가들이 명명한다. 해골 구멍, 참 기막힌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이 사건의 전말은 수사에 의해 밝혀진 것은 아니다. 1901년 PFH 맥케이라는 언론인이 사건 당시 목장주의 동료였던 헤이즐턴 블록으로부터 이 사실을 제보받고 내용을 정리한 후 퀸즈랜드 신문사 투고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당시 사건의 전 과정에 참여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신뢰를 담보할 수 있었다. 블록은 당시 학살 현장에서 어린 남자아이를 잡아 목줄로 묶고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와서 부메랑 잭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자신의 종으로 삼았다고 덧붙였다. 이에 멕케이는 1901년, 미스테이크 크릭 지역의 대지주였던 존 아서 매카트니와 함께 스킬홀 현장에 가서 당시 학살당한 구와 족의 유해를 발굴하였다. 매카트니는 당시 목축업과 부동산으로 많은 부를 축척한 인물로서 인류학에도 관심이 많아 고고학적 가치가 충분했던 원주민 유골을 수집하고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그들에게 있어 살아있는 화석의 보고였던 것이다. 이에 대한 예로 노르웨이의 인류학자 칼 럼홀츠는 1881년 퀸즈랜드 지역을 여행한 후 쓴 기행문에서, 블레이던스버그 지역을 답사하던 중 지역 정착민의 안내로 많은 유골을 발견하였는데, 스킬홀로 보이는 지역에도 답사한 결과 7~8개의 유골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 많은 유골이 어떻게 여기에 있는지 궁금해서 추가로 정착민에게 사건의 경위를 질문한 결과 그들로부터 위 사건으로 인해 원주민이 대부분 살해되었다는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노라고 밝혔다.


4. 끝나지 않은 전쟁

위에서 언급한 기사 형식의 학살 사례는 일부에 불과하며, 이후에도 퀸즈랜드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수많은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그중에는 행정 관서에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지역 신문에 일반적인 사회면 기사로 실린 것과 지역에서 돌아다니던 소문 등을 검증하여 탐사 형식으로 세상에 드러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먼저 언급한 태즈매니아를 비롯해 뉴사우스웨일즈, 빅토리아, 서부오스트레일리아, 노던 테리토리 등에서도 퀸즈랜드의 사례와 비슷한 사건들이 수없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들은 유럽인이 분탕질을 한 아메리카의 아즈텍이나 잉카 정복의 경우처럼 체계적인 전쟁 양상이 아니었다. 불법거주자가 형성한 공동체와 그 지역 원주민 부족 사이에서 발생한 분쟁과 갈등이 소규모 유혈 충돌을 유발하였고, 이후 원주민 경찰 같은 공권력이 개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 충돌의 양태를 숫자를 헤아린다는 것은 거의 비어있는 광활한 땅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몇십 년 후 어느 산이나 강가에서 우연히 원주민 유골이 발견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는데, 그 주검들이 왜 그렇게 방치되었는지 소문으로 아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원인을 할 수 없는 무연고자 유골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레일리아의 의식 있는 많은 역사가들은 개개의 진상을 규명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현상적 규모를 조사하여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퀸즈랜드 대학 역사학 교수이자 저명한 원주민 역사가인 레이몬드 에반스이다. 2009년 그가 발표한 논문을 보면 전체적으로 65,000명의 원주민이 전쟁과 학살 등으로 사망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금년 뉴케슬 대학 린다 라이언 교수가 십수 년 간 조사 끝에 학살 지도를 발표하였다. 각각의 학살 장소를 오스트레일리아 지도에 표식을 한 것인데, 한 번의 토벌 작전에서 원주민이 무방비 상태로 6명 이상 고의적으로 혹은 불법적으로 사망한 사건 현장을 기준점으로 삼아 현장을 조사했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공격자, 피해자, 목격자를 기본 삼각형 조사 방법으로 증언과 증거를 수집하고, 공개된 자료와 공개되지 않은 자료 등을 취합하여 교차 검증을 하고 그 연결고리에 위배되는 것은 배제시켰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조사된 건수가 1788년에서 1930년 사이에 419건이었고, 그 사건으로 10,374명이 학살되었다고 덧붙였다. 이 숫자는 보수적 데이터에 근거한 최소 추정치라고 밝혔다. 또한 백인의 학살 특징은, 계획적으로 집단을 이루어 무방비 상태의 원주민을 일방적으로 공격하였고, 이렇게 자행된 학살은 이후 비밀유지를 위해 참여자들 사이에 침묵의 규범이 형성되었으며, 지지하는 식민지 주민들도 사건을 부인 은폐에 동조하는 양태를 보였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어렵게 증거들이 발견되고 양심적인 증언이 뒤따랐던 것이다. 그 외에도 그런 단초조차 없는 침묵하는 주검은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알 수 없다고 밝혔다. 연구팀은 마지막으로 이번 조사 연구는 중간발표에 불과하고 현재도 국경학살과 집단학살 현장 발굴 작업은 계속 진행 중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객관적이라고 자처한 린다 라이언 교수의 학살 지도 제작 작업도 주체적인 측면에서 볼 때 백인이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학살의 정의는 여전히 백인이 기준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영국의 식민지 시절이나 독립 후의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 탄압에 대한 거대 담론을 논할 생각은 없다. 제국주의적 욕망으로 인해 새롭게 진화된 인간의 우월적 탐욕이 자신보다 열등한 집단을 어떻게 다루었는지에 대해 조금이라고 생각하게끔 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중세시대까지만 해도 타민족이나 인종에 대한 차별 의식이 갈등의 형태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대항해의 시대 이후엔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결합하여 새로운 돌연변이 인간종이 지구의 지배적인 포식자 되었고 그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이유도 없이 희생되었다는 것은 최소한의 진실이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벌어졌던 국경학살과 집단학살의 경우도 그런 맥락에서 자행된 사례이라고 볼 수 있다.


‘2008년 4월호 The Monthly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역사학자 데이비드 데이(David Andrew Day)는 집단학살이라는 주제에 대해 추가로 글을 썼다. 그는 렘킨이 집단학살이 대량살해 이상의 행위, 즉 "토착민을 땅에서 몰아내는 것... 보호구역에 가두어 의도적으로 방치하는 정책을 사용하여 그들의 수를 줄이는 것... 토착민 어린이들을 그들 가운데로 데려가서 흡수시키는 것... 사람들을 그들의 문화, 언어, 종교, 그리고 종종 그들의 이름에서 분리시키는 동화"와 같은 행위도 포함한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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