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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호용 Sep 16. 2020

길에 홀로 서서

가평 매봉 임도

언젠가 영월 동강변 도로를 지나가다 강 건너편 산기슭에 다 쓰러져 가는 허름한 집 한 채가 덩그러니 있는 게 눈에 띈 적이 있었다. 집 바로 뒤엔 경사가 심한 검푸른 산이 마치 거대한 성벽처럼 가로막고 있었다. 농사를 지을 때마다 사용하는 초막 같기도 했지만 주변 상태를 볼 때 굳이 강을 건너 가 밭을 맬 정도는 아니었다. 그 집을 가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있는지 잠시 생각을 해보았지만 결론은 나룻배 밖에 없었다. 동강이나 강원도 산간지역에는 아직도 무동력 줄 나룻배가 있는 것으로 보아 타당한 결론이었다. 아무튼 우리가 알지 못하는 깊은 사연이 있겠지만, 세상과 단절하고 미미한 존재로 묻혀 있는 듯한 모습에서 왠지 진한 페이소스가 느껴졌다. 처음엔 그랬다.   


나는 운전하면서 그 외딴집의 잔상에 몰입되어 있었다. 그 집의 식구는 몇 명일까, 늙은 두 부부가 살까, 아니면 노인 홀로 사는 것은 아닐까, 생활공간으로 볼 때 아이들은 없을 것이다, 그럼 그들의 호구지책은 무엇일까, 굴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구들장은 있는 것 같고 그럼 집안 구조는 어떨까, 집 주변에 텃밭 정도는 있는 것 같고, 밤이면 강 소리는 어떻게 들릴까, 달빛에 비친 동강은 어떤 그림일까, 무엇보다 그들은 왜 강을 건넜을까...     


칼봉산 휴양림은 가평 시내에서 2시간 남짓 발품을 팔면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다. 걸음이 빠르다면 1시간 30분이면 넉넉하게 갈 수 있다. 그만큼 시내에서 가깝지만 칼봉산 주변은 대처와는 전혀 다른 풍광을 가지고 있다. 그 주변엔 오래전부터 누군가 살아왔던 흔적들과 이야기들이 숨어있다. 70년대에 그들이 떠나고 난 후 그곳은 오랫동안 방치되어 왔으며, 그렇게 자연 보존이 제대로 진척된 묘한 분위기가 배어있는 곳이다.

     

불타는 아스팔트 도로를 가평역에서 칼봉산 휴양림까지 도보로 가라는 것은 너무 가혹한 요구이기에 부득불 택시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몇 년 전 여름, 칼봉산 산행 후 휴양림에서 가평역까지 지친 몸을 이끌고 나간 본 적이 있는 일인으로서 다시는 그럴 필요성이나 타당성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영혼 없는 행군이었다.     


변명은 그만하고, 이번 여정의 시작점인 칼봉산 휴양림에서 우리는 언제나 그렇듯 경건함을 되새기며 산속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길은 중간에 칼봉산과 용추계곡과 연인산 등으로 갈라지면서 경반분교와 회목고개와 우정고개를 거쳐 마일리까지 산속을 비집고 굽이쳐 이어진다. 그 길로 오래전부터 그 누군가 소통과 삶을 위해 걸어 다녔다.

     

2020년 8월 29일 / 경반분교로 가는 길에 있는 개천 / 이런 천을 서너 번 건너야 한다

승용차 한 대 정도 다닐 수 있는 이 길은 전형적인 비포장 시골길이었다. 오래전, 처음 이 길을 만났을 때 느낀 것은 이 계곡 상류 너와집에 사는 막내딸이 폴짝거리며 자기 집으로 걸어가는 이미지였다. 단발머리 막내딸이 순이네 집에 놀러 갔다가 오후 봄 햇살을 받으며 사람 허리만 한 풀숲과 개울 사이로 난 오솔길을 걷는 풍경이 연상되었던 것이다. 개울 돌다리를 폴짝폴짝 뛰며 건너는 막내딸을 먼발치서 바라보고 있는 엄마의 모습도 함께 떠올랐고, 개울가 건널목에 쭈그리고 않자 가평장에 장작을 팔러 나갔던 아버지를 기다리는 막내딸의 모습도 떠오르는 , 그렇게 잔잔한 미소를 머금으며 상상을 해보기도 했었다.      


그렇게 단발머리 막내딸이 걷던 길을 따라  30분 이상 가다 보면 경반분교가 나온다. 지금은 폐교가 된 경반분교는 개인에게 임대되어 캠핑장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운동장 터에는 도심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우람한 산악용 지프차들과 눈에 익숙한 SUV차량들과 그리고 텐트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사실 휴양림에서 이곳까지 오는 흙길을 포장도 안 하고, 개천에 다리도 안 놓는 것은 이런 4륜구동 차량들을 유혹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처음엔 이렇게 요철이 심한 흙길을 왜 정비하지 않은 것인지 관청을 탓하였는데 나중에 4륜구동 차들이 오고 가는 것을 보고는 그때서야 깨달았던 것이다. 조금 전 올라오는 도중에도 경치 좋은 계곡과 접한 명당자리에서 한 무리의 오프로더들이 텐트와 차량 옆에서 아침을 먹고 있는 것을 보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시간이 갈수록 그런 종류의 오프로더들이 이 계곡을 점령할 게 눈에 선했다. 어느 산에 가든 푸대접을 받는 그들에겐 적당한 산악 오프로드와 캠핑을 겸할 수 있는 이곳은 정말 환상적인 장소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많으면 계곡이 오염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미세먼지와 온갖 유해물질들을 뿜어대는 디젤 차량들이 길바닥에 수많은 스키드 마크를 찍어대고, 개울을 수차례 도하를 하고, 그것도 모자라 개울가에 자리를 잡고 야영까지 한다면, 손상의 속도는 당연히 가속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물 맑고 평화롭던 경반천은 아마도 몇 년 후엔 영원히 사라질지 모른다. 


아무튼 경반분교는 오래전부터 등산객들에겐 칼봉산(해발 899m)의 기점으로서 유명한 곳이었다. 이런 깊은 산속에 비록 분교지만 교육시설이 있었다는 것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했다. 50~60년대까지만 해도 학생들이 100여 명(사실 그 정도까지는 보이지 않지만)이었다고 하는 그 분교는 칼봉산 너머 그러니까 용추계곡 중간 정도에 있던 내곡 분교와 교류를 했다고 전해 온다. 운동장이 없었던 내곡 분교 학생들이 운동회나 학교 행사가 있을 시 해발 700미터가 넘는 칼봉산 능선 안부를 넘어 이곳까지 왔다고 한다. 대한민국은 산악 민족이라고 자부하지만, 그 당시 아이들이 경사가 심하고 거친 산길을 넘어 다녔다는 것은 현재 우리의 상식으론 납득하기 쉽지 않다. 그 산길을 다녀 본 나로선 더욱 믿기지 않았지만, 가평 원주민들이 그러하다고 하니 믿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내곡 분교 아이들은 산 능선만 넘으면 됐지만, 매봉 너머에 있는 마일리의 아이들이 여기까지 통학을 했다는 사실에는 정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인터넷상에서 그런 기사를 보고 혹시나 해서 얼마 전 현리에 있는 택시를 탈 기회가 있어서 기사한테 그에 관한 사실관계를 물은 적이 있었는데, 그는 그 기사의 팩트를 확인시켜 주었다. 마일리 국수당 마을 아이들이 표교 차 300미터가 넘는 전폐고개를 넘어 산판길을 지나 회목고래를 거쳐 다시 산길을 따라 하산하는, 그렇게 대략 30리 길을 통학했다는 것이다. 불과 50년 전까지만 해도 그러했다는 말이다.

    

2020년 8월 29일 / 폐교된 경반분교

얼마 전, 네팔의 히말라야 깊은 산중에 사는 원주민들이 자식들을 방학을 마친 후 도시에 있는 학교로 통학시키기 위해 7일간의 험난한 트레킹을 하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것만큼은 안 되지만 우리네 옛사람들도 정말 대단한 교육열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학교 교육을 받음으로 해서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논리는 동서고금 막론하고 다르지 않다는, 그러니까 교육열은 인류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육의 필요성은 인간의 본능 중에 하나라는 사실을 말이다. 인간은 무언가 열망한다.

     

우리는 경반분교를 뒤로 하고, 무속인이 운영하는 것 같은 경반사 암자 뒷 능선을 차고 오르기 시작했다. 회목고개까지 오르는 기나긴 임도가 있지만 오늘 트래킹의 주목적은 매봉 숲길이기 때문에 임도에 연연하지 않고 등산로를 택했다. 초반의 된비알을 잠시 단내가 나도록 오르면 습한 구릉지역에 도달하고, 오밀조밀한 숲을 헤치고 조금만 더 오르면 화전민 터가 나온다. 언 듯 보아서는 작은 구릉지로 보이지만 땅을 자세히 보면 각진 돌을 쌓은 흔적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터 옆이 경반천의 발원지여서 땅만 조금 파면 물은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더라도 해발 700미터에 가까운 이곳에 산다는 건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다.

    

산 아래 경반분교에 등교하는 학생들은 이곳에 살던 화전민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을 게다. 물론 경반분교 뒤 다루개골에도 화전민이 살았지만 이곳 회목고개 아래에 있는 화전민들도 그 분교에 다녔던 것이다. 불과 50~60년 전만 해도 칼봉산과 매봉 주변에는 이런 키 큰 나무들은 거의 없었다. 당연히 너와집 주변에는 화전을 일구고, 땔감으로 모조리 벌목을 했기 때문에 웬만한 나무들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여기뿐만 아니라 전국의 어느 산이든 수령이 좀 되는 굵은 나무들이 거의 없는 것을 보면 벌목은 일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숲을 이루고 있는 대다수 나무는 60년대에 본격적으로 녹화사업이 시작한 후, 70년대를 거치면서 대대적인 화전민 이주 정책을 하는 등 전 국민적인 의식의 전환을 겪으면서부터 자란 것들이다. 가장 나이가 많다고 해야 60년을 넘지 않는다는 것이다.   

2020년 8월 29일 / 화전민 터

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감자 옥수수 메밀 칡 콩 등의 구황식물을 불을 놓아 만든 밭에서 작물 하거나 야생에서 캐어서 민생고를 해결했다. 나무를 벤 구릉에 쥐불을 놓고 다 태운 후 나무뿌리를 캐고 돌을 골라내는 노동을 한 다음 그곳에 씨를 뿌려 수확을 했다. 그것도 가뭄이 일고 장마가 닥친다면 수포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그들에게 초근목피는 대수로운 게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은 주변 산 곳곳에 산판길을 내어 나무를 벌목하여 장작을 만들고, 또한 가깝게는 연인산이나 멀게는 명지산 화악산 줄기까지 넘나들며 약초를 캔 후 가평장으로 짊어지고 나가 팔아서 쌀과 보리를 사 가지고 왔다. 장날이면 지게에 자신보다 부피가 큰 장작을 짊어지고 산길을 내려가 경반분교를 지나고 경반천을 몇 번씩 건너는 어느 화전민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들은 천민 중에 천민이었다. 소작농이나 노비는 물론이고 백정이나 갖바치보다도 못한 삶이었다. 산으로 들어온 사연들이야 제각각이지만 삶은 그들보다 척박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들은 산을 내려가서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양반집의 종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고, 백정이나 갖바치는 도제적 성격이 강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기술을 전수해주지 않았다. 세상에서 그들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산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유일한 생존 방법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생활이 자유로웠을지도 모른다. 누구의 속박을 받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히말라야에 사는 부탄 원주민들이 절대적 행복지수가 높다고 하는데, 그런 면에서 화전민이 불행하다고 단정하는 것은 편견일지 모른다.     


그들의 궁박했던 생활을 잠시 상상을 하며 화전민 터를 지나 얼마 남지 않은 경사면을 올라 드디어 회목고개에 도착했다.    


회목고개는 칼봉산과 매봉을 잇는 안부이고 연인산 임도의 시작점이다. 마루금 공터엔 오색방천이 걸려 있는 당산나무가 있고 그 앞에는 아는지 모르는지 등산객들이 앉아 쉬는 자연석으로 된 제단이 있다. 굿을 하는 곳인지 아니면 무당들의 기도터인지 정확하게 모르지만 아래에 있던 경반사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닌지 하고 추정해 본다.     


회목고개에서 잠시 쉬며 곡기로 배를 채우고 자리를 뜨려고 할 때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잎사귀에 부딪히는 빗소리는 양철 지붕에 떨어지는 소리처럼 선명하게 들렸으며 그 소리는 점점 크게 들렸다. 지나가는 비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방수 자켓을 배낭에서 꺼내 입고 부지런히 짐을 꾸린 후 자리를 떴다.     


드디어 오늘의 메인이벤트인 매봉 임도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것이다. 오래전부터 산 도반들에게 입이 닳도록 자랑을 하던 바로 그 숲길이었다. 회목고개에서 우정고개까지 약 6킬로미터에 이르는 이 길은 경사가 거의 없이 울창한 숲으로 덮여 있으며, 길 폭도 정원처럼 적당하여 아늑한 분위를 연출하고, 특히 북동향이어서 여름에는 최적의 그늘을 선사한다. 천상의 낙원을 거닐기 위해서는 공짜가 없는 법, 이곳을 걷기 위해서는 들머리나 날머리나 한 시간 이상 마운티니어링을 해야 임도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용추계곡처럼 비경은 아니지만, 그리고 주관적인 시선이지만 아마도 한반도에서 이만한 풍경을 자랑하는 숲길은 없을 것이라고 나는 주저 없이 엄지척을 내보이곤 했었다.

      

이 숲길로 건너편 산 아래에 살던 국수당 아이들이 경반분교로 등교를 했다는 것은 이 산등성이는 그 당시 민초들에겐 일상적인 생활 반경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명 비박촌이 있는 우정고개 주변의 구릉지와 그리고 내가 지나온 화전민 터는 이 길을 통해 하나의 생활 영역이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우리가 인식하는 거리와 고개의 등반 난이도는 당시의 개념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당시 이곳 사람들은 이 길 정도는 특별하지 않은 일상적인 활동량에 불과하며, 그러니까 그 운동량에 놀라워할 필요는 없다.

      

2020년 8월 29일 / 천상의 숲길,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빗소리는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방수 자켓과 배낭 카바에 떨어져 부서지는 빗방울 소리와 수많은 이파리를 두드리는 소리와 그리고 질척거리는 흙길을 내딛는 등산화 소리 등이 어우러져 차이콥스키의 6번 교향곡 2악장처럼, 우울한 1악장이 끝나고 무언가 해방된 듯한 절제된 음률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처럼 맑고 평화롭지도 않고, 말러 교향곡처럼 장중하지도 않고, 쇼스타코비치 교향곡처럼 역동적인 에너지가 넘치지도 않고 그리고 베토벤처럼 열정적이지도 않지만, 고고한 숲길을 사뿐히 걷듯 마음이 정결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비 내리는 숲길을 산책하는 차이콥스키 뒷모습에서 진한 고독의 향기가 물씬 풍겨온다고 하면 위험한 레토릭 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규칙적인 걸음 속에서 감성은 정적인 소리에 몰입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잠시 지친 몸을 나무 아래에 숨기고 숨을 고른다. 비를 피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많은 양의 비를 나뭇잎이 막아주고 있었다. 방수 자켓 후드 끄트머리에서 굵은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직도 국수당까지 가려면 험난한 길을 예고하고 있었다. 우정고개까지는 이런 페이스대로 가면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하산 길은 추측하건 데 결코 여기처럼 수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난 장마에 등산로가 유실되어 아수라장이 되어 있을 게 분명했다. 그래도 오래전부터 자연에 의해 치도곤을 당하더라도 사람들은 그 사이로 다시 길을 내고 왕래를 해왔다.     

2020년 8월 29일 / 마일리로 하산하는 등산로가 장마로 인해 망가져 있다

불현듯, 비 내리는 동강의 외딴집이 떠오른다. 비 오는 날은 나뭇잎처럼 연약한 줄 나룻배를 움직일 수 없다. 장마철이면 더더욱 배를 댈 수 없다. 비 오는 날이면 외딴집 노인은 거센 물줄기가 일렁이는 동강 너머 산기슭 오솔길로 넋 놓은 시선을 주고 있다. 짙뿌연 담배연기가 습기를 머금고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꿈틀거리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뱃길이 열릴 것이라는 것을 외딴집 노인은 잘 안다. 그렇게 외딴집은 비를 맞으며 항상 그랬던 것처럼 기다린다. 은둔자처럼 세상을 등지지 않은 채 세상을 기다리고 나를 기다린다.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이미 바지는 빗물에 완전히 침투를 당했고, 구입한 지 오래된 방수 자켓은 이제 기능을 거의 상실한 듯 몸에서 땀과 습기가 섞여 축축해지기 시작했고, 다행히 등산화는 잘 버텨주고 있었다. 이렇게 비를 맞으며 산행을 하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무차별 폭격을 맞은 듯 처참하게 부서진 하산 길을 가면서, 비로 인해 행동의 제약을 많이 받았지만 그래도 몸은 그 불편함을 거부하지 않았다. 현리에 있는 커피 가게에서 따뜻한 라테 한 모금을 마시면 오늘의 피로는 싹 가실 것이다. 그리고 친구한테 전화를 해 오늘 겪었던 무용담을 장황하게 늘어놓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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