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그리스 독립전쟁

by 안호용

1. 필헬레니즘


호모사피엔스는 유라시아 대륙으로 진출하여 수만 년 동안 가장 혹독하다고 하는 최종 빙성기(Last Glacial Maximum)를 힘겹게 극복하고 근근이 생존해 오다 신의 영감으로 구리를 발견했고, 이어서 철을 가공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면서 정신사적인 대 변혁을 촉발시켰다. 금속의 발견은 인류사에 있어 삶 자체가 완전히 재편되는 대혁명이었고, 지구의 근본을 바꾸는 극적인 패러다임의 대전환이었다. 그로 인해 기원전 800년부터 기원전 200년 사이에 문화와 종교의 탄생이 지구 곳곳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는데 칼 야스퍼스는 그 시대를 축의 시대하고 불렀다. 인간의 정신사는 그 당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인류세가 믿고 있는 대부분의 종교와 과학과 인문학은 그 당시에 태동한 모체의 자양분을 먹고 급속도로 몸집을 키운 결과물이다.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도 있지만 농경과 기술의 혁명적인 발달로 잉여의 시간이 생기자 그들은 자신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바로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그중에서도 그리스 문명은 오늘날의 문명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들은 기원전 500년부터 자연의 섭리를 탐구하고 인간의 감성과 이성과 도덕에 대해 논쟁을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강력한 무력으로 제국화 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자신이 정복하는 지역에 그리스 문화를 견고하게 심어놓았는데 그 헬레니즘은 그리스 로마를 비롯해 서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에 뿌리를 내려 2,000년 이상 유지하였다. 특히 유럽에서 폭발한 르네상스의 성공은 헬레니즘이 암흑시대에서도 근근히 명맥을 이어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아마도 헬레니즘이 중동 어딘가의 낡은 도서관에 처박혀 있었다면 르네상스는 화려한 꽃을 피우지 못하였을 것이고 이후 문명도 거인의 어깨를 깨닫지 못하고 지지부진했을지도 모른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문명사적 사실이다. 과학, 문학, 철학, 미학 등 문화의 전반은 그들을 논하지 않고는 시작할 수 없다. 중국과 인도의 문명이 찬란하다고 하더라도 헬레니즘을 넘기엔 부족하다. 소포크레스, 아르키메데스,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림자 아래 현대 문명이 놓여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근대의 그리스는 자신의 선조들이 이룩한 거대한 만신전을 지키지 못하고 세상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집트는 기독교과 이슬람 문명에 시달리면서도 역사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명맥은 유지하여 왔지만 그리스는 1453년 오스만 튀르크가 동로마를 완벽하게 접수하면서 역사 속에 묻히고 말았다. 이미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선포되고 중세를 거치면서 그리스 문화는 하나의 천박한 형이상학으로 치부되었고 더 나아가 불경스러운 학문으로 취급되어 지하에 묻히는 신세로 전락하였다. 소설 '장미의 이름'을 보면 살인 사건의 주된 원인이 금서로 취급되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촉발된 것을 알 수 있듯이 유럽 중세에서 그리스 문화는 철저하게 배격되었다. 이런 기나긴 암흑기를 거쳐 르네상스로 접어들 무렵에 필헬레니즘이 태동하였지만 역설적으로 동로마의 핵심적인 일원이었던 그리스 공동체는 이교도의 대표주자인 오스만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렇게 400년 동안 그리스는 유럽인의 관심 밖에서 오스만의 한 변방 속국으로 생명을 유지하였다. 사실 400년이라는 시간이면 이미 오스만화 되어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을 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소생할 수 있었던 것은 오스만의 독특한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각 속국이나 공동체에 자치구처럼 대폭적이 권한을 주었기 때문이다. 밀레트 제도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스 공동체에도 기존의 종교와 문화와 행정을 존중하는 대신 정치와 군사는 오스만이 독점하는 형식이었던 것이다. 만약 유럽 제국주의자들이 자신의 식민지에 기독교를 전파한 것처럼 오스만도 강압적으로 그리스인에게 정교회를 강제로 폐하고 이슬람을 접목시키려고 했다면 그들은 지금까지도 쿠르드족처럼 오스만의 소수 민족으로 남아 있었을지 모른다.


나중에 더 얘기하겠지만, 유럽의 문화를 지탱해 온 근간이 헬레니즘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라는 공동체는 18세기 유럽의 국제정치 상황을 볼 때 이제 오스만의 일부로서 굳어졌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통상적인 국제법으로 그리스라는 국호는 유럽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보다 아나톨리아는 물론이고 이집트와 중동을 통치하던 당시 오스만 제국은 전 유럽에 맞설 수 있는 거대한 제국이었다. 그리스는 이제 미노아 문명처럼 신화 속의 문명으로 취급받으며 현실에서는 멀리 잊혀가고 있었다. 하지만 헬레니즘에 가반한 유럽의 정신사는 기독교와 함께 거세게 흐르는 문명의 강줄기였다. 그리스의 문학 철학 과학 등은 이미 유럽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런 필헬레니즘은 유럽의 정치 지형이 변하면서 행동으로 나타나 그리스를 오스만으로부터 구출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낭만주의와 문학적 감수성이 정치현실에서 폭발한 드라마틱한 전쟁사이며, 한 편의 새로운 그리스 신화라고 할 수 있겠다. 인류사에서 정신이 현실을 극복한 전무후무한 사례이다.


하지만 전쟁은 항상 폭력과 주검을 양산하기 마련이다. 인간의 폭력성에는 낭만이나 문학적 감수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네로처럼 사람을 죽이면서 시를 읊조리는 따위는 정신병적인 행위에 불과하다. 1821년부터 1829년까지 지속된 그리스 독립전쟁에서 수많은 군인들이 전장에서 죽고, 무고한 민간인들이 대량으로 학살되었다. 폭력은 보복을 부르고 그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을 부르기 마련이다. 인간의 폭력적 야만성은 필연적으로 전쟁 전체를 지배하며 결국은 피의 저수지에 이르게 한다.



오스만제국으로부터 동로마제국이 멸망하면서 함께 속국으로 전락하였지만 17세기부터 그리스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각성하고 독립에 대한 의지를 고취시키기 시작하였다. 특히 모레아(현재의 펠로폰네소스) 지역 곳곳에서 정교회 주교들을 중심으로 소규모 봉기를 일으켰다. 성공적인 결과를 만들지는 못했지만 저항의 끈을 놓지 않고 그리스 곳곳에서 유의미한 움직임이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그 저항세력의 무장군 중에는 클레프트라고 불리던 산적 집단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호전적이었던 그들은 오스만의 통치를 거부하고 산악지역으로 잠입하여 산적 형태의 공동체를 형성한 후 한때는 정략적으로 오스만과 동맹을 맺기도 하고, 무슬림과 정교회 사람들을 약탈하기고 하면서 세력을 유지하였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의 재산은 탐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전설에 의하면 하이두크 같은 의적으로 인식되어 민중으로부터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산적이든 의적이든 남의 재산을 탈취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용납받을 수 없어 평가가 다양하지만 독립항쟁 초기에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었다. 독립항쟁이 길어지면서 클레프트는 민병대에 흡수되어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그리스 민중에게는 의적으로 남을 만한 평가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오스만으로서는 그리스를 비롯해 발칸반도의 몰다비아와 알바니아 같은 속국에서 발생하는 저항운동을 제압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것보다 러시아와의 갈등과 분쟁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국화 된 러시아는 흑해와 에게해의 헤게모니를 쟁취하기 위해 수시로 오스만을 도발하여 전쟁을 유도하였다. 그런 전쟁마다 오스만은 대부분 패하고 많은 영토와 영향력을 러시아에게 빼앗겼다. 그중에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전쟁이 1768년에 발발한 전쟁이었다. 18세기 들어서만 3번째 충돌인 이 전쟁에서 1770년 2월 오를로프가 지휘하는 러시아 해군은 흑해를 빠져나와 펠로폰네소스 남단에 위치한 마니 지역까지 진출하였다. 그 작은 반도는 에게해와 접하고 있는 해상무역의 중심지였다. 상대적으로 강하지 못했던 러시아 해군이 이곳까지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해외에 있는 그리스 해운업자들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오스만의 속국이지만 해상 무역만큼은 베네치아와 대등한 위치에 있었던 그리스 해운업자들은 자신의 상선과 자위군함 등을 동원하여 오스만 함선을 방어해 준 것이다. 당시 그리스인이 소유한 상선의 수는 프랑스보다 많았을 정도로 지중해 무역에서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이렇게 오를로프 군이 마니를 손쉽게 접수하자 그리스 독립운동가들은 해방군을 만난 것처럼 그들을 반겼고, 이에 도취되어 오스만에게 보다 큰 규모의 반란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러시아군의 군사력을 믿고 펠로폰네소스의 마니와 칼라마타와 코린도 그리고 본토의 미솔롱고와 파크토스 등 많은 지역에서 봉기를 하였지만 생각보다 러시아군의 전력은 강하지 않았다. 해군중심이어서 병력도 소수였고 육군의 숫자도 미미하여 그리스 독립군을 실망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전열을 정비한 오스만의 정예군 예니체리가 반격하자 독립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오를로프 군도 4개월 만에 퇴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을 역사가들은 오를로프 반란이라고 칭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를로프 반란은 유의미하게 작동되었다. 그 반란의 핵심적인 주체는 그리스 상인 연합체로서 본격적인 독립항쟁을 함에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대다수 상인은 국외에서 디아스포라를 형성하여 전통적인 해상력을 바탕으로 해상무역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스만 군의 영향력을 벗어나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그렇게 민족주의에 고취된 상인들을 중심으로 뭉친 비밀결사단체는 차후 독립전쟁에서 필리키 에떼리아로 다시 태어난다. 아무튼 상인 조직은 유럽의 계몽주의에 영향을 받아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그리스의 많은 지역에 학교와 도서관 건립하였고, 그리고 서적 출간에도 집중적으로 투자하기 시작했다. 서유럽의 신문화를 전파하기 위한 밑거름이었다.


방대한 영토를 소유하고 있던 오스만제국은 수십 개의 속국을 밀레트 시스템이라는 방식으로 통치하였다. 18세기에는 동유럽의 중심인 그리스에서도 밀레트가 강고하게 구축되어 있었다. 그 중추적인 역할을 한 세력이 바로 파나리오테스 가문이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가장자리에 위치한 구역의 지명이 파나리오테스였는데, 그곳은 과거 유력한 귀족 가문이 관리하던 영지였다. 그 후에도 그 가문 출신들이 오스만제국과 결탁하여 그리스 통치의 대리인 역할을 하였고, 현재로 표현하지면 대기업에 속하는 대상들도 배출하였으며, 정교회 총대주교를 비롯한 많은 사제들도 생산하였다. 그중에 유럽과의 외교 무역에서 중계자 역할을 담당하는 채널이 가동되고 있었는데 그들을 드라고만이라고 불렀다. 직역을 하면 통역자라고 하지만 실무를 담당하는 외교부 차관 정도의 역할이었다. 바로 그 드라고만을 파나리오테스 가문이 거의 독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직역하면 함대의 드라고만이라고 불리는 직책도 있었는데 그들은 에게해의 많은 섬들을 행정적으로 통치하기도 하고 조선 산업과 해군의 조직도 관리하였다. 정치적인 통치를 배제한 거의 모든 분야를 그들이 관리했다고 보아야 옳다. 그래서 통역자, 중재자, 대리자라는 개념이 중요한 근간이 되었던 것이다. 오스만 정부는 군사 정치적으로 월권을 하지 않는다면 그리스 사회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스 외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같은 작은 영지에서는 호스포다르라고 불리는 대리 군주가 전반적인 행정을 담당하였다. 아무튼 파나리오테스 가문 출신의 유력한 인사들이 독립운동에 지도자급으로 앞장서기도 했지만 오스만 정권에 굴복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그리스 독립 과정에서 그들의 영향력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2. 혁명 전야


1789년 7월 프랑스에서 폭발한 대혁명은 전 유럽을 흔들어 놓았다. 그 혁명은 무엇보다도 오스만의 식민지인 그리스에게 결정적인 영감을 주었다. 시민이 중심인 혁명세력이 루이 16세를 단두대로 처형을 하고 절대왕정을 무너뜨린 이 사건의 핵심은 억압된 통치로부터의 자유였다. 이런 혁명과 자유의 바람은 그리스에서 혁명적 민족주의로 발전 하였고 때로는 낭만적 민족주의로 포장되어 유럽의 많은 젊은 지식인의 지지를 유도하였다. 낭만적 민족주의는 계몽주의와 더불어 그리스 문명에 대한 대각성을 불러오게 하여 돌이킬 수 없는 혁명의 정체성으로 확립 되었다. 혁명의 불씨가 뜨겁게 타오른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을 받은 테살리아 출신 리가스 페라이오스는 1793년 빈에 망명하여 본격적인 민족운동을 시작했다. 작가이자 시인이었던 그는 혁명가가 되어 민족주의 운동의 선봉에 섰고, 오스만으로부터 독립한 발칸공화국 수립을 주장하며 오스트리아 정부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또한 당시 프랑스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고 있던 나폴레옹에게도 지원을 요청하는 밀서와 특사를 보내기도 했다. 그리스의 독립은 유럽 열강들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끌어내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영국과 프랑스가 유럽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지만 합스부르크의 본산인 오스트리아도 여전히 유럽 전역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에 오스만은 페라이오스의 송환을 오스트리아에게 강력하게 요청하였다. 사실 오스트리아 입장에서도 페라이오스는 골칫거리였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유럽 전체가 뒤집어진 형국에서 인접한 오스만을 자극하여 또 다른 갈등을 초래할 수는 없었다. 오스트리아의 주요 관심사는 공화정 운동을 차단하고 왕정을 지켜내는 것이었다.


그리스 독립에는 안중에도 없던 오스트리아 정부는 오스만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1797년 트라에스터에서 페라이오스를 체포하여 오스만으로 송환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 6월 그는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죽음은 그리스 민족주의 정신을 고양시켜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그리스 내에서 그의 영향을 받은 혁명가들이 성장하였고 그에 따른 조직들도 암암리에 형성되면서 혁명의 기운이 한층 부풀어 올랐다.


그중에 아르마톨로이와 클레프트가 있다. 아르마톨로이는 오스만 정부에서 그리스인을 중심으로 만든 지역의 치안 경찰 조직이었고, 클레프트는 아르마톨로이가 색출해야 하는 도적의 무리였다. 흔히 아르마톨로이를 기독교민병대하고도 불리고, 위에서 언급했듯이 클레프트는 하이두크 같은 의적으로 불리기도 한다. 대척점에 있던 두 조직은 오스만의 느슨한 감시를 틈 타 은연중에 결탁하여 독립전쟁 당시 선봉대 역할을 하였다. 혁명을 위해 도적과 경찰이 연합한 것으로서 그리스 사람들은 그들을 '자유의 효모'라고 불렀다.


그렇게 혁명의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1814년 그리스 상인들을 중심으로 비밀 혁명 조직인 필리키 에테리아가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이 조직은 독립전쟁의 모채가 되었고 최종 목적은 독립국가 설립이었다. 정통성을 가진 상당한 재력가들이 만든 조직이었기 때문에 활동의 역량은 상당하였다. 그들은 자금을 구하기 위해 영악하기로 소문난 영국의 은행들과도 협상을 하여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오디세아스 안드루초스, 게르기오스 카라이스카키스, 아타나시오스 디아코스 같은 젊은 혁명가들이 에테리아에 가담하여 혁명의 전위에 섰다. 또한 알렉산더 입실란티스 같은 파나리오테스 가문의 지도자급 인사들과 세르비아의 카라조르제, 루마니아의 투도르 블라디미레스쿠 같은 정교회 지도자들도 필리키 에테리아에 참여하였다.


19세기 초 오스만제국은 아제르바이잔 국경 문제로 갈등을 겪던 페르시아와 대치하기 위해 많은 병력을 동쪽으로 이동시키고 있었고, 알바니아에서 발발한 알리 파샤의 반란을 진압하느라 내부 단속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서유럽에서는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 재상의 주도로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시대 이후 유럽의 재정립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보수주의에 입각해 무너진 왕정복고에 심혈을 기울였고 비엔나 회의에서 유럽 협력체(Concert of Europe)를 만들어 각국의 갈등을 방지하기 위해 대책을 마련하였다. 그들은 특히 혁명과 자유주의 운동을 반대하였고, 민족주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정책을 내놓았다. 나폴레옹에게 호되게 당한 오스트리아 같은 경우는 강력한 경찰국가를 구축하여 개인의 자유를 통제하고 진선미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인간형 배양에 힘을 쏟았다. 혁명과 민족주의 운동을 거부한 이런 서유럽이 그리스 독립 문제에 관심을 두지 못한 것은 당연했는지 모른다.


서유럽 국가들의 이런 무관심 속에서 의식 있는 예술가들이 필헬레니즘이라는 사회역사적인 사조를 설파하였고, 뜻있는 지식인들이 동조하는 분위기가 서서히 형성되었다. 수많은 고전들이 만들어진 고대 그리스는 자신들의 문화정신사적인 원류임에는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었다. 하지만 작금의 그리스는 400년 동안 이교도인 오스만제국의 억압에 눌려 있는 실정이었다. 바로 이런 사실을 예술가들이 앞장서서 그리스 독립의 정당한 논리를 만들어냈고 문화적 감성에 호소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것은 결국 그리스 독립운동에 동정심을 유발해, 최종적으로 유럽 국가들의 직접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필헬레니즘은 유럽의 낭만주의자들이 고대 그리스 정신의 재생을 꿈꾼 황금시대의 부활의 서곡이었던 셈이다.


차후 이 운동에 뛰어든 대표적이 인물이 영국의 낭만주의 문학을 이끌었던 조지 고든 바이런이었다. 필헬레니즘의 상징적인 인물인 그는 실제로 독립전쟁에 참전하여 1824년 미솔롱기에서 혹독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열병으로 사망하였다. 또한 미국의 갑부인 세뮤엘 하우, 급진적인 공리주의 철학자인 영국의 제레미 밴담, 영국의 휘그당과 복음주의자 단체 등이 직간접적으로 지원을 하였다. 스코틀랜드 출신 토마스 고든은 입실란티스의 참모를 지내기도 하고 트리폴리차 전투에 참전하였고, 영국의 리차드 처치는 젊은 시절부터 그리스 독립운동에 동조하여 그리스 군 설립에 기여하고, 전쟁 막바지에는 그리스 군 사령관으로 참전하여 독립에 일조하였다. 그 밖에도 유럽의 많은 이름 없는 젊은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목숨을 걸고 참전하는 필헬레네스 붐이 큰 울림으로 조성되었다. 낭만주의 시대의 낭만적인 참전이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면서 동로마제국을 멸망에 이르게 한 오스만은 로마제국에 버금가는 대제국을 형성하였다. 이후에도 영토를 더 확장하여 현재의 그리스, 세르비아, 알바니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발칸반도와 흑해 주변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오스만은 16세기 이후 흑해의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맞서 싸우면서 연전연패를 하였다. 두 왕국은 1820년까지 7번의 전쟁을 겪었는데, 그때마다 거의 패배한 오스만은 베오그라드 조약과 쿠츠크카이나르자 조약과 부크레슈티 조약 등을 맺으면서 영토를 조금씩 내주었고 그러면서 오스만의 국력이 약화되었다. 상대적으로 타타르인, 캅카스인, 코사크인 같은 소수민족을 규합한 러시아의 군사력이 강력하기도 했고, 질기고 그악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이후에도 러시아를 비롯해 서유럽은 하이에나처럼 늙은 사자를 집요하게 물어뜯는다.


이렇게 약해진 오스만에게 첫 번째로 반기를 든 속주는 세르비아였다. 1802년 봉기를 하여 성공한 후 1813년까지 자치권을 부여받았고, 이후 다시 오스만이 무력으로 재합병하자 1817년 밀로시 오브레노비치가 이끄는 민병대가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하고 세르비아 공국을 수립하였다. 오스만의 영향을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지만(오스만 군 일부 상주) 사실상의 독립국이나 마찬가지였다. 세르비아의 독립 성공은 그리스에게 매우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어느 속주보다 독립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 그리스는 세르비아 상황을 목도하고 독립 의지를 더욱 고취시켰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1820년 현재의 알바니아 중남부와 그리스 북부를 아우르는 야니나(알바니아)에서 알리 파샤가 오스만에게 반기를 들었다. 당시 산전수전 다 겪은 80세의 고령이었던 그는 속주의 파샤에 불과했지만 군주처럼 행세하며 영향력을 확대하였고 시시때때로 오스만 정부의 정책에 대립하였다. 그의 목적은 독립에 가까운 완전한 자치 정부 수립이었다. 아무튼 알리 파샤가 봉기를 일으키자 인접한 펠로폰네소스(오스만에서는 모레아로 부름)의 총독인 후르시드 파샤가 참모와 일부 군대를 남겨두고 손수 진압에 나섰다. 펠로폰네소스에서도 봉기의 기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우선은 여우 같은 알리 파샤를 제거해야만 다른 속주의 준동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당시 후르시드 파샤는 처음엔 그리스의 봉기를 대단하게 보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바로 이 틈을 노리고 1821년 1월, 펠로폰네소스에서 필리키 에테리아를 중심으로 사제 파파플레사스와 게르마노스 그리고 많은 시민 지도자들이 브스티차에 모여 회의를 열어 독립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방향을 논하였다. 이 회의 후 그해 3월 17일, 펠로폰네소스 남단에 위치한 아레오폴리에서 페트로스 마브로미할리스가 이끄는 마리오트 군이 봉기를 하여 다른 반군과 연합하였고, 7일 후 파트라스의 대주교 게르마노스가 아기아 라브라 수도원에서 혁명의 깃발을 올리면서 드디어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이와 더불어 알렉산드로스 입실란티스도 그들보다 조금 앞서 방아쇠를 당겼다. 1820년 4월 필리키 에테리아의 수장으로 선출된 그는 다음 해 2월 현재의 몰다비아, 왈라키아 공국에 망명하여 일종의 망명정부를 설립한 후 독립 선언문을 발표하고 봉기의 깃발을 들었다. 러시아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 정교회의 본산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정교회 총대주교 그레고리 5세는 혁명을 공식적으로 비판하며 그를 파문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오스만의 수도이기도 해서 지리적으로 볼 때 혁명을 지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이런 입실란티스의 봉기는 처음부터 삐꺽거렸다. 입실란티스가 러시아 차르의 위임을 오용했다는 이유로 지원 중단을 통보받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에 혁명 동맹을 맺은 판두르의 혁명 지도자인 투도르 블라디미레스쿠(루마니아 혁명의 영웅)가 이 사태에 개입되었다는 음모론이 확산되면서 관계가 악화되었는데, 혁명이란 목표는 같았지만 서로 간의 불신이 심각한 갈등으로 발전하기에 이르렀고, 방법론에서도 상당한 차이점이 표출되었다. 그런 갈등은 내분으로 치달았다. 필리키 에테리아 지도부는 블라디미레쿠스가 오스만과 내통을 했다는 명분으로 그를 체포하고 고문한 끝에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다. 그해 6월이었다. 이 비극적인 사건으로 인해 혁명의 동력은 상당 부분 상실되었다.


이후 오스만 군이 왈라키아에 진입했을 때 입실란티스가 이끄는 필리키 에테리아 반군은 드라가샤니 전투에서 참패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몰다비아에서 조르가키스 올림피오스를 중심으로 항전을 하였지만 강력한 오스만 군을 이길 수 없었다.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입실란티스는 헝가리를 거쳐 오스트리아로 어렵게 국경을 넘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가 맺은 신성동맹이 작동 중이어서 정치 망명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 협정 내용 중에 반란 지도자의 망명을 불허한다는 문구가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고, 오히려 그는 체포되어 7년 동안 감금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후 전쟁의 중심지는 그리스의 중심인 펠로폰네소스로 옮겨졌다.


입실란티스의 실패와는 상관없이 그리스 본토 전역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전쟁이 확산되었다. 혁명군은 포키스, 암피사, 라바데이아, 테베, 미셀롱고, 칼라마타, 칼라브리타 등을 점령하며 승리의 깃발을 올렸다. 특히 파트리스에서는 파트라스 포위전이라고 일컫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파나기오티스 카라차스가 이끈 혁명군은 오스만 군을 성채 안으로 몰아넣는 데 성공하였고, 오스만 군은 그 성체 안에서 나오지 못하고 1828년까지 버텼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오스만인 거주지가 파괴되었고 학살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당시 가장 성공적인 전투는 트리폴리차 전투였다. 트리폴리차는 펠로폰네소스의 주도로서 혁명군의 첫 번째 타깃이었고, 쌍방의 상당한 전력이 집중되지 않을 수 없는 상징적인 전장이었다. 1821년 4월 테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가 이끄는 혁명군이 트리폴리차에 진격하자 오스만 군은 성 안으로 후퇴를 하였고, 혁명군은 성곽 주변을 포위하고 캠프를 설치한 후 공성전을 준비하였다. 마리오트 군대를 비롯한 많은 지역에서 지원군이 속속 도착하였다. 하지만 수적으로 열세였던 오스만 군은 수비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 암암리에 다른 지역에서 지원군이 잠입을 하였지만 크게 도움은 되지 않았다. 성곽 봉쇄는 수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시간이 지나자 오스만 군은 식수와 식량 부족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혁명군은 오스만 군과의 협상에서 항복할 것을 강권했지만 오스만 군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혁명군 사령관인 디미트리오스 플라푸타스가 와해 작전을 시도하였다. 오스만 수비대의 일원이었던 알바니아 군에게 안전한 퇴로를 보장할 테니 도망갈 것을 요구하였고, 2천5백 명의 알바니아 군은 이런 요구를 수락하고 행동으로 옮긴 후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갔다. 혁명군은 약속을 지킨 것이다. 이렇게 오스만 군의 전력을 약화시켰지만, 이후에도 오스만 군의 항복에 대한 방법론을 두고 쌍방 간에 협상은 계속 진행되었다. 그럼에도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5개월 후 트리폴리차 성은 스스로 무너졌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한 오스만 군은 힘 한번 쓰지 못하고 백기를 들었고, 2만여 명의 혁명군은 다소 저항이 있었지만 거의 무혈입성 하다시피 트리폴리차 성을 함락하는 데 성공하였다.


트리폴리차 성에 입성한 혁명군은 대대적인 숙청 작업에 들어갔다. 오스만 투르크인과 그들에게 협조한 유대인을 색출하여 학살하였다. 증언에 의하면 그 수가 8,000명에 이른다고 한다. 유대인은 몰살되었고 몸값을 지불한 투르크인 97명이 생존하였다고 한다. 당시 학살 현장에 있었던 영국인 장교 토마스 고든은 훗날 이렇게 증언했다. “목격자와 역사가들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적게는 8천 명 많게는 3만 2천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하였다. 학살 현장은 무법천지였고 여성과 어린아이들은 노예로 팔렸고, 곳곳에서 교수형과 참수가 이루어졌고, 고문과 팔다리를 절단하는 경우도 있었고, 임신한 여자의 배를 가르기도 하고, 허공에 비명소리가 가득 찼다. 어느 한 그리스인은 자신은 투르크인을 90명이나 죽였다고 자랑했고, 웃물에 던져진 시체로 인해 물을 마시지 못했고, 투르크인은 거의 살아남지 못했다. 그 많았던 투르크인은 세상의 주목도 없이 사라졌다.”


이런 민간인 학살은 혁명군 내에서도 비판을 받았다. 특히 입실란티스와 마브로코르다토스는 혁명군의 잔악한 행위를 규탄하였다. 봉기가 발발한 후 오스만의 본토에 살던 그리스인이 학살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는데, 반군은 이에 대한 보복이라고 정당화하였지만 그럼에도 그를 따라 한 행위는 비판받아 마땅한 짓이었다. 사실 이후에도 이런 보복 학살은 쌍방 간에 끊임없이 이어졌다.


아무튼 트리폴리차 함락은 펠로폰네소스 대부분 지역을 독립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많은 지역에서 개별적으로 혁명군이 조직되었기 때문에 지휘계통이 한 군데로 집중되지 못했다. 군사 파벌과 정치 세력 간의 의견이 충돌하고, 지휘계통서도 혼란이 일어나는 등 차이점이 극명하게 노출되어 난망한 갈등 구조가 만들어졌다. 무정부 상태였다. 그 밖에도 전리품에 대한 처리 방법, 새로운 정부의 구성 등에 대한 방법도 각자의 생각이 달랐고, 결국 나중에는 내전까지 이어질 정도로 극열하게 대립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3. 학살과 보복의 연속


그리스 혁명군이 본격적으로 총공세를 펴자 오스만제국의 술탄은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당시 페르시아와 분쟁이 고조되고 있어서 전선이 분산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만은 알바니아 용병을 중심으로 정부군을 구성하였다. 처음엔 혁명군에게 밀리는 듯했으나 전세를 가다듬은 오스만 군은 반격을 하기 시작했다. 전선은 그리스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수많은 국지전이 전개되었다. 뺏고 뺏기는 장기전의 양상이었다. 산악지역이 많았기 때문에 혁명군의 입장에서는 게릴라 전술을 쓰면서 오스만 군을 괴롭혔다.


알바니아 출신인 오스만의 장군 오메르 브리오니는 악명 높은 학살자로 소문이 자자했다. 한때 알리 파샤의 참모이기도 했고 전쟁 발발 이후에는 그리스인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그는 전쟁 초기 알라미니 전투와 엘레프테호르 전투에서 연승을 하는 등 거칠 것이 없었다. 알라미니에서는 혁명군의 젊은 장군인 아타나시오스 디아코스를 체포하여 처형하기도 하였다. 디아스코는 브리오니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고 장열하게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이후 독립 영웅으로 추앙을 받았다. 하지만 곧이어 이어진 그라비아 전투에서 브리오니는 오디세아스 안드루초스가 이끄는 혁명군의 영리한 전술에 말려 패배를 하였다.


반격에 앞서 오스만이 그리스인에게 대응한 것은 학살이었다. 오스만 대제국의 술탄 마흐무드 2세는 그리스인의 반란에 격노하였다. 충분한 자치권을 주면서 관대한 통치를 보여주었지만 결과는 무력 봉기였으니 그들의 행동은 술탄의 분노를 유발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이에 술탄은 아나톨리아에 살던 동로마제국의 후예인 그리스계 투르크인을 잔혹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일종의 분풀이였다.


당시 가톨릭의 전통을 계승한 동방정교회는 395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동로마제국의 수도를 현재의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세우고 성 소피아 성당을 건립하면서 시작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1천4백 년 이상 그곳에 존재해 왔던 동방정교회의 본산이었던 것이다. 이런 역사적 맥락을 잘 알고 있던 오스만은 동방정교회의 사목활동을 보장하면서 종교적으로 억압하지 않았다. 이슬람의 본류와 기독교의 본류, 이 거대한 두 종교가 공존한 것이다.


펠로폰네소스에서 반란군이 총 궐기하자 대노한 오스만의 술탄은 동방정교회 총대주교인 그레고리 5세에게 반란군을 파면할 것을 강권하였다. 평소에도 혁명에 대해 소극적이었던 그레고리 5세는 이에 1821년 4월 15일 미사 집전 때 정식으로 반란군에게 종교적으로 파문을 선포하였다. 그런 상징적 행위는 탄압의 시작을 의미했다. 같은 날 오스만의 예리체니는 고위 관료 레이스 에펜디의 저택에 은신하고 있던 대드라고만 콘스탄티노스 모우루지스를 체포한 후 정식재판도 없이 반역죄로 참수하고 광장에 전시를 하였다. 혁명에 관련이 있다는 증거가 없었지만, 술탄은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그들을 의심을 했다. 그리고 이어서 모우루지스의 형제와 파나리오트 가문과 칼라마치 가문의 지도자들을 잡아 역시 반란군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참수하였다. 드라고만은 오스만의 외교, 통상 교섭 업무를 지원하였지만 무엇보다도 그리스 사회의 지도자 계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대드라고만은 그중에서 최상위층의 지도자급이다. 오스만은 이들을 먼저 제거함으로써 아나톨리아 내 그리스 사회의 구심점을 사전에 와해시킨 것이었다.


술탄의 분노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더욱 가열하게 이어졌다. 모우루지스가 참수되고 일주일이 지난 4월 22일, 술탄의 정예부대인 예리체니는 미사를 마친 그레고리 5세를 체포하여 반역죄로 몰아 즉석에서 교수형에 처하였다. 술탄에게 충성맹세를 하고 적극적으로 협조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총대주교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의 주검은 총대교구 건물 정문에 이틀 동안 전시되었다. 이후 시신은 유대인이 인계하여 보스포러스 해협에 수장하였고, 다시 어느 그리스인이 주검을 수습하여 은밀하게 당시 러시아 영토였던 오데사로 빼돌렸다. 여담이지만 그레고리 5세의 유해는 50년이 지난 후 아테네 메트로폴리탄 대성당으로 이관하여 안장되었고 순교자로 시성 되었다.


그레고리 5세의 처형은 그리스와의 관계를 단절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루비콘 강을 건넌 술탄은 그리스인을 용서할 수 없었고, 관계를 과거로 되돌리기를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이제 무력으로 그리스인을 진압하는 것만이 대제국을 유지하는 자존심이었고 알라의 계시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유대인은 그리스인과 적대적으로 변하였다. 총대주교의 주검을 바다에 버린 유대인을 그리스인은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소문은 그리스 사회에 순식간에 퍼져 유대인은 투르크인보다 더 큰 저주를 받고 포그럼처럼 학살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레고리 5세의 유해가 숨겨져 있던 오데사에서 유대인 14명이 그리스인에 의해 피살되었고, 그해 9월 트리폴리차를 함락한 혁명군도 이 사건을 잊지 않고 그 안에 살던 유대인 수백 명을 학살하였다. 차후에 유대인이 공식적으로 그리스 독립을 지지했지만 당시에는 유대인과 그리스인의 관계는 악화되어 있었던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전쟁이란 혼란한 상황에서 서로 의도하지 않은 오해가 있었던 것이다. 사실 15세기 스페인에서 추방된 많은 유대인을 받아준 것은 그리스인이었다. 초기 기독교 시절 유대인 기독교인과 그리스 기독교인은 서로 하나의 신을 믿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렇게 유대인에게 관대했던 그리스인은 유대인 난민을 데살로니카에 정착하도록 도와주었다.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그리스인과 유대인은 서유럽처럼 탄압 구조가 만들어지지 않아 학살을 할 정도로 적대적 관계가 형성될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이 사건 이후에도 그리스인은 전혀 안전하지 않았다. 일주일 후, 전 대주교였던 킬릴 6세도 교수형을 당했고, 이후에도 대주교, 주교 등 14명의 사제들이 교수형으로 목숨을 잃었으며, 그 외에 전국에 퍼져 있던 수십 명의 사제들도 순교하였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여러 가문들의 지도자급 인사들도 참수를 당하였고, 수백 명의 그리스 상인들도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 이런 죽음의 행렬은 끝없이 이어졌다. 광신적인 무슬림들은 14개의 교회를 파괴하였고, 스미르나, 아이발리크, 코스 섬, 로도스 섬 등 투르크인보다 오래전부터 살고 있던 그리스 공동체를 파괴하고 학살하였다. 그리스인도 저항을 하였지만 아나톨리아는 그리스 혁명군이 접근할 수 없는 또다른 세상이었다.


그해 6월에는 몰다비아에서 그리스 반군과 싸우고 돌아온 오스만 군인들이 에게해의 해안도시 스미로나에서 그리스인에 대한 대대적인 포그롬을 자행하여 3,000명을 죽이는 끔찍한 사건도 일어났다. 광기에 사로잡힌 오스만 군인과 폭도로 변한 투르크인은 이슬람 종교지도자 물라에게 살해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파트와(율법에 따른 의견)를 요구하였지만 이를 거부하자 그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스인과 투르크인은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다.


아나톨리아 외 그리스 혁명군의 군사력이 닿지 않은 지역에서도 정교회 사제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이루어졌다. 마케도니아 지역은 그리스 남쪽의 펠로폰네소스와 아테네에 비해 혁명군의 전력이 상대적으로 강하지 못했는데 그런 지역에서 정교회 사제 탄압이 집중된 것이다. 사제들이 혁명군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술탄을 비롯한 오스만 투르크인은 동방정교회 사제들을 불신하였고 항상 첫 번째 타깃이 되었다.


마케도니아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1821년 6월 성 도로테오스 대주교와 주교 3명이 오스만 군에 의해 교수형을 당하였다. 나사우에서도 1822년 오스만 군은 도시를 포위하고 성 조지 교회의 사제 5명을 교수형에 처했고, 이후 3일 동안 개종을 거부한 그리스인 1,241명을 학살하였다. 오스만 정부는 혁명의 근간이 정교회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사제들을 혁명의 배후세력으로 몰아 처형하였고, 그와 더불어 정교회를 믿는 그리스인을 이슬람으로 개종시키려고 강제하였다. 그런 개종 행위는 엄연한 종교탄압이었다. 과거 스페인에서 무슬림을 모두 북아프리카로 쫓아낸 후 남아있던 무슬림과 기존의 유대인에 대한 종교재판을 거행할 때 가톨릭으로의 개종이 최종 목표였다. 개종하지 않으면 죽음이었다. 오스만도 과거의 스페인처럼 기독교인에게 개종을 강요하였고 거부할 시에는 화형 대신 참수를 하였다. 근본적으로 혁명세력을 약화시키려는 방편이었지만 그것은 큰 효과를 보지 못하여 대부분의 그리스인은 개종을 거부하고 순교를 선택하였던 것이다. 그리스 정교회는 이후 이렇게 죽임 당한 사람들을 순교자로 시성하였다.


이 사건은 기독교 국가에 큰 충격을 주었다. 교리상으로 로마가톨릭과 결을 달리하지만 한 형제임은 분명했기 때문에 종교적으로도 묵과할 수 없는 만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유럽은 동유럽과 오랜 시간 동안 격조해 온 터라 종교적이든 정치적이든 그리스의 상황에 쉽게 감정이입을 할 수 없었다. 러시아는 같은 정교회인 탓으로 방관하지 않고 탄압 중지를 통첩하면서 반발하고 심지어 오스만과 단교까지 단행했지만, 서유럽은 불구경하듯이 여전히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진보적인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은 개인적으로 오스만제국을 성토하였다. 바이런, 퍼시 셸리, 토마스 무어, 월터 새비지 랜더, 제러미 벤담 등 영국의 지식인들이 오스만의 만행을 규탄하며 서유럽은 그리스롤 도와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이들의 노력은 영국과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의 많은 국가의 젊은이들이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전하는 동기와 동력이 되었다. 바로 필헬레니즘이 운동으로서의 지점을 지나 주검을 담보로 할 정도로 행동화로 이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에서는 여전히 전쟁과 더불어 곳곳에서 끊이지 않고 학살이 자행되고 있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아나톨리아에서 발생한 사건 중에는 포그롬으로 인한 민간인 학살도 있었지만, 오스만 본토 내에서는 그리스의 성직자나 고위관료들의 처형이 주된 관심사였다. 그곳은 혁명군이 접근할 수 없는 지역이어서 그리스계 오스만인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에게해의 경우는 달랐다. 에게해의 많은 섬에서는 혁명군이 상륙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런 와중에서 피치 못하게 많은 민간인들이 죽음에 노출되었다. 그리스인과 투르크인 모두 그랬다. 더구나 고립된 섬이어서 인명 피해는 육지보다 훨씬 많았다.


대표적으로 키오스가 그랬다. 제주도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되는 키오스는 오스만의 본토 체쉬메에서 불과 약 7킬로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 작은 섬이다. 그럼에도 호메로스의 고향으로서 오래전부터 고대문명이 융성하였고 이후에도 전통적으로 에게해 해상무역의 허브와 같은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더구나 키오스에서만 재배되는 마스틱 나무의 수지 형태의 물질은 디저트나 많은 음식의 첨가제로서 오스만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었다. 이런 특징으로 상인과 선주들이 많았던 키오스는 적은 인구임에도 불구하고 자부심과 독자성이 강하였다.


하지만 1822년 3월 무장한 8백여 명의 그리스 혁명군이 상륙하면서 키오스는 지옥으로 변하였다. 오스만 본토와 근접해 있어서 설마 했는데, 혁명군이 실제로 공격해 오자 오스만 군은 수세에 몰려 요새 안으로 후퇴를 하였다. 이에 키오스는 잠시 혁명군이 점유할 수 있었다. 당시 키오스 주민 일부가 혁명군에 가담하였지만 상류층을 비롯한 대다수는 혁명 참여에 미온적이었다. 그들은 수백 년 동안 쌓아온 자신들의 기득권이 한순간 무너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이런 내부 갈등이 키오스에 팽배하였다.


이런 갈등은 한 달도 채 안되어 3만 명의 오스만 군이 상륙하면서 해결되었다. 나수자데 알리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군은 8백 명의 혁명군을 압도하여 일순간 키오스의 상황은 급변하였다. 대 오스만제국에 저항한 혁명군과 이에 동조한 키오스 주민은 잔인하게 도륙되었다. 교회와 건물들이 거대한 화염에 휩싸이고 알바니아 용병들에 의해 대규모 약탈이 자행되었다. 에게해를 순찰하던 영국 함대의 해군 장교는 섬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다고 증언했다. 영국 당국은 당시 절대적인 중립을 지키고 있어서 영국의 순찰 함대는 마음대로 이 전쟁에 개입할 수 없었다.


당시 키오스 인구는 1십만 명에서 1십2만 명이었다고 하는데 그중에 2만 5천 명에서 5만 명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그중에는 플라톤 대주교를 비롯한 43명의 사제의 순교도 포함되었다. 그 외에도 수만 명이 노예로 잡혀가거나, 다른 데로 디아스포라를 하였다고 한다. 전체 인구의 80%가 죽거나 타의에 의해 떠난 것이다. 세상의 종말을 고하는 묵시론적인 학살이었다고 많은 역사가들이 말했다. 이런 무차별한 파괴에 따라 이는 극심한 인구 감소 결과로 나타났고, 그 여파는 100년 이상 지속되어 지금도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이런 살육을 관망만 할 수 없었던 혁명군은 곧이어 반격을 시도하였다. 키오스 섬에는 오스만 군이 수만 명 상주하고 있어서 상륙은 할 수 없었지만 해상력은 전통적으로 그리스인들이 강했던 터라 이를 120%로 활용을 하였다. 콘스탄티노스 카나리아가 이끄는 혁명군의 함대가 자데 알리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함선을 화선을 이용하여 침몰시킨 것이다. 화선 공격은 적의 함선에 작은 배를 밀착해 단단하게 고정시킨 후 불을 지름으로서 적의 함선에 화재를 일으키는 병법이다. 전쟁사에 유래가 없는 이런 기발한 화선 공격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불이 확산하여 화약고가 폭발하면서 그 2차 충격으로 자데 알리 파샤가 검게 그을린 채 사망하였고, 84문의 함포를 탑재한 거대한 함선은 결국 괴멸되었다. 당시 알리 파샤의 함선에 승선해 있던 2천2백여 명의 해군 중에 180명 만이 생존하였다고 한다.


이런 승전보가 세상에 알려졌지만 그해 6월 이후에는 알리 파샤의 부사령관이 오스만 군을 이끌고 다시 키오스에 상륙하여 섬을 접수하고 피비린내 나는 복수의 칼을 휘둘렀다. 이후 백 년 가까이 지난 20세기 초, 그리스와 발칸반도 국가들이 연합하여 맞선 일명 발칸 1,2차 전쟁에서 대패한 오스만은 결국 키오스를 그리스에 양도함으로써 그제야 키오스는 완전한 독립을 이룰 수 있었다.


키오스 학살 사건은 서유럽에 큰 충격파를 일으켰다. 1년 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학살 사건으로 충격을 받았던 서유럽의 지식인들은 강도 높은 비판의 축을 형성하였다.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인 외젠 들라크루아가 '키오스 섬의 학살'이라는 작품을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미술작품 하나가 세상에 전하는 직관적인 메시지는 말과 글 보다 파급력이 더 커서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지성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이를 시발점으로 영국의 토마스 바커도 서머싯 도리스 하우스에 키오스 학살에 대한 프레스코화를 그렸고, 필헬레니즘 신봉자인 빅토르 위고도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편승하였다. 그는 1829년 키오스 섬의 아이들이라는 서사시에서 ‘투르크 인들이 이곳을 휩쓸고 지나가자 모든 게 파괴되고 흐느꼈다... 키오스는 암초로 변해버렸다’고 읊었다. 그리고 미국의 윌리엄 컬런 브라이언트도 키오스에서의 학살이라는 제목의 시집도 집필하였고, 무엇보다 바이런이 그리스의 미솔롱기 지역으로 건너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럼 다른 학살 현장으로 가보겠다. 당시 키오스에서 도망친 난민들은 그곳에서 서쪽으로 20킬로미터 떨어진 프사라 섬으로 디아스포라 하였다. 그 인원이 약 2만 명에 이른다고 전한다. 프사라는 키오스보다 훨씬 작은 섬이었다, 난민 수가 프사라 인구 7천 명보다 3배나 많았고 곧이어 테살로니카와 모스코니아에서도 난민이 유입되어 섬 전체가 북새통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곳도 오스만 군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키오스 반군의 저항은 거셌다. 처음엔 오스만 군함을 파괴하고 2천3백 명의 적군을 사살하였고, 카프단 파샤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그들은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구호 아래 똘똘 뭉쳐서 마지막까지 항전하였다. 난민을 포함한 섬 전체가 독립전쟁에 참전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오스만 군의 공격이 거세지자, 혁명군은 오스만 군을 팔라이오카스트로 요새로 유인하여 스스로 화약고를 폭파시켰다. 요새 하나를 통째로 날려버린 이 자폭 작전으로 오스만 군과 프사라 시민 대부분이 폭사를 하였다. 증언에 의하면 화산 폭발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 전투에서 원주민과 난민 포함하여 1만 7천여 명이 사망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당초 프사라 인구는 7천 명에서 1천 명으로 감소하였다. 자의적인 학살이었다. 섬은 죽음의 섬으로 변하여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황폐화된 채 폐기물처럼 에게해에 버려졌다. 이후에도 인구는 더 줄어들어 현재는 400여 명 만이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이 섬 역시 발칸전쟁 후 그리스로 반환되었지만 그 후에도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그 밖에도 에게해에서는 사모트라케, 코스, 로도스, 카소스 등에서도 오스만 군과 혁명군의 충돌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수많은 주민들이 무참하게 학살되었다. 이런 작은 섬에서도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인들이 함께 수백 년 동안 살았지만 혁명이 발발하자 서로에게 총부리를 향하는 비극적 상황이 벌어진 것이었다.


크레타는 지중해에서 에게해로 들어가는 관문에 위치하고 있어서 이미 선사시대 때부터 문명을 꽃피운 유서 깊은 섬이다. 헬레니즘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미노아와 미케네 문명이 수천 년 전부터 형성된 고대문명의 보고였지만 혁명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펠로폰네소스에서 혁명의 포성이 들리자 크레타에서도 미리 준비하고 있던 시민군이 봉기하였다. 오스만의 지원군이 오기 전, 혁명에 동참한 시민군은 투르크인과 유대인을 탄압하고 학살까지 저지르며 크레타섬을 대재해의 현장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오스만의 지원군이 크레타에 상륙하자 전세는 곧바로 역전되어 다시 복수의 피바람이 불었다. 크레타는 에게해의 섬들과는 상대가 안 될 정도로 큰 섬이었고 다양한 계층과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다. 1821년 6월, 4월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학살처럼 게라시모스 팔르달리스 대주교와 5명의 주교가 오스만 군에 의해 재판 없이 교수형으로 순교하였고, 헤라클리온과 크노소스에서는 1천 명에 가까운 주민들이 학살되었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오스만 군은 우선적으로 사제들을 집중적으로 처형을 하였다. 레팀노 교구 수도원장과 주교가 순교하였고, 그 밖에도 여러 교구에서 주교와 수도사와 수녀와 평신도들이 순교의 길을 뒤따랐다. 그와 더불어 오스만 군에 의해 학살당한 수천 명의 원주민들의 피가 크레타를 흥건하게 적셨다.


크레타 혁명군도 그리스 본토로부터 지원을 받은 후 대대적으로 반격을 하였다. 이에 다시 수세에 몰린 오스만의 술탄은 궁여지책으로 이집트의 무하마드 알리 파샤에게 손을 벌렸다. 당시 동지중해의 강자로 부상하고 있던 이집트는 그렇게 해서 1825년 그리스 독립전쟁에 개입하기에 이른 것이다. 무하마드 알리는 이집트의 파샤로 임명된 후 내부 권력을 장악하고 부국강병에 매진하여 낙후되어 있던 이집트를 자신을 임명한 오스만제국에 버금가는 큰 세력으로 증강시켰다. 야심이 많았던 알리 파샤는 오스만제국의 약화에 편승해 이집트를 준독립국가로 만들어 레반트 지역과 동지중해까지 군사적 영향력을 확대하였고 근대 이집트의 근간을 마련하는 초석을 이루었다.


알리 파샤의 아들 이브라힘 파샤가 지휘하는 이집트군과 연합한 오스만 군은 본격적으로 그리스 반군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이집트군의 전력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했다. 과거의 이집트 군이 아니었다. 프랑스군에게 훈련받은 1만 4천 명의 보병과 2천 명의 기병. 5백 명의 포병과 150문의 대포 등이 지중해를 건넜다. 크레타 전체에서 격렬한 국지전이 벌어졌고 엄청난 피해가 속출하였다. 용병의 특성상 약탈이 일반화되면서 크레타는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결국 반군 진압에 성공한 술탄은 그에 대한 보상으로 무하마드 알리에게 크레타 지배권을 선사하였다. 1830년 그리스 본토가 독립이 완성된 후에도 크레타는 여전히 이집트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1913년 발트전쟁 후에야 이집트군이 철수하였다. 크레타는 오스만에 이어 아프리카의 이집트에게 거의 90년 동안 지배당하는 수모를 겪은 것이다.


또한 독립전쟁의 여파는 키프로스에도 미쳤다. 키프로스는 오스만의 속국으로서 밀레트 방식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고대부터 헬레니즘화 되었던 키프로스는 당시까지도 그리스 성향이 강한 문화적 색채를 띠고 있었다. 당시 종교적인 분포를 보면 전체인구의 70% 정도가 정교회를 믿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리스계가 그만큼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그레고리 5세가 처형된 후 그리스 본토에서 넘어온 필리케 에테리아들이 키프로스에 혁명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전단을 뿌리며 그리스계 키프로스인들이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고, 실제로 혁명군 500명을 조직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들은 전쟁 물자를 그리스 본토로 공급하는데 앞장을 섰고, 키프리스아노스 대주교에게도 전향적인 행동으로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대주교는 혁명군의 요청을 수용하지 않았다. 암묵적으로 지지는 하지만 앞에 나서 적극적으로 지원하기엔 한계가 있어 보였다. 그럼에도 오스만 총독은 정교회 지도자들이 혁명에 연루되었다는 조서를 꾸며 술탄에게 보고하고 반역죄로 그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그리스계 키프로스인을 신속하게 무장해제를 시킨 오스만 총독은 1821년 7월 니시코시 키프리스아노스 대주교에게 반역죄를 적용시켜 교수형에 처하였다. 그리고 3명의 주교를 포함한 36명의 사제와 그리스계 키프러스인 480여 명이 교수형과 참수 등으로 순교하였다.


그리스 본토처럼 혁명군도 없었던 키프로스의 그리스인들은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였다. 오스만은 자군의 병력을 아끼기 위해 시리아군을 동원하여 살인과 약탈을 부추겼다. 상대적으로 궁핍했던 시라아군은 물 만난 고기처럼 약탈을 일삼았다. 현지에서 그리스인과 섞여 살았던 투르크인들도 폭도로 변하여 그리스인을 공격하였다. 이들은 약탈과 폭력을 중단하라는 오스만 당국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폭력의 관성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들은 1년 동안 그리스인 마을 62곳을 폐허로 만들었다. 그리스의 영토가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고립되었던 키프로스에서의 학살은 상대적으로 파악이 잘 되지 않아 피해 규모를 점칠 수 없다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위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민간인에 대한 폭력은 피의 보복을 불러와 사람들을 악마로 만들었다. 학살은 또 다른 학살을 낳았다. 학살 행위는 필연적으로 인간의 잔악함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무고한 살육은 그리스인이나 투르크인 사이에서 시시때때로 일어났다. 복수의 신 에리니에스가 그리스를 집어삼키고 피로 물들였다.


사실상 학살이 시작된 곳은 펠로폰네소스였다고 한다. 그리스인과 투르크인 중에 누가 먼저 학살을 자행했는지 따지는 것이 무의미할지 모르지만 굳이 따지자면 그리스인이 먼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투르크인은 이미 몇 백 년 전부터 그리스 곳곳에 정착하여 농부, 상인, 공무원 등의 직업을 가지고 살고 있었다. 종교만 다를 뿐 투르크계 그리스인이었다. 자신의 이웃이었던 그런 투르크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그들을 오스만 본토로 몰아냈고, 심지어 어떤 곳에서는 포그럼처럼 학살을 자행하였던 것이다.


학살은 혁명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1821년 3월 28일 아카이아에서 시작해 4월 3일 칼리브리타로 이어졌다. 모넴바시에서는 도시에 당도한 혁명군이 성문을 열어주고 무기를 내려놓은 무방비의 오스만 군을 공격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그것도 모자라 혁명군은 자신의 생활터전을 지키기 위해 이주를 포기한 투르크인과 모든 재산을 남겨두고 본토로 떠나려고 선박에 오른 수백 명의 투르크인을 무참하게 학살하였다. 이렇게 혁명 초기 펠로폰네소스에서 학살된 투르크인이 20,000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 숫자에는 오스만 군의 사망자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런 인간 청소급의 학살은 트리폴리차 함락 전투에서 혁명군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것을 위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보복 차원에서 술탄의 뜻으로 그레고리 5세 총대주교를 처형하고 뒤이어 벌어진 대학살의 현장도 짚어보았다. 이런 보복은 그리스인이 있는 곳에서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기원전 6,500년부터 아나톨리아에서 온 신석기인이 거주해 오던 나바리노에서도 학살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혁명 시작과 함께 콘스탄티노스 마브로미칼리스가 지휘하는 만 명에 가까운 혁명군이 나바리노에 도착하여 오스만 군이 지키는 요새를 포위하였다. 맞서 싸울 병력이 부족했던 투르크인들은 성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않았다. 이에 치열한 공성전이 벌어졌다. 이 공성전에서 혁명군 사령관이 전사하였다. 이런 돌발적인 사건으로 공성전을 중지한 혁명군은 작전을 바꾸어 장기전에 돌입하였다. 식량이 부족했던 투르크인은 지쳐갔고 협상이 빠르게 이어졌다. 그해 8월 협상이 마무리되었다. 투르크인의 항복 조건은 모든 재산을 남겨두고 오스만으로 떠날 터이니 대신 오스만에 당도할 때까지 혁명군이 안전 통로를 확보해 주는 것이었다. 손해 볼 것이 없었던 혁명군은 이에 사인을 하였다.


하지만 협상은 협상일 뿐 실제로 지켜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혁명군은 자신의 사령관이 오스만 군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구실로 협상을 파기하였다. 협상대로 성문이 열리자 일부의 돈 많은 사람들이 먼저 빠져나간 후 혁명군은 아직 탈출하기 못한 투르크인들을 공격하여 학살하기 시작했다. 3천 명이 넘는 투르크인이 참혹하게 학살되어 바다로 던져졌다. 학살이 끝났을 때 해변으로 수백 구의 시체들이 떠밀려 왔다. 연대기 작가들은 시체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고 한다. 이런 학살은 펠로폰네소스뿐만 아니라 아테네와 브라초리 같은 다른 지역에서도 횡횡하였다.


4. 독립으로 가는 길


필헬레니즘 운동가들의 순수한 의용 참전은 지구 역사상 유례가 없는 현상이었다.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그해 7월 프랑스에서 어둠에서 별을 보기 위해 360명의 젊은이들이 펠로폰네소스행 배를 탔다. 뒤이어서 영국과 이탈리아와 미국에서도 많은 젊은이들이 자처해서 그리스인을 구하기 위해 전쟁터로 갔다. 1824년에는 바이런도 미솔롱고 전쟁에 참전하여 낭만주의를 완성한다. 그중에서도 미국인 외과의사인 새무엘 그리들리 하우는 자비로 그리스 난민을 지원하고 어린 고아들을 보스턴으로 데리고 왔다. 그는 그것도 모자라 바이런의 영향을 받아 전투병으로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전하는 행동에의 의지도 보여주었다. 1827년 미국으로 돌아와서도 자금과 물자를 지원하는데 앞장을 섰다. 그리고 조지 자비스는 1822년 독일 유학 중 그리스 해군장교로 전쟁에 참전했다가 2년 후 바이런이 미솔롱고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가서 그의 부관으로 복무하였다. 그해 바이런이 열병으로 사망했을 때도 계속 남아 1828년 발진티푸스로 사망할 때까지 미국의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활동을 하였고 죽어서도 그는 펠로폰네소스의 아르고스에 뼈를 묻었다.


프랑스 출신 장 프랑수아 맥심 레보이는 1824년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전한 후 귀향하여 회고록을 출간하였다. 그의 회고록을 보면, 그는 의용군의 신분으로 4명의 프랑스인과 3명의 이탈리아인과 함께 1821년 8월 미솔롱고에 도착한 후 트리폴리차 전투와 페타 전투에 참전하였다. 그가 속한 부대는 다국적 부대로서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비롯해 독일, 폴란드, 스위스 등에서 온 지원병들로 구성되어 있는 대대급 부대였다. 그리스 혁명군이 서유럽에서 온 의용군들을 한데 모아 부대를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 부대는 오합지졸이었다. 의견 충돌로 응집력을 발휘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다국적군의 한계였던 것이다. 그 부대는 전투에서 연전연패를 한 결과 67명의 필헬레네스들이 허무하게 전사하였다. 그중에는 독일인이 34명이었다고 한다. 맥심 레보이는 전쟁터에서 돌아온 후 회고록을 발간하여 전쟁의 실상을 세상에 전파하였고, 신문사도 설립하여 측면에서 그리스 독립을 지원하였다.


1822년 11월 오스만 군의 주요 거점이었던 항구도시 나프플리오 요새를 탈환하는 공성전에도 많은 필헬레네스들이 참전하였다. 이 전쟁에서 독일인 100명과 프랑스인 40명 그리고 이탈리아, 영국, 스페인, 헝가리, 스웨덴, 포르투갈, 덴마크에서 온 많은 젊은이들이 그리스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1824년에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바이런이 미솔롱고 전투에 참전하였지만 안타깝게도 열병으로 사망했다는 비보가 유럽에 전해졌다. 그 미솔롱고 전투에도 상당히 많은 필헬레네스들이 참전 하였다.


이렇게 서유럽의 젊은이들이 그리스에 산화하고 있을 때, 서유럽의 성직자와 지식인들은 우리는 고대 그리스 문화에 빚을 졌기 때문에 현재의 그리스를 도와야 한다며 대중과 정부에게 설파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는 이교도 오스만으로부터 독립을 해야 진정한 역사적 진보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덧붙이며 논리를 엮어갔다. 이에 감화한 젊은이들이 학업과 직업을 포기하고 그리스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미국에서도 이런 분위기가 조성되었는데 특히 구호품과 자금을 지원하는데 주력하였고, 러시아에서도 난민 구호자금을 지원하였다.


서유럽에서 목숨을 걸고 그리스로 온 젊은 필헬레네스들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연대기 작가들은 최소한 1만 명 이상이라 추정한다. 그들은 비록 정규군이 아니어서 전투력이 부족했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전쟁에서 상징적인 존재로서 역할을 다하였다. 특히 서유럽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자체만으로 독립의 의지를 불태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힘으로 언젠가는 영국과 프랑스 정부를 움직이게 할 것이라 희망하였다.


하지만 희망은 쉽게 결과로 나타나지 않았다. 펠로폰네소스를 상당 부분 점령한 그리스 혁명군 내부에서 내전에 가까운 치열한 권력 투쟁 양상이 나타나 파벌 간의 갈등이 극에 달했고 이는 클레프트의 지도자 콜로코트로니스가 숙청됨으로써 외형적으로 내분이 봉합되었다. 혁명군은 펠로폰네소스에 행정부와 입법부를 구성한 후 독립정부를 선언함으로써 갈등을 해소하고 서유럽의 지원을 유도하였다. 그럼에도 갈등의 내상이 컸다. 이를 노린 것은 아니지만, 이런 상황에서 오스만 술탄과 결탁한 이집트 군이 크레타를 점령한 후 1825년 2월 펠로폰네소스에 상륙함으로써 상황은 새로운 국면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집트군은 과거의 무기력한 군대가 아니었다. 이집트군을 과소평가한 그리스 혁명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마브로코르다토스가 이끄는 혁명군이 나바리노에서 이집트군과 맞서 저항하였지만 이겨낼 수 없었다. 불과 3개월 만에 무기와 군수물자를 약탈당하는 막대한 피해를 입은 끝에 패전을 하였고, 결국 나바리노는 이집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나바리노는 지중해와 에게해를 연결하는 핵심적인 거점이었고, 이집트는 이곳을 선점함으로써 펠로폰네소스 진출에 교두보를 확보한 것이다. 이후 이집트군은 남부 반도에 위치한 마니와 펠로폰네서스의 수도인 트리폴리차를 점령하였고 마지막에는 중부지역의 아크로폴리스를 장악하였다. 혁명군은 계속 수세에 몰렸다. 멈추지 않은 이집트군의 공격은 파괴와 약탈로 이어져 펠로폰네소스를 폐허로 만들었다. 그리스는 고육지책으로 리처드 처치, 토마스 코크레인, 토마스 고든 같은 영국의 군사전문가에게 전선을 맡겼다. 그럼에도 1827년에는 저항의 중심지인 미솔롱고가 마침내 오스만-이집트군 손아귀에 들어갔다. 이는 그리스 내부는 물론이고 유럽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이를 계기로 그리스 혁명군은 산악지역으로 쫓겨들어가 게릴라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제 눈앞에 보이던 독립은 멀어지고 있었다. 그리스 혁명군은 오스만 이집트 동맹군을 극복하는 게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였지만, 그럼에도 영국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코 총을 내려놓지 못하였다. 버티면 승리하리라는 확신을 가지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영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외무장관에서 수상에 즉위한 조지 캐닝이 당초 지중해에서 강한 국가 등장을 원하지 않아 힘의 균형정책을 줄곧 견지하여 왔고, 그리스 문제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소극적 입장을 취해 왔는데 이제 노선을 변경한 것이다. 자신이 속한 토리당 내 자유주의자들의 반 오스만 정서에 압박을 받았고, 그리스에서 국민회의가 구성되는 등 독립에의 의지가 확산되었고, 필헬레니즘 운동의 확산과 그리스를 지원해야 한다는 여론이 조성되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입계점에 도달한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쟁의 장기화로 동지중해 무역에 타격을 입어 경제적 손실이 컸고, 이집트가 유럽을 침공했다는 사실도 결코 묵과할 수 없었다.


1825년 후반, 영국은 러시아와 긴밀하게 협의를 하며 그리스 독립 문제에 대한 종결의지를 다졌다. 남하정책을 굽히지 않는 러시아는 가장 견제해야 할 국가이면서도 정치경제적으로 이해관계가 합치될 때는 필요한 존재이기도 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강경 노선을 지향하는 니콜라이 1세가 즉위하자 기존의 남하정책을 추구하던 주전론자들이 득세하면서 오스만을 압박할 절호의 기회가 조성되었고, 무엇보다도 이집트가 자신과 같은 정교회를 국교로 삼고 있는 그리스의 독립에 무력으로 개입한 것은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영국과 러시아는 1826년 4월 드디어 상트페테르부르크 의정서에 합의하였다. 주요 골자는 오스만은 그리스 자치권을 인정해야 하며, 이에 동의하지 않으면 강압 외교를 통해 이를 실천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이 의정서는 그리스 독립을 위한 최초의 시금석이었다. 영국은 이런 합의 내용을 유럽 열강들에게 통보하였는데 프랑스는 찬성하였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거부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이렇게 프랑스까지 끌어들인 영국은 런던에서 회동하여 그리스 문제 해결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강구하였다.


이와는 별개로 러시아는 독자적으로 오스만을 압박하였다. 러시아에서 오스만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루마니아와 세르비아에 대한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월등한 군사력을 앞세워 오스만에게 협상을 요구하였다. 이빨 빠진 호랑이에 불과했던 오스만은 러시아와 타협하는 쪽으로 선회하여 그들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하였다. 이를 아케르만 협약이라고 한다. 이 협약은 2년 후 오스만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중요한 빌미가 된다.


하지만 대제국 오스만 술탄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의정서에 대해 내정 간섭이라고 비난을 하며 분명하게 거부 의사를 밝혔다. 루마니아와 세르비아 정도는 자치권을 인정할 수 있지만 그리스의 경우는 외교 전략적으로 볼 때 절대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1827년 7월 영국, 프랑스, 러시아 3국은 런던조약을 체결하여 그리스 자치권은 물러설 수 없는 역사적 소명이라고 못을 박았다. 오스만이 이 조약을 거부할 시에는 3국이 연합하여 공동 대응을 한다는 입장을 명확하게 선포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드디어 1827년 8월, 24척으로 구성된 3국 연합함대가 동지중해로 이동하여 펠로폰네소스 해안을 봉쇄하였다. 터질 듯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최후통첩이었다. 2개월 후, 이런 군사행동에도 오스만 정부가 미동도 하지 않자 연합함대는 나바리노 항에 접근하여 교전을 유발하였고, 그동안 긴장감이 팽배했던 화약고가 기어코 터지고 말았다. 하지만 최신식 군함으로 무장한 연합함대는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구식 군함 89대로 무장한 오스만-이집트 함대를 어렵지 않게 격파하였다. 기록이 의하면 오스만-이집트 함대의 65%가 격침되었고 8천 명이 사망하였다고 한다. 나바리노 해전에서 치명상을 입은 이집트 군은 이후 항복을 선언하고 펠로폰네소스를 떠났다. 이집트 패잔병들은 영국의 상선을 타고 자국으로 돌아갔고, 프랑스 군 3만 명이 펠로폰네소스에 주둔하였다. 이제 그리스 해방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만의 술탄은 이런 상황을 인정하지 않고 1827년 12월 성전을 선포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결정적인 한방을 날렸다. 1828년 4월, 러시아는 10만 대군을 흑해 동부와 발칸반도 중부지역으로 진격하여 오스만 군을 공격하였다. 영국과 프랑스와 더불어 러시아의 무력시위는 오스만의 기를 꺾어놓기에 충분하였다. 이에 오스만은 백기를 들고 또다시 러시아에게 많은 영토를 양보하였다. 1829년 9월 에디르네 평화협정을 보면 여러 가지 내용 중 상트페테르부르크 의정서에 따라 오스만은 그리스 자치권을 허용한다는 내용을 명문화하였다. 이로서 그리스는 그토록 원하던 자치권을 얻었고, 1830년 영국, 프랑스, 러시아 3국이 주도한 런던 의정서에 의해 완전한 독립을 이루었다. 유럽 열강들의 강압적인 개입으로 전쟁이 종결되었지만 무엇보다도 그리스인들이 포기하지 않고 무너질 것 같으면서도 꿋꿋이 버텨온 결과이기도 하였다. 처음에 오스만이란 거대한 벽에 계란을 던지는 무모한 행위였지만 수많은 주검을 감수하면서 이룬 놀라운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안타까운 사실은 이 독립전쟁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는 점이다. 그리스 독립에 대한 의미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 과정에서 오스만과 그리스 두 민족 간의 감정은 극에 달해 서로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그리스 독립은 피로 얼룩진 결과물이었다. 유독 민간인이 많이 사망한 이유가 강력한 독립의지와 제국적 의지가 충돌하면서 그 파편이 민간인에게 튄 현상일 수도 있고, 동방정교회와 이슬람의 종교적인 갈등 구조가 그 충돌에 가속도를 붙여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역사가들은 십자군 전쟁 이후 기독교와 이슬람의 종교적 갈등이 폭발한 결과로 평가하기도 한다. 종교적 분노는 종교적 의무를 무색하게 할 만큼 폭력성과 잔인함을 극대화시켰다. 특히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벌여졌던 그레고리 5세를 비롯한 종교인에 대한 학살과 그리스계 오스만인의 포그롬은 묵과할 수 없는 잔학한 폭력성을 보여주었다. 이런 연속된 폭력은 결국 피의 보복과 또 다른 피의 보복을 낳고 순환되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게 된다. 사실 그리스가 독립에는 성공했지만 이 피의 역사는 초자아처럼 두 국가의 무의식이 숨어 또 다른 폭력을 기다렸다. 어떤 분쟁이 발생한다면 언제든지 또 다시 피의 역사를 소환할 수 있었다.


1897년 크레타 반란군을 지원하면서 벌어졌던 그리스-오스만 전쟁, 1912년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와 연합군을 형성하여 발발한 발칸전쟁, 1919년 세계 1차 대전이 종전된 후 붕괴되다시피한 오스만을 공격했던 그리스-오스만 전쟁 등에서 두 민족은 끊임없이 충돌하였다. 그리고 1923 로잔조약이 맺어졌는데, 그 조약의 쟁점은 각 국가에 거주하는 자민족을 교환한다는 일종의 인구 교환이었다. 그로 인해 오스만에서 수백 년 동안 거주하던 그리스계 오스만인 150만 명이 그리스로 강제로 이주하고, 그리스 영토에서 역시 수백 년 동안 살던 투르크계 그리스인 50만 명이 강제적으로 오스만으로 이주하는 지구 역사 이래 유례가 없는 역대급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후 그들이 살던 거주지는 파괴되어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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