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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호용 Dec 01. 2020

바흐와 함께 춤을

홍천 구절산 임도

남춘천역에서 십여분 걸어 가톨릭 춘천교구 근방에 가면 조양리로 가는 마을버스를 탈 수 있다. 크기만 마을버스이지 종착지는 산골짜기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농촌 마을이 대부분이다. 하루 두 번(다섯 번이지만 세 번은 출발점이 다르다) 중 첫 번째인 10시 20분경에 들어가는 그 버스를 타기 위해 나는 남춘천역을 빠져나와 공지천이 흐르는 효자교를 건너고 있었다. 이른 오전 팔호광장으로 쭉 뻗은 신작로는 한산했고, 비가 올 것이라는 일기예보 탓인지 하늘은 잿빛이었다.                    

2020년 9월 12일 / 춘천 시내

30분 동안 텅 빈 버스정류장에서 아직 문을 열지 않은 페인트 가게, 이불가게, 치킨집, 광고점, 부동산 앞을 기웃거리고, 그 유리에 비치는 내 모습을 보며 옷매무새를 확인하면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드디어 버스가 나타나 나를 싣고 떠났다. 두세 명을 태우고 내려준 버스는 두 명만 태운 채 시내를 빠져나와 한적한 지방도로를 달린다. 농촌버스가 그렇듯 버스는 동춘천 산업단지를 한 바퀴 돌아 두 명을 태우고, 다시 한번 계곡 깊숙이 있는 봉명리 종점에 들어갔다 제자리로 나와 고개를 넘고 다리를 건너 드디어 긴 여정 끝에 조양리 종점에 당도했다. 산업단지에서 탄 두 명의 사내를 놓아둔 채 나와 동네 아주머니는 버스에서 내렸고, 버스는 마을회관 주차장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려는 듯 주차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버스기사는 담배 하나를 맛깔나게 피울 것이다. 그리고 아주머니와 헤어진 나는 산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구절산에서 갈라진 산줄기가 두 팔을 벌리고 나를 반겨주고 있었다.

               

농가 몇 채가 듬성듬성 모여 있는 마을을 지나 고속도로 교각 아래에 다다랐을 때 잔뜩 찌푸리고 있던 하늘에서 기어코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여름 끄트머리여서인지 지난번 묵안리 임도에 갔을 때처럼 폭우는 아니었지만 제법 빗줄기가 굵었다. 배낭에서 레인 재킷을 꺼내 뒤집어쓴 나는 비탈면을 오르기 시작했다. 후드를 때리는 빗방울 소리가 잠시 의식을 지배했지만 금방 적응한 듯 그 소리는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2020년 9월 12일 / 조양리

외딴 펜션을 지나자 경사가 가팔라지면서 10평 정도 되는 조그만 가옥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마도 마지막 집인 듯했다. 사람들이 주거하는 집 같지는 않고 가끔 와서 자고 갈 정도의 초막 수준의 조립식 주택이었다. 이 깊은 산에 이런 초막을 짓는 이유는 무엇일까. 수많은 산과 여러 지역을 여행하면서 깊은 산속에 지은 집들을 많이 보아왔다. 보다 더 깊은 곳을 갈망하듯 사람들은 인적이 없는 산속 깊은 곳에 집을 짓는다. 하지만 주의 깊게 보면 주거로서의 집이 아니라 개인의 욕망과 독특한 사연이 개입된 집들이 많았다. 해가 떨어지면 칠흑 같은 어둠과 숨 막힐 것 같은 깊은 정적에 휩싸이는 초막에서 사람이 매일 기거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어떤 완고함이 없으면 할 수 없는 행위이다. 여기서 그들의 정신세계를 탐사할 수 없지만, 인간이 만든 보편적 세계관을 탈피하려는 사람이 어디든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 개체가 하나의 우주라고 하지 않는가.     


마지막 집을 통과하자 이제부터 본격적인 산길이 시작된다. 해발을 높이기 위해 길은 급격하게 굽이치고 경사도 한층 끌어올린다.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가을 준비를 한 듯 산길은 시원스럽게 제초작업이 되어 있었다. 진한 풀 냄새가 습기를 머금고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짐작컨데 아마도 이 임도를 관리하는 강원대학교 학술원에서 집행한 작업일 것이다. 과거에는 숲길 체험 시설을 만들어 외지 사람들을 유치했으나 무슨 연유인지 지금은 그 시설들이 흉물처럼 남아 있고, 사람들의 출입도 통제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사유지처럼 울타리를 설치한 것을 아니지만, 학술원 건물이 있는 건너편 봉명리 임도 들머리에서는 학술원 직원이 출입을 막고 있었다. 그외의 다른 곳에서는 차량 통제 바리케이트만 설치되어 있어서 사람의 출입은 제약을 받지 않았다.                


아무튼 한 시간 정도 오르면 봉명리 강원대 학술림 방향에서 올라오는 임도와 합류하고, 잘 가꿔진 길을 따라 조금만 더 가면 본격적인 숲길이 이어진다.           

2020년 9월 12일 / 봉명리와 조양리가 만나는 삼거리

길은 서로 만나고 헤어지지만 영원히 만나지 않는 길도 많다. 그리고 가다 보면 막다른 길과 만나기도 하고 그렇게 미로처럼 얽힌 길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기도 한다. 또한 중간에 탈출구도 없이 사면을 굽이쳐 도는 길이 끝없이 이어지기도 한다. 마치 뫼비우스 띠를 기어가는 개미처럼 경계가 없는 2차원의 산길이 이어지고 그렇게 길은 극한계까지 이어질지 모른다.               


지금 이 길을 가고 있지만 내일이면 다른 길을 걷고 있는 나를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날은 이곳과 전혀 다른 잿빛이 범람하는 거친 길을 가고 있을 것이다. 길은 다르지만 주체자는 하나이며 그 속에서 욕망들이 충돌하고 번민들이 파편처럼 튕겨나가 어딘가 박힐 것이다.           


한껏 물기를 머금은 숲길이 구절산 품으로 들어갈 즈음, 지난 태풍에 쓰러진 소나무와 참나무가 길을 막고 있는 광경이 나타났다. 그중에 비탈면으로 한 아름 이상 되는 소나무가 허리를 포장 박스 구겨지듯 꺾인 채 넘어가 있었다. 모양새가 참 괴기스러웠다. 몸집이 큰 나무는 대게 뿌리 채 뽑혀 쓰러지기 마련인데 그놈은 허리가 두 동강이 난 것도 아니고, 넘어진 반대쪽 줄기가 끊어지지 않고 마지막까지 안간힘을 쓰며 붙잡고 있었다. 금방 찢어질 것 같았다. 넘어갈 때의 엄청나 에너지를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지탱한 상황이 화석처럼 남아 있었던 것이다. 소나무 특유의 질긴 섬유질 탓이기도 하지만, 넘어가는 물리적 힘과 자신을 지키려는 짝힘이 서로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싸웠을 것이며, 결국 패배한 나무의 처참한 심정이 억울한 영령처럼 아우라를 만들고 있었다. 그 고통을 감내한 소나무에게 경의를 표하고 나는 다시 발길을 옮겼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서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포탄을 맞은 것처럼 파헤쳐진 길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장마로 망가진 임도의 보수공사와 임도를 가로지르는 암거 공사 등을 하다가 이 비에 중단을 한 듯 아수라장이었다. 금방 되메우기를 대충 해 놓은 곳은 길이 무너질 것 같이 위태로웠고, 그나마 안전한 곳은 굴삭기와 트럭 바퀴 자국으로 인해 진흙탕이었으며, 구경이 1미터 정도 되는 폴리에틸렌 배수관과 파헤쳐 놓은 바위들과 그리고 경사면 보수용 잡석들이 임도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 위로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2020년 9월 12일

생각지도 않은 상황에 봉착하자 무언가 긴장감이 등줄기를 타고 엄습해 왔다. 비 내리는 텅 빈 이 산속에서 이런 살풍경 중심을 통과하는 게 결코 편할 수는 없었다. 우비를 뒤집어쓴 제이슨(13일의 금요일의 살인마 이름)이 도끼를 들고 내 뒤를 쫓아오는 것 같은 공포가 뒷목을 살짝 당기는 듯했다. 질퍽이는 길과는 상관없이 발걸음이 본능적으로 빨라졌다. 중간에 좀 쉬어가야 했지만 분위기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 불편한 곳을 황급히 벗어나고 싶은 심정이 가득 차올랐다. 하지만 공사현장은 생각보다 훨씬 길게 이어졌다. 나중에 지도상으로 보았을 때 공사 구간이 3킬로미터 정도 되었는데, 그렇게 빨리 걷는다고 했는데도 한 시간이나 걸린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공정률이 80% 정도 되었기 망정이지 그 이하였다면 더구나 이런 우천 시에는 사람이 다니기에 불가능했을 것이다. 설령 비가 오지 않았더라도 이렇게 긴 공사 구간을 뚫고 지나가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냥 발길을 돌리는 것이 현명한 판단일 것이다. 2년 전 여름, 축령산 서쪽 임도를 가다 백여 미터 보수공사 구간을 통과한 적이 있었는데, 특히 작업 중인 굴삭기를 지나가는 것이 정말 고역 중에 고역이었다. 한 여름 산에서 고생하는 작업 인부들 보기에도 눈치 보이고, 흙먼지와 소음과 중장비의 매연 등이 혼재한 그 공간을 빨리 빠져나가야 한다는 일념뿐이었고, 당연히 그날의 트레킹은 속된 말로 개판이 되고 말았으니까 말이다.          


예전 알피니스트를 자부하던 시절, 위험한 상황을 수없이 경험해 보고 두려움에 떨어보기도 했지만 이런 종류의 상황과 두려움은 생소한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정도의 분위기에서 정신줄을 잠시 느슨하게 잡고 있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노쇠한 트레커의 한계인지 모른다.          


공사구간을 빠져나온 나는 잠시 한숨을 돌리며 선 채로 영양 보충을 했다. 빗방울이 우의 후드챙 끝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긴 터널을 빠져나온 것 같은 여운이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었다. 간단하게 에너지를 보충한 후 두 다리를 케어할 여유도 없이 나는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가다 보면, 녹색 잡초들이 주단처럼 깔리면서 세상은 공평하게도 시나브로 안정감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 들어가듯이.          

2020년 9월 12일

산행을 시작한 지 2시간 30여분이 지난 뒤 드디어 1차 목적지인 삼거리가 나왔다. 춘천 방향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삼거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의 왕래가 꽤 있었다는 것을 방증하는 듯 족구장 크기만 한 공터로 형성되어 있었고, 반대 방향은 홍천군으로서 이 지점은 춘천과 홍천의 시계였다. 그리고 SUV 차량 한 대는 충분히 다닐 수 있는 넓이의 임도가 양방향으로 깔끔하게 나 있었다.


나는 사진 몇 장을 찍고 홍천 방향으로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부터 오르막이나 공사구간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빗줄기도 가늘어지고 있었다. 두 다리는 한결 가벼워졌다.          


가랑비에 촉촉이 젖은 늦여름의 녹음은 조용히 숨을 쉬고 있었다. 여름의 끝물에 다시 살아나듯 녹색의 이파리들이 생기 가득했다. 비는 그들에게 생명의 에너지를 선사한 것이리라. 엽록소들이 마지막 에너지를 발산하듯 색감이 짙어지고 있었다. 봄의 녹음은 수채화 톤이지만 늦여름의 녹음은 진한 오일 페인팅 느낌이 강하며 다분히 인상파적이었다. 마치 고흐의 그림처럼 색감이 강했다. 가을을 준비하고 있던 산신이 천신이 뿌린 비에 놀라 정신이 바짝 들었는지 모른다.          


길은 대룡산 가장 깊은 곳으로 굽이쳐 이어지지만 오지에서 느껴지는 고립감은 없었다. 세상과 단절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갈 때 엄습해 오는 두려움도 나타나지 않았다. 잡초가 무성한 상판리 산판길처럼 영혼의 쓸쓸함도 없었다. 심장이 쪼그라들 것 같았던 국망봉의 그 거대한 기운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똑같은 길이 끊임없이 반복될 때의 지독했던 지루함도 없었다. 빗줄기는 그렇게 소리 없이 세상을 감싸고 있었다.                    

2020냔 9월 12일

비맞은 녹색의 정원에 취해 걷고 있을 때 문득 바흐의 향기가 뇌리에 꽂혔다. 18세기 바로크 음악을 주도했던 거장이며 우리에겐 서양음악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마지막 작품번호가 BWV1080번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는 지구 상에서 가장 많은 곡을 만든 작곡가이며, 음악의 신 오르베우스였으며, 음악의 헤파이스토스였고, 그리고 음악 공장 공장장이었다. 공식적으로 발굴하여 분류한 곡이 1080곡이고, 아직도 미발굴 된 곡이 많다고 보도되는 것을 보면 진정한 마지막 BWV 숫자는 아무도 모른다. 바흐 사후 150년이 지난 19세기 말, 첼로의 거장 파블로 카잘스가 13살 때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허름한 헌책방에서 우연히 바흐의 첼로 무반주 모음곡 악보 뭉치를 발견한 것을 보면 그 방대함을 방증하고도 남는다. 바흐와 카잘스의 그 운명적 만남에 대한 스토리는 책으로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베토벤으로부터 시작해서 말러에서 끝나는, 서양음악의 천재들이 군웅할거하던 19세기에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던 낭만파 뮤지션들이 바흐를 강제로 소환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바흐 사후 50~60년 동안은 음악의 변방이었던 독일 라이프니치에서 그저 그런 교회음악을 했던 잊혀진 뮤지션에 불과했다. 오히려 18세기 후반 당대에는 그의 아들들이 아버지보다 더 많은 명성을 얻고 있었다. 대중들에겐 바흐 음악이라고 하면 그의 막내아들이며 모차르트의 스승인 요한 크리스티안을 연상했다고 한다.                     


그렇게 세상에서 잊혀가던 바흐를 지상으로 끌어올린 사람들 중에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음악가는 바로 낭만파의 거두이며 영원한 청년인 멘델스존이었다. 바로크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젊은 음악가 멘델스존의 집요한 추적 끝에 바흐 사후 전설 속에 묻혀있던 ‘마테 수난곡’을 복원하였으며, 당시 지휘자로서의 자질이 상당했던 그가 편곡을 한 후 연주회를 열어 직접 지휘를 했다. 당시 모차르트와 비견될 정도로 아이돌 스타였던 멘델스존이 열렬히 복음을 하였기  때문에 세상은 예수의 부활처럼 바흐에게 빠르게 매료되기 시작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그 후 바흐의 음악은 19세기 전반에 걸쳐 슈만과 브람스 같은 당대 최고의 고수들에 의해 발굴되고 재평가하는 붐이 일었고, 20세기에는 아쉽게도 독일 나치에 의해 음악의 아버지로 추앙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의 65년의 삶은 음악처럼 아름답지도 않았고 종교처럼 성스럽지도 않았다. 그의 자식들은 정확하게 20명이었다. 첫 번째 아내에서 7명, 사별 후 재혼한 아내에게서 13명의 자식을 생산하였고, 그중 10명은 성인이 되기  전에 사망하였다. 재혼을 한 관계로 평균적인 자식 수 보다 좀 많았고, 생존율은 모차르트가 7형제 중에서 생존한 2명 중에 하나이듯 당시 평균보다 훨씬 높았다. 여담이지만 클라라 슈만은 8명의 자녀를 2년마다 출산하면서 알베르토 슈만의 불안정한 정신상태를 이겨냈으며 그리고 브람스, 리스트, 바그너 등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과 왕성하게 교류를 하였고, 그 와중에도 피아노 연주회를 비롯한 자신의 음악세계를 구축한 것을 보면, 욕계에 사는 우리의 상식으로는 범접할 수 없는 색계의 경지에 존재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바흐 자신이 직접 가계도를 작성하기도 헸는데, 그 결과 바흐 성을 가진 음악가 60명을 추려냈을 정도로 바흐 가문은 독일에서 200년 동안 대대로 명성이 자자한 음악 장인 집안이었고 그도 그중에 일원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음악가는 사회적 계급으로 볼 때 평민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는 선조들이 그래 왔듯 평생 동안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음악 공장을 운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지 재혼을 한 관계로 자식들이 좀 많았기 때문에 공장의 작곡 기계를 좀 더 많이 가동해야 했다.                    


음악 공장 노동자였던 그는 생의 전반기에는 바이마르 공국과 쾨텐 공국에서 오르가니스트와 궁정 마스터로 재직하며 '브란덴부르크 협주곡'과 '바이올린 무반주 모음곡' 등을 만들었고, 후반기에는 좀 더 좋은 대우를 받기 위해 라이프니치 교회의 악장으로 전임을 하여 수많은 칸타타와 수난곡과 미사곡 등을 찍어냈다. 그의 작품들이 많은 것은 교회 악장을 할 때 미사 때마다 매번 새로운 미사곡을 연주해야 한다는 관례에 따라 그와 관계된 곡을 생산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일상은 피곤의 연속이었지만 가족들을 위해 헌신하는 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쪼들리고 배움이 부족하면 귀족들에게 괄시를 받는다는 게 그의 삶의 신조여서 자식들의 경제적 환경과 학업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우월한 음악적 DNA가 유전되는 가계의 특징도 있지만 그의 자식들 중에 유독 자신을 능가하는 청출어람이 많은 것은 도제식 음악 교육이 지독했기 때문이었다.                    


21세기 지구인에게 마음의 안식을 위한 음악을 선사한 위대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도 한 가정이라는 현실 앞에서는 노동하는 범부에 불과했다. 그는 대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보다 안정된 직장을 구하려고 치열하게 투쟁했고, 그 세계에서 생존하기 위해 매일 초과 근무를 감내해야만 했다. 작곡도 하고, 훈장질도 하고, 오르간을 연주하기도 하고, 미사 때는 음악 감독을 하기도 하는 과중한 업무의 연속이었다. 말년의 베토벤처럼 정원을 거닐며 진정한 자신의 음악에 대해 사색하는 따위는 머리에 기름 낀 예술가의 호사에 불과했다.               

바흐와 김수영

여기서 바흐 얘기는 그만하고, 글이 길어지지만 시인 김수영에 대해 몇 마디만 하고 다음 진도를 나가겠다.     

대한민국의 위대한 시인 김수영도 알고보면 바흐만큼 피곤한 인생이었다. 예사롭지 않은 강렬한 눈빛처럼 김수영의 시 또한 강열하고 예사롭지 않았다. 소싯적에 시 몇 편 잃어본 일인으로서 그의 ‘풀’이란 시를 외워 친구들한테 암송할 정도로 그의 시는 대한민국 문학계에서 상당한 위치를 점령하고 있었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그 위상은 더 높아져 지금은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리고 수능시험에 단골 문제로도 출제된다고 한다. 당시에는 10대 때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를 외웠다면 20대 때는 김수영의 '풀'을 외웠었다.                    


50~60년대 시 세계의 주류였던 서정성을 배제한 인간의 분열적 자아와 자신의 일상을 도구로 삼아 도발적으로 토해내는 강열함이 그의 시의 특징이었다. 부조리한 세상에서 행동하지 못하는 소시민으로 그리고 지식인으로서의 자기 연민과 자기모멸과 자기 학대 등 그런 자신과의 치열한 투쟁을 통해 리얼리즘을 극복하였고, 일상의 솔직한 언어와 불온성 때론 독설과 퇴폐적인 시어로 자신의 영감을 표현했다. 문학에 문외한인 내가 그의 시를 논하는 게 건방지다고 하겠지만, 예술적 가치와 현실적 삶을 병치해서 볼 때, 대한민국 현대 문학사에서 서양음악의 악성이라 칭송하는 베토벤 정도의 아우라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평가해본다. 사실 예술가의 삶이 피곤하다는 측면에서 볼 때 그들은 동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본래 해방되기 전 학창 시절부터 다다이즘적인 전위성이 농후한 이상을 동경했고, 해방 후에는 6살 어린 모더니즘의 마왕인 박인환과 치명적 교류를 하면서, 당시 혼란한 현실을 외면하려는 현상으로 나타난 모더니즘 세계에 적극 합류하였다. 아마도 해방과 한국전쟁 사이의 5년이 그에게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는지 모른다. 20대 중후반으로서 순수 문학적 상상력이 왕성했으면, 무엇보다 당시 수많은 문학청년들이 흠모의 대상이었던 문학계의 아이돌 김현경과 결혼까지 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한국전쟁으로 인해 그의 정신세계의 패러다임이 180도 바뀐다.               


함락된 서울에 숨어 있다가 인민국에 붙잡힌 그는 강제적으로 북한 의용군에 입대하여 전쟁터를 전전하다 우여곡절 끝에 탈영한 후 수복된 서울로 돌아오지만, 다시 국군에게 간첩으로 몰려 체포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넘겨진다. 그가 쓴 당시 포로수용소 생활상을 보면, 우익과 좌익이 나뉘어 초현실적인 야만적 폭력들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에서 그는 믿음도 없으면서 미군에게서 얻은 성경책 속으로 깊이 숨어 들어갔고, 파리 같은 목숨을 건사하기 위해 비열한 짓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자술 한다.               


한국전쟁이라는 거대한 카오스에서 극적으로 살아 돌아온 그는 아내의 배신과 만남을 거듭하고, 1956년 박인환의 허무한 요절을 겪으면서 의식의 대전환이 일어난다. 그로 인해 그의 시 세계는 급전환하여 현실 속으로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간다. 박인환과 정신적으로 결별한 후 10년 동안 미친 듯이 쏟아낸 그의 시가 60년이 지난 현재까지 고전이 되어 울림을 주고 있는 것이다.               


당시 문학인들, 특히 전업 시인으로 산다는 것은 지난했다. 그는 취업을 거부하고 시평론, 산문, 번역 작업 등의 원고료와 아내가 잠깐 운영했던 의상실, 미장원 등에서 수입을 창출했고,  그것도 모자라 북한산 기슭에 살 때는 가족과 함께 가내 수공업식으로 양계장도 운영했다고 한다. 백면서생처럼 집안일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자신의 정신세계만 애지중지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가장으로서 일상 깊은 곳에 실존하려고 치열하고 싸웠다.               


그러면서 그는 삶과 문학이라는 두 길에서 방황하고 번민했다. 당시엔 원고료를 받으면 문학 도반들에게 술을 사주지 않으면 안 되는 불문율이 하나의 미덕처럼 여겨지고 있었지만 그는 쪼잔하다는 뒷담화를 애써 외면하면서 그 피 같은 돈을 집에 갔다 주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리고 집에서는 꼬장 하고 가부장적이어서 작품의 필사본을 아내에게 쓰라고 했고, 각종 원고의 정리와 출판사 납품까지 지시하는 등 아내를 직원처럼 부려먹었다. 또한 '죄와 벌'이란 시에서 밝혔듯이 신작로에서 아내와 함께 걷다가 싸워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렸다고' 고백한 것을 보면 꼬장함과 함께 분노조절장애도 가지고 있었고,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라는 시에서는 세상의 부조리에 행동하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면서 '설렁탕 집 돼지 같은 주인 년한테 욕'을 해대는 자신의 옹졸함을 뇌깔이기도 했다.               


이상과 박인환, 그들과 같은 영감의 피가 흐르는 그는 그 뜨거움을 감추고 있었지만 때론 술에 취하면 두 아들과 마누라를 먹여 살려야 하는 생활인으로서의 자신을 한탄하기도 하고, 한 겨울 정신을 잃고 길에 쓰러져 파출소에 실려 가 행패를 부리기도 하고, 어떤 날은 밤늦게 집에 들어가 잠자는 가족들을 깨워 제발 내게서 떠나라고 읍소하는 등의 주사를 부리기도 했다고 한다. 가족의 생계 걱정을 하지 않으며 마음껏 시를 쓰고 싶었지만, 가족이란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자신의 앞길을 막고 있었으며 그런 갈등과 번민 등이 그의 시 속에 진하게 녹아 있었다. 세상에 분노한 그는 박인환이 부러웠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들이 녹색의 숲길을 걸으며 살아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면서 서서히 멀어져 가고 있었다. 개개인은 하나지만 그 자신이 가는 길은 둘일 수도 있고 여러 개일 수도 있다. 이 숲길을 걷는 나도 있지만 내일이면 저 회색빛 빌딩 숲을 거니는 나도 존재하지 않는가. 아니면 철저히 나를 숨기고 다른 옷을 입고 음침한 어느 길모퉁이를 배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속에서 번뇌가 작동하여 자아가 분열되고 고통스러워한다.               

2020년 9월 12일 / 홍천 북방리

이제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연화사 절집 뒤를 거쳐 울창한 소나무 숲을 지나면 도롯가 산기슭에 농가가 보이고 마지막으로 커브를 틀면 북방리 마을이 멀리 시야에 들어온다. 그렇게 산길을 빠져나온 나는 산속으로 이어진 차도를 따라 올라간다. 몇 백 미터 가자 홍천 읍내로 나가는 버스가 멀리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을회관 옆에서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버스는 ‘천천히 와도 돼’라고 말한다. 지친 다리는 조금은 가벼워지고 있었다. 빗방울은 레인재킷을 벗지 못할 정도로 아직도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버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4시가 되자 밖에서 담배를 다 피운 버스기사가 올라와 시동을 걸었다. 버스는 10여분 전에 내가 내려온 임도 날머리를 지나 천천히 달린다. 이제 빗방울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노곤함이 전신으로 퍼지고 있었다. 종일 비에 시달린 몸이 녹아내리면서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지만 입가에 미소를 만들고 있었다. 나는 차장으로 스쳐 지나가는 산과 논밭과 가옥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다시 한번 나는 씩 웃었다. 그리고 몇 정류장 지났을 무렵 외국인 노동자들인 듯한 동남아 사람 세 명이 탔다. 무슨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을까, 홍천으로 나가는 것일까, 아니면 홍천에서 춘천까지 나가는 것은 아닐까 하고 나는 나에게 계속 질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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