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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선비 Mar 24. 2021

5. 진시황

   

진시황은 비록 황제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지만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다는 소문에서 한 시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어머니는 명색이 태후라는 신분이면서도

여불위는 물론 천민인 노애와 사통 하면서 두 명의 자식까지 낳았다.

게다가 그것도 모자라, 자기가 죽고 나면 그 아이들로 하여금 대를 잇게 하겠다는 소문까지 흉흉하게 떠돌아다니게 만들 지경이었으니 위나라 남자(南子)는 견줄 수도 없을 정도였다.

비록 천하를 모두 가졌다고는 하나 진시황은 자신을 둘러싼 이 모든 상황들이 다 싫었다.

제위도 신하도 백성도 모두 잊고 싶었다.     








파란만장한 생애란 바로 진시황과 같은 인생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흔히들 진시황을 진(秦) 나라 황제로 일컫지만 사실 그는 진나라에서 태어나지도 못했던 사람이다.

진시황은 진나라 소양왕(昭襄王: B.C. 251) 칙(則)의 손자인 자초(子楚)의 아들로 태어났다. 즉 소양왕의 증손자인 셈이다.

여기서 별다른 설명 없이 그냥 소양왕이라고만 이야기하고 넘어가면, 일반 독자들에게는 그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기 때문에 사실 와 닿는 것이 거의 없을 것이다.

소양왕은 우리들에게 익숙한 ‘계명구도(鷄鳴狗盜)’나 ‘완벽(完璧)’이라는 고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계명구도(鷄鳴狗盜)’란 ‘닭 우는 소리나 흉내 내고 개구멍을 드나들며 도둑질이나 하는 하찮은 존재’라는 뜻으로, 진나라 소양왕과 제나라 맹상군(孟嘗君) 사이에서 일어났던 사건에서 유래한 고사성어다.

제나라 맹상군이 아주 유능하다는 소문을 들은 소양왕은 맹상군을 자기 나라로 초청하여 재상으로 삼고자 하였다.

달리 저항할 힘을 갖지 못했던 맹상군은 할 수 없이 진나라로 가서 소양왕을 만났다. 이때 맹상군은 소양왕에게 호백구(狐白裘)를 선물했다. 호백구란 여우 겨드랑이 부분의 흰 털로만 만들어진 털옷인데, 하나를 만들려면 수십 마리의 여우가 필요한 것으로, 아주 진귀한 물건이었다.

그러나 진나라 대신들이 ‘다른 나라 사람을 재상으로 삼으면 결코 우리 진나라를 위해서 노력하지 않을 것이라’라는 논리를 앞세워 반대하자, 소양왕도 마침내 그 생각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렇다고 맹상군을 그대로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그가 제나라로 돌아가 복수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소양왕은 결국 맹상군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이런 낌새를 눈치챈 맹상군은 진나라를 빠져나갈 궁리를 하다가 한 가지 묘안을 찾아냈다. 맹상군은 소양왕이 자신이 총애하는 애첩의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준다는 사실을 알고 그 애첩에게 부탁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애첩은 맹상군의 부탁을 들어주는 대가로 맹상군이 소양왕에게 선물한 것과 꼭 같은 호백구를 요구했다. 하지만 그 호백구는 그렇게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바로 그때, 고민하던 맹상군에게 호백구를 구해다 준 인물이 있었다. 바로 맹상군의 식객으로 있던 사람으로, 개구멍을 드나들며 좀도둑질이나 하던 인물이었다. 그 식객이 소양왕의 창고로 숨어 들어가 호백구를 훔쳐온 것이다.

호백구를 받은 애첩은 과연 소양왕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였고, 맹상군은 제나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맹상군이 진나라 국경인 함곡관에 이르렀을 무렵, 마음이 변한 소양왕이 군사를 보내 맹상군을 추격해 왔다. 그런데 함곡관은 첫닭이 울어야 문을 여는 규칙을 엄하게 지키고 있었다. 맹상군 일행이 함곡관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한밤중이었고 첫닭이 울려면 아직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무작정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는 추격대에게 잡힐 상황이었다.

그때 맹상군의 식객 가운데 닭 울음소리를 잘 내는 사람이 닭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얼마나 진짜 닭 소리를 닮았던지 그 소리를 들은 온 성안의 닭들이 모두 함께 울기 시작했고 당연히 성문도 열렸다. 그리하여 맹상군은 무사히 제나라도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생겨난 고사가 바로 ‘계명구도’다.    

 

‘완벽(完璧)’은 소양왕과 조(趙) 나라 인상여(藺相如) 사이에서 만들어진 고사성어다.

조 나라에는 천하제일의 보물로 알려진 화씨벽(和氏璧)이라는 옥이 있었다. 이를 탐낸 진나라 소양왕이 사신을 보내, 그 옥과 진나라의 15개 성과 바꾸자고 제안을 해왔다. 하지만 조나라에서는 소양왕이 그 옥만 빼앗고 성은 하나도 주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지도 못하고 고민만 거듭하고 있었다.

이때 조나라 재상 인상여가 스스로 그 임무를 자청하고 나섰다. 그는 조나라 혜문왕에게, 만약 진나라가 성 15개를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그 옥을 흠 하나 내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오겠다고 장담을 한 후 화씨벽을 가지고 진나라로 갔다.

인상여가 소양왕에게 화씨벽을 바치자, 소양왕은 화씨벽을 어루만지면서 그 아름다움에 대해서만 계속 이야기를 할 뿐, 주겠다던 성 15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러자 인상여가 소양왕에게 말했다.

“사실 그 옥구슬엔 쉽게 발견할 수 없는 흠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그것을 알려 드릴 테니 잠시만 이리로 주십시오.”

그 말을 들은 소양왕은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수 없자, 인상여에게 옥을 주면서 한번 찾아보라고 했다. 그러자 옥을 받아 든 인상여는 대뜸 돌계단 앞으로 나가서 옥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소양왕에게 말했다.

“왕께서는 어찌하여 화씨벽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시고, 주시겠다던 성 열다섯 개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씀도 없으십니까? 만약 왕께서 약속을 지키지 않으신다면 저는 당장 이 옥을 박살 내 버리고 저도 여기서 죽겠습니다.”

그 모습에 어쩔 줄 몰라하던 소양왕은 마침내 약속대로 하겠다고 다짐을 했다.

인상여는 소양왕에게 말했다.

“조금 전의 일로 이 구슬이 부정을 탔으니, 왕께서는 사흘 동안 목욕재계하신 후 이 구슬을 받으십시오. 그때까지 이 구슬은 제가 보관하고 있겠습니다.”

구슬을 가지고 돌아온 인상여는 부하를 시켜 몰래 구슬음 흠 하나 없이 다시 조나라로 돌려보냈다.

이것을 두고 ‘완벽귀조(完璧歸趙)’ 혹은 ‘완벽(完璧)’이라는 고사성어가 만들어진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볼 때, 진시황의 증조할아버지에 해당하는 소양왕 때부터 진나라의 힘이 중원지방 전체에 막강하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진나라 소양왕 칙의 손자인 자초가 진시황의 아버지다’라고 말하지 않고 굳이 ‘진시황이 자초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말하는 데는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서다.

진시황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알면서도 겉으로 쉬쉬하는 출생의 비밀이 있었기 때문이다.     

소양왕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는데, 진시황은 그 둘째 아들 안국군(安國君)의 손자로 태어났다. 안국군의 정실은 화양부인(華陽夫人)인데, 안국군은 그 정실에게서는 단 한명의 아이도 얻지 못하고 소실들에게서만 20명의 아들을 얻었다.

이 안국군의 많은 아들 가운데 하희(夏姬)라는 소실에게서 난 아들이 하나 있었다. 훗날 자초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는 이 인물은 당시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가 있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국가 간의 전쟁을 방지하고 화평을 도모하는 차원에서, 제후국 사이에 왕자를 서로 인질로 주고받는 관례가 있었다. 그러나 누구나 상상할 수 있듯이, 예나 지금이나 약소국에서 보내는 인질로는 그 나라의 태자와 같은 중요한 인물이 뽑히게 마련이고, 강대국에서 보내는 인질이란 아무나 한 사람으로 정해지게 마련이다.

그러니 이 자초가 진나라에서 어느 정도로 보잘것없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인물인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초를 유심히 보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바로 여불위(呂不韋)라는 이름을 가진 거상(巨商)이었다.

그는 위(衛) 나라 출신인데, 여러 나라를 돌면서 장사를 해왔기 때문에 다방면에 걸쳐 남달리 뛰어난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주목한 인물이 바로 자초였던 것이다. 그가 자초를 눈여겨본 것이 우연이었다면 모를까, 만약 정말로 그가 앞날을 내다보고 무슨 예측을 해서 일을 꾸몄다면 그 역시 예사 인물이 아님은 분명하다.  

   

여불위는 우선 자초와 친하게 지내기 시작했다. 머나먼 타국에서, 그것도 인질로 와 있는 신세인지라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자초였기에,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며 접근하는 거상 여불위를 마다할 이유가 그에게는 애초부터 없었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허물없는 사이로 발전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여불위가 자초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는 일이 생겼다. 주흥이 도도하게 무르익어갈 무렵 여불위는 자신의 애첩을 불렀다. 대부분 그런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곤 하는 여느 사건과 마찬가지로, 자초는 그만 첫눈에 그 여자에게 빠져버렸고, 급기야 그녀를 자신에게 달라고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은 여불위가 이미 설정해 놓은 각본이었다. 이처럼 모든 것이 계획대로 착착 맞아 들어갔지만 여불위는 정말 뜻밖이라는 듯이 놀라다가, 못 이기는 척하면 그 여자를 자초에게 보냈다. 하지만 사실 그녀는 이미 여불위의 자식을 잉태하고 있는 상태였다. 자초의 집으로 간 그녀에게서 얼마 후에 아들 정(政)이 태어났고, 아들이 태어나자 자초는 곧 그녀를 부인으로 삼았다. 사실상 여불위의 아들인 이 정이 곧 훗날의 진시황이 되는 것이다.   

  

한편 여불위는 화양 부인의 언니를 통해 화양 부인에게 지속적으로 뇌물을 바치며 안국군의 정실인 화양 부인과 친밀하고도 돈독한 사이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여불위는 예물을 보낼 때 항상 자초의 이름으로 보냈는데, 이러한 선물과 함께 효성스러운 수사로 점철된 편지를 함께 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자신을 생각하는 자초의 정성에 감격한 화양 부인은 급기야 소실의 자식인 자초를 자신의 양자로 삼기에 이르렀다. 자초라는 이름도 이때 화양 부인이 자신이 태어난 초나라의 ‘초’ 자를 따서 지어준 이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구도 예기치 못했던 상황이 벌어졌다. 갑자기 진나라 태자가 병사한 것이다. 왕위를 이어받을 태자가 죽자, 둘째 아들인 안국군이 자연스럽게 진나라의 태자가 되었고, 왕위 계승권은 안국군의 아들인 자초에게 돌아오게 되었다.

몇 년 뒤에 안국군이 즉위하여 효문왕(孝文王)이 되자, 정실인 화양 부인의 아들이 된 자초는 자연스레 그 뒤를 이어 태자가 되었다. 조나라에서 자초와 그 아들 정을 포함한 일가족을 진나라로 무사히 돌려보낸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당시 황제의 상기(喪期)는 일 년이었고, 후사를 잇는 차기 황제가 즉위하는 것은 그 상기를 마친 후에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그래서 효문왕은 일 년 뒤에 즉위했다. 하지만 효문왕은 즉위한 지 사흘 만에 죽고, 곧바로 자초가 진나라 장양왕(莊襄王)이 되었다.

장양왕은 화양 부인을 화양 태후(華陽太后), 생모 하희를 하태후(夏太后)라 하는 한편 자신을 지원해 준 여불위를 승상으로 삼고 문신후(文信侯)로 봉해 하남과 낙양의 10만 호를 식읍으로 하사했다.

이 장양왕이 즉위한 지 3년 만에 죽자, 드디어 태자 정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황제가 되었다. 여불위의 투자가 멋지게 성공한 것이다. 여불위는 승상보다 높은 상국(相國)이라는 지위에 올랐고, 진나라 왕이 된 정은 여불위를 중부(仲父)라 불렀다. 여불위의 입장에서 보면 아들이 황제가 되고, 애첩이 태후가 된 셈이다.  

   

여불위는 전국의 학자들을 식객으로 불러서 백과사전인 <여씨춘추(呂氏春秋)>를 편찬하고, 그 책은 거기서 한 글자를 빼거나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고 장담하면서, 단 한 글자라도 첨삭할 수 있는 사람이 나오면 천금을 주겠다고 큰소리를 칠 정도로 자신의 영향력을 키워 나갔다. 이른바 ‘일자천금(一字千金)’이라는 고사는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상국이 된 여불위는 이미 태후가 된 자신의 옛 애첩, 즉 진시황의 생모와 새삼스레 불륜의 관계를 재개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두 사람 관계에서는 태후가 훨씬 적극적이었다. 태후는 남자 없이 살기 힘든 체질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불위는, 황제가 자신과 태후의 관계를 눈치채면 자신이 위태로워질 것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여불위는 태후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태후와의 관계를 자연스레 정리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 그 방안이란 자신을 대신해서 태후의 욕정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음경(陰莖)이 크기로 이름난 ‘노애(嫪毐)’라는 인물을 찾아냈다. 진시황이 제위에 오른 지 8년째 되던 해의 일이다. 기록에 의하면 노애는, 수레바퀴를 뽑아서 그의 음경에 끼운 다음 빙글빙글 돌릴 수 있을 정도의 인물이었다고 한다.

여불위는 노애를 궁형(宮刑)을 받은 사람이라고 속이고 태후의 궁중으로 들여보냄으로써 비로소 태후의 욕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하태후는 노애의 아이를 임신하기에 이르렀다. 그녀는 진시황에게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옹(雍)’이란 곳에 궁궐을 새로 짓고, 그곳으로 옮겨가서 남몰래 아이를 둘이나 낳아 기르면서 살았다. 하지만 결국 이 사실은 진시황에게 발각되었고, 노애는 죽음을 당했다.

진시황은 여불위도 상국의 지위에서 파직하는 한편 자신의 봉지로 낙향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가, 후에 다시 촉(燭) 당으로 유배를 보냈다. 그러자 이미 사태를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 여불위도 결국 음독자살하고 말았다. 진시황은 여불위의 가신 가운데 여불위의 장례식에 참여한 사람은 모두 국외로 추방하거나 삭탈관직하는 조처를 취할 정도로 그를 증오했다.

나아가 진시황은 자신의 생모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실제로 어머니의 부정을 알게 된 아들이 그 어머니를 죽이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진시황은 옛날 위나라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위나라 영공(靈公)의 부인 남자(南子)가, 당대의 미남자로 이름난 송조(宋朝)와 사통 했다. 송조는 송나라 사람이었다. 두 사람의 이러한 관계를 모르는 사람은 세상에 없을 정도였다.

그 무렵, 위나라 태자 괴외(蒯聵)가 회맹에 참여하기 위해 송나라 땅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때 마침 송나라 들판에서 일하던 농사꾼들이 “너희 암퇘지를 만족시켰는데, 어찌 우리 수퇘지를 돌려보내지 않느냐?”라고 부르는 노랫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들의 노랫말에 나오는 암퇘지란 바로 자신의 어머니인 남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괴외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남자를 죽여버리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더 이상 백성들의 조롱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괴외는 자신의 가신(家臣) 희양속(戲陽速)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을 내려두었다.

“내가 귀국해서 소군(少君: 남자)을 뵈러 갈 때, 너는 나와 함께 가자. 소군이 나를 접견할 때 내가 뒤를 돌아보면 너는 즉시 소군을 죽여라.”

희양속은 그러겠다고 굳게 약속했다. 하지만 귀국해서 괴외가 남자를 뵐 때, 괴외가 세 번이나 희양속을 돌아보았지만, 희양속은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태자의 얼굴빛을 보고 사태를 눈치챈 남자는 울면서 영공에게 달려가 괴외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일러바쳤다. 그리하여 괴외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아버지 영공을 피해 국외로 망명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진시황은 괴외와 입장이 달랐다. 천하를 통일한 명실상부한 제 일인자였으니 스스로 결심만 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오래도록 잠 못 이루며 고통스러운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내린 결정은 어머니를 용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겪을 당시 진시황은 겨우 스물한 살이었다.

진시황은 춘추전국시대라는 전란 속에서, 적국의 인질로 잡혀 있는 서자의 아들로 태어나 온갖 수모를 겪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성인이 되어서는 천하를 통일하기까지 평생토록 전쟁을 떠나지 못했던 진시황은 개인적인 가족사마저도 이처럼 파란만장했던 것이다.

진시황은 비록 황제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지만,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다는 소문에서 한시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어머니는 명색이 태후라는 신분이면서도, 여불위는 물론 천민인 노애와 사통 하면서 두 명의 자식까지 낳았다. 게다가 그것도 모자라, 자기가 죽고 나면 그 아이들로 하여금 대를 잇게 하겠다는 소문까지 흉흉하게 떠돌아다니게 만들 지경이었으니, 위나라 남자(南子)는 견줄 수도 없을 정도였다.

비록 천하를 모두 가졌다고는 하나 진시황은 자신을 둘러싼 이 모든 상황들이 다 싫었다. 제위도 신하도 백성도 모두 잊고 싶었다.

이 땅에서 자신을 괴롭혔던 모든 과거를 털고 새로운 세상으로 가서 새로운 나라를 세워,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지금 이 뱃전에 서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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